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차 산행 (2/16)] ♣ 원주 치악산(雉嶽山) 향로봉-남대봉(1,182m)
* [산행 코스] 원주 행구동 <샘골>→ 국형사(주차장)→ (포장도로)→ 보문사→ 향로봉[치악산맥 비로봉-남대봉 중간지점]→ 금두고원[점심 식사]→ 치마바위→ 남대봉→ (상원사)→ 갈림길→ 금대계곡→ 영원사→ 금대분소 주차장(12km. 6:00)
* [보문사 용왕각] — 보문사 법당 앞의 청석탑! 눈길을 끌다.
☆… 오전 10시 30분, 보문사(普門寺)에 도착했다. 가파른 산록의 중턱에 자리한 보문사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년) 때 무착대사(無着大師)가 국형사와 함께 창건하였으며,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보문암창기(普門庵創記)》에 따르면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가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중창하면서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신행결사도량으로 삼아 절 이름을 보문련사(普門蓮社)라고 불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작고 아담했다. 남향받이 대웅전 앞마당에 높이 1m 정도에 불과한 검은 색의 작은 탑이 눈에 들어왔다. 저 유명한 ‘보문사칠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해인사와 금산사·법주사 등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점판암으로 된 석탑으로, 일명 ‘청석탑(靑石塔)’이라 불리며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절앞의 계곡, 철제다리 건너편 산록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당우(堂宇) 한 채가 당그라니 앉아 있다. 북향받이 주변의 산록도 눈으로 덮여 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아직 단청을 하지 않아 원목의 향기가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아담한 용왕각(龍王閣)이다. 해안이 아닌 산중에 웬 용왕각인가. 그 내력이 궁금하다. 건너편 대웅전 뒤 산록에 산신각(山神閣)이 있는데 그 맞은 편 산록에 용왕각을 지은 것은 국태민안을 염원하는 동악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 [보문사-향로봉 가는 길] — 눈 덮인 가파른 산길을 치고 능선에 오르다.
☆… 여기 용왕각에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산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원들 모두 아이젠을 장착했다. 가파른 산길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은 눈이 녹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산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최근에 내린 눈이 아니어서 얼어붙은 곳도 있었다. 지그재그의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대열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선두는 민창우 대장, 후미는 유형상 부대장이 수습하여 오고 중간에는 김의락 총무가 돕기로 했다. …
☆… 오전 11시 10분, 일단 산 능선에 올라섰다. 이정표를 보니 보문사에서 0.5km 올라온 지점이다. 뒤쳐진 대원을 기다려 눈 쌓인 산등성이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산록을 올라올 때와는 달리 이제 바람결이 차게 느껴진다. 치악산 주능선의 향로봉까지는 0.7km, 다시 산행을 계속한다. 가파른 눈길이다. 그렇게 오르다가 막바지 가파르고 긴 철제계단을 차고 오른다. 드디어 ‘향로봉 삼거리’에 이르렀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정상 비로봉 가는 길이요, 우측으로 가면 향로봉으로 가는 길이다. 치악산맥의 주능선이다.
* [향로봉 정상] — 눈 덮인 산봉에서의 조망
☆…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오늘 산행의 제1 포인트인 향로봉(1.042.9m)에 도착했다. 1,000고지가 넘은 산등성이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환하게 열린 하늘에서 맑은 햇살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치악산 정상 비로봉(1,288m)에서 남쪽 5.9km에 위치한 향로봉은 치악산의 허리에 해당되는 고둔치[곧은재]와 치악평전(일명 금두고원) 사이에 솟아 있다. 산봉에는 나무판재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향로봉’ 표지판을 세워놓았다. 여기서 오늘 산행의 2차 포인트인 남대봉 상원사까지는 4.6km이다. 향로봉 정상에서 후미의 대원을 기다리며 도착하는 대원마다 향로봉 등정을 기념하는 인증샷을 눌렀다. 사방을 둘러보니 앙상한 나목 사이로 치악의 거대한 산군(山群)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동북쪽에 삼각추를 세워 놓은 듯이 오연(傲然)하게 솟아 있는 비로봉이 단연 압권이었다. 비로봉 정상에는 어느 독지가가 쌓은 돌탑이 있다. 그리고 남쪽을 바라보니 남대봉으로 뻗어가는 장대한 산줄기가 장엄하게 포진하고 있다. 동쪽의 분지(盆地)는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 들판이다. 곧은재에서 내려가는 계곡에 바로 강림계곡인데, 거기엔 고려 말의 충신 원천석(元天錫)의 일화가 숨 쉬고 있다.
*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계곡] — 고려말의 충신 운곡 원천석 이야기
☆… 원천석(元天錫, 1330~?)은 본관이 원주(原州)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 원 씨의 중시조이다.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 일찍이 방원(芳遠 :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치악산에 은거하고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갔다. 벼슬이라면 철새처럼 변조(變調)하여 날아다니는 작금의 ‘명리한’(?)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푸른 소나무의 절조(節操)를 지닌 그분에게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은 그의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 :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여 스승의 마음을 기렸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고려에 대한 충의심이겠지만, 평생을 관류하는 것은 인간적인 절조였다.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그것을 엿볼 수 있다.
… 그의 시문들은 뒤에『운곡시사 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린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있다. 패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시조(時調)도 한 수가 오늘날에 전한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만월대(滿月臺)는 송도[개성]에 있는 고려 왕궁이다. 허물어진 왕궁터에 잡초만 무성하고 ‘오백년’ 고려 왕조도 목동의 피리소리로 남아있으니 맥수지탄(麥秀之嘆)이요 인생무상이다. 그래서 충신의 한탄이 눈물로 솟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 [아늑한 눈밭-치악평전에서의 점심식사] — 시야가 열린 곳, 겨울 산의 조망(眺望)
☆… 12시 정각, 향로봉에서 0.5km 내려온 안부, ‘치악평전’에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나누었다. 이른 아침에 집에서 나온지라 모든 대원들이 시장한 터, 산 위의 밥맛은 꿀맛이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산의 능선 위에도 바람이 불지 않았다. 게다가 따스한 햇살이 내려 아주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다. 사방 시야가 확 트여 비로봉으로 향하는 산줄기와 남대봉으로 향하는 거대한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계곡의 좌우에 여러 산봉들이 첩첩이 겹쳐 겨울 산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 [영월지맥-치악산맥 : 향로봉-남대봉] — 눈 덮인 산록의 완급이 반복되는 산길
☆… 12시 45분 식사를 마치고, 오후의 산행이 시작했다. 남대봉(1,182m)을 향하여 나아가는 산길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이 온지 한참 된 이곳에 아직도 많은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남향받이 양지쪽에는 눈이 녹아 봄기운이 감도는 듯한데, 산길은 오르고 내리는 길의 연속이다. 오후 들어 하늘은 청명해지고 있는데, 능선의 바람결이 차갑다. 앙상한 겨울 나목이 빽빽한 눈길, 완만하다가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목, 그리고 다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좁은 바위틈을 지나기도 하고, 다시 가파른 산록의 옆구리를 치고 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산행을 계속하던 중, 우리는 질주하는 능선 위의 ‘치마바위’를 통과했다. 이곳은 영원산성을 거쳐 영원사로 내려가는 산줄기의 분기점이다.
☆… 나목이 울울한 완만한 산길에는 하얀 눈에 덮여 있고, 길가엔 푸른 산죽이 백설을 품고 파릇파릇 잎새를 드러내고 있다. 낮은 자리에서 촘촘히 살을 부비고 군락을 이루고 있지만, 아무리 눈이 내려도, 아무리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쳐도 산죽은 그 본색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산죽이 내는 길이 이어졌다. 얼마나 오르내렸을까. 한 모퉁이 돌고나면 문득 앞을 가로막은 급경사의 오름길이 나타나고, 내려가면 다시 가파르게 내려가는 철계단이 나타났다. 응달의 산록은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