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월, 고사목, 화엄벌 첫 꽃, 자나방, 얼레지
고사목
내원사 남쪽 골짜기를 영장골이라고 한다. 하지만 왜 영장골이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용장사, 용장골이라는 이름이다. 용장사는 경주 남산에 있는 절이다. 김시습이 용장사에서 금오신화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자로 풀면 ‘사슴뿔 + 길다’이다. 사슴뿔처럼 긴 골짜기인지 긴 뿔을 가진 사슴이 사는 골짜기라는 뜻인지 대략 그럴 것 같다. 아니면 용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과 사슴은 영물스러움에서 서로 통한다.
계곡에서 한 동안 물소리를 들었다. 주변 바위를 굴뚝새가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 이 긴 계곡에서 조금만 자리의 위치를 달리해도 물소리가 달리 들린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나는 내게 적당한 위치,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물소리를 향해 자리와 방향을 조절하면 된다. 너무 강한 물소리는 골속까지 씻어줄 만큼 시원한 맛이 있지만, 새소리 바람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면서 물소리의 향연히 다채롭게 펼쳐지는 곳이 제일 좋다. 거기에 시간이 되면 이끼와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감상하면 된다.
멧돼지들이 놀던 진흙탕을 다시 지났다. 이곳에도 산개구리들이 알을 낳았다. 알 속을 보니 머리와 꼬리 모양이 제법 갖추어가고 있었다. 한 동안 길찾기가 제일 어려운 갈림길 자리에 도착했다. 모처럼 굵은 굴참나무가 서있다. 직경이 60센티미터가 넘는 아름드리 나무다. 주변에는 개서어나무와 때죽나무가 많이 보였다.
오늘은 경성대골 방향의 능선길을 잡았다. 능선에 올라갈수록 오래전에 말라죽은 소나무들이 보였다. 주변 5~6 그루가 그랬다. 그들 나무는 모두 말라죽은 지 꽤 되어서 변재부분은 거의 분해되었고 심재부분이 뾰족뾰족한 형체로 남아 서 있다. 갈라진 가지의 위치로 전체 키를 추측해보면 모두 키가 크지 않다. 지금 화엄벌에서 만날 수 있는 나무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한말과 일제시대, 그리고 6.25 전쟁을 겪으며 민둥산이 되어버린 척박한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리며 자랐을 것이다. 그래서 가지의 갈라짐이 밑에서 시작하고 키도 4~5미터 내외였을 것이다. 척박하고 강한 햇볕 속에서도 잘 견디는 양수인 소나무는 주변의 키큰 나무가 없으므로 가지를 일찌감치 낮게 뻗으며 수형을 잡았던 것이다.하지만 60~70년대를 지내며 이곳도 본격적인 조림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니 조림보다는 70년대 화전정리 사업으로 산위에 살던 사람들이 산 아래도 내려가면서 자연스런 천이과정을 겪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키 큰 참나무를 지나 음수인 개서어나무, 때죽나무들이 우점종이 되면서 소나무는 활엽수들의 그늘에 파묻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아마 9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기존의 조림지들도 20~30년이 지나면서 점차 자연림화 되어가고 있다. 짐작컨대 이 나무들은 20~30년 전에 서서히 고사했을 것이다. 나무는 죽어 서 있지만 죽기 전에도 족히 50~60년은 살았을 것이다. 척박했던 지난 시절을 고스란히 형해에 새겨둔 고사목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산철쭉밭을 지나 주능선을 탔다. 네발나비들이 많이 보였다. 원효봉 근처에서는 까마귀들이 공중전을 했다. 번식철이 되니 아무래도 세력권 다툼을 하는 것 같다. 공중에서 추격전을 보니 아슬아슬하니 비행솜씨가 대단했다. 두 마리의 까마귀가 급선회와 회전을 거의 동시에 하며 마치 싱크로나이즈드 수영을 하는 것 같았다. 결국 주변을 얼짱거리던 놈이 멀리 간 뒤에야 싸움은 끝났다. 까치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았다. 까치가 이 부근에 나타나기는 처음이다. 화엄벌에는 처음으로 노랑제비꽃이 피었다.
화엄벌 첫 꽃
화엄벌 첫 꽃의 자리는 노랑제비꽃에게 내줘야 할 것 같다. 물론 산거울(그늘사초)이 일찌감치 피었지만, 또 그도 아름답기야 하지만 메마른 벌판에 순노랑의 화인을 찍는 노랑제비꽃의 놀람에 비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노랑제비꽃은 등산로 옆 억새밭이나 경계부에 피어 있었다. 사람들이 걸어 다녀 억새들이 꺾이고 누그러진 곳에서 햇볕을 받아 일찍 꽃필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같이 이파리보다 꽃이 먼저 피었다는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파리도 있긴 했지만 아직 채 펴지기 전에 꽃이 먼저 피어났다.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빽빽한 억새들 사이에 살아 이렇게 멋지게 꽃을 피우다니. 다섯 장 노란 꽃잎의 색도 모양도 아름답지만, 유인선을 따라 보이는 꽃 속 또한 엄청 섬세하고 아름답다. 레이스처럼 화려하고 섬세한 노랑 꽃밥과 연두빛 암술머리, 그리고 빨간 씨방과 꿀샘이 정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섯 장의 꽃잎을 보니 대칭을 이루면서 맨 위 꽃잎은 곤충을 부르고, 다음 두 장은 모으고, 맨 아래꽃잎 한 장이 받고 유도선으로 유도하는 등 저마다 역할을 정확히 나눠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으로 태어나 보고 느끼고 감탄하고 더불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작은 꽃 하나에 온갖 이치가 담겨 있다니 신비롭고 황홀한 일이다.
자나방
내원사로 내려오는 길 오늘은 유난히 자나방이 많이 날아다녔다. 어제와 그제는 간혹 보이는 정도였는데 오늘 하산할 때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곧잘 작고 하얀 나방들이 마치 꽃잎처럼 팔랑팔랑 거리며 일어나 날아다녔다. 하지만 막상 이들이 내려앉으면 어디에 앉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서 정체를 확인하려고 몇 차례 따라가 보아도 놓쳤다. 드디어 낙옆 사이로 앉는 한 마리를 확인해 사진을 찍었다. 날아다닐 땐 벚꽃잎처럼 하늘하늘 날아다녀 잘 보이지만, 막상 내려앉으면 종무소식인 게 이들이 자기가 지닌 색과 무늬와 비슷한 곳에 내려앉는 탓이었다. 사진을 찍어 찾아보니 자나방이었다. 산에서 종종 보는 자벌레의 부모들인 것이다. 놀랍다. 어제는 막 나오는 중인 새 잎에 달라붙은 진딧물을 목격했는데, 오늘은 자란 잎을 갉아먹을 자벌레의 부모들과 상견례를 한 셈이다. 자나방들도 자식들을 위해 일찌감치 적당한 나무를 찾아 알을 낳아놓을 것이다. 신기하다. 온갖 곤충들이 모두 제 때를 알아 이렇게 나온다. 자연의 시계는 정말 느슨한 것 같으면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섬세한 것 같다.
자나방이 벚꽃잎처럼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숲을 걸어 내려왔다.
얼레지
얼레지꽃밭에 얼레지꽃들이 일제히 만개했다. 활짝 핀 꽃들은 여섯 개의 연보라 꽃잎이 지나치다 싶게 뒤로 젖혀서 서로 만날 지경이다. 참 날렵한 느낌이다. 날아갈 듯 경쾌한 모습 때문에 얼레지는 유쾌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의문이 곧 생겼다. 도대체 왜 얼레지 꽃잎은 이렇게 뒤로 확 재껴질까? 너무 되바라진 거 아닌가? 그러나 얼레지의 생태와 생리를 중심으로 꽃을 다시 보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얼레지 꽃밭에서 나는 벌과 같은 곤충을 보지 못했다. 호박벌, 파리, 꽃등에가 꼬이는 진달래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얼레지도 충매화임에는 틀림 없을 텐데 도대체 누가 꽃가루를 옮겨줄까? 비교적 건조한 곳에서 잘 자라는 진달래와는 달리 얼레지는 주로 물가의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진달래가 햇살을 꽃잎에 투과시키며 눈에 확 들어오는 것과는 달리 얼레지는 습지의 낮은 곳에 자라기 때문에 햇볕의 효과를 진달래처럼 100% 활용할 수 없다. 개구리복처럼 넓고 얼룩덜룩한 이파리를 보라. 다른 나무들의 싹이 나오기 전에 두 장의 이파리는 햇볕을 최대한 그러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꽃은 곤충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진달래와는 다른 수법을 써야 했다. 그것은 첫째로 집단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얼레지는 홀로 떨어져 피지 않는다. 모여서 함께 살고 한꺼번에 동시에 꽃피운다. 그래서 더 화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얼레지꽃은 이맘때 나오는 꽃 중 가장 크다. 시선을 끄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얼레지꽃의 키는 기껏 아이 손의 한 뼘을 넘지 못한다. 더구나 땅을 보고 꽃을 피운다. 꽃은 일반적으로 하늘을 보고 피지 않는다. 지구처럼 약간 기울거나 아예 옆을 보고 피운다. 그건 아무래도 항아리처럼 우묵한 꽃 속과 씨방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비라도 와서 물이 차면 어쩌겠는가? 또 꽃의 목적은 강한 햇살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곤충을 유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풍매화처럼 수직으로 설 필요가 없다. 왜냐면 곤충이 하늘을 날아다녀도 수평비행을 하지 매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은 옆으로 피는 게 거의 많다. 하지만 얼레지처럼 땅에 거의 붙어서 땅을 보고 핀다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얼레지는 꽃의 뒤쪽 즉 꽃받침을 중심으로 봐도 꽃처럼 보이도록 했다. 키가 낮은 탓에 어느 정도는 하늘에서 내려보는 시선을 유인하기 위해 뒤집혀도 꽃이기로 한 것이다. 헛꽃인 뒤꽃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꽃잎 사이도 벌어져 있고 꽃잎의 유도선을 따라 쉽게 반대편으로 갈 수도 있다. 수술의 길이는 안쪽의 세 개는 짧고 바깥쪽 세 개는 안쪽 보다 두 배 길다. 2단 시스템인 셈이다. 그리고 자가수정을 막기 위해 암술은 대개 바깥쪽 수술 보다 길지만, 아슬아슬 하거나 짧은 경우도 있다. 도대체 어떤 곤충이 화분을 옮겨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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