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서원(忠烈書院)>
충렬서원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118 에 있는 고려 말기의 충신이자 동방성리학 조종으로 추송된 포은(圃隱) <?xml:namespace prefix = st2 ns = "urn:schemas:contacts" /><?xml:namespace prefix = st2 />정몽주(鄭夢周)1337~1392)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 이계(李棨), 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와 조광조(趙光祖)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이 서원을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지역인 지금의 죽전동에 세워 서원 이름도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 했었다. 임진왜란 때 서원 건물이 회진(灰塵)되어 선조 38년(1605)에 경기도 관찰사로 있던 이정구(李廷龜)가 현감 정종선(鄭從善) 이시윤(李時尹)등과 함께 논의하여 정몽주의 묘소아래 증건 하였다.
3년여 공사 끝에 사우 3칸, 동 서재 각2칸, 문루 3칸을 지었다. 문루 위층은 강당이며 아래는 문주방(門廚房)과 고사(庫舍)등을 갖추었다. 1609년(광해군1)에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사액)하였다. 이때 조광조 위패는 심곡서원으로 옮겨 배향하였다. 중창과 함께 충렬(忠烈)이라 1609년(광해군1)에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사액)하였다. 정몽주 선생의 손자인 설곡 정보(雪谷 鄭保)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죽창 이시직(竹窓 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숙종 32년 (1706)에 다시 후손 정제두(鄭齊斗), 정찬조(鄭纘祖)를 비롯한 여러 유림의 공의로 옛터 서쪽 가까운 곳에 이건 하였다. 그 후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1년 에 유림에서 사우를 중건하였고 1924년 복원되었다. 1956년 에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6간의 사우(祠宇), 내신문, 외신문, 동서협문)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8칸의 강당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워 신성시 하였다. 1997년 유림의 결의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3학사의 한 분으로 추숭되고 있는 추담 오달제(秋潭 吳達濟)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충렬서원은 일정한 중심 측이 없어 외 삼문에 들어서면 강당과 사당이 동시에 보인다. 한때 용인의 대학자 도암 이재(陶庵 李縡)선생이 여러 유림과 학문을 교류화던 곳이기도 하나 그 후 교육공간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매년 음력 3월과 음력 9월에 중정(中丁)에 향 사를 지내고 있으며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
마을 뒤쪽의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 후 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는 홍살문과 내삼문, 외삼문, 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재실이나 장경각, 교직사 등 부속건물이 없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에 서원이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 중심의 시설로 바뀌어 갔음을 보여 준다. 강당도 교육공간보다는 제 향 때 모임 장소로 쓰였다. 유물로 [유한집]과 [단심가] 등을 서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강당과 서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푸른 차일이 쳐진 잔디마당에 신발까지 갖추어 입으신 어른들이 옆으로 나란히 서고 그 뒤로 종친들이 가득 서서 식이 거행되는데 원장님이 앞에 나와서 호명하며 소개하고 사람이 많은 관계로 제복을 입은 분들이 먼저 사당으로 올라가 제를 지내고 그 다음에 다시 올라 가는 등 진지한 제가 시작된다.
마침 근처에 있는 모 초등학교 현장학습으로 어린이들도 교사들과 함께 자리를 가득 메웠다.
복사된 영정그림을 모셔 둔 발한 채 문이 열리더니 보인다, 내가 그린 작품보다 작은 듯 하나 안정된 크기로 보인다. 족자가 아니고 유리를 낀 표구로 해 두어 먼지방지를 해놓아 좋아 보인다.
그런데 돼지머리가 4개가 놓이고 촛불이 켜진 제상이 포은정몽주 선조님, 손자 설곡 정보, 죽창 이시직, 추담 오달재 제상 이렇게 4개의 제상이다. 제기들은 모두 놋그릇이고 주를 담는 그릇도 놋그릇이라 중후하다.
제를 지내는 그릇도 놋그릇으로 돼 있고 차례대로 제를 올리고 단체로 절하기를 1시간이나 흐른 뒤 마지막으로 소지를 태우니 제를 지낼 때 간간히 불던 바람이 와락 달려 들고 해는 서서히 구름 속으로 들어가더니 빗방울이 몇 낱 떨어진다. 다행이다 제를 지낼 떼 비가 내리지 않음이
“서원 밖에 관리 집에 들러 점심을 드시고 가세요”
일단 추위를 피할 겸 관리 집 안으로 들어가 대청에 앉으니 궁둥이가 차고 사람들은 가득하다 단체로 떠 놓아서 그런지 국도 미지근히 다 식고 떡도 약간 굳었으나 시장기를 대충 견디고 일어선다.
“N님이 하나 가지시고 하나는 종손님께 전해 드리세요. 저는 먼저 가야겠습니다”
가져간 자료를 마저 나누어 주고 헤어져 차를 타고 오리 역에 내리니 이게 웬일인가 아침하고 달리 비가 얼마나 많이 쏟아지고 바람이 사람을 날려 버릴 듯 세게 부는지 쓰고 있는 우산을 홀랑 뒤집어 놓고 모자를 벗겨서 바닥에 패대기 친다. 얼른 주어 쓰니 이번엔 아예 우산을 부러 뜨려 놓는다.
‘어쩌지 옷 다 젖겠네’ 망가진 우산을 버리지도 못하고 그냥 접어서 들고 뛰어 역 안으로 들어선다. 옷은 젖고 신발은 흙이 묻은 채 의자에 앉았다가 섰다가 몇 번을 갈아타고 화실 앞에 내리니 여전히 비는 멈추지 않고 내려 힘듦도 함께 내린다. 화실에 들어서니 나를 기다리는 그림들이 벌떡 일어선다.
2010, 4,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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