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8년여의 월남 참전 기간 동안 두 사람의 사령관이 재임했었다. 나는 이세호 장군이 주월남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시기에 파병이 되었었기에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후반기에 파병되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령관이 이세호가 아닌 채명신으로 남아 있었다. 왜 그럴까? 나는 검증의 차원에서 이 글을 먼저 월남참전용사 사이트에 올리면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사병이야 사령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장교들 사이에서 이세호 장군의 별명이 ‘돈세호’라는 것이었다. 별명이라는 것이 그냥 붙여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게 돈을 사랑하는 분이야말로 철수할 때 월남에서 한 푼이라도 더 챙겨와야 하는 한국군의 사령관으로서는 적임자(?)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쯤해서 나는 과연 박정희의 용병설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채 명신 장군은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철저히 견제를 당했고 생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살았다. 후임 이세호 장군은 개인적으로 박 정희와 친구 사이여서 박정희 치하에서 4년 7개월 최장수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자신의 부하였던 전두환이 집권하고 나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대접을 받아서 재산을 탈탈 털리는 복수를 당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두 장군들의 개인적인 인격의 차이에 대한 평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역사적 평가를 받을만한 일이 우연하게 발생했다. 이세호 장군이 2012년 04 월 18일 오전 07시 30분~09:00까지 서초동 전자랜드 12층에서 실시된 어울리지 않게 통일교의 2대 교주 문국진(문선명 아들)의 강연에 축사를 하는 들러리를 서는 자리에서 한국군 병사 1 인당 봉급을 매월 500달라(당시 US 달라) 를 미국측으로 부터 받았으나 그 돈의 50 달라만(병장기준) 지급하고 나머지 450달라는 국고에 귀속시켜 버렸다고 비밀을 누설해버린 것이다.
채 장군은 파월 전우들 모두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고 있지만 수십 년간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가 삥땅을 친 일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 있는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갔다. 그러나 비록 세상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비록 실수로라도 진실을 알게 만든 이 장군의 역할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의 실언으로 역사의 진실의 한 부분이 밝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날 행사의 정황상으로 볼 때 이세호 장군의 이 날 발언은 전혀 본인이 사전에 계획했던 것이 아닌 당일 행사에 참전군인들이 많이 참석한 분위기에서 나온 즉행적 발언이라고 본다. 그가 그렇게 중대한 발언을 하려고 했다면 통일교 집회 같은 음성적인 모임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선명이 직접 등장하는 자리를 비롯해서 통일교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취재를 목적으로 몇 번 참석을 해본 나의 경험으로 볼 때 통일교 행사란 주로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돈을 듬뿍 주고 초청하는 자리이거나 그럴듯한 명분을 걸어놓고 둘러치기 식으로 행사를 치르는 자리이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진심으로 국가로서 언제인가는 해결해야 할 엄청난 숙제에 대하여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보다 더 공식적인 자리에서 명분을 가지고 했을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월남전에서 공로는 없으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전두환이다. 9사단장이자 이후 특전사의 2대 사령관이 조천성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고 29 연대장직을 해임 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했다. 실제로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까지 존재한다. 이유는 지나치게 과시행사 및 민간인 상대가 잦았으며 그 과정에서 작전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인수인계한 사례가 많음, 전투수행능력 부족,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 등 전쟁을 하러 간거냐 놀러간거냐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직속상관 2명이 모두 반대했지만, 결국은 훈장을 받은 것은 박정희가 하나회를 키워야 했던 속 사정이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참전군인과 전두환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5년 베트남이 멸망하면서 더불어 참전군인도 잊혔다. 참전군인 단체를 결성하려는 노력은 1966년경부터 있었으나, 이는 소규모의 친목단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집단적인 응집력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 12월 신군부가 재향군인회 산하 38개의 임의단체를 해체하면서 그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월남참전전우회도 해체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 1987년 12월 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참전군인 350여 명이 모여 ‘따이한 클럽’의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었으며, 1988년 문화공보부 제415호로 ‘따이한’이 등록됨으로써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가 공식적으로 출현했다. 따이한이 나타나면서 대한해외참전전우회 (1991년 10월 창립),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1992년부터 활동, 1997년 12월 사단법인화),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2004년 8월 창립) 등 다수의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각 조직은 조직 목표나 방향의 명확한 차이보다는 조직 대표나 내부의 이해관계 등에 따라 이합집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인 분열상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보수 세력의 일원으로서 강력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