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나서 자료를 올리려고 했는데, 그게 언제 될 지 몰라 우선 올리고자 합니다.
3-1코스는 3코스가 공사 등의 관계로 걷기에 불편해서 새로이 개척한 코스입니다.
우리 카페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걷기도 했지요.
3-1코스도
1. 3-1코스 설명
1) 3-1코스
① 원당역(3번 출구) -> ② 어울림공원(성라공원) -> ③ 흥도동사무소 -> ④ 원흥동 청자도요지 -> ⑤ 건지산 -> ⑥ 심희수/일타홍묘 -> ⑦ 원흥동 앞산자락 -> ⑧ 흥도동주민센터 -> ⑨ 성라공원 -> ⑩ 원당역
으로 이어지는 원점회기 코스입니다.
2) 거리 및 소요시간
* 거리 : 12.3km
* 소요시간 : 4~5시간(휴식시간 포함)
3) 교통편
* 전철 : 3호선 원당역
* 버스 : 일산/화정 방면 - 706번, 9701번// 탄현/중산/식사 - 567번, 7733번, 9703번
* 마을버스 : 13, 18, 19, 38, 97, 98, 99번 등
* 주차 : 원당역공영주차장(1일 3,000원), 성라공원 주차장(무료)
2. 관련 유적
1) 원당(元堂) 지명유래
원당은 1413년 고봉현이 고양현이 되면서 관청이 들어선 최초의 관아지터이다. 이로써 이곳을 ‘으뜸 원(元)’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원당리(元堂里)’ 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이 관청은 장경왕후(중종의 왕후)의 묘를 이장한 희릉이 들어오면서 대자골로 이전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이곳은 정승이 많이 나며, 그분들의 묘 자리로 널리 쓰이던 명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삼릉인데 이곳에 왕실의 큰 재실(정자각)이 있어 역시 으뜸 원자와 집 당자를 써 원당이 되었다고 한다.
2) 권희(權僖) 묘
1319(충숙왕 6)∼1405(태종 5).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할아버지는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보(溥)이며 아버지는 검교시중 고(皐)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홍주도병마사(洪州道兵馬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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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장단(長湍)에서 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그뒤 문하찬성사에 이르러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조선건국 후 1393년(태조 2) 검교문하시중이 되고 원종공신녹권(原從功臣錄券)을 하사받았다.
1398년 세자전(世子殿)의 남문에서 개복신초례(開福神醮禮)를 주관하였으며, 1400년(정종 2) 판삼사사로 치사하였다.
그뒤 태종조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이 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 아들 : 권근(權近) : 조선개국공신,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종1품 : 뒤의 좌우 찬성)
* 손자 : 권제(權踶) : 세종 때 우찬성
* 증손자 : 권람(權擥) : 세조의 공신, 좌의정 역임
* 후손 :
- 권철(權轍) : 선조 때 영의정, 권율의 아버지
- 권율(權慄) : 임진왜란 때 도원수(총 대장)
- 권상하(權尙夏) : 송시열의 수제자. 숙종 때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음.
3) 국사봉 지명유래
성라산(星邏山, 星羅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마치 비단과 같이 많은 별들이 하늘에 펼쳐져 있는 곳이다 하여 성라산이라 했다고 한다. 베라산은 성라산의 우리말인 별아산을 편하게 부르는 이름이다. 그리고 성라산 정상에서 1년에 한번 씩 관청에서 주관하는 큰 제사를 지냈는데 이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 국사봉이다.
4) 일타홍(一朶紅)과 심희수(沈喜壽) 묘
일송 심희수(沈喜壽)와 부인 광주 노씨(光州盧氏)의 쌍분으로 조성된 묘 왼쪽으로 오래된 상석과 기념비가 놓여있다. 오래된 상석으로 미루어 일타홍(一朶紅)의 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다고 한다.
심희수(沈喜壽 1548∼1622)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수뢰루인(水雷累人). 본관은 청송(靑松).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91년 응교·간관(諫官)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같은 해 도승지·형조판서를 거쳐서 호조판서가 된 뒤에 관서의 굶주리는 백성구제에 힘썼다. 그 뒤 홍문관·예문관대제학,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615년(광해군 7)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 축출되었다.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尙州)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一松 沈喜壽와 기생 一朶紅의 사랑>
15세 미소년이었던 일송 심희수는 대가집 연회에 가서 선녀 같은 기생 일타홍을 보고 사모의 정을 가진다. 10여일 후 글방에서 귀가 중 말을 타고 오는 도중 일타홍을 만나 며칠을 함께 지내게 되지만 일타홍은 이런 생활은 장구한 계책이 못되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자고 한다. 일타홍은 낭군은 도량, 재주, 품격으로 보아 일찍 과거 급제하여 영상을 지낼 관상이므로 과거급제하면 3일 안에 반드시 만날 것을 맹세한다.
심희수는 일타홍을 그리워하여 침식을 폐할 정도였으나 일타홍을 만날 생각으로 과거시험 준비에 진력하였다. 그 와중에 장가를 들었으나 금실이 좋지 못했고 결국 소년 등과하여 일타홍을 만나게 된다. 심희수는 일타홍을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예의범절도 빈틈이 없고 여공도 정교하였다. 후일 일타홍은 미미한 병에 걸리더니 고통도 느끼지 않고 숨을 거두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심희수 1583년 금산군수가 됨)
‘인생의 생사장단은 한가지이며 군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한이 없다. 낭군의 옆에 뼈가 묻혀 지하에서 다시 만나 모시는 게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은 손수 염하여 첩을 귀장하는 예는 없으나 다른 연고를 대어 말미를 얻고 고양의 선영 안에 장사 지냈다.
일타홍이 죽고 난 뒤부터 집에 크고 작은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일타홍이 꿈에 나타나 예고를 했는데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러던 중 꿈에 일타홍이 나타나 심희수의 명이 다했으니 맞아 뵈올 날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일송 심희수는 과연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달구경(賞月)- 일타홍(一朶紅)의 절명시
靜靜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淸 일편금광만고청
無限世界今夜望 무한세계금야망
百年憂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맑고 고요한 초승달 또렷하기도 해
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푸르렀겠지.
무한한 세상에 오늘 밤 함께 달을 보니
인생 슬픔과 즐거움 몇 하고나 정을 나눴을까.
이별눈물(有倬) - 沈喜壽 : 일타홍을 버들상여에 싣고 가며 울며 지은 시라고 함
一朶芙蓉載輀車 일타부용재이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한 떨기 연꽃은 버들상여에 실려 있는데
향기로운 영혼(香魂)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비단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5) 원흥동 신라 말 고려 초기 청자요
1937년 발견된 이후 우리나라 초기 청자가마터 중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대규모의 퇴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2년 정신문화연구원의 조사시에는 5개 정도의 요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현재 가마터는 전체면적이 약3.300㎡인데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4개의 구릉처럼 보이는 퇴적더미는 대량의 갑발과 소량의 폐기물로 이루어져있다.
갑발류는 일반적인 원통형과 초기의 특징적인 갑발 받침대가 있으며 자기조각은 거의무늬가 없는 청자 조각으로 짙은 암녹색이나 황갈색이 주류이다.
기형은 완(대접)류가 대부분인데 이들 중 소량의 항아리나 주전자 조각이 확인되기도 했다. 한편 장방형 벽돌도 존재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벽돌가마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韓國精神文化硏究院,1982,『韓國靑磁陶窯址』고양시·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1999,『고양시의역사와문화유적』
6) 한규설(韓圭卨) 묘
1848(헌종 14, 서울)~1930. 한말의 무신·애국지사.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 아버지는 부사 승렬(承烈)이다. 형이 총융사(摠戎使) 규직(圭稷)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75년(고종 12) 진주병사가 되었다. 이어 전라좌수사·경상우병사·우포도대장·친군우영사(親軍右營使)·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 등을 거쳐 1887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한성부판윤·친군장위사(親軍壯衛使)·총어사(摠禦使) 등을 역임했다. 1896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으로 있으면서 김안(金安) 등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을 환궁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1898년 중추원 의장이 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국왕에게 의원 설치를 건의하자 이에 호응해 새로운 중추원관제를 공포하게 했다. 그해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체포되고 독립협회의 혁파가 논의되자 이들을 석방하고 민의를 존중하자고 주장 했다. 같은 달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정부의 반격으로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될 때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다시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12월에는 미국에게 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노력을 당부하는 고종의 밀서를 이승만(李承晩)·윤병구(尹炳求)에게 전달했다.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수상)이 되었다. 그해에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완용(李完用) 등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일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한규설은 ‘황제의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다’며 끝까지 이를 반대하다가 대궐 수옥헌(漱玉軒)에 감금되고 바로 면직당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중추원고문 궁내부특진관을 지냈으며, 1907년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이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후 남작작위를 주었으나 거부했다. 1920년 6월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창립하고, 이어 이를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로 발전시켜 교육을 통한 민족역량 배양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