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고
정 성 천
며칠 전 “부고(訃告) 알림, 삼가 알려드립니다. x x x 님께서 2022년 1월 14일 저녁 9시경 향년 72세의 일기로 영면하셨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지난 연말 친하게 지내던 고등학교 동기생이 갑작스레 세상을 하직하여 새벽에 문자로 부고를 받은 황당한 경험이 있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메시지를 다시 찬찬히 읽어 보았다. 하지만 이름이 생소하다. 나이로 보아 우리 또래 같아 혹시 내가 잊고 있었던 지인이 아닌가 하여 나의 전화번호 연락처를 검색해 봤으나 연락처에도 이름이 없다. 부고까지 보낸 걸 보면 그의 연락처엔 나의 전화번호가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궁금하여 전화를 걸었다. 젊은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망자의 따님인 것 같다. 사연을 들어 보니 아버님이 지난 14일에 돌아가셨고 16일에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부친 휴대폰을 정리하기 위해 연락처에 부고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망자가 어디에서 생활하셨는지를 물었다. 울릉도에서 생활하셨다고 대답한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이름이 생각났다. 그래서 혹시 전화 받는 분의 이름이 x x 가 아닌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순간 나의 의식은 40여 년 전으로 빠르게 되돌아간다. 망자가 바로 x x 아빠였던 것이다.
1978년 군에서 제대하고 5년 동안 봉화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했었다. 1983년 3월 고향 김천으로 근무지를 옮기려는 나에게 이동점수가 너무 높은 점수라 아까우니 승진에 유리한 울릉도를 한번 지원해 보라는 교감 선생님의 권유로 울릉도로 지원하여 울릉종합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울릉종합고등학교는 울릉도 내에서도‘저동’에 위치되어 있다 하지만 학교 가까운 ‘저동’에는 고등학교 교원 사택이 모자라서 할 수 없이 ‘도동’의 초등 교원사택에서 울릉도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도동’항 부두에서 성인봉 쪽으로 가장 멀리 올라가야 하는 ‘대원사’골짜기 앞 동네에 자리한 교원사택이었다. 자연적으로 주위에 사는 현지 이웃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중 한집이 x x네 집이었다. 나의 딸아이와 동갑내기이고 x x 엄마에게 딸아이가 피아노 교습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 친하게 지냈다. x x 아빠는 그 당시 서면사무소에서 면서기로 근무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래 이웃이고 한창 젊었던 시절이라 때로는 오징어 회 안주에 소주도 함께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1988년 5년간의 울릉도 생활을 마치고 고향 김천에서 근무하게 된 후로 몇 번이고 전화 통화를 한 기억도 난다. 휴대폰을 몇 번 교체하여 연락처마저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나와는 달리 x x 아빠는 내 번호를 고이 연락처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안함에 잠시 망자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하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고를 받을 때는 으레 친구들의 부모님에 대한 부고가 전부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아니라 친구 당사자의 부고가 주를 이루고 있다. 지난 연말에도 새벽에 문자로 날라 온 부고가 으레 동기 친구의 부모님 부고인 줄로 착각했었다. 며칠 전까지도 지나치는 차창을 통해 건강한 모습으로 시내 거리를 활보하는 친구 모습을 목격했었기에 더욱 친구의 부고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마침 서울 딸네 집에 와 있던 나는 친구 부모님 장례식에 참석이 어려워 다른 친구에게 조의금을 부탁하려고 전화를 걸다가 부고의 주인공이 바로 친구인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고 허겁지겁 서울서 내려와 참석한 친구의 장례식에서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몇 명의 동기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 또래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세상의 다반사가 되는 시기가 도래했단 말인가?
장례식장에서 친구 중 누군가가 말하기를 갑작스러운 망자의 죽음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아쉽고 애석한 일이지만 본인을 위해서는 복스러운 일이고 망자의 죽음 복이 부럽다고까지 말한다. 저녁나절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다가 증세가 심해져 의료원 응급실로 급히 실려갔고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진단에 구급차에 실려 대구로 가는 도중 운명을 달리했던 친구였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수년간 정상 생활은커녕 식물인간으로 자리보전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망자가 주위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고통이 어떠한가를 흔히 보아 온 우리는 죽음 복을 운운하며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죽는 것이 꼭 바람직한 죽음인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눈인사 하나 없이 충격과 혼란만 마음에 심어주고 나만의 갈 길을 급히 떠나는 죽음이 망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죽음일까?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의 망자 마음 상태가 아닐까? 친구는 죽는 바로 그 순간 어떠한 마음을 갖고 떠난 것일까? 우리는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세상으로 갈 때 평온한 마음을 갖고 가기를 원한다. 또 다른 지인의 어머니는 96세까지 사셨다고 했다. 자리에 누우시기 전까지 일상생활을 영위하시다가 자리에 누워 말문을 닫으신 지 3일 만에 숨을 거두셨는데 마지막 임종하실 때의 모습이 마치 불꽃이 사그라들 듯, 고무풍선으로 된 인형에 바람이 서서히 빠져나가듯이 그렇게 영면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죽음을 바람직한 죽음으로 여기고 이런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무나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복이 지대한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행운이 아닐까? 누가 알겠는가? 지인의 어머니는 살아생전 특별한 삶이 아니라면 전생의 삶이 그런 복을 받을 만한 큰 덕을 쌓았는지 우리로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죽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인 1963년 6월 10일 남베트남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인‘응오 딘 디엠(Ngo Dinh Diem)’의 불교도 탄압에 항거하여 수도 사이공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한‘틱 쾅 둑(Thich Quang Duc)’ 스님의 죽음이다. 머리 위에서부터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자 이내 전신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이고 살갗이 타는 냄새가 주위에 가득해도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부좌의 모습 그대로 산화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매스컴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자 세상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꼿꼿이 앉은 채로 화염에 휩싸이는 모습을 찍은 신문 기자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케네디’는 “역사상 그 어떤 뉴스 사진도 이 사진 만큼 전 세계적으로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킨 사진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은 걸 보면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평온한 마음을 갖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 같다.
나이 칠십을 넘기고 보니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몸의 어느 한 곳이 아프기라도 하면 이게 혹시 불치의 병은 아닌지 두려움에 휩싸인다. 몸이 아프고 점점 더 노쇠해 감은 이러다 마침내 죽음에 다다르고 말 것이라는 예상을 자아내고 그런 예상은 두려움으로 버무려진 여린 슬픔이 되어 늦가을 아침 안개처럼 마음에 스멀스멀 피어난다. 그리고 이 여린 슬픔은 삶의 갈피 갈피마다 그 밑바탕에 기분 나쁜 불만족으로 서리게 된다. 부처님은 이것을 ‘고통’이라고 했다. 사실 부처님이 말한 ‘고통’은 팔리어로 된 불경 원본에는 ‘둑카(duka)’로 표기했는데 이는 ‘고통’보다도 ‘불만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한다. 이 ‘둑카’를 극복하는 방법의 첫 단계가 실상을 똑바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갑작스럽게 떠난 친구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의 무겁고 착잡한 분위기에서 친구 죽음의 애도와 함께 죽음 자체에 대한 거북스러운 친숙함을 읽을 수 있었다. 죽음은 나의 윗대에서 일어나는 나와는 먼일이 아니라 우리 또래들의 일이며 죽음이 점점 더 친숙함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일은 거북한 일이다. 하지만 거북하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외면한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언젠가는 닥쳐올 죽음이라면 한 번이라도 똑바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작가는 인생을 축제처럼 살기 위해 죽음을 공부한다고도 했다. 딱히 축제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똑바로 보는 것은 필요해 보인다. 어둠이 두려운 것은 어둠 속에서는 실체를 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체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대상은 두려울 뿐이다.
‘틱 쾅 둑’ 스님처럼 극심한 육체의 고통까지도 뛰어넘어 평온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며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일반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님의 죽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깨닫게 된다. 죽음의 길도 우리의 평소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얼마든지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평소‘마음 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을 통해 자기 마음과 죽음을 잘 관찰해 온‘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는 자신 죽음을 평소 머릿속에 떠올리며 마음을 똑바로 관조해 온 사람은 자신의 삶을 좀 더 온전하게 살 가능성이 크고 또 그런 사람은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자기 마음을 가다듬고 잘 챙겨 평온한 마음에 들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실제 ‘스티브 잡스’가 숨을 거둘 때의 마지막 말은 “오, 와우(Oh Wow)!”를 3번 외쳤다고 했다. “오, 와우!”라는 말은 영어권 사람들이 감동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감탄사이다. 이 말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의 죽음길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평온하고 아름다운 길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의 죽음길은 과연 어떤 길이 될까? 가능하다면 이런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붉게 노을 진 강물을 따라 늦가을 하얀 억새꽃이 흐드러지게 핀 호젓한 강변 길, 그런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강물이 저녁 어둠 속으로 사라지듯 적멸로 사그라드는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평온하고 아름다운 길이 되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