시 모음

[일주]

       옹이

지갑 속 꼬깃꼬깃 숨겨 둔 로또 한 장

칠 일 간의 설렘

정말 부질없는 일 같지만

퀴퀴한 죽음의 냄새가 종일 가시지 않는 머릿속에

생경한 숫자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동안만이라도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촉촉이 젖어 있는 삶의 겨드랑이 그쯤에 앉아

굳은살로 물고 늘어지는

지긋지긋한 가난의 고리를 끊어 낼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지

혼자 실실 웃어가며

하룻밤에도 열두 번 더

기와집을 세웠다 헐었다하기도 하고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지구촌을 누비기도 하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지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는다.

방안 가득 진하게 배어 나는 커피 한 잔에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감미로움을 담아내는 밤

어둠 깊숙이 접질려 지난 설렘

그도 내려놓고

크고 작은 나이테를 만들면서

제 자리를 잡아가는 옹이

찔레꽃 향기에 취해 해 가는 줄 몰랐다나.

     민들레

이른 아침 등산길에서

집 주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키 작고 노란 꽃을 피운 민들레를 만났다.

벌 나비 찾지 않아도

꼭꼭 여민 가슴에 우주를 담을

홀씨 한 점 품어

밟히고 또 밟혀도 그게 뭐 대수냐며

활짝 웃고 선 모습

시장통 민초民草들을 닮았다.

발길 돌리기 아쉬워 굳어 선 채 잠시

지난 기억 속으로 필름을 돌린다.

되돌아 감길수록 부끄러이 살아오는 기억들

얼룩진 신기루의 파편들이

돌부리로 앉아 발을 낚아챈다.

넘어질 때마다

멍들고 생채기 나는  기억들

그 기억들이 건져 올리는 잡동사니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간간히 낡은 필름이 찍찍거리고

길을 벗어난 비틀거림이 멀미로 자리할 쯤

멀고 먼 여행을 준비하는 홀씨 하나

어느 틈

내 가슴을 비집어 심호흡을 한다.

     신, 분서갱유焚書坑儒

퀴퀴한 책 냄새가 빼꼭히 쌓인 방

남들은 책이 많아 좋겠다며

간혹 따뜻한 눈길로 웃어 주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그 주인인 나는 징그럽다.

수 십 년을 씨름해 온 손때 묻은 분신들을 보며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떠 올려 본다.

그래, 확 싸질러버려

허망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엉겨 붙는다.

말문을 닫아 건지 벌써 십 년

쌓아 올린 세월의 깊이만큼 곤궁해 진 삶

모래성을 쌓아 놓고

조금씩 허물어지는 나 아닌 나를 본다.

허물어져 모래바람에 묻힐 망정

비단길 찾아 길을 나서는 낙타의 분신이 되어

모래알을 세며

끝없이 늘어 선 그 길을 간다.

전생에 밟아 지난 것만 같은 그 길을 따라

문득 돌아보니

귀밑머리에 앉아 노려보는 백발이

등짝을 후려치는

‘갈’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고쳐 앉는다.

다가오는 명절에는 찾아오는 사람보다

찾아 갈 곳이 적은 것이 더 가슴 아플 것 같다.

        일출

오렌지색 술렁임들이 하나 둘

어둠을 지워간다.

오랜 꿈을 키워 온 바다

그 바다의

파도소리를 기억하는

소년의 가슴이 되어

두 팔 벌려 수평선을 안아 본다.

점점이 눈길 잡는 어부들의 바다

그 바다가 가르쳐 준 침묵이

밤새도록 밀어 올리는 햇덩이 하나

고단한 어깨를 어루만진다.

        정선 아라리

한 여름 밤

대박을 쫓는 부나비들의 전투가 시작된다.

라스베가스를 꿈꾸며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는 정선의 흔들림

흥청대는 네온의 불빛에 취해

비틀거리는 유혹의 손길이 닿을 적마다

방금 막장에서 퍼 올린 탄가루만큼이나 소박한

눈빛에 비친 세상이 온통

금빛으로 출렁일 쯤

진폐증을 앓던 산골의 밤은

낮선 사투리들이 뿜어내는 입김 하나로 녹아 내렸다.

겨울나무에 갇혀 보랏빛 꿈을 쫒는 사람, 사람들

한 뙈기 비탈 밭에 감자를 심던 마음들이

희망의 싹을 잘라내고

쌓아 올린 욕망의 높이만큼

무리지어 짖어대는 승냥이 울음처럼 차가운

무엇 하나 채울 것 없는 삶의 빈 구석

알이 굵고 빛깔 고운 놈을 골라 구워내면

절망을 구워내면

폭설 내리는 밤

화롯가에 둘러 앉아 서로의 온기를 채워주던

오랜 그리움의 조각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한 웅큼 선혈이 번진다.

         천둥

아직 바람이 차다.

평반 남짓 보금자리를 튼 그대

눈빛을 만나고 싶어

경부고속도로를 달린다.

간간히 흩뿌리는 진눈깨비

발을 들여 놓을수록 점점 더

거센 바람을 동반한 폭설로 변해 갔다.

누군가 먼저 다녀간 흔적

군데군데

점점이 앞섶을 물들이는 얼룩진 슬픔

금세라도 훠이훠이

살아 올 것 같은 한 소절 헌화가

살아 부끄러운 물상들을 지워가는

눈보라에 갇혀

반쯤 잊혀진 그대 이름을 눈뜨는

미명의 울림 저 깊이

천지를 울리는 천둥의 무게로 찍혀 나고

그렇다

어찌 보면 우리들이 흘리는 이 시대의 눈물

그도

사치일는지 모른다.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다면 좋겠다며

겨울 지나면 봄도 멀지 않았다며

한 올 두 올 늘어만 가는 한숨을 추스르는

이 땅의 아버지들

내일은 어느 녘에서

허기진 목마름을 채울 바람으로 앉을까.

         남산 가는 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모래알을 세며 끝없이 늘어선 행렬들

전생의 내가 밟아 지난 것 같은 길을 따라

오늘은 먼 그리움을 찾아

남산을 간다오.

이봐요. 이 얼마나 황홀한가요.

아픔만큼이나 더 새롭게 필 보랏빛 꿈길 따라

발을 놓는 너와 나의 행보

가슴이 터질 것 같지 않나요.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울렁이지 않나요.

가만히 불러 봐요.

산

남산

정말 꿈만 같아요.

          탁본

어느 추운 겨울날 석빙고를 다녀왔습니다.

입구를 막아 선 천년의 고집스러움이

움푹 팬 글씨만큼이나 파리해 보였습니다.

정말 안쓰러웠습니다.

그림자 하나도 머물지 못할

바람처럼 흘러 지난

깊고도 깊은 세월의 주름살마저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며

언 손 녹여 불며 두드린 천년이

오지랖 넓은 그날의 기억으로 살아

봄날 햇살 같은 내려놓을 수 없는 흔들림으로

등을 떠 밀더이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 진하게 눈을 흘기는

윤회의 바퀴

        지리산 이야기

커튼을 젖혔다.

순간,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산

겨우내 폭설에 갇혀 깨어날 줄 몰랐다.

돌아 갈 길을 잃어버린 끈적거림이

울컥 잘라내는 절망의 시간

바람을 몰고

지난 가을 붉게 타올랐을 가지 끝에 앉아

깃발을 흔들며 목 잘린 고개를 내밀던

그래 그 많던 바람의 영혼들

어디로 떠났을까

어디 쯤 숨었을까

문둥이는 이렇게 살아 잠든 꿈을 더듬는데

아른아른

텐트 천정에 비치는 버너 불 소리 함께

코펠 뚜껑을 가득채운 커피

그 진한 향기에 취해 눈을 떴다.

희열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龜岩 허남기]

뭇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주옥같은 일주선생님의 시향에 비내리는 시원한 아침을 활짝 열어 젖힙니다ㅡ잘 감상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웃음 가득한 시간되시길빕니다 감사합니다

[일주]

감사합니다. 15년 전쯤 쓴 것들인데 자료 정리하다가 발견 하였답니다. 많이 설익은 글이라 망설이다가 올려 보았습니다. 감안하여 읽어주소서^^

[김희수]

김광수 올림, 묵송과 낭송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습니다.

[withpoem]

15년 전 최시인님의 뜨거운 시향에 겨울의 을씨년스런 추위를 잊습니다. 여기서 다시 읽으니 넘 좋습니다~~~

[프리텐]

가슴으로 스며드네요.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홍순옥세시리아]

폭풍의 눈이 있어 자연이 깨끗이 정화 되어 살아 나가듯이 무엇인가 저를 살리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