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 있는 한 교회가 항상 잡음이 일었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는 목회자 집중 구조 탓에 일어난다. 이 교회의 문제는 담임 목사가 공부도 제대로 했고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성격적으로 목회가 적성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목회자의 기본적 소양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깊고 넓어야 하는 법인데 그런 면에서 부족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에서 경제적으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장로 집안 위주로 편향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이 장로는 동포사회에서 인정 받는 지도자로서 신망이 있는 사람으로서 교회가 구조적으로 자신의 집안에 의존되고 있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다른 교인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교회 일에 나서지 않으면서 오로지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만 치중해서 지혜롭게 처신을 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계속되는 교회의 잡음에도 불구하고 담임 목사의 독주를 아무도 견제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시드니에서 신학교 동문 중에 제일 연장자인 내가 헛기침이라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나로서는 전혀 관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담임 목사가 교회의 압력으로 마지 못해 몇 번 나를 찾아왔기에 간곡하고 친절하게 조언을 했지만 천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라 사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목회자들 중에도 사회성이 약한 사람들이 많은데 경우가 심하면 소시오패스 경향으로 나타난다. 즉 자기 교회 외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관심이 없고 자기 목회스타일 외에는 땅이 꺼져도 다른 것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고교 졸업 후 공부만 하다가 목사가 되는 한국 교회 풍토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나올 가능성 많다. 문제가 된 교회의 목사는 공부를 적당히 해서 대강 대학을 마치고 신학 대학에 왔다가 적당한 집안 형편 덕분에 유학까지 하고 온 사람이었다. 즉 교회 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호주에서는 목사를 만나면 목사가 되기 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를 묻는 것이 상식인 것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일이다.
담임 목사는 급기야 이 장로와도 불화가 생기자 이 장로에게서 도움 요청이 왔다. 교회에서 목사를 사임을 시키기로 했으나 목사가 거부하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결정한 해결 방법이 기막힌 것이었다. 담임 목사가 사표를 낼 때까지 주일 예배시간에 목회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집사들이 문을 막고 내가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매우 곤란한 부탁이지만 교회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이 장로가 그 동안 여러 가지 일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런 사례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목사를 잘 설득해서 명예롭게 물러서도록 해보겠다고 했다. 물론 담임 목사를 설득하는 일은 좋은 말로는 되지 않았다. 담임 목사는 세상 상식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고운 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버티던 담임 목사가 결국 사회를 보고 내가 설교를 하는 예배에서 순순히 사임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해결이 되었다.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는 그리스토퍼라는 호주인 성공회 수사가 있다. 한국에서 성 프란시스코 수도회를 운영하는데 가끔 호주에 온다. 호주에서 처음 만났을 때 한국에서처럼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야 내가 한국에서와는 달리 돈을 벌고 있는데 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를 했었다. 신앙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사를 만나면 많든 적든 반드시 돈을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수사는 예수의 말대로 ‘청빈’의 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기 그는 나를 만나러 올 차비는 있어도 내가 차비를 주지 않으면 돌아갈 차비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크리스토퍼를 만날 때 마다 조금이라도 반드시 돈을 주었다.
어느 날 보슬비가 슬금슬금 내리는 이른 아침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주위가 어둠침침 새벽 6시쯤 신문을 사기 위해서 NEWS AGENCY(신문 잡지 등등 파는 가게) 에 갔다. 집에서 신문 값인 2불짜리 동전만 들고 와서 아무 생각 없이 가게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눈 앞에 웬 놈이 떡 막아서더니 내 가슴에 칼을 들이대었다. '이건 뭐야?'하고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영화에서나 보던 눈구멍 뚫린 모자를 뒤집어 쓴 녀석이 날카로운 잭나이프도 아니고 무식하게 생긴 식칼을 들고 나를 위협하는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어 자세히 가게 안을 살펴보니 주인 여자는 카운터 뒤에 서서 몸을 웅크리고 부들부들 떨며 겁에 질려서 "I'm scared! I'm scared!"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울고 있었다. 또 한 놈은 가게 안쪽에서 정신 없이 이것 저것을 보따리에 주워 담기에 분주했다. 문 앞에서 망을 보던 놈이 내가 들어서자 칼을 들이댄 것이었다. 그 놈은 낮은 소리로 나에게 "Give me wallet! wallet!"이라고 했다. 나는 슬로우 모션으로 신문을 집고 2불 짜리 동전을 카운터에 놓으면서 "Sorry! I haven't got a wallet."이라 했다. 강도는 왼 손으로 내 옷을 급하게 더듬어 보고서 진짜로 지갑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재빨리 밖으로 튀어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놀랄 시간도 없었다. 놈들의 차 넘버라도 기억해두려고 얼른 가게를 나서 두 놈을 몇 발짝 따라 갔더니 어랍쇼? 놈들은 두건을 벗더니 차를 타지도 않고 뛰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가게 앞 큰 길에 차를 세워두면 눈에 띌까 보아서 뒷골목에 세워 둔 모양이었다. 가게로 도로 들어가자니 경찰이 곧 올 것이고 그러면 꼼짝 없이 증인이 되어야 할 판이어서 난처하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를 떠났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울고 있는 여인을 뒤로 한 채 그냥 말없이 새벽안개를 헤치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던 장면은 내 생애 딱 한 번 약간 비겁했던 순간이었다.
집에 와서 가만히 사건을 복기해 보니 조금 전에 벌어진 사건이 진짜로 벌어졌던 사건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칼을 든 강도 앞에서 내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던가? 그것은 내가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빼앗길까 보아 불안했을 것이고 많이 가졌으면 많이 가졌을수록 불안했었을 것이다.
세상에 강도가 가슴팍에 칼을 들이대는데 겁먹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 순간 나는 용감한 인간이 아니고 칼이 아니라 기관총을 들이대도 빼앗길 것이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위장의 상태에 따라서 주위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게 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각이 예민해지기 쉽지만, 배가 부르면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즉 배의 기름기와 눈의 시력은 비례한다. 기름기가 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사람들의 배고픔, 슬픔, 억울함 등이 정확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부자와 관계를 가질 때는 그는 나와 다르게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은 감각 자체가 다르다. 왜냐하면 마치 장갑을 끼고 만지는 것과 맨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사물과 상황에 대한 감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돈이라는 장갑을 끼고 만지기 때문에 감촉이 다른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돈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본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지킬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를 한다. 그들은 실제로 늘 돈을 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시달림을 받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뜻으로라도 부자에게 함부로 접근하면 속으로 무시를 당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부자는 사람뿐만 아니라 정의나 양심, 이런 가치들에서도 자기를 지켜야 한다.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정의나 양심을 주장하기는 쉽지만 부자가 그런 것을 주장하려면 자기 살을 베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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