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시집 <장안문 달빛에 막혀 집에 가지 못했다> 해설
해자화두(解字話頭) 속의 절제미, 깨달음의 세계
김광기(시인, 문학과사람 발행인)
김우영 시인은 무엇이든 일찍 시작한 사람이다. 문단에도 일찍 나왔고 결혼도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한 경우에 속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야생초>라는 시 동인 활동을 하다가 <시림>이라는 전국 동인을 조직하여 주재하며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교 재학 중 첫 시집 당신이 외치는 문을 발간하고 월간문학 신인상에 입선한 후 1978년 신인상에 당선되어 약관의 나이에 문단에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문단에 나오는 일이 한국 문단에서도 극히 드문 일일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문예지가 몇 개 되지 않는 상황이라서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오는 것조차 주요 일간지에 날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시조문학에 시조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화려하게 문단 활동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신문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평생을 언론사에서 몸담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시를 쓰고 시집을 출간하는 등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에서도 수원시사를 집필하는 등의 많은 활동을 하며 애향심을 키우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자주 만나던 수원 예술인들의 의견을 모아 <화성연구회>를 조직하고 사단법인으로까지 발족하여 20여 년이 넘게 애정을 쏟은 것이 대표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수원 남문이나 북문 어디쯤 수원 예술인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막걸리를 나누며 수원 얘기를 하다가 이뤄낸 결과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자리에 나도 끼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좌중의 이목을 받으며 분위기를 늘 주도하고 있었다. 그가 많이 쓰는 말 몇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좌중의 의견을 모으는 “그런데 말이야.” “그럼, 이렇게 하자.”는 말투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좌중의 의견은 많은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사소한 개인적인 일이든 지역사회를 위하는 큰일이든 그는 항상 진지하게 모두를 위해 일을 결정하고 수행하며 앞장서는 데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위해 결정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결정은 다른 사람들이나 지역사회를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또 그래서 날마다 술을 마시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에는 책이 떠나지를 않았다. 고전 철학서 한 권쯤은 늘 지니고 다니면서 탐독하고 가끔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내용과 느낌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의 문학도 풀어져 나왔고 그의 시도 늘 그렇게 완성되고 있는 듯했다. 한 마디로 그는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처럼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에는 형식이 없고 시를 쓰는 것에 어떤 맺힘도 없는 듯하였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고여있는 것이 그의 시 특징이랄 수도 있는데 자신이 쓴 시를 잘 모아두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시작(詩作) 활동을 한지 50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 겨우 네 번째 시집을 묶고 있다. 그것도 마지막 시집을 낸 지가 20여 년이 넘었는데 한 권 묶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볼 때마다 졸라서 겨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종이가 아깝다.” “나무에게 미안하다.” 등의 말로 한사코 거부하다가 “그럼, 수원시에 관한 것들만 모아서 한번 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가 근근이 모아준 시들 중에서 몇 편을 골라 살펴보기로 한다.
본래는 전생의 기억조차 없었던
무형체인 내가
알음알이로 이 면목의 형체를 지어
꽤 오랜 날 살아왔으니
이제 그 잡스러운 물건 가득한
마음 좀 텅 비우고
주어 목적어
수시로 형상 짓지 말 것이며
바람이나 빗방울, 구름에 순응할 것이며…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이것이 전부
남김없이
다 토해내 텅 비었으니
다시 막걸리나 한잔하세
- 「공심돈(空心墩) 앞에서」 전문
공심돈(空心墩)은 공심돈이란 글자의 뜻대로 하면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華城)에서만 볼 수 있는 구조물이다. 돈(墩)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는 망루와 같은 곳으로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 활용하는 곳이다. 위의 시 「공심돈(空心墩) 앞에서」의 화자는 비어 있는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공격적으로 살지는 못하더라도 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방어적으로만 살아오다가 이제 마음마저도 텅 비워둔 화자의 심상이 공심돈처럼 드러나 있다. 하지만 쓸쓸함보다는 초연함이 보이고 공허함보다는 무상(無常) 무위(無爲) 무념(無念)과 같은 철학적 과정을 녹여낸 삶의 의지 가득한 결연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조락(凋落)의 햇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광교산 자락 오래된 절터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 있는데
바람 속에서
산이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던졌다
나무가 잘 물든 나뭇잎 몇 개를
떨어트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기들끼리 소리 내며 흐르던 물이
나뭇잎을 데리고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 「산음(山吟)」 전문
산음(山吟)은 산(山)을 읊는다는 것인데, 화자는 산과 같이 스스로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던져 산과 하나가 되는 듯하다. 물심일여(物心一如)로 산을 읊는 것이 스스로 자신을 읊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화자가 산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산이 되어 산처럼 굳건하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조락(凋落)의 햇살/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상승하는 기운이 아닌 하락의 기세로 스스로 머물겠다는 의지이다. “나뭇잎을 데리고/ 더 낮은 곳으로 흘러” 가겠다는 무념무상인 자연의 흐름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화자에게는 무자(無字)이지만 화두(話頭)가 있다. 공(空)이라는 것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다’는 ‘있음’이 있듯 아무 뜻도 없는 무자(無字)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질량의 무게가 담겨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화두(話頭)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화자의 사유 세계의 폭을 잘 가늠하기 어려울 듯하다. 이러한 무자화두(無字話頭)는 조주종심(趙州從諶, 778∼897) 스님의 화두로도 유명하다. 이 화두를 바탕으로 한 「산음(山吟)」의 깊은 울림을 생각하게 된다.
산에 드니
산이 보이지 않았다
삶이여
자네도 혹시 이럴 것인가
사랑
그대 역시
품에 드는 날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인가
만유(萬有)가 내 안에 들어
천지 그윽하던 날
산속에서 산이 걸어 나왔다
- 「적멸(寂滅)-광교산에서」 전문
광교산은 김우영 시인의 시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다고 하는데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악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친히 ‘광교(光敎)’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80년대 후반 경기도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에는 “아주 먼 옛날 수도를 많이 한 도사가 이 산에 머무르면서 제자들을 올바르게 가르쳐 후세에 빛이 되었다고 해서 광교산이라 하였다”고 나와 있기도 하다. 광교산에는 창성사(彰聖寺)를 비롯해서 암자가 89개나 있었다고 해서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광교산을 김우영 시인은 자주 오르고 있다. 등산 삼아 오르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의 시를 들여다보면 본시 산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도를 닦듯 산의 정취를 느끼며 자신을 들여다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평소 옷차림 대부분도 등산복 차림이기도 하다. “만유(萬有)가 내 안에 들어/ 천지 그윽하던 날/ 산속에서 산이 걸어 나왔다”는 말처럼 산속에서 수도를 마친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광교산의 시를 읽어보며 그와 함께 명상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60 나이 가까이/ 산 그림자/ 물빛/ 풀벌레 소리/ 제대로 보고 듣지 못한/ 청맹(靑盲)의 사내// 돌부처 지고/ 터벅터벅 산길 내려간다/ 밤새 걸어/ 다시 절터로 올라간다// 그래 오늘은 여법(如法)하다/ 해지는 영마루/ 해 뜨는 것을 보느니 - 「광교, 여법(如法)하다」 전문
저 보아라
우러러 고개 드는 나무들
연초록의 풀잎들
하늘의 생각 하나만으로도
저리 충만하지 않느냐
바람결을 따라 이리저리 손 흔들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지 않고 저승으로
오직 저승으로 허청허청 가는 사람
생각도 보인다
그의 등 뒤에
사족처럼 붙은
봄비
- 「봄비-연화장에서」 전문
연화장은 수원시에서 숲속에 설립한 장례식장이다. 이곳에서 화자는 누군가를 보내며 저승으로 떠나는 망자를 배웅하고 있다. 하늘의 순명에 따라 길을 떠나는 망자의 모습이 “바람결을 따라 이리저리 손 흔들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떠나는 듯 이승의 삶에 감사하고 있다. 한(恨)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모습, “뒤돌아보지 않고 저승으로/ 오직 저승으로 허청허청 가는 사람”의 모습은 망자의 모습이라기보다 화자의 미래지향적 모습이 아닌가 한다. 어떤 생각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저승으로 가듯 이승을 살아낸다면 얼마나 순결하고 아름다운 삶이 되겠는가. 그렇게 이승을 가꾸어야 한다는 삶의 의지가 비치고 있다. 그 뒤에 “사족처럼 붙은/ 봄비”가 그 삶의 의미를 기록해 줄 것만 같다.
성 밖 새술막거리에서
작부 앉히고 진탕 놀다
흥얼흥얼 노래하며 텅 빈 골목길에 방뇨하고
큰길 나와 바라본 팔달산 서장대 위로
오호 달 떠 올랐구나
달빛
성벽 타고 장안문까지 감싸 안으며
깊고 푸른 해자 만들었다
헤엄칠 수 없고
뱃사공 불러 노 저을 수도 없던 그 물줄기
달빛에 막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 「장안문에서 달빛에 막혀」 전문
위의 시 「장안문에서 달빛에 막혀」는 장안문 달빛에 막혀 집에 가지 못했다는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하다. 이 시는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는 김우영 시인의 평상적인 모습이 잘 드러난 시로 보인다. 굳어짐이 없고 막힘이 없는 김우영 시인이 생각하는 “작부”는 이 세상 삶에 찌들어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일 것이다. 흥얼흥얼 달구경을 하다가 “성벽 타고 장안문까지 감싸 안으며/ 깊고 푸른 해자”까지 만든다. 해자는 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을 말하는 것으로 “헤엄칠 수 없고/ 뱃사공 불러 노 저을 수도 없던 그 물줄기”가 있는 곳이다. 마음대로 휘젓지도 못하고 시원하게 뻗어 나가지 못하는 그 답답함을 대변하는 듯한 “달빛에 막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한다. 여기서 김우영 시인은 무자화두(無字話頭) 대신 ‘풀다’ ‘벗다’ ‘깨닫다’를 뜻하는 해자화두(解字話頭)를 제시하는 듯하다.
그는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공원에서 잠을 자거나 길바닥 아무 데서나 잠을 자기도 하는데 2, 30여 년 전 나도 그에게 새벽에 불려 나가 술을 먹다가 남문 도로변 길바닥에서 신발까지 잘 벗어놓고 사이좋게 누워서 아침까지 곤하게 잠을 잤던 적이 있었다. 길바닥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잔다는 것이 나에게도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의 시를 읽다 보니 “큰노미” “자근노미” 할 것 없이 김우영 시인에게는 많은 “노미”들과 함께 길바닥이나 공원에서 잠을 자는 일이 다반사였던 모양이다. 이 시의 종연 “달빛에 막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이후의 일이 다른 세상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지난번 시집 출판기념회 때 그의 시 세계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철학이 끝난 곳에서 시가 시작된다”며 어떤 사상이나 형식, 그리고 기교에 얽매임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되는 시라고 했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그는 스스로 무자화두(無字話頭) 해자화두(解字話頭) 또는 천하를 사유하는 해자화두(垓字話頭)를 던지며 끊임없는 참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끝에 나오는 시의 절제미가 있고, 그 시 속에 사람의 향기가 있고, 그 세계 속에 깨달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