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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선 히말라야 스크랩 오은선 라이프 스토리
한베러브 추천 0 조회 359 10.09.04 13: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은선 라이프 스토리

 

"무서울 땐 무서움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남을지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산을 좋아했던 타고난 산악인.......... 냉철함과 동시에 눈물 많아

 

 

오은선(吳銀善·44)은 1966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1남2녀 중 맏딸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강원도에서 살았으며 이후 서울 면목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래서 자란 고향은 서울이다.


유년기의 교육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 그녀는 어릴 적부터 산과 인연이 있었다.

강원도 산자락의 관사에 살았는데 온 산과 계곡이 그녀의 놀이터였다.

지금도 그녀는 “눈 쌓인 구불구불한 임도를 걸으며 무척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며

                                                         “산은 내 동심의 고향”이라고 얘기한다.


 

          



그녀의 아버지 오수만(69)씨는 가정의 단란함을 중요시 여기는 분이었고

                                           어머니 최순내(64) 여사는 전형적인 가정주부였다고 한다.

늘 휴가 때마다 산으로 바다로 들로 온 가족이 여행을 갔으며

                                   그 중에서 산에 놀러갈 때가 제일 좋았고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어릴 때는 아이에게 자연을 많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줘야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정신이 건강해진다고 생각해요.

 비록 제가 가정을 꾸려보진 않았지만 부모는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고 봐요.

 요즘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많은데

                                            한정된 모니터 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는 게 참 안타까워요.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릴 적 생활기록부에는 ‘명랑하고 사교성이 좋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디에 있든 즐거우려고 노력한다”는 게 그 비결이다.

오은선은 유년 시절에 대해 “즐거웠다”고 얘기한다.

특히 휘경여중에 다니던 때의 추억이 많다고 회상한다.

교정이 아름다워 친구들과의 추억이 많다는 것이다.


중학생 때 휘경여고 축제에서 등산반 장비전시회를 보고

            그녀는 ‘고등학교만 가면 등산반에 들 테다’ 하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학한 송곡여고에는 등산반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그녀는 참 산을 좋아했다.

아버지와 갔던 도봉산도 좋았고 바위에서 암벽등반하는 사람들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한 것도 그랬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산에 끌리고 있었다.

마치 14좌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 같은 것이었을까.


 154cm, 47kg의 작은 몸집이지만 오은선은 어릴적부터 체력과 순발력이 남달랐다.

 오은선의 어머니는

“은선이는 시골 담벼락을 넘어 다닐 정도로 활달했고, 예방접종 빼고는 병원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고기보다 나물을 좋아하는 딸이 산을 타다 힘이 떨어질까봐 지난 1년 내내 홍삼과 곰국을 달였다.


 수원대 전산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1학년 2학기에 대학산악부에 들어간다.

 산악부에 가입하는 건 중학교 때부터 늘 생각해오던 것이었기에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암벽등반은 무서웠다.

 그녀가 “암벽은 무서워서 못한다”고 하자

                선배들은 걷는 산행만 해도 된다고 하여 산악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산악부에서 자주 간 곳은 인수봉이었고 가면 오은선은 늘 밑에서 혼자 남아 짐을 지켜야 했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지겨웠고 “대체 뭔데 저리 미쳐 있나” 싶어 도전하게 되었다.


오씨는 지금도 인수봉에 처음 올라갔을 때를, 소위 바위꾼들이 상투 틀었다고 말하는 그때를 아직 기억한다.

날아갈 듯 기뻐 팔짝팔짝 뛰었다.

그러자 선배가 “첫 바위에서 너처럼 기뻐하는 애는 처음 본다”고 하며 놀랐다.

이때부터 ‘날다람쥐’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보통 인수봉에 처음 올라서면 진이 빠져서 지쳐 있기 마련이다.

이후 그녀의 대학생활은 산악부와 암벽등반에 푹 빠져 있었다.


“인수봉 산천지길 크럭스 구간을 선등했던 게 지금도 자랑스러워요.

                             그때가 아마 대학교 3~4학년쯤이었을 거예요.”


 

          


                                          (左) 대학 2학년 때 인수봉 귀바위 밑에서 후등자를 확보 중인 오은선.

                         (右) 수원대산악부원 시절, 빙벽등반을 위해 아이젠을 들고 선 앳된 모습의 오은선.


 

첫사랑이었던 ROTC 선배


뭔가 하나를 이루기 위해선 푹 빠져야 한다고, 거기에 미쳐야 한다고 흔히 얘기한다.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따낸 그녀 역시 산 밖의 것들은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20대면 이성에 가장 관심을 가질 나이였지만 그 흔한 연애 한 번 해보질 못했다.


“이성에 관심은 있었죠. 근데 산악부 남자들한테는 관심이 없었어요.

 학교에 짝사랑 하던 ROTC 선배가 있었는데, 그렇게 끝났죠. 그게 첫사랑이었어요.”  


 졸업 후 오은선은 서울과학교육원 전산직(8급) 공무원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안정된 삶을 버리게 만든 건 에베레스트 원정이었다.

 1993년 에베레스트여성원정대 모집공고를 보고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이에 대해 그녀는

“물론 당시에는 14좌는 꿈도 못 꿨다”며 “히말라야 자체가 꿈이었다”고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를 설명했다.

 대원 선발에 발탁된 오은선은 1년 동안

   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 4개 산을 잇는 종주산행과 겨울 설악산과 한라산에서 장기훈련을 했다.


“그때는 젊었기에 공무원 그만두고 나서도 뭘 하더라도 먹고살 자신이 있었어요.

 엄마한테는 그만뒀다는 얘기 안 하고 갔어요.

 물론 다녀오고 나서 엄마가 알게 되셨고 장비 다 버리고 한바탕 떠들썩했죠.”


 첫 원정이었던 에베레스트에서 비록 등정은 하지 못했으나 3캠프(7,300m)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때만 해도 체력이 뒤처져 정상공격조에서는 제외됐고

                                                       선배 3명(지현옥, 김순주, 최오순)이 등정의 영광을 안았다.

“힐러리 스텝까지 갈 체력이 있었지만 대장이 내려오라고 명령해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고 한다. 


“당시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애초에 정상은 꿈도 꾸지 않았고 만년설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또 이번에 못 가면 내 생에 다시는 에베레스트에 갈 기회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장기휴가를 내고 가려 했는데 그만두기 전에는 안 된다고 해서 그만두고 갔어요.”


처음으로 8,000m 거봉 정상에 오른 건 박영석의 원정대를 따라 나섰던 가셔브룸2봉이었다.


“등반 도중에 영석이 형이 힘든 사람 있냐고 묻길래

 그만 내려가라 할 줄 알고 번쩍 손을 들었더니 웬걸, 너 맨 앞으로 나와 하는 거예요.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가셔브룸 등정을 통해 고산등반을 배운 그녀는 한동안 박영석 대장과 함께 등반을 한다.

 1999년 브로드피크와 마칼루, 2001년 K2로 이어지는 박 대장의 14좌 원정에 홍일점으로 동행했다.

 그러나 이 세 등반에서 한 사람씩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고 오은선은 등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목격한 최초의 죽음은 1999년 파키스탄 브로드피크(8,047m) 등반 때였다.

 연세대 재학생이었던 허승관 대원이 밤사이 실종됐는데 결국 그가 입었던 빨간 재킷만 발견됐다.

 오은선은 “참으로 천사 같은 성품의 후배였는데 주인 없는 재킷을 보면서 너무 슬펐다”고 말했다.

 그 해의 마칼루 등반에선 셰르파가 죽는 사고를 목격하며 고산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된다.

 

 

          

 

                                                                                 (左) 시샤팡마를 함께 오른 두 셰르파와.

                                                              (右) 인터뷰를 위해 본사를 방문했던 오은선과 고미영.

                                                                                                            <사진 허재성 기자>

 

 

 

징크스는 방을 어질러 놓는 것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오은선(가운데).

 

 

원정등반과 관련한 징크스는 방을 정돈하지 않고 어질러 놓는 것이다.

등정계획이 세워지면 산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를 섭렵하는데

                집을 나서면서 방 가득히 어질러 놓은 상태에서 현지로 떠난다고 한다.

오은선은 “깨끗하게 정돈하면 마치 세상과 하직하는 느낌이 들고,

                        어질러 놓아야 무사히 돌아와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0년대 후반, 히말라야에 대한 꿈만 가진 그에게 후원사는 없었다.

산악부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다른 원정대의 대원으로 쫓아가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러나 오은선은 원정등반을 경험할수록 내 힘으로 혼자 가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다른 원정대의 일원으로 가는 건 남한테 의지해서 가는 등반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 의해 등반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내 힘으로 내 돈 벌어서 혼자 가보자고 생각했어요.”


 원정비용을 벌기 위해 학습지 교사를 4년간 했고 스파게티가게를 1년간 운영했다.

 수학과 영어를 주로 가르쳤는데 시원시원한 성격 때문에

                                   학부모들로부터 인기가 많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1999년 다시 원정을 가게 되었고

    회사에서 장기간의 휴가를 허락해주지 않아 결국 학습지 교사 일도 그만두었다.


 1997년 가셔브룸2봉 이후 2001년까지 계속 등정하지 못하자

                               히말라야 고산등반에서 7대륙 최고봉 도전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

 7대륙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를 제외하면 혼자서도 등정할 수 있는 5,000~6,000m급 봉우리들이다.

 2002년 유럽 엘브루즈, 2003년 남미 아콩가구아와 북미 매킨리, 2004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호주 코지오스코, 남극 빈슨매시프, 아시아 에베레스트를 차례로 등정하며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다.


 이 중에서도 에베레스트 등정은 14좌를 성공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

 사실상 대구 계명대 팀과의 합동등반이나 다름없었던 이 등반에서 계명대 팀 박무택 대원이

                 하산 중 실종되는 사고가 났고, 등반 도중 오은선은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본다.

 거기에서 겪었던 극심한 슬픔과 공포, 그리고 등정 후 하산길에 산소가 떨어져

  최종 캠프에 다다르기 직전 온몸의 기운이 쇠진해 쓰러졌던 극한 체험은 이후 등반에서 큰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7대륙 최고봉 등정은 14좌를 할 수 있었던 훈련과정이 되었고

                              이를 통해 오은선은 ‘날다람쥐’에서 지금의 ‘철녀(鐵女)’로 다시 태어났다.


 7대륙 최고봉을 할 때에도 그녀는 일을 하고 있었다.

 2002년 등산장비업체인 포리스트시스템에 입사했으며 다시 영원무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에는 일하다가 원하는 원정을 나갈 경우

    시간과 장비 지원을 해준다는 괜찮은 조건이었기에 ‘세븐 서밋’을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었다.



 14좌의 가장 큰 장애물 K2를 넘기 위한 노력


 

          


                   후원사인 블랙야크 옷을 입고 선 오은선.

 

 

 오은선의 유일한 취미는 스키다.

 7대륙 최고봉을 끝내고 후련한 맘으로 스키를 즐기던 그녀는

             2005년 2월 오른쪽 다리 정강이가 복합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1년여 산을 쉰다.

 그동안 8,000m 14좌 등반계획을 세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등반이 힘들어 ‘죽음의 산’이라고도 불리는 K2 등정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2001년 K2 원정을 경험했고 동료의 죽음을 보았기에 얼마나 등반이 어려운 봉우리인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첫 단계로 2006년 8월 말 시샤팡마·초오유 원정을 추진했다.

“나 혼자서 등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해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지

                         스스로 체크해 본다는 의미를 둔 그런 원정이었다”고 한다.


“원정 비용을 마련하느라 준비하는데 굿모닝신한증권에서 3000만 원에 TV 광고모델 제의가 들어왔어요.

 무조건 오케이했는데, 당시 다니던 회사(영원무역)에서 등반경비로 3000만 원을 지원해줬어요.

          그래서 처음엔 시샤팡마만 계획했다가 바로 옆에 있는 초오유도 해버리자 그렇게 계획을 바꿨죠.”


오은선은 혼자 셰르파 2명만 고용해서 나선 이 원정에서 시샤팡마만 오르고 초오유는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 아닌 실패였다”고 설명한다.


“속공 체질을 키워보려고 캠프 수를 줄였죠. 먼저 시샤팡마부터 캠프를 2개만 설치하고 등정했어요.

 힘들었지만 할 만했어요.

 그래서 초오유도 3캠프는 생략해버리고 2캠프에서 곧바로 등정 시도를 해봤어요.

 2캠프에서 3캠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개 3~4시간이니 그만큼 빨라야겠죠.

 그런데 오전 11시쯤 록밴드에 도착했을 때 체력이 떨어지면서 머리가 너무 시려워왔어요.

 고산에서 뇌세포가 죽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강풍이 불고, 날씨도 너무 나빴어요.

 안 되겠다 싶어 되돌아섰지요.”


 그 해 겨울 대학산악연맹 후배들과 추진한 동계 아마다블람 등정은

     혹한 등반능력을 키우는 훈련이었으며 K2 원정을 함께할 동료를 물색한다는 취지의 원정이었다.

 아마다블람 등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오은선은 후배 김선애(33)와 단둘이 단돈 1500만 원만 쥐고 초오유 재시도에 나섰다.

 셰르파도, 산소도, 쿡도 없는 베이스캠프 이후는 오로지 단 두 사람만이 움직이는 초경량 원정대였다.

 코펠 한 조, 압력밥솥 작은 것 하나, 휴대용 버너 한 조, 부탄가스 20개가 베이스캠프 취사구의 모두였다.

 2캠프에서 바로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계획을 바꿔 3캠프를 구축해 등정에 성공한다.


오은선은 결국 2007년 7월 K2 등정길에 올라 등반 개시 18일 만에 정상을 밟았다.

의사 한 명을 포함해 대원은 6명이었지만 오은선 자신 이외에 고소 경험자는 초오유 3캠프까지

      가본 것이 고산 경험의 전부인 김선애뿐이어서 실제 등반은 셰르파 2명과 진척시켜야 했다.

1, 2캠프만 고정텐트를 설치해두고 4캠프는

                                     3캠프에 썼던 텐트를 옮겨 설치하는, 초오유에서 유용했던 방식을 썼다.

 이렇듯 오은선은 어떤 룰을 답습하고 따르기보다 몸으로 부딪혀서 자신에게 맞는 것들을 찾아내고

                                   혼자서 셰르파들을 지휘해 오르는 특유의 단독등반 방식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K2는 역시 위험한 곳이었다.

 오은선은 바로 앞에서 가던 다른 팀 셰르파가 낙석을 피하려다 추락사한 것을 목도했다.

“추락해서 떨어지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며 “너무 무서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부산팀 대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겨우 용기를 내서 다시 올라갔다”고 오은선은 회상했다.


 K2 등정 이후 오은선은 옆의 브로드피크로 바로 이동,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오은선은 “이 등반 이후 비로소 14좌 완등을 결심했다”면서 “10개 정도 한 다음 정식으로 밝히려 했는데,

                                                         경비문제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라고 앞당긴 이유를 밝혔다.

 당시 오은선은

“지금까지는 아마추어였지만 이제는 프로라고 선언하려 한다”며 K2 등정으로 얻은 자신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무리하지는 않겠지만 서두르고는 싶다”며 

                         40대라는 나이 때문에 힘이 떨어지기 전에 목표를 이루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K2 원정을 떠나기 직전 영원무역을 그만두었고

                                     이후 블랙야크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14좌 등정 행보에 나선다.

다음해인 2008년 한 해에 마칼루, 로체, 브로드피크, 마나슬루까지 무려 4개의 거봉에 오른다.

시행착오를 통해 익힌 자신만의 속공등반이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러나 말처럼 쉽진 않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2008년 마칼루 정상에 선 오은선.

 

“가장 힘들었던 봉이오? 마칼루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등정하고 4캠프로 내려와 주저앉았는데, 100m도 안 되는 저만치에 있는 내 텐트까지 도저히 못 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주위에 보이는 남의 팀 셰르파한테 내 배낭 옮겨주면 100달러 준다고 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마나슬루는 너무 쉬웠어요. 새벽 1시에 2캠프를 출발해서 정오 전에 등정했는데,

                                                 너무 빠르다고 정말 올랐느냐는 의심까지 받았어요.

                                                                           등정 사진 찍어왔기에 망정이지..............”


오은선은 혼자서 셰르파들만 고용해 등반해왔다.

그는 자신의 속공등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원은 나 혼자인 게 등반하기에 더 좋아요.

 내가 하루 더 쉬고 싶으면 그냥 쉬면 되니까요.

 셰르파들은 철저하게 고용주인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고요.

 하지만 동료가 없는 만큼 끊임없이 나 자신을 내 스스로가 체크해야 해요.

 내가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몸 상태는 괜찮은지 끝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실수가 없어요.”


 오은선은 14좌를 등반하는 동안 손가락 동상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강인한 체력과 고소체질 외에도

                  그만큼 자기 제어가 철저하고 판단력이 빠르며 계획이 투철했다는 걸 의미한다.

 살이 찔까봐 술자리도 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산악인들을 만나면 거의 술을 마시는 자리가 되는데

     안 먹고 거절하면 보는 사람도 재미없고 그렇다 보니 술자리도 점점 안 가게 됐다고 한다.

 이쯤 되면 철녀라는 별명보다 ‘강철여우’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겠다.


 2009년에도 오은선은 2008년에 그랬던 것처럼 특유의 속공등반으로

                                                     캉첸중가, 다울라기리, 낭가파르밧, 가셔브룸1을 등정한다.

 이 과정에서 고 고미영과 등정 레이스를 펼쳤으나 안타깝게도 낭가파르밧에서 고씨가 추락사한다.

 고미영은 스포츠클라이머 출신이었고 오은선은 대학산악부 출신이었기에 성장 배경이 달랐다.

 오은선은 고미영의 죽음에 대해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다”며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올해 5월 14좌의 마지막 종착지인 안나푸르나에 올랐다.

2009년 연초, 고 고미영과 오은선은 안나푸르나를 함께 등반하기로 약속했다.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오씨는 “차마 혼자 가기 뭐해서 고미영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올랐다”고 고백했다.

귀국 후 인터뷰에서 그녀는 “

원래 사진을 정상에 묻고 오려고 했는데, 막상 오르고 보니 너무 추운 데에 두는 것 같아 다시 품고 내려왔다”며

                                                                                고씨가 “따뜻했으면 좋겠다”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오은선은

“내 돈 벌어 내 원정 가겠다”는 식의 냉철하고 단호한 면과

                       사소한 일에도 눈물 흘리는 상반된 면을 다 가지고 있다.

“TV를 보다가도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면 펑펑 운다”며 본인이 생각해도 “감정이 풍부한 것 같다”고 얘기한다.

 한편에서는 “눈물로 얘기하냐”는 비아냥 섞인 비판을 듣기도 했단다.

 그러나 등반할 때는 감상적인 것들을 철저히 배제한다.

“1980년대 포크송 같은 서정적인 음악을 좋아한다”는 그이지만

                    베이스캠프에서는 시간이 남아도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가 있다.

 마음이 흔들릴 까봐 그렇다고 한다.


 2008년 브로드피크 등반 당시는

“외국 산악인들 사이에 동양 여자 혼자 끼어 굉장히 힘들었다”며

                   당시에는 언덕을 넘어가 혼자 울고 노래를 부르며 힘든 맘을 달랬다고 한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주로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함께하며 얘길 나누는 게 주된 일과였단다.  

 

 

 

 

                                                       

 

                                                                   본사를 방문한 오은선이 빗속에서 환하게 웃는다.

 

 

“외로우면 외로운 거다”


외국 여성 산악인에 비하면 오은선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14좌를 해냈다.

이에 대해 그녀는 “파사반과 칼텐브루너가 있어 가능했다”고 한다.

시작부터 등정 봉우리의 개수가 차이가 커서 줄여보겠다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가능했다고 한다.

또 “8,000m는 알 수 없다”며 “열심히 노력하면 2~3번째는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8,000m는 1분 1초를 다투는 곳이에요.

 비록 몸은 천천히 움직이지만 정신은 빠르고 예민해야 해요.

 저는 단독등반이라 결정 단계가 나 하나만 결정하면 되니까 빠른 등반이 가능했어요.

                   속공등반 스타일도 계속 등반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어 만들어진 거예요.” 


 철녀라 불리는 타고난 체력도 한몫한다.

 체육과학연구원은 지난해 9월 오씨의 신체능력을 측정했다.

 가셔브룸1봉을 등정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피로 회복이 제대로 안 된 상태였는데도, 고산등반에 뛰어난 신체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연구원 측은 전했다.


 오은선은 심폐 기능이 탁월하다.

 최대 산소섭취량은 단위 시간 내 얼마나 많은 산소를 섭취할 수 있느냐를 나타내는 수치로,

                                             오랜 시간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심폐지구력과 직결된다.

 오 대장은 이 최대 산소섭취량에서 63.8을 기록했다.

 일반적인 고산등반자의 평균치(남자 57.9, 여자 55.2)보다 크게 앞섰다.

 정상급 남자 철인3종 선수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히말라야 14좌 중 12개 봉우리를 무산소 등정으로 오른 비결도

                                                   이런 산소섭취능력에 있다는 게 체육과학연구원의 설명이다.

 오 대장은 에베레스트(8,848m)와 K2(8,611m)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산소 등정으로 정상에 올랐다.

“대자연 그대로를 느끼고 싶어 무산소 등정을 고집한다”는 그의 생각도 이런 신체능력이 뒷받침돼 가능했다.

 오은선 스스로는 “작은 키가 장점”이라 말한다.

                           작은 키에 비해 허벅지가 두꺼워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게 수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부분도 14좌 성공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요소다.

 오씨는 보통 산악인들에 비해 원정에서 경제적인 부족함을 겪은 적이 별로 없다.

 7대륙 할 때는 자비로 가거나 회사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금을 받았고

                           이후부터는 영원이나 블랙야크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

 그래서 “스폰서를 구하려고 발을 동동 구른 적이 없었다”며 스스로도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오은선의 나이 44세.

 혼기를 지났다는 흔한 말보다 산과 결혼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제 은선이가 올바른 사람 만나서 가정을 일구고 사는 걸 보면 원이 없겠다”고 말한다.

 그동안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닌데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었다”며

                 하지만 14좌를 끝낸 지금은 “언제든지 맞는 사람만 있다면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한다.

 한편으론 “자신의 말투가 단정적이고 목소리가 커서 남자들이 부담스럽게 여기는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분석해보기도 한다.

 한때 그녀의 마음속 이상형은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였다.


“그의 환경 때문에 연민의 정이 들었어요.

 사회주의 속에서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등반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가 자유롭게 혼자 원정등반을 한다는 게 어려웠어요.

 그런 상황이 통하는 면이 있어서 그를 따라하고 싶은 맘이 있었어요.

 쿠쿠츠카는 산에서 너무 추우면 옷을 다 벗었다가

                                다시 하나씩 입으면 따뜻하댔는데 전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


 어릴 적부터 장녀로서의 책임감이 많았고 연애 한 번 하지 못한 솔로였기에

                   외로우면 벗어나려 발버둥치기보다 “외로우면 외로운 거다”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단다.

 단독등반에 익숙해진 그녀였기에 KBS를 통해

                                      등정 생방송을 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 굉장히 부담스러웠다고 회고한다.

“회사에는 미안하지만 혼자 움직이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대규모 인원과 장비가 몰려와 등반을 함께하는 게 부담이었다고 한다.


 오은선은 8,000m 신들의 봉우리라 할 수 있는 죽음의 지대를 오르며 처절한 고통과 공포를 맞닥뜨려야 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받아들이는 것”이라 한다.


“공포를 받아들입니다.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요.”


 두려움을 이기려 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숱한 거봉들을 넘어 왔다는 오은선.

 히말라야에서 채득한 그녀만의 삶의 방식이다.  

 



 산악계 축하


“대단하고 장하다는 것 말고 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은선 14개 거봉 등정에 산악계 원로·인사들 격려


오은선의 8,000m 14개 거봉 완등은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산악계의 경사다. 국내 산악계의 원로인 김영도 선생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악단체인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 한국산악회 전병구 회장, 이명규 대학산악연맹 회장의 축하 인사를 지상으로 전한다.

 

 

 

 

 김영도 77에베레스트 원정대장

 

 

      


 

독일 슈피겔지에 최근에 발표된 오은선에 대한 문제와 자신들의 평가를 자세히 읽어봤습니다.

본래 큰일을 할 때는 옆에서 말이 많은 법입니다.

더군다나 경쟁자들이 등산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인들이고 동양권에서는 오은선 혼자였습니다.

그러니 유럽에서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오은선의 등반 태도나 인성으로 볼 때 분명 14개 봉을 제대로 올랐을 것으로 믿습니다.


유럽과 우리나라는 알피니즘의 측면에서 볼 때 자연과 입지조건이 매우 다릅니다.

그곳은 등산의 발상지이고 우리나라는 2,000m도 안 되는 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의 여성이 8,000m 14개 봉을 등정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특히 여성으로 최초의 14개 봉 완등 기록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등산이 심한 경쟁으로 비춰진 것은 아쉽지만 분명 가치가 있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오은선의 14개 봉 완등을 축하합니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

 

 

        

 


오은선 대장이 대학교 입학할 때부터 봐왔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자그마한 몸집에 강단이 대단했던 후배였는데,

           여성 최초의 14개 봉 완등자가 된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고 대견합니다.

오 대장이 첫 번째 8,000m 봉우리인 가셔브룸1봉을 등정했을 때

                         본인도 한국대학산악연맹 단장 자격으로 현장에 있었습니다.

당시 박영석 대장도 같이 갔던 기억이 납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해보니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으로서 오은선 대장은 정말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전병구 한국산악회 회장

 

 

                                                                                      

 


정말 대단합니다. 본인도 1976년도에 정찰을 위해 안나푸르나1봉 북면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보름 정도 머물면서 매일 산을 바라봤는데,

          그때 상황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자신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나푸르나4봉으로 대상지를 바꿔 성공했습니다.

이번에 오은선 대장의 안나푸르나1봉 등정을 생중계로 보면서 정말 가슴이 벅찼습니다.

여성으로서 그런 성과를 이룬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사람은 할 수 없는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진정 박수 받을 만한 일입니다.

다시 한 번 대단한 일을 한 오은선 대장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이명규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

 

                                                                                          

 


여성 최초로 8,000m 14개 거봉을 완등한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원 오은선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번 오 대장의 쾌거는 한국 여성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세계 곳곳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 특히 한국의 여성 차별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봅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작고 가냘파 보이는 오은선이 해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여성들의 우월성이 빛을 발해

           각 분야에서 창조적 역할을 해낸다면 한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오은선이 한국 여성의 리더로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산악인,

                               특히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원 모두가 성원할 것입니다.

                                                                                  장하다, 오은선.



                                                                   월간 산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이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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