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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 / 본격적인 한국문화 전파, 조선통신사 / ≪한강문학≫ 31호 권두한국문화원형질찾기
본격적인 한국문화 전파, 조선통신사
홍 윤 기
일본 센슈대학 국문과 문학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석좌교수
《한강문학》(2014.창간∽)은 《문학탐구》(편집,발행인 권녕하, 1993.창간∽ 1994.종간) 당시부터 추진하여오던 〈검은 머리칼의 종족을 찾아서〉(문화인류 학, 고고학, 지질학)에 이어 명제를 〈한국인의 문화원형질 찾기〉로 달리하여 큰 주제로 삼고, 기왕의 천착과정에 ‘역사전통문화예술’을 얹어 새삼 추진하여 오던 차, 홍윤기 박사님의 대작 《일본문화사신론》(2011, 한누리미디어)을 접하게 된다. ---------------------------------------------------------------------------------------------------- 본고는 홍윤기 박사의 저서 《일본문화사신론》(홍윤기, 2011, 한누리미디어) 내용 중 ‘향가’ 관련부분이 실린 편을 발췌, 일부 윤문, 분재한다.〈편집실〉 |
일본무사 정권 등장과 조선의 현실
일본의 중세는 12세기 말부터 16세기 후반에 이르는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는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라고 하는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이 등장한 시기(1192∽13330)이다. 두 번째 무사정권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1336∽1573)이다. 이 시기에 다이묘영국[大名領國]이 형성되어 전개된 시기라는 특징도 있다. 이 시대를 이른바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센코꾸지다이, 1467∽1568)로 부르는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가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며 전국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 시기에 조선왕조는 11대 중종中宗(1506∽1544) 다음 12대 인종仁宗 (1544∽1545) 1년,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가 일어난다. 인종의 외숙 윤임과 13대 명종明宗(1545∽1567)의 외숙 윤원형의 정권쟁탈 싸움이다. 그 다음 14대 선조 25년(1592년), 조선은 일본 무사정권의 침략을 받고 전 국토가 만신창이가 된다. |
오다 노부나가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1526∽1598)는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文祿の役)을 일으킨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慶長の役)을 다시 일으키며 조선을 재침했지만 참담한 패전을 거듭한 끝에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病死하며 조선 침략이 중단된다.
이 때 왜군이 파괴하고 약탈해간 문화재급 불상, 불화, 활자 인쇄술 그리고 전적류를 가지고 주자학을 비롯한 학문과 예술이 크게 발전한다. 도공을 끌고 간 왜군 다이묘들은 아리타야키[유전소有田燒, 나베시마씨鍋島氏], 사쓰야마키[륭마소蕯摩燒, 시마쓰씨 島津氏], 하기야키[추소萩燒, 모리씨毛利氏] 등 요업窯業이 각지에서 번창한다. |
이 때 왜군이 파괴하고 약탈해간 문화재급 불상, 불화, 활자 인쇄술 그리고 전적류를 가지고 주자학을 비롯한 학문과 예술이 크게 발전한다. 도공을 끌고 간 왜군 다이묘들은 아리타야키[유전소有田燒, 나베시마씨鍋島氏], 사쓰야마키[륭마소蕯摩燒, 시마쓰씨 島津氏], 하기야키[추소萩燒, 모리씨毛利氏] 등 요업窯業이 각지에서 번창한다.
그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의 새 시대가 열리며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마지막 무사정권으로서의 막을 내리는데, 이후 서양문물을 도입하여 국력을 키운 그들은 아예 조선을 합병, 식민지로 삼아버린다.
현재, 일본에는 임진왜란과 식민시대 때 조선으로부터 약탈해간 문화재, 서적, 불화 등 귀중한 한국 고대 문화재를 관장하고 있는 도서관이며 문고文庫 등이 산재해 있다. 이를테면 아카와문고[阿川文庫], 가네자와[金澤]문고, 호좌[蓬左]문고, 긴도[琴堂]문고, 가와이[河合]문고, 후지미테이[富士見亭]문고, 진쇼 [珍書]문고 등등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 수많은 고대 한국 간본刊本이 보관되어 있다. |
임진왜란 이후의 한일 간의 두드러진 교류는 이른바 ‘조선통신사’가 12번(1607년 12 ~ 1811년 8)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어째서 임진왜란 후에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인가.
막부는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으로 끊어진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바라고 있었다. 또한 조선과 깊은 교류를 해 왔던 대마도[쓰시마]의 소시(宗氏, 종씨)도 국교 재개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막부는 소시에게 교섭을 시켜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된 조선 사람들을 송환함으로써 성의를 표시했기 때문에 조선도 1607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여 국교를 회복시켰다. 이어서 1609년 대마도와 조선 사이에 조약을 맺고, 부산에는 왜관倭館이 설치되고 소시의 무역선이 해마다 조선을 오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장군이 바뀔 때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12번에 걸친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일본의 근세, 근대 문화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 12월부터 1811년 8월까지 12번에 걸쳐 매번 약 5백여 명씩이나 되는 사절단이 건너갔다. 그들 중에는 뛰어난 학자와 문인들이 많이 일본을 다녀왔기 때문에 일본에는 고대와 중세 이래로 또 다시 한국의 학문과 문화가 크게 전파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이 일본에 계속해서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한일 양국은 19세기 중엽에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 에도 막부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서로가 평화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내면적인 갈등이 소리없이 크게 작용했었다고 서울시립대학교 사학과 정재정(鄭貞) 교수는 지적했다.
▲ 동북아역사재단 정재 정鄭在貞 이사장1)은 서 울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했고, 일본 도쿄대학 에서 석사, 서울대에서 박 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 립대학교 국사과 교수로 서 인문대학장과 교육대 학원장, 한일관계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
또한 정재정 교수는 “통신사는 문자 그대로 대등한 처지에서 신의信義를 주고받는 사절이었다. 그렇지만 내심으로 에도 막부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화이질서華夷秩序 속에서 조선을 바라보았고, 조선도 중화문화의 계승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일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즉 양국의 외교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제9차의 조선통신사 일행 475명이 숙종肅宗(1674~1720) 말기인 1719년 4월, 서울을 떠나 일본에 갔던 내용을 일본 측 사료 내용이다.
통신사가 지나는 길은 대략 세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제1구간은 한성에서 부산까지의 육로이며, 제2구간은 부산에서 오사카와 교토까지의 뱃길, 제3구간은 교토에서 에도까지의 육로이다. 통신사 일행은 출발에 즈음하여 한성의 창덕궁에서 국왕을 배알한다. 육로를 거쳐 부산에서 재집결하여 도쿠가와 쇼군 등에게 줄 선물을 비롯해 다양한 진물품進物品을 3척의 배에 나누어 싣는다. 거기서 길일을 골라 바다의 신에게 항해의 안전을 비는 의식을 거행한다.
통신사 일행 475명이 서울을 떠났다. 일행 중에는 각종 문서의 기초를 담당하는 제술관製述官, 기記, 사자관寫字官, 의원醫員, 화원畵員 등 제1급의 인물들이었다.1) 朝鮮시대에 외교 담당 정부 기관인 承文院에는 등을 담당하는 관직에 製述官이 있었고,
承文院書庫인 奎章閣에 寫字官의 관직이 있었다.
6월에 부산을 떠나 대마도[쓰시마]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쓰시마 번주 등 주종主從 8백여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이 선도역을 도맡았다. 일행은 정박하는 곳마다 각 지역 다이묘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세도내해[瀨戶內海]를 지나서 9월 초순에는 오사카에 이르렀다. 여기서 통신사선 6척은 정박하고, 강을 다니는 배편으로 요도강(川)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곳으로부터 에도를 향해 일로 육지의 여행을 택했다. 교토로부터 에도까지는 15일간이 걸렸다. 도중에 모리야마(守)로부터 히코네(根)를 거쳐서 도리이모토(鳥居本)까지 이르는 길은 ‘조선인가도’(鮮人街)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으며, 이 가도는 장군이 상경하고 통신사만이 지나다니는 데 이용하는 특별한 길이 되었다.
통신사에 대한 일본 측의 경비 총액은 100만 냥, 동원된 인원은 33만명, 말은 7만 7600마리였다고 한다. 막부가 이와 같이 조선통신사들에게 대해 성대한 응접을 한 배경에는 장군의 권위의 고양 과시와 조선을 통해서 동아시아 국제사회와 손잡자는 의도가 있었으며, 또한 훌륭한 문화의 도입을 바랐던 것도 간과할 수 없다.
한국서 배운 주자학朱子學과 한국식 서당 데라코야[子屋]
대규모의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은 양국의 외교적 친선이 이루어지는데 한국의 학문과 사상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에도 막부의 정치에 있어서 유학儒學 사상이 정치철학으로 자리 잡게 된 일이다. 특히 주자학자의 정치적 참여는 괄목할 만하다. 한편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약탈해간 주자학의 많은 서적들은 조선통신사들의 일본 내왕과 함께 일본의 유학사상과 학문을 발전시키는 큰 바탕이 되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일본 학자들은 조선통신사로서 건너간 조선의 유학자들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을 본격적으로 배우며 새로운 학문적 내용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하야시 라잔[林羅山](1583~1657)이다. 총명한 하야시 라잔은 한국의 유학을 열심히 배워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군으로부터 인정받는 젊은 유학자로서의 길까지 텄다. 그는 도쿠가와 가문에서 유학을 강설하게 되었고 문서의 정리며 의식儀式과 전례典禮의 조사 등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하야시 라잔은 한국으로부터의 주자학의 수용과 보급에 크게 힘썼던 것이다.
하야시 라잔은 장군을 보필하면서 막부정치의 정비에 크게 공헌했거니와, 문치 정치 중에서도 나라를 다스리며 예절을 중시하는 사상으로서의 주자학을 막부에다 공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때문에 지방의 번藩[다이묘[大名]의 領地)에서 등용하는 유학자들도 주자학자가 주축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막부에 등용된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1621~1698)이며, 그의 문하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 무로규소[室鳩巢](1658~1734) 등의 주자학자를 배출시키게 되었다.
한편 나카에 도쥬[中江藤樹](1608~1648), 구마자와 반산[熊澤蕃山](1619~1691) 등 양명학陽明學을 중시하는 학자도 나타났다. 이들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올바른 행위는 실천에 의해서만 확인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양명학의 정신을 존중했다.
야마카소코[山鹿素行](1622~1685)와 이토 진사이[伊藤仁齊](1627~1705), 이토 도가이[伊藤東涯](1670~1738) 부자 등은 공자, 맹자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인간적인 도덕을 찾아내는 데 힘썼다. 이토 진사이는 관직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힘쓰면서 ‘고기도’[古義堂]라는 사숙私塾을 1662년에 자택(京都 堀川)에다 개설했다. 이 사숙에는 전국에서 3천의 문하생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장남인 도가이도 아버지를 뒤이어 이 ‘고기도’를 이어나갔다.
‘데라코야’[寺子屋]라고 하는 한국식의 서당도 에도[江戶](1603~1867) 시대 중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곳은 일종의 아동 교육의 터전으로, 정인町人 등 도시민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농민의 자녀들에게도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새로운 아동학습의 장이 되었다. 이곳은 주로 사찰의 승려며 신사의 신관神官을 스승삼아 대개 10여 명의 아이들이 방안에 모여들어 공부했다. 이와 같은 것은 조선통신사들에 의해서 한국 서당의 아동교육이 일본에 처음 등장한 것이며, 한국의 초등교육 방식의 영향을 크게 준 것이다. ‘데라코야’에서는 스님과 신관들에 의해서만 아이들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일본은 한국과 달리 각
고장이며 마을의 지식층 지도자는 스님이나 신관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와 달리 일본의 권력층은 붓을 쥔 선비인 문사文士가 아니고, 칼을 쥔 무사武士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글은 지식 있는 종교인들이 도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종교적 배경은 불교와 신도神道가 함께 일심동체로서 공존했다. 즉 ‘신불습합神佛習合’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양자는 사이좋게 조화를 이루어나갔다.
고대 한국으로부터 왜나라에 신을 섬기는 신도神道가 먼저 건너갔고, 서기 538년에는 최초로 백제로부터 불교가 건너가기 시작해서 이 두 종교는 신라와 백제의 지원 속에 어느 사이엔가 사회적으로 친화親和되는 가운데 신이나 부처님은 한 몸이라고 일컫는 이른바 ‘신불습합’ 신앙을 일구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훨씬 뒷날인 1868년의 메이지유신과 함께 터무니없게도 불교는 갑작스런 탄압을 받게 되고 ‘신불습합’은 깨지고 말게 된다.
1607년부터 조선통신사들이 계속해서 한국의 각종 학술문화를 일본에 전해준 것이 1811년 제11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1787~1837재위) 장군 때까지 204년간 12번이었다.1)《江戶時代 の貿易と對外關係》(沼田次郞, 1964)
조선통신사의 일본 내왕이 시작되는 가운데 한일 양국어에 관한 어학
연구도 한국과 일본에서 각기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다. 단국대학교 편무
진 교수2)편무진:단국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는 이 당시부터 일본에서 저술된 한국어 학습서 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일본에는 근세近世에서부터 메이지시대에 걸쳐 일본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어 학습서류學習書類가 존재하는데 그러한 것들에는 대부분이 한국어와 일본어의 때역對譯이 되어 있다. 한국어 학습서로는 주로 사쓰마 나와시로가와[蕯摩苗代川] 전래傳來의 필사본筆寫本으로 교토대학[京都大學]과 심수관가沈壽官家에 소장되어 있는 책으로 《교린수지交隣須知》(19C 초 필사본), 《인어대방隣語大方》(1859년 필사본), 《표민대화漂民對話》(1845년 필사본), 《한어훈몽韓語訓蒙》(1834년 필사본), 《대화비밀수감對話秘密手鑑》(1845년 필사본) 등이 있다.
한국에서 간행된 일본어 교과서와 학습서로는 주로 사역원司譯院의 왜학서倭學書에는 《이로파伊路波》(1492), 《첩해신어捷解新語》(1676),《인어대방隣語大方》(1790), 《조선간본朝鮮刊本》( 1790) 등이 있다.1)《日本語 史的資料로서의 ‘朝鮮資料’ 와 ‘韓國資料’》(片茂鎭, 1997)
17C말경부터 난학으로부터 시작해서 양학으로 발전하던 시기 이전부터 이미 에도와 교토 및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국학韓國學이 에도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교린수지》 등과 같은 한국어 학습서적들이 다양하게 간행된 것으로도 추찰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후 오늘날까지 《교린수지》 등에 대한 깊은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점이다.
그 점을 사이토 아케미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교린수지》는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시대에 걸쳐 일본인에게 가장 널리 사용된 학습서이다. 이 책은 메이지 14년(서기 1881년)에 인쇄본이 나오기 전까지 200년 가까이 필사본인 채로 전해져 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언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그 가치가 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체계적인 연구가 많이 행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2)《交隣須知 硏究の意義》( 齊藤明美, 1998)
《교린수지》의 저자로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설이 지배적이나 이설異說도 있다. 아메노모리는 주자학자이고 한국어에 능통했으며, 쓰시마 번[對馬島藩]에서 근무하며 한국을 내왕했다고 한다.
서기 1811년에 막부에서는 외국어 번역을 맡는 기관으로서 ‘만서화해어용괘’蠻書和解御用掛를 설치했다. 이 시기에 지리학자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1745∼1818)는 전국 각지를 측량해서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與地全圖(1800~ 1817년까지 제작)를 만들게 되었다.
이 무렵 나가사키[長崎]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의 의사 시볼트(Siebold, 1796∼1866)는 나루타키숙[鳴瀧塾]이라는 학숙을 만들고, 의학과 천문, 지리, 물리, 화학, 생물 등을 가르쳤다. 그 문하에서 의사인 다카노 쵸에이[高野長英](1804~1850) 등 인재가 배출되었다. 다카노 쵸에이는 1839년에 ‘반샤노고쿠’[蠻社ノ獄] 사건으로 와타나베 가산[渡邊華山](1793~1841)과 함께 투옥 당한다. 그 이유는 1837년에 미국 상선 모리슨호가 우라가[浦賀] 항에 들어왔다가 격퇴 당한 사건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신기론》[愼機論], 다카노는 《보쥬쓰 꿈이야기》[戊戌夢物語]를 지어 막부의 처사에 부당론을 폈던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서양의학의 기초를 닦은 난학자며 의사인 오가타 고안[緖方洪庵](1810~1863)의 문하생들 중에서 막말幕末 때 정객인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內](1834~1859)며, 병학자(兵學者)이며 정객인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1824~1869), 계몽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 등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