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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두언
善한 惡마
권 녕 하(시인, 문화평론가)
여론조사로 나라의 미래를 정할 때 눈치 챘어야 했다
민심의 실체를 파악한다고 하여, 여론조사를 한 결과를 봤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그 결과는 지역적 이기주의를 뻔뻔하게 드러내기 위한 설문조사였고, 그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들 자신이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탐문한 것에 불과했다. 국가 차원에서 정책과 추진방향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 하는, 미래지향적인 소중한 가치는 뒷전에 처박아놓고, 당장의 이로운지 나쁜지를 확인해 보는 졸속도구로 그 역할이 변질된 것이다. 어이없게도.
여론조사는 참 좋은 장치다.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사안을 걸고, 민심의 향방을 알아보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선택지 또는 설문지의 문항을 어느 방향으로 추출하는지와 설문 응답자를 어느 계층에서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도 춤을 춘다. 더욱이 무응답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 의도를 더러 무시하거나 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도출해낸 민심이 과연 대표성을 갖추었냐? 하는 ‘불신감’을 내포한 채 결과가 발표되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발표된 여론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과 또한 여론을 반영한 결과이니까, ‘유, 불리’를 떠나서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며 불만을 품은 대다수의 민심을 다독이곤 했다. 이러하니, 여론조사가 아이러니하게도 분열된 여론을 들춰내고, 숨죽이고 있는 민심을 드러내 보이는 역할로 전락하고 말 때가 많았다. 한 마디로 여론조사 결과를 ‘안 믿거나, 못 믿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발표된 내용을 분석해보면, 여론조사에 응한 사람들의 성향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 즉 설문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답변하는데 ‘과감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이란, 정신과 물질을 등가等價로 비교, 판단, 결정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과감한 사람들’이란 뜻으로 말을 했을 뿐이지만, 결국 여론조사 결과는 이들의 응답을 집계한 결과이고 보니, 이들의 판단이 결국 ‘민심으로 대변되거나 포장될 것’이란 판단은 당연한 것이다.
아침마다, 눈 뜨면 부딪치는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늘 OX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오늘은 이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에 따르는 이익과 손해, 유, 불리를 가려내고 판단하는 선택은 각 개인의 당연한 권리다. 삶이란 늘 살벌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현장이기에, 그래서 각 개인이 선택한 결정이 공공의 이익에 반한다 하여도, 일방적으로 비난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동체, 국가, 민족으로 적용대상 범위가 커지면, 그것도 당장의 문제보다는 미래를 염두에 둬야한다면, 당장의 유, 불리보다는 장기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로 판단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 또한 모르는 사람 하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뽑는 선거, 정치인을 뽑는 선거, 또는 공공기관의 이사장을 뽑는 선거 등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자리에 앉을 사람을 뽑는 중요한 투표에서, 자신의 이익, 손해와 유, 불리를 떠나 참[眞]을 찾고 거짓[假]을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과연 얼마나 될까? 참의 편에 섰다가 혹여 자신에게 돌아올 불리함이 있다고 했을 때, 이를 쾌히, 능히 감내해낼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의 틈에 섞여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참을 찾는 사람, 사람다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만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귀중한 인연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밥 먹던 숫가락도 내동댕이치고,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하듯 하면서, 감격에 겨워 펑펑 울어댈 것이다. 체면? 은 그 다음 문제다. 소중한 만남의 기회를 놓치면 아니 되니까. 그래서 “어서 오세요!”를 일식집 주방장처럼, 큰 소리로 외치면서, “빨리 오세요!”를 엄마 기다리던 아이처럼, 참으로 반기면서, 속마음을 다 드러낼 것이다. 은혜를 빨리 잊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개똥같은 이 세상’(한 세대 전, 文목사의 詩에서 인용)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사람다운 사람과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전철에서 노인들이 홀대 받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주책없는 노인들이 여기저기 많아졌다. ‘나이 먹은 게 벼슬이냐!’ 라는 말도 있지만, 공공장소에서 나이만 먹었지 미성년자들과 정신이 동급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치졸한 언동을 거침없이 내뱉는 노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런 노인들이 젊은 사람들로부터 홀대를 받게 되는데, 그 처지가 안타까울 뿐, 입이 열 개라도 거들어 줄 명분이 없다. 딱하게도.
광복光復 이후, 피비린내 나는 6.25동란을 겪고 난 뒤, 우여곡절 끝에 4.19 그리고 5.16을 거쳐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이 시작됐다. 이 때부터 이 땅에 본격적(?)인 ‘베이비 붐’이 일어난다.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으면, 일터로 뛰어나가 열심히 일했다. 개인의 노력이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에 가슴 벅찼다. 이제,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세상이 됐다고 판단했다. 이 아이들이 학령學齡에 도달하자, 아이들의 미래에 학부들의 꿈과 소망을 담아 국가와 민족의 미래상未來像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경제개발이 성공하자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변화와 혜택과 기회와 풍요 속에서 성장한 베이비 붐 세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질주해도 무방했다. 모든 부모와 기성세대가 바란 그대로였다. 서구 물질문명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폭발적인 경제성장은 정치민주화의 에너지로 작용하며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정치민주화는 미래의 꿈과 소망이었고 민족이 파라다이스로 가는 로드맵으로 여겼다.
그들이 성장했고, 사회 진출과 더불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이윽고 사회의 중추적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전세대보다 훨씬 많은 기회와 더불어 경쟁 상대도 그만큼 많았다. 이렇게 주어진 상황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열심히 공부도 하였을 것이고 서로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열정과 노력을 다한 이들의 노력과 열성을 깎아내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다만, 그렇게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하면 예정된 길, 즉 성공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안정된 시대를 맞이한 이들 세대가 ‘참 행복한 세대였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벌써 수년전, 전철에 노인들이 많이 타서 등하교 하는 학생들이 불편해 한다는 신문기사와 TV 뉴스를 본 기억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노인 인구, 즉 지하철무료탑승 승객은 자꾸 늘어나는데, 노인들이 학생들 등하교 시간에까지 전철 칸의 거의 절반을 점령(?) 하다시피 한다. 그러니 학생들에게서 불편하다는 말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새로운 세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이끌고 갈 학생들이 공부하러 가는 그 시간에 왜, 꼭 전철을 타야 하는지, 시대가 싹 변해버린 것을 외면해온 노인들이 저지른(?) 몰염치였다.
최근, 이들 노인들이 태극기가 새겨진 옷과 모자를 쓰고 전철을 타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떼를 지어, 광화문, 시청 등 서울시내 한 복판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공짜 밥 챙기는 노인들은 탑골공원, 서울역, 청량리역, 용산역, 영등포역 인근에로 가는 줄 알았는데, 이들은 마치 ‘시티투어’하는 관광객처럼, 시내 중심가 즉 시청앞 또는 광화문이었다. 이곳은 세월호, 민노총, 산별노조 등 조직적 활동이 가능한 사회단체들이 마치 전세(?) 낸듯한 곳이었는데, 사전에 집회허가도 받아놓는 둥 꽤나 신경을 써서, 태극기를 들고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을 일컬어 누군가가 ‘태극기 부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게 그들을 칭하는 공식적인 용어가 됐다.
그런가하면, 노인계층 중에도 “그 많은 시간을 골프나 치러 다니고 해외여행이나 다니지, 왜? 길거리로 나와? 꼭! 길 막히게 해야 돼?” 하며, 정작 태극기 부대의 행위를 못마땅해 하는 이들도 꽤 있다. 이들은 대체로 전철 탈 일이 없는 노인네들이다. 참고로 전철은 경제개발 시대에 놓인 국철이고 대부분의 노인들은 무료탑승 승객이다. 노인이라고 다 똑같은 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태극기 부대는 할 일 없는 노인네들이 맞다. 아파트 경비, 주차장 관리인이라도 하려면 그 시간에 그곳에 갈수 없겠다. 남느니 시간뿐인 노인네들이 맞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젊은 시절에 대체로 직장에서 단위노동조합 조합원이었겠다. 직장의 발전과 안정된 일자리를 위해,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키우기 위해, 부모가 무식하다고, 뭐니 뭐니 하면서, 멸시하는 자식의 출세를 위해, 나아가 전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한 때 붉은 머리띠를 이마에 매었던 사람들이었겠다. 그들이 때늦게 못 다 이룬 노동자 시절의 꿈을 꾸고 있는지, 다 늙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역할을 찾아낸 것인지, 오직 기억되고 추억되기를 보람으로 생각하는 노인네들이, 은혜를 빨리 잊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 오늘도 시내를 활보하고 있다.
인문학의 부활, 통섭을 처방전으로 내놓았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오늘날 정신문명이 하나 둘 파괴되어가더니, 꼭 그만큼 빈자리에 물질문명으로 파생된 콘텐츠가 하나 둘 채워지고 있다. 나무가 가지를 치듯 나날이 다양해지는 그 콘텐츠를 익히기 위해 특정 ‘학문’이 새롭게 탄생해야 할 정도로 현실세계에 자리를 굳게 잡아가고 있다. 이러한 판국에 유물론 ‘사상’까지 그 판에 뛰어들어 아편처럼 횡행하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인문학의 부활’이라느니 ‘동양철학의 재발견’이라느니 ‘통섭’이니 하는 고언苦言들은 몽땅 망가져버린 가정교육을 사회적 비용부담으로 전가시키는 무책임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에티켓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됐고, 윤리를 포함한, 기초 사회질서는 경찰에 떠넘기기로 작정했다. 교육 당국은 학교라는 장소를 전교조의 배교拜敎 장소가 되도록 방치했고, 종교는 ‘루터’처럼 공개적으로, 화끈하게, 결혼해서 타협을 해버리던지, 개혁의 깃발을 추켜들던지 하지, 혹세무민에 꿀 빨아먹느라 구원은 이제 그만, 역부족이다. 정치는 내놓고 ‘정당의 목적은 정권을 잡는데 있다’고 목적과 수단을 뒤섞은 해괴한 변론을 당당하게 공언하는데도, 정치평론가, 학자들은 ‘정당의 목적은 민의를 대변하는 단체’라고 에둘러 말도 않고 있다. 이러하니 삶의 공동체, 즉 국가를 이끌어갈 철학도 없는 ‘대한민국’호가 북한의 주체사상 앞에서 표류하고 있겠다.
가정은 최소단위의 공동체이다.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촉발된 변화를 인문학의 부활, 통섭 정도의 (계층간의)교류로 물꼬를 트고자 하는 처방전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정도다. 그동안 수많은 전조증상을 무시하더니, 이제 지진은 시작됐다. 분화구는 들썩거리는데 화산재나 쓰나미에 휩쓸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거나 높은 산으로의 도피, 보트피플 등은 고통의 연장일 뿐이다.
삶의 공동체, 국가를 이끌 철학이 없는 말세末世를 살면서, 이 땅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신문명의 파괴 수순을 목불인견目不忍見 참느라, 결국 행성 지구의 운명까지 재촉하게 될 것이다. 자연自然을 누가 선善하고 순順하다 했는가. 자연은 인간에게 받은 만큼만 틀림없이 되돌려준다. “자연적으로(자연의 뜻대로) 하지, 인간적으로(네 맘대로는)는 안 한다”가 정답일 것이다. 그리하여, 차라리 ‘말세를 사느니 먼저 빨리 죽는 게 더 좋다’는 ‘알파고’의 대답을 꼭 기다려야만 할까. 은혜를 빨리 잊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에서.
세상 뒤집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와우아파트가 무너질 때, 삼풍쇼핑센타가 주저앉았을 때, 성수대교가 끊어졌을 때, 졸속 시공, 빨리빨리 병病, 무능한 정부를 탓하며, 신속 대처하지 못하는 공권력을 원망했다. 사고를 당하고 죽은 사람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고, 가족들은 피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재수가 없어서’, ‘운이 나빠서’ 하며, 신년운수, 토정비결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사고가 난 그 장소에 갔다가 불과 몇 분전에 그곳에서 나왔기에 사고를 면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요행과 우연 구사일생 등이 밝혀지자, 그것도 언론이라고, ‘운수 탓’을 하거나 ‘팔자 탓’을 하는 민심을 보도하기도 했었다. 기가 막히게도.
이미 단련이 돼 있어서 그랬구나! 북한 인민군의 기습 남침에 38선을 돌파당한 국군이 파죽지세로 밀려, 불과 이틀 만에 수도 서울 방어까지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이 때는 엄청난 공포에 떨며 하늘을 원망했겠다. 정부는 국군의 독전督戰, 항전抗戰을 목적으로 한 선무방송을 펼쳤고, 북쪽에서 밀려온 피난 행렬은 한강 건너 남쪽으로 피난가기 위해 한강인도교로 몰려가고 있었다. 이때 한강다리가 폭파된다. 살아남겠다고 피난길에 나섰다가, 하필이면 한강다리 폭파 현장에서 폭살당하거나 떼밀려 강물로 떨어져 죽은 피난민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운 좋게 먼저 한강다리를 건너간 피난민 외에는 대부분이 탈출의 기회를 놓치고 서울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만다.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한 인민군대에게 항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점령당한 수도 서울. 정부는 서울을 포기한 채, 경황 중에도 한강다리를 폭파하여 인민군의 남진을 막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지휘부만 남쪽으로 내 튀어버린 것이다.
민간인들을 고스란히 내버려둔 채. 국군이 수도 서울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집에 있던 서울 사람들. 그들 중 공무원, 경찰가족, 유명인사, 반공인사들이 색출, 체포됐다. 공산당 용어로 ‘반동분자’들은 굴비 엮듯이,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끌려갔다. ‘해방군이 왔다!’고 반기며,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심지어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남로당원과 좌파, 그리고 불만세력들이 붉은 완장차고 경찰가족, 군인가족, 지주계층을 색출해냈다. 선전선동에 능한 그들은 이미 이북에서 지주계급과 친일파와 정적들을 무참히 숙청해본, 경험이 많은 인재(?)들이었겠다. 남한에서는 어제까지 인사 꾸벅하던 젊은이가 죽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고, 살려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고 애원하는 아낙네까지 무참하게 죽여 구덩이에 내던져버려졌다. 그들은 천인공노할 악행을 백일하에 공동으로 저지르면서, 열성당원으로 변신했다. 국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려나, 이제 나라의 목숨 줄이 간당간당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됐다. 이제 ‘나라 다 망했다’고 다들 체념했다.
이렇게 다 망해버린 나라를 되살려내 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연합의 공로와 숭고한 정신을 한동안은 기억하고 상기했다. 서울을 수복하고,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세월이 흘러가고,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이제 좀 살만해졌다고 생각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중산층이 자리 잡고 이어서 정치민주화가 자리를 잡아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운동권에서 반미운동이 시작됐다. 대한민국이, 돈 좀 벌었다고,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에 쉽게 편승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때 IMF 사태가 터졌다. ‘샴페인을 미리 터뜨렸다’며 그들이 비웃었다. 국가부도사태를 당하여, 그들의 길들이기에 순응하면서 재활의 청사진을 펼쳐보이자 ‘시궁창에서 장미꽃이 폈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그 말을 그때는 ‘고맙다’고 절하며 받았다. 그리고 국가신용등급을 수시로 체킹 당하는 와중에도 한편에선 반미운동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의 똥꼬를 계속 찌르고 있다.
그런데, 그만 세월호가 침몰하여 학생들이 떼죽음 당하는 대형 재난이 터진다.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 수백 명이 의문의 침몰로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수학여행은 단체현장학습이기에 교육의 연장이다. 알뜰한 현장학습을 위하여, 학생을 현장으로 인솔하는 ‘학교’는, 대형 운송수단인 ‘갈 때는 배, 올 때는 비행기’를 선택했다. 이 때, ‘갈 때는 비행기, 올 때는 배’로 결정한 학교가 있었다. 세월호 사고만 나지 않았으면, 올 때 그 배를 탈 예정이었다. 소름끼치는 순서 배정이었다.
이런 끔찍한 재난을 겪고서도, 포항에서 지열발전 한다고, 고압의 물을 지하 깊은 땅까지 구멍을 뚫고 지층 틈새로 쑤셔 넣어, 지진을 일으키지를 않나(아니면! 아니라는 ‘지질학, 물리학적 증거’를 관계자는 심장을 하늘에 걸고 발표! 해야 한다), 강원도에서 산불을 또 일으키지를 않나, 국가적 재난이 줄을 잇고 있다. 이걸! 관재官災, 인재人災 탓으로 돌려야 하나? 국가운영 시스템 부실 탓으로 돌려야 하나? 혹세무민하듯 사주팔자 탓으로 돌려야 하나? 포항이나 강원도나 무너진 집, 불 탄 집 다시 지어주고 보상하면 다 끝날 일인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이승을 떠난 학생들의 원통함과 유가족의 탄식을 다 어떻게 수렴하고 달랠 것인가. 누구에게 원죄를 물을까? 하늘[天]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연自然은 또 뭘 준비하고 있을까? 최근의 유투브[YouTube]도 그 중의 하나일까?
은혜를 부정하거나 빨리 잊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이 땅에서, 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가치의 중요성을 깨친 선각자가 어서 빨리 이 땅에 출현하기를 고대하면서. 아주 다 망하기 전에.
〈하나님의 교회 복음선교회〉에서 ‘진심, 아버지를 읽다’ 전시회를 열었다(2.28∼5.12).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전展과 함께 어머니전展도 계속된다. ‘아버지, 어머니’는 종교보다 드높다(인터넷 홈페이지 : thankfather.org). 노인들 스스로 위로 받기에 아주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