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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十一回 責趙盾董狐直筆 誅鬪椒絕纓大會
제51회: 동호가 직필로 조돈을 책망하고 초장왕이 투월초를 주살하고 절영대회를 열다.
話說,晉靈公謀殺趙盾,雖然其事不成,卻喜得趙盾離了絳城,如村童離師,頑豎離主,覺得胸懷舒暢,快不可言,遂攜帶宮眷於桃園住宿,日夜不歸。再說,趙穿在西郊射獵而回,正遇見盾朔父子,停車相見,詢問緣由。趙穿曰:「叔父且莫出境,數日之內,穿有信到,再決行止。」趙盾曰:「既然如此,吾權住首陽山,專待好音。汝凡事謹慎,莫使禍上加禍!」趙穿別了盾朔父子,回至絳城,知靈公住於桃園,假意謁見,稽首謝罪,言:「臣穿雖忝宗戚,然罪人之族,不敢復侍左右,乞賜罷斥!」
한편, 진영공은 음모를 꾸며 조돈을 죽이려고 하여, 비록 그 일이 성공하지 못했으나, 조돈이 강성(絳城)을 떠난 것을 기뻐했다. 영공은 마치 스승을 떠난 촌아이처럼, 주인을 떠난 어리석은 종놈처럼, 어떻게 가슴이 후련하고 기쁜지 말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궁궐의 시녀들과 시종들을 데리고 도원으로 가서 머물러 자고, 밤낮으로 놀며 돌아가지 않았다. 한편, 조천은 서쪽 교외에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조돈과 조삭 부자를 만나 수레를 멈추고 연유를 물었다. (조돈의 말을 듣고) 조천이 말하기를, “숙부께서는 잠시 국경을 넘지 마십시오. 며칠 안에 제가 기별을 보내면 다시 거취를 결정하십시오.” 하니, 조돈이 말하기를,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잠시 수양산(首陽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 너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재앙 위에 재앙을 보태지 말아라!” 했다. 조천이 조돈과 조삭 부자를 이별하고 강성에 돌아와서, 진영공이 도원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거짓으로 알현을 청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말하기를, “신은 비록 군주의 인척이지만 죄인이 종족입니다. 감히 다시 전하의 좌우에서 모시지 못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소신을 파직하여 물리쳐주십시오.” 했다.
靈公信為真誠,乃慰之曰:「盾累次欺蔑寡人,寡人實不能堪,與卿何與?卿可安心供職。」穿謝恩畢,復奏曰:「臣聞『所貴為人主者,惟能極人生聲色之樂也。』主公鐘鼓雖懸,而內宮不備,何樂之有?齊桓公嬖幸滿宮,正娶之外,如夫人者六人。先君文公雖出亡,患難之際,所至納姬,迄於返國,年踰六旬,尚且妾媵無數。主公既有高臺廣囿,以為寢處之所,何不多選良家女子,充牣其中,使明師教之歌舞,以備娛樂,豈不美哉?」靈公曰:「卿所言,正合寡人之意。今欲搜括國中女色,何人可使?」穿對曰:「大夫屠岸賈可使。」
진영공은 조천의 말을 진심이라고 믿고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조돈이 여러 번 나를 기만하고 멸시하여 과인이 사실 참을 수 없었소. 경과는 무슨 관계가 있겠소?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맡아보시오.” 했다. 조천은 감사하고 다시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 ‘백성의 주인이 된 사람에게 귀중한 것은 오로지 노래와 여색을 마음껏 즐기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주공께서 종과 북을 비록 걸어 놓으셨으나 내궁이 비어 있으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제환공은 비첩으로 궁궐을 가득 채웠고 정부인 이외에도 부인과 같은 여자를 여섯이나 두었습니다. 선군이신 진문공께서 비록 망명하여 곤궁한 처지에서도 여자를 여럿 취하시어 환국 이후에 불러왔습니다. 나이가 육순이 넘어서도 잉첩(媵妾)을 무수하게 거느리셨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미 높은 누대를 짓고 넓은 동산을 갖추셨으니 이곳을 침소로 삼아 많은 양갓집 여자들을 골라 그곳을 채우시고 좋은 선생을 시켜 가무를 가르치게 하여 오락을 준비하게 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나의 뜻과 같소! 지금 나라 안의 미녀들을 찾아내려면 누구를 시키면 되겠소?” 하니, 조천이 대답하기를, “대부 도안고를 시키면 될 것입니다.” 했다.
靈公遂命屠岸賈專任其事。不拘城內郊外,有顏色女子,年二十以內未嫁者,咸令報名選擇,限一月內回話。趙穿借此公差,遣開了屠岸賈,又奏於靈公曰:「桃園侍衛單弱,臣於軍中精選驍勇二百人,願充宿衛,伏乞主裁!」靈公復准其奏。趙穿回營,果然挑選了二百名甲士。那甲士問道:「將軍有何差遣?」趙穿曰:「主上不恤民情,終日在桃園行樂,命我挑選汝等,替他巡警。汝等俱有室家,此去立風宿露,何日了期?」軍士皆嗟怨曰:「如此無道昏君,何不速死?若相國在此,必無此事。」
진영공이 즉시 도안고에게 명을 내려 그 일을 전담하게 했다. 성안이건 성밖이건 얼굴이 아름답고 시집가지 않은 20세 미만의 여자는 모두 이름을 등록하고 그중에서 뽑아서 한 달 안에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조천은 이렇게 공무 출장을 맡겨 도안고를 영공의 곁에서 떼어놓았다. 다시 진영공에게 아뢰기를, “도원을 경비하는 군사들이 너무 약합니다. 신이 군중에서 사납고 용감한 정예 병사 2백 명을 뽑아 이곳을 지키도록 하겠으니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진영공이 다시 그 말을 받아들였다. 조천이 군영에 돌아와 과연 2백 명의 무장병을 선발하였다. 그 무장병이 묻기를, “장군께서는 저희들을 어디로 보내려 하십니까?” 하니, 조천이 말하기를, “주상이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종일 도원에서 행락만을 일삼으면서 나에게 명하여 너희들을 선발하여 도원을 경비하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모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인데 이번에 가면 바람 속에 노숙하며 어느 날에 끝날지 모르겠다.” 했다. 군사들이 모두 탄식하고 원망하기를, “이 같은 무도 혼군이 왜 빨리 죽지 않는가? 만약에 조돈 상국께서 계셨더라면 반드시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했다.
趙穿曰:「吾有一語,與汝等商量,不知可否?」眾軍士皆曰:「將軍能救拔我等之苦,恩同再生!」穿曰:「桃園不比深宮邃密,汝等以二更為候,攻入園中,託言討賞,我揮袖為號,汝等殺了晉候,我當迎還相國,別立新君。此計何如?」軍士皆曰:「甚善!」趙穿皆勞以酒食,使列於桃園之外。入告靈公。靈公登臺閱之,人人精勇,個個剛強。靈公大喜,即留趙穿侍酒,飲至二更,外面忽聞喊聲,靈公驚問其故。趙穿曰:「此必宿衛軍士,驅逐夜行之人耳。臣往諭之,勿驚聖駕。」
조천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과 상의할 일이 하나 있는데 너희들이 찬성할지 모르겠다.”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장군께서 능히 우리들의 고생을 구해 주신다면 그 은혜는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했다.조천이 말하기를, “도원은 궁궐에 비해 그다지 깊지 않다. 너희들은 이경(밤 10시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동산 속으로 들어와 상을 타러 왔다고 핑계를 대고, 내가 소매를 흔드는 것을 신호로 하여 너희들은 진영공을 죽여라. 나는 상국을 다시 모셔와 따로 군주를 세우겠다. 나의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주 좋습니다.” 했다. 조천이 군사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위로하고 도원 밖에 줄지어 서게 했다. 조천은 진영공에게 경비병들을 선발하여 세웠다고 보고했다. 진영공이 누대에 올라 살펴보니, 군사들은 하나같이 정예하고 용맹하여 개개인이 굳세고 강하게 생겼다. 진영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조천을 머물러 두고 술자리를 같이하여, 이경이 되도록 마셨다. 갑자기 바깥에서 함성이 들려와. 진영공이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조천이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도원을 지키는 군사들이 밤길 가는 행인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신이 가서 타일러 주군이 놀라지 않게 하겠습니다.” 했다.
當下趙穿命掌燈,步下層臺。甲士二百人,已毀門而入。趙穿穩住了眾人,引至臺前,升樓奏曰:「軍士知主公飲宴,欲求餘瀝犒勞,別無他意。」公傳旨,教內侍取酒分犒眾人,倚欄看給。趙穿在旁呼曰:「主公親犒汝等,可各領受!」言畢,以袖麾之,眾甲士認定了晉侯,一湧而上。靈公心中著忙,謂趙穿曰:「甲士登臺何意?卿可傳諭速退!」趙穿曰:「眾人思見相國盾,意欲主公召還歸國耳。」靈公未及答言,戟已攢刺,登時身死。左右俱各驚走。趙穿曰:「昏君已除,汝等勿得妄殺一人,且隨我往迎相國還朝也。」
그때 조천이 등불을 켜라고 명하여 걸어서 누대를 내려갔다. 2백 명의 무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조천은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그들을 이끌고 누대 앞에 이르러서, 혼자 누대에 올라 아뢰기를, “군사들이 주공께서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고 있음을 알고 남은 술이나마 얻어먹고자 소란을 피웠습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니, 진영공이 내시들에게 명하여 군사들에게 술을 나누어주게 하고, 난간에 기대어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았다. 조천이 영공 곁에 있다가 소리치기를, “주군께서 친히 너희들을 위로하니 모두 잘 받아라.” 했다. 조천이 말을 마치고 소매를 휘저으니, 군사들이 진영공임을 알아보고 모두 몸을 솟구쳐 누대 위로 올라왔다. 영공이 당황하여 조천에게 말하기를, “군사가 누대 위로 올라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경은 나의 명을 전하여 빨리 물러가게 하시오.” 하니, 조천이 말하기를, “군사들이 조돈 상국을 그리워하여 주공께서 다시 귀국시키라고 하려는 듯합니다.” 했다. 진영공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극에 찔려서, 끌어 일으켰을 때 몸이 이미 죽어 있었다. 좌우에 있던 시종들은 모두 놀라 달아났다. 조천이 말하기를, “혼군이 이미 제거되었으니, 너희들은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를 따라 조돈 상국을 조정으로 다시 모셔와야 한다.” 했다.
只為晉侯無道好殺,近侍朝夕懼誅,所以甲士行逆,莫有救者。百姓怨苦日久,反以晉侯之死為快,絕無一人歸罪於趙穿。七年之前,慧星入北斗,占云:「齊、宋、晉三國之君,皆將死亂。」至是驗矣!髯翁有詩云:「崇臺歌管未停聲,血濺朱樓起外兵,莫怪臺前無救者,避丸之後絕人行。」屠岸賈正在郊外,捱門捱戶的訪問美色女子,忽報:「晉侯被弒!」吃了大驚,心知趙穿所為,不敢聲張,潛回府第。士會等聞變,趨至桃園,寂無一人。亦料趙穿往迎相國,將園門封鎖,靜以待之。
진영공이 무도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여, 근시들이 아침저녁으로 죽기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무사들이 반역하여 진영공을 시해했음에도 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원한에 사무쳤기 때문에 진영공의 죽음을 오히려 통쾌하게 생각하고 한 사람도 조천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7년 전에 혜성이 북두를 침입하자 점괘에 이르기를 ‘제(齊), 송(宋), 진(晉) 세 나라의 군주는 모두 반란을 당하여 죽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에 이르러 들어맞았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높은 누대 위에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바깥 군사들이 일어나 화려한 누각에 피를 뿌렸구나! 누대 앞에 구하려는 자 없음을 이상하게 생각 말라. 탄환을 피한 후에는 백성들이 떠났음이라.” 했다. 도안고는 도성 밖에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미녀들을 뽑고 있었는데, 갑자기 보고하기를, “주군께서 시해되었습니다.” 했다. 도안고가 크게 놀라 마음속으로 조천의 짓임을 알고 감히 말하지는 못하고,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 사회 등이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도원으로 달려갔으나 도원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조천이 상국을 맞이하러 갔다고 생각한 사회 등은 도원의 문을 봉쇄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不一日,趙盾回車,入於絳城,巡到桃園,百官一時並集。趙盾伏於靈公之屍,痛哭了一場,哀聲聞於園外。百姓聞者皆曰:「相國忠愛如此,晉侯自取其禍,非相國之過也。」趙盾吩咐將靈公殯殮,歸葬曲沃。一面會集群臣,議立新君。時靈公尚未有子,趙盾曰:「先君襄公之歿,吾常倡言欲立長君,眾謀不協,以及今日。此番不可不慎!」士會曰:「國有長君,社稷之福,誠如相國之言。」趙盾曰:「文公尚有一子,始生之時,其母夢神人以黑手塗其臀,因名曰黑臀。今仕於周,其齒已長,吾意欲迎立之,何如?」
하루가 지나지 않아 조돈이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강성(絳城)에 들어왔다. 조돈은 도원을 둘러보고 백관도 일시에 도원으로 몰려들었다. 조돈이 진영공의 시체 옆에 엎드려 한바탕 통곡했다. 그 슬퍼하는 곡소리가 도원 밖에까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상국의 충성과 애정이 이같은데, 진영공이 화를 자초한 것이지 상국의 잘못은 아니다.” 했다. 조돈이 분부하여 진영공을 염하여 곡옥에 장사지냈다. 한편으로 여러 신하를 모두 모아 새 군주를 세우는 일을 의논했다. 그때 진영공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조돈이 말하기를, “선군 양공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항상 나이 든 사람을 군주로 세우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협조하지 않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했다. 사회가 말하기를, “나라 안에 나이 든 공자가 있다면 사직의 복입니다. 진실로 상국의 말과 같이 하겠습니다.” 했다. 조돈이 말하기를, “아직 문공의 아들이 한 분 살아있습니다. 태어날 때 그 모친의 꿈에 신인(神人)이 검은 손으로 아기의 볼기를 칠해서 이름을 흑둔(黑臀)이라 했습니다. 지금 주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가 이미 장년이 되었으니 내 생각에 그 분을 모셔다 군주로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했다.
百官不敢異同,皆曰:「相國處分甚當。」趙盾欲解趙穿弒君之罪,乃使穿如周,迎公子黑臀歸晉,朝於太廟,即晉侯之位,是為成公。成公既立,專任趙盾以國政,以其女妻趙朔,是為莊姬。盾因奏曰:「臣母乃狄女,君姬氏有遜讓之美,遣人迎臣母子歸晉,臣得僭居適子,遂主中軍。今君姬氏三子同、括、嬰皆長,願以位歸之。」成公曰:「卿之弟,乃吾娣所鐘愛,自當並用,毋勞過讓。」乃以趙同、趙括、趙嬰並為大夫。趙穿佐中軍如故。穿私謂盾曰:「屠岸賈諂事先君,與趙氏為仇,桃園之事,惟岸賈心懷不順。若不除此人,恐趙氏不安!」
백관들이 감히 조돈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상국의 처분이 가장 합당합니다.” 했다. 조돈이 조천의 주군을 살해한 죄를 벗기고자 조천을 주나라에 사자로 임명하여 공자 흑둔을 진(晉)나라로 모셔 오게 했다. 흑둔이 돌아와 태묘에 고하고 진(晉)나라 군주로 즉위하니, 이가 진성공(晉成公)이다. 진성공이 군주가 되자, 국정을 오로지 조돈에게 맡기고, 그 딸을 조삭과 혼인시켰다. 진성공의 딸이 장희(莊姬)다. 조돈이 성공에게 아뢰기를, “소신의 모친은 오랑캐의 딸이었습니다. 군희씨(君姬氏)가 겸양의 미덕이 있어 사람을 보내 저희 모자를 진(晉)나라로 데리고 왔습니다. 신이 참람하게 적자가 되어 마침내 중군을 주관했습니다. 지금 군희씨(君姬氏)의 세 아들 동(同), 괄(括), 영(嬰)이 모두 장성하였으니 원컨대 제 자리로 돌려주기를 바랍니다.” 했다. 진성공이 말하기를, “경의 동생은 곧 내 누이의 사랑하는 아들들이라. 내 마땅히 불러 쓰겠으니 너무 겸양하지 마시오.” 했다. 이에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趙嬰) 등을 대부로 삼았다. 조천은 옛날처럼 중군의 보좌로 있게 했다. 조천이 조용히 조돈에게 말하기를, “도안고가 진영공을 모시고 아첨하여 조씨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도원의 거사도 오직 도안고만이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이자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조씨가 편안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했다.
盾曰:「人不罪汝,汝反罪人耶?吾宗族貴盛,但當與同朝修睦,毋用尋仇為也。」趙穿乃止。岸賈亦謹事趙氏,以求自免。趙盾終以桃園之事為歉。一日,步至史館,見太史董狐,索簡觀之。董狐將史簡呈上。趙盾觀簡上,明寫:「秋七月乙丑,趙盾弒其君夷皋於桃園。」盾大驚曰:「太史誤矣!吾已出奔河東,去絳城二百餘里,安知弒君之事?而子乃歸罪於我,不亦誣乎?」董狐曰:「子為相國,出亡未嘗越境,返國又不討賊,謂此事非子主謀,誰其信之?」盾曰:「猶可改乎?」
조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너의 죄를 묻지 않고 있는데 네가 도리어 다른 사람의 죄를 묻고자 하는가? 우리 종족들이 귀하고 번성하고 있으니 마땅히 그들과 조정에서 서로 화목해야 하고 남과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된다.” 하니, 조천은 이에 그만두었다. 도안고도 역시 근신하여 조씨를 섬겨서 스스로 화를 면하려고 하였다. 조돈은 도원에서 영공이 시해된 일을 늘 껄끄럽게 여겼는데, 하루는 발걸음을 사관(史館)으로 옮겨 태사 동호(董狐)를 만나 죽간을 을 찾아보자고 했다. 동호가 영공의 일을 기록한 죽간을 바쳤다. 조돈이 죽간을 보니, 분명하게 기록하기를, “가을 7월 을축 일에 조돈이 그 군주 이고(夷皐)를 도원에서 시해했다.”라고 했다. 조돈이 깜짝 놀라 말하기를, “태사는 잘못 기록했오! 나는 이미 하동(河東)으로 달아나서 강성 밖 2백여 리에 있었는데 어찌 군주를 살해한 일을 알았겠습니까? 그대가 죄를 나에게 돌리는 것은 또한 모함이 아닙니까?” 하니, 동호가 말하기를, “그대는 상국이었고, 달아났지만 국경를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도성에 돌아와서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그대가 꾸미지 않았다고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했다. 조돈이 말하기를, “이 기록을 고칠 수 없겠소?” 했다.
狐曰:「是是非非,號為信史。吾頭可斷,此簡不可改也!」盾嘆曰:「嗟乎!史臣之權,乃重於卿相!恨吾未即出境,不免受萬世之惡名,悔之無及。」自是趙盾事成公,益加敬謹。趙穿自恃其功,求為正卿,盾恐礙公論,不許。穿憤恚,疽發於背而死。穿子趙㫋,求嗣父職,盾曰:「待汝他日有功,雖卿位不難致也。」史臣論趙盾不私趙穿父子,皆董狐直筆所致。有贊云:「庸史紀事,良史誅意。穿弒其君,盾蒙其罪。寧斷吾頭,敢以筆媚?卓哉董狐,是非可畏!」時乃周匡王之六年也。是年,匡王崩,其弟瑜立,是為定王。
동호가 말하기를,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참다운 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이 죽간은 고칠 수 없습니다.” 했다. 조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사관의 권세가 상국보다 더 무겁구나! 내가 국경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 만세에 악명을 남기는 일을 면하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후회막급이로구나.” 했다. 이때부터 조돈이 진성공을 받들기를 더욱 공경하고 근신했다. 조천은 자기의 공을 믿고 정경의 자리를 원했으나, 조돈은 공론을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조천은 분노하여 등창이 나서 죽었다. 조천의 아들 조전(趙旃)이 부친의 직책을 잇게 해 달라고 청하니, 조돈이 말하기를, “후일에 네가 공을 세우게 되면 비록 정경의 자리인들 구하기가 어렵겠는가?” 했다. 후세의 사관들은 조돈이 조천 부자에게 사정을 봐주지 않은 것은 모두가 동호의 직필 때문이라고 논했다. 동호의 직필을 찬양하여 이르기를, “보통의 사관은 사실대로 기록하지만, 훌륭한 사관은 뜻으로 부정(不正)을 죽인다. 조천이 군주를 시해했는데, 조돈이 그 죄를 뒤집어썼다. 비록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어찌 감히 붓으로 아첨하리오. 장하다, 동호여! 시비를 가리는 일은 두려운 일이구나!” 했다. 이때가 주광왕 6년(기원전 606년)이었다. 그해에 주광왕이 죽고 그 동생 유(瑜)가 즉위했는데, 이가 주정왕(周定王)이다.
定王元年,楚莊王興師伐陸渾之戎,遂涉雒水,揚兵於周之疆界,欲以威脅天子,與周分制天下。定王使大夫王孫滿問勞莊王。莊王問曰:「寡人聞大禹鑄有九鼎,三代相傳,以為世寶,今在雒陽。不知鼎形大小與其輕重何如?寡人願一聞之!」王孫滿曰:「三代以德相傳,豈在鼎哉!昔禹有天下,九牧貢金,取鑄九鼎。夏桀無道,鼎遷於商。商紂暴虐,鼎又遷於周。若其有德,鼎雖小亦重,如其無德,雖大猶輕!成王定鼎於郟鄏,卜世三十,卜年七百,天命有在,鼎未可問也?」莊王慚而退,自是不敢復萌窺周之志。
주정왕 원년에 초장왕이 군사를 일으켜 육혼(陸渾) 땅의 융족을 치고, 마침내 낙수(洛水)를 건너 주나라 경계에서 군세를 떨쳐 천자를 위협하여 주나라와 천하를 나누어 제압하려고 했다. 주정왕이 대부 왕손만(王孫滿)을 사자로 보내 초장왕을 찾아가 위문하게 했다. 초장왕이 묻기를, “과인이 듣기에 대우(大禹)께서 솥 아홉 개를 주조하여 삼대(三代 ; 夏商周)에 걸쳐 내려왔는데 그것은 세상의 보물이고 합니다. 지금 낙양(洛陽)에 있는데, 그 솥의 생김새와 크기 및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과인은 그것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했다. 왕손만이 말하기를,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는 덕으로써 천하를 서로 전했지 어찌 솥으로 천하를 전했겠습니까?! 옛날에 우임금이 천하를 다스렸을 때, 아홉 지방 장관이 쇠를 바쳐서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하였습니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이 무도하여 그 솥은 상(商)나라로 옮겨졌고,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포학하여 그 솥은 다시 주(周)나라로 옮겨졌습니다. 만약 천자가 유덕하면 비록 솥이 작아도 무거울 것이며, 만일 덕이 없다면 비록 커도 오히려 가벼울 것입니다. 주나라 성왕(成王)께서 정을 겹욕(郟鄏)에 안치하신 이래 30대, 700년이 되도록 천명이 이어졌는데, 제후가 솥에 대해 물을 수는 없겠지요?” 했다. 초장왕은 부끄러워하며 군사를 물렸다. 이로부터 초장왕은 감히 주나라를 넘보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卻說,楚令尹鬥越椒,自莊王分其政權,心懷怨望,嫌隙已成。自恃才勇無雙,且先世功勞,人民信服,久有謀叛之意,常言:「楚國人才,惟司馬伯嬴一人,餘不足數也!」莊王伐陸渾時,亦慮越椒有變,特留蒍賈在國。越椒見莊王統兵出征,遂決意作亂。欲盡發本族之眾,鬥克不從,殺之,遂襲殺司馬蒍賈。賈子敖,扶其母奔於夢澤以避難。越椒出屯蒸野之地,欲邀截莊王歸路。莊王聞變,兼程而行,將及漳澨,越椒引兵來拒,軍威甚壯。越椒貫弓挺戟,在本陣往來馳驟,楚兵望之,皆有懼色。
한편, 초나라 영윤 투월초(鬪越椒)는 초장왕이 투월초의 권세를 나누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을 때부터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어 이미 싫어하는 틈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재주와 용기에서 견줄 사람이 없다고 믿고, 또 선조들의 공로로 백성들이 믿고 복종한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모반의 뜻을 품고, 항상 말하기를, “초나라의 인재는 오직 사마 백영(伯嬴; 위가(蔿賈)의 자) 한 사람뿐이다. 나머지는 셀 것도 없다.” 했다. 초장왕이 육혼을 칠 때, 또한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특별히 위가를 나라 안에 남겨 두었다. 투월초는 초장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자 마침내 내란을 일으키려고 결심하여, 투씨 일족을 모두 동원하려 하였으나 투극(鬪克)이 따르지 않자 살해하고 곧바로 사마 위가를 습격하여 죽였다. 위가의 아들 위오(蔿敖)가 그 모친을 모시고 몽택(夢澤)으로 피난했다. 투월초가 증야(蒸野)의 들판에 진을 치고, 초장왕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여 공격하려고 했다. 초장왕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밤낮없이 행군을 재촉하여 장서(漳澨)에 이르자, 투월초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서 막으니, 군사의 위세가 매우 강했다. 투월초가 활을 메고 극을 꼬나 쥐었으며 본진에서 말을 달려 왕래하니. 초장왕의 군사들이 바라보고 모두 얼굴에 두려운 기색을 띄웠다.
莊王曰:「鬥氏世有功勳於楚,寧伯棼負寡人,寡人不負伯棼也!」乃使大夫蘇從,造越椒之營,與之講和,赦其擅殺司馬之罪,且許以王子為質。越椒曰:「吾恥為令尹耳,非望赦也,能戰則來。」蘇從再三諭之,不聽。蘇從去後,越椒命軍士擊鼓前進。莊王問諸將:「何人可退越椒?」大將樂伯應聲而出。越椒之子鬥賁皇便接住廝殺。潘尪見樂伯戰賁皇不下,即忙驅車出陣。越椒之從弟鬥旗亦驅車應之。莊王在戎輅之上,親自執枹,鳴鼓督戰。越椒遠遠望見,飛車直奔莊王,彎著勁弓,一箭射來。
초장왕이 말하기를, “투씨는 대대로 초나라에 세운 공훈이 있으니, 비록 백분(伯棼 ; 투월초의 자)이 나를 져버렸지만 내가 백분을 져버릴 수는 없다.” 하고, 이에 대부 소종(蘇從)을 시켜 투월초의 진영으로 가서 강화를 청하도록 했다. 사마 위가를 멋대로 죽인 죄를 용서할 것이며 또 왕자를 인질로 보내기를 허락했다. 투월초가 말하기를. “나는 영윤이 된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용서를 바라지 않소. 싸울 수 있으면 오라고 하시오.” 했다. 소종이 재삼 권유했지만, 투월초는 듣지 않았다. 소종이 돌아간 후에, 투월초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북을 치고 전진하게 하였다. 초장왕이 여러 장수에게 묻기를, “누가 투월초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니, 대장 낙백(樂伯)이 묻는 소리에 응해 나가니, 투월초의 아들 투분황(鬪賁皇)이 문득 맞서 싸웠다. 낙백이 투분황과 싸워 떨어뜨리지 못하는 것을 반왕(潘尪)이 보고, 즉시 전차를 바삐 몰아 진영을 나갔다. 투월초의 종제 투기(鬪旗)가 역시 전차를 몰아 응했다. 초장왕은 큰 전차에 타고 있다가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리며 독전했다. 투월초가 멀리서 바라보고 전차를 나는 듯이 몰아 초장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강궁에다 화살을 메어 초장왕을 향해 쐈다.
那枝箭直飛過車轅,剛剛中在鼓架之上,駭得莊王連鼓槌掉下車來。莊王急教避箭,左右各將大笠前遮。越椒又復一箭,恰恰的把左笠射箇對穿。莊王且教回車,鳴金收兵。越椒奮勇趕來,卻得右軍大將公子側,左軍大將公子嬰齊,兩軍一齊殺到,越椒方退。樂伯潘尪聞金聲,亦棄陣而回。楚軍頗有損折,退至皇滸下寨。取越椒箭視之,其長半倍於他箭,鸛翎為羽,豹齒為鏃,鋒利非常,左右傳觀,無不吐舌。至夜,莊王自出巡營,聞營中軍卒,三三五五,相聚都說:「鬥令尹神箭可畏,難以取勝!」
그 화살이 곧바로 날라가 수레의 끌채를 지나 북을 매단 시렁 위에 꽂혔다. 초장왕이 놀라서 북채를 버리고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초장왕이 급히 좌우에게 큰 삿갓 방패로 화살을 막아 자기를 보호하라고 했다. 투월초가 또 화살을 쏘니 바로 왼쪽의 방패를 뚫었다. 초장왕은 전차를 뒤로 돌리게 하고 징을 쳐서 군사들을 거두어들였다. 투월초가 용기를 떨쳐 쫓아왔으나, 우군 대장 공자 측(公子側)과 좌군 대장 공자 영제(公子嬰齊)가 양쪽에서 일제히 쇄도하니, 투월초가 비로소 물러났다. 낙백과 반왕도 징 소리를 듣고, 진영을 버리고 돌아왔다. 초장왕의 군사는 자못 손실을 입고 물러나 황호(皇滸)에 영채를 세웠다. 투월초가 쏜 화살을 가지고 와서 보니, 그 길이는 다른 화살보다도 반 배가 길고, 활의 깃은 황새의 깃털로 만들었으며, 표범의 이빨을 화살촉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끝이 아주 날카로웠다. 좌우에서 보고 모두 혀를 내둘렀다. 밤이 되자 초장왕이 진영을 한 바퀴 돌다가 진영 안의 군졸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말하기를, “영윤 투월초가 쏘는 화살은 귀신같아서 두려우니 이기기가 어렵겠다.” 했다.
莊王乃使人謬言於眾曰:「昔先君文王之世,聞戎蠻造箭最利,使人問之,戎蠻,乃獻箭樣二枝,名『透骨風』,藏於太廟,為越椒所竊得。今盡於兩射矣,不必慮也。明日當破之。」眾心始定。莊王乃下令退兵隨國,揚言:「欲起漢東諸國之眾,以討鬥氏。」蘇從曰:「強敵在前,一退必為所乘,王失計矣!」公子側曰:「此王之謬言耳。吾等入見,必別有處分。」乃與公子嬰齊,夜見莊王。莊王曰:「逆椒勢銳,可計取,不可力敵也。」吩咐二將,如此恁般,埋伏預備。二將領計去了。
초장왕이 이에 사람을 시켜 군중에 헛소문을 퍼뜨리기를, “옛날에 선군이신 초문왕 때에 오랑캐 융만(戎蠻)이 화살을 아주 날카롭게 만든다는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 물으니 융만이 두 개의 화살을 보냈는데, 이름을 투골풍(透骨風)이라 부르고 태묘에 보관하였다가, 이번에 투월초에게 도둑맞았다. 지금 두 화살을 다 쏘았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은 마땅히 깨트릴 것이다.” 했다. 군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초장왕은 이에 수(隨)나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소문을 퍼뜨리기를, “한수 동쪽 여러 나라의 군사들을 모아 투씨를 토벌할 것이다.” 했다. 소종이 말하기를, “강적이 앞에 있는데 한 번 뒤로 물러난다면 적군은 승세를 탈 것이니, 왕은 계책을 잘못 쓴 것이다.” 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헛소문입니다. 우리가 들어가 만나보면 반드시 별도의 처분이 있을 것입니다.” 했다. 두 사람과 공자 영제가 밤에 초장왕을 뵈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역적 투월초의 군세가 강하니 계략으로 취해야지 힘으로 대적할 수는 없소.” 하고, 두 장수에게 분부하기를 이러저러하게 미리 매복하라고 했다. 두 장수는 명령을 받들어 갔다.
次早,雞鳴,莊王引大軍退走。越椒探聽得實,率眾來追。楚軍兼程疾走,已過竟陵而北。越椒一日一夜,行二百餘里,至清河橋。楚軍在橋北晨炊,望見追兵來到,棄其釜爨而遁。越椒令曰:「擒了楚王,方許朝餐。」眾人勞困之後,又忍著飢餓,勉強前進,追及後隊潘尪之軍。潘尪立於車中,謂越椒曰:「吾子志在取王,何不速馳?」越椒信為好語,乃舍潘尪。前馳六十里,至青山,遇楚將熊負羈,問:「楚王安在?」負羈曰:「王尚未至也。」越椒心疑,謂負羈曰:「子肯為我伺王,如得國,當與子分治。」
다음 날 새벽 닭이 울자, 초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후퇴했다. 투월초가 그 사실을 탐지하고 군사를 인솔하여 추격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하루에 이틀 길을 질주하여 이미 경릉(竟陵)을 지나 북쪽으로 달아났다. 투월초가 하루 밤낮에 2백 리를 행군하여 청하교(淸河橋)에 이르렀다. 초장왕의 군사들이 다리 북쪽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다가 추격병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솥과 아궁이를 버리고 도망쳤다. 투월초가 명령하기를, “초장왕을 사로잡은 후에 아침을 먹겠다!” 하니, 군사들이 피곤하지만 다시 배고픔을 참고 애를 써서 전진하여, 후대인 반왕(潘尫)의 군사를 따라잡았다. 반왕이 전차 위에 서서 투월초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초장왕을 잡으려고 하면서 어찌하여 빨리 달리지를 못하는가?” 했다. 투월초는 호의를 갖고 하는 말이라 믿고 반왕의 군사들을 버리고, 앞으로 60여 리를 달려서 청산(靑山)에 이르렀다. 초장왕의 장수 웅부기(熊負羈)를 보자 묻기를, “초장왕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웅부기가 말하기를, “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했다. 투월초가 의심이 나서 웅부기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나라를 얻어 그대와 함께 나누어 다스릴 용의가 있소.” 했다.
負羈曰:「吾觀子眾飢困,且飽食,乃可戰耳。」越椒以為然,乃停車治爨。爨尚未熟,只見公子側公子嬰齊兩路軍殺到。越椒之軍,不能復戰,只得南走。回至清河橋,橋已拆斷。原來楚莊王親自引兵,伏於橋之左右,只等越椒過去,便將橋梁拆斷,絕其歸路。越椒大驚,吩咐左右測水深淺,欲為渡河之計。只見隔河一聲砲響,楚軍於河畔大叫:「樂伯在此!逆椒速速下馬受縛!」越椒大怒,命隔河放箭。樂伯軍中有一小校,精於射藝,姓養名繇基,軍中稱為神箭養叔。自請於樂伯,願與越椒較射。
웅부기가 말하기를, “내가 장군의 군사들을 보니 굶주리고 지쳐있어 일단은 군사들을 배불리 먹여야만 싸움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하니, 투월초가 그렇다고 생각하여 전차를 멈추고 아궁이를 만들게 했다. 아궁이에서 밥이 되기도 전에 공자 측과 공자 영제의 두 갈래 군사가 쇄도해 오는 것을 보았다. 투월초의 군사는 싸움을 다시 할 수 없어서 남쪽으로 달아났다. 돌아와 청하교에 이르렀으나 다리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원래 초장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다리의 좌우에 매복하고 있다가 투월초의 군사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바로 다리를 끊어 그들의 귀로를 끊었다. 투월초가 크게 놀라 좌우에 분부하여 수심을 재게 하여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자 강 건너편에서 포 소리가 한번 울리더니 초장왕의 군사들이 강 언덕에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낙백이 여기 있다. 역적 투월초는 빨리 말에서 내려 오랏줄을 받아라!” 했다. 투월초가 대노하여 강 건너를 향해 활을 쏘도록 명했다. 낙백의 군중에는 활쏘기에 정통한 양요기(養繇基 ; 養由基)라는 하급 장교가 있었다. 군중에서는 그를 신전(神箭) 양숙(養叔)이라고 불렀다. 양요기가 낙백에게 자청하여 투월초와 활쏘기를 겨루어 보겠다고 했다.
乃立於河口大叫曰:「河闊如此,箭何能及?聞令尹善射,吾當與比較高低,可立於橋堵之上,各射三矢,死生聽命!」越椒問曰:「汝何人也?」應曰:「吾乃樂將軍部下小將養繇基也。」越椒欺其無名,乃曰:「汝要與我比箭,須讓我先射三矢。」養繇基曰:「莫說三矢,就射百矢,吾何懼哉!躲閃的不算好漢!」乃各約住後隊,分立於橋堵之南北。越椒挽弓先發一箭,恨不得將養繇基連頭帶腦射下河來。誰知「忙者不會,會者不忙。」養繇基見箭來,將弓梢一撥,那箭早落在水中。
이에 그는 강 언덕에 서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강이 이렇게 넓은데 화살이 어찌 능히 미치겠소? 들으니 영윤께서 활을 잘 쏘신다고 하니 제가 마땅히 누가 잘 쏘는지 비교해 봅시다. 다리가 있던 담장 위에 서서 각각 세 번 쏘아 생사를 걸고 겨루어 봅시다!” 하니, 투월초가 묻기를, “너는 누구인가?” 했다. 양요기가 응답하기를, “저는 낙백장군 휘하의 소장 양요기입니다.” 하니, 투월초가 그가 무명 소장이라는 말에 업신여기며 말하기를, “네가 나와 활 솜씨를 겨루겠다고 하면 너는 나에게 먼저 세 번 화살을 쏘게 양보해야 할 것이다.” 하니, 양요기가 말하기를, “세 번 화살을 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백 번 화살을 쏜들 내가 어찌 두려워하겠소? 화살을 피한다면 대장부로 치지 않겠소!” 했다. 이에 각각 군사들을 뒤로 물리고 다리가 있던 담장의 남북에 마주 섰다. 투월초가 먼저 활을 당겨 화살을 쏘았다. 그는 양요기의 머리를 꿰뚫어 강물에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자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일을 이루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리오. 양요기는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들고 있던 활로 쳐서 화살이 어느새 강물에 떨어져 버렸다.
高叫:「快射,快射!」越椒又將第二箭搭上弓弦,覷得親切,嗖的發來。養繇基將身一蹲,那枝箭從頭而過。越椒叫曰:「你說不許躲閃,如何蹲身躲箭?非丈夫也!」繇基答曰:「你還有一箭,吾今不躲,你若這箭不中,須還我射來。」越椒想道:「他若不躲閃,這枝箭管情射著。」便取第三枝箭,端端正正的射去,叫聲:「著了!」養繇基兩腳站定,並不轉動,箭到之時,張開大口,剛剛的將箭鏃咬住。越椒三箭都不中,心下早已著慌,只是大丈夫出言在前,不好失信,乃叫道:「讓你也射三箭,若射不著,還當我射。」
양요기가 큰소리로 외치기를, “빨리 쏘시오. 빨리 쏘아!” 하니, 투월초가 다시 두 번째 화살을 활에 메어 자세히 노려보더니 쉿 하고 쏘았다. 양요기가 몸을 한번 굽히자 그 화살은 머리 위로 지나갔다. 투월초가 소리치기를, “너는 몸을 피하지 말자고 해놓고, 어찌하여 몸을 굽혀 화살을 피하는가? 너는 대장부가 아니다!” 하니, 양요기가 대답하기를, “너에게 화살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나는 이제 피하지 않을 테니, 네가 만약 이번 화살을 맞히지 못하면, 틀림없이 내가 활을 쏠 수 있도록 하겠느냐?” 했다. 투월초가 생각하기를, “네가 만약 피하지 않는다면 이 화살이 틀림없이 너를 맞출 것이다.” 하고, 세 번째 화살을 집어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발사했다. 외치기를, “맞았다!” 했다. 양요기는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움쩍도 하지 않았다. 화살에 날아왔을 때 입을 크게 벌려 정확하게 화살촉을 물었다. 투월초가 세 개의 화살이 모두 맞추지 못하자 마음속으로 이미 황망하게 되어, 좀 전에 대장부라는 말을 꺼낸 데 대해 실언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외쳐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활을 세 번 쏠 것을 허락한다. 네가 쏘아서 맞추지 못한다면 다시 내가 화살을 쏘겠다.” 했다.
養繇基笑曰:「要三箭方射著你,便是初學了。我只須一箭,管教你性命遭於我手!」越椒曰:「你口出大言,必有些本事,好歹由你射來。」心下想道:「那里一箭便射得正中?若一箭不中,我便喝住他。」大著膽由他射出。誰知養繇基的箭,百發百中。那時養繇基取箭在手,叫一聲:「令尹看射!」虛把弓拽一拽,卻不曾放箭。越椒聽得弓弦響,只說箭來,將身往左一閃。養繇基曰:「箭還在我手,不曾上弓,講過『躲閃的,不算好漢。』你如何又閃去?」越椒曰:「怕人躲閃的,也不算會射!」繇基又虛把弓弦拽響,越椒又往右一閃。
양요기가 웃으며 말하기를, “화살을 세 번 쏘아 너를 맞힌다면 그것은 초보자다. 나는 단지 화살 한 개로 네 목숨을 끊을 것이다.” 했다. 투월초가 말하기를, “네 입으로 큰소리를 친다마는 아무튼 네가 활을 쏘아 봐야 알지 않겠느냐?”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어찌 화살 한 개로 나를 맞출 수 있겠는가? 만약 화살 한 개로 맞추지 못한다면 내가 큰소리를 쳐서 그를 멈추게 해야겠다.” 했다. 투월초는 대담하게 양요기로 하여금 활을 쏘도록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오, 양요기의 화살은 백발백중인 것을. 그때 양요기가 화살을 한 대 뽑아 손에 들고 소리치기를, “영윤은 나의 활 솜씨를 한번 보시라!” 하고, 빈 활을 한번 잡아당겼다 놓았으나, 아직 화살을 쏘지는 않았다. 투월초가 활시위 소리를 듣고 화살이 날아오는 줄 알고 몸을 왼쪽으로 한번 피했다. 양요기가 말하기를, “화살이 아직 내 손에 있고 활에 메기지도 않았는데, ‘피하는 것은 대장부가 아니다.’ 해놓고 어찌하여 피하는 거요?” 했다. 투월초가 말하기를, “내가 몸을 피할까 두려워서 화살을 쏘지 않은 것은 쏜 것으로 치지 않겠다!” 했다. 양요기가 다시 빈 활시위를 당기자 투월초가 다시 오른쪽으로 피했다.
養繇基乘他那一閃時,接手放一箭來,鬥越椒不知箭到,躲閃不及,這箭直貫其腦。可憐好個鬥越椒,做了楚國數年令尹,今日死於小將養繇基的一箭之下!髯仙有詩云:「人生知足最為良,令尹貪心又想王;神箭將軍聊試技,越椒已在隔橋亡。」鬥家軍已自飢困,看見主將中箭,慌得四散奔走。楚將公子側公子嬰齊,分路追逐,殺得屍同山積,血染河紅。越椒子鬥賁皇,逃奔晉國,晉侯用為大夫,食邑於苗,謂之苗賁皇。莊王已獲全勝,傳令班師,有被擒者,即於軍前斬首。凱歌還於郢都,將鬥氏宗族,不拘大小,盡行斬首。
양요기가 그 순간을 틈타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쏘자 투월초는 화살이 날아오는 줄도 모르고 미처 피하지 못하여, 그 화살이 머리를 꿰뚫었다. 가련하게도 수년간 초나라의 영윤이던 투월초가 오늘 소장 양요기의 화살 한 개에 죽고 말았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인생은 만족을 아는 것이 가장 좋은데, 영윤은 욕심이 많아 왕의 꿈을 꾸었구나! 귀신같은 활 솜씨의 장군이 시험 삼아 재주를 겨루었는데, 다리 건너편의 투월초는 이미 숨을 거두었구나.” 했다. 투씨 종족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피곤하여 주장이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을 보고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져서 달아났다. 초나라 장수 공자 측과 공자 영제는 길을 나누어 추격하여 죽인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강을 붉게 물들였다. 투월초의 아들 투분황이 진(晉)나라로 달아나니, 진(晉)나라 군주가 대부로 삼아 묘(苗)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고, 묘분황(苗賁皇)이라고 불렀다. 초장왕이 이미 전승을 거두고 회군을 명령하였으며, 사로잡은 자들은 바로 영문 앞에서 참수했다. 초장왕의 군사들은 개선가를 부르며 영도(郢都)로 돌아갔다. 투씨 종족들은 어른이나 아이를 불문하고 모두 참수되었다.
只有鬥班之子,名曰克黃,官拜箴尹,是時莊王遣使行聘齊秦二國。鬥克黃領命使齊,歸及宋國,聞越椒作亂之事,左右曰:「不可入矣!」克黃曰:「君,猶天也,天命其可棄乎?」命馳入郢都,復命畢,自詣司寇請囚,曰:「吾祖子文,曾言『越椒有反相,必主滅族。』臨終囑吾父逃避他國。吾父世受楚恩,不忍他適,為越椒所誅。今日果應吾祖之口!既不幸為逆臣之族,又不幸違先祖之訓,今日死其分也!安敢逃刑耶?」莊王聞之,嘆曰:「子文真神人也。況治楚功大,何忍絕其嗣乎?」
다만 투반(鬥班)의 아들 극황(克黃)은 잠윤(箴尹)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초장왕이 그를 제나라와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투극황은 명을 받들어 제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다가 송나라에 이르러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초나라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라고 했지만, 투극황은 말하기를, “군주는 하늘과 같다. 하늘의 명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수레를 몰게 하여 영도(郢都)에 들어와 복명한 후에 스스로 사구(司寇)에게 가서 구속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내 조부 자문(子文)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투월초는 반골의 상을 갖고 있어 틀림없이 투씨 일족을 멸족시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부께서 임종하실 때 제 부친에게 다른 나라로 도피하라고 하셨지만, 부친께서는 초나라로부터 대대로 은혜를 입어서 차마 다른 나라로 가지 못했다가 결국 투월초에게 주살되었습니다. 오늘 과연 조부의 말씀이 들어맞습니다. 이미 불행하게도 역적의 가족이 되었고, 또한 불행히 선조의 가르침을 어겼으니, 오늘 죽는 것은 제 운명입니다. 어찌 감히 형을 피하여 도망치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자문은 참으로 신인(神人)이다. 하물며 초나라를 다스려 공이 크니, 어찌 차마 그의 후사를 끊겠는가?” 했다.
乃赦克黃之罪,曰:「克黃死不逃刑,乃忠臣也。」命復其官,改名曰鬥生,言其宜死而得生也。莊王嘉繇基一箭之功,厚加賞賜,使將親軍,掌車右之職。因令尹未得其人,聞沈尹虞邱之賢,使權主國事。置酒大宴群臣於漸臺之上,妃嬪旨從。莊王曰:「寡人不御鐘鼓,已六年於此矣。今日叛臣授首,四境安靖,願與諸卿同一日之遊,名曰:『太平宴』。文武大小官員,俱來設席,務要盡歡而止。」群臣皆再拜,依次就坐。庖人進食,太史奏樂。飲至日落西山,興尚未已。莊王命秉燭再酌,使所幸許姬姜氏,遍送諸大夫之酒,眾俱起席立飲。
초장왕이 이에 투극황의 죄를 용서하고 말하기를, “투극황은 형벌을 피하여 도망가지 않고 죽음을 자청하였으니 그는 곧 충신이다.” 하고, 그를 관직에 복귀시키고, 이름을 투생(鬪生)으로 바꾸게 했는데, 마땅히 죽으려고 하여 살았다는 뜻이었다. 초장왕은 양요기가 화살 한 개로 세운 공을 표창하여 큰상을 내리고 근위대를 이끌게 하고 차우 장군의 직을 맡게 했다. 영윤을 맡길 사람을 얻지 못하다가 심(沈) 땅의 윤(尹)으로 가 있던 우구(虞邱)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국정을 주관하는 권한을 맡겼다. 초장왕은 점대(漸臺) 위에서 여러 신하를 모아 큰 잔치를 열고 비빈들도 참석하게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내가 풍악을 멀리한 지 이제 6년이 되었다. 오늘은 역적의 목을 쳤으니 나라 안이 이제 안정이 되었다. 여러분들과 하루의 즐거움을 함께 하고자 하여, 태평연(太平宴)이라 이름을 지었소. 문무 대소 관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자리에 앉아 즐기기를 바랄 뿐이오.” 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재배하고 순서대로 앉았다. 요리사들은 음식을 내오고 태사들은 음악을 연주했다. 해가 질 때까지 마시고 흥이 아직 끝나지 않아, 초장왕이 불을 밝히고 다시 잔을 따르라고 명하여, 총애하는 허희(許姬) 강씨를 시켜 여러 대부에게 술을 두루 따르게 하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서 마셨다.
忽然一陣怪風,將堂燭盡滅,左右取火未至。席中有一人,見許姬美貌,暗中以手牽其袂。許姬左手絕袂,右手攬其冠纓,纓絕,其人驚懼放手。許姬取纓在手,循步至莊王之前,附耳奏曰:「妾奉大王命,敬百官之酒,內有一人無禮,乘燭滅,強牽妾袖。妾已攬得其纓,王可促火察之。」莊王急命掌燈者:「且莫點燭!寡人今日之會,約與諸卿盡歡,諸卿俱去纓痛飲,不絕纓者不懽。」於是百官皆去其纓,方許秉燭,竟不知牽袖者為何人也。席散回宮,許姬奏曰:「妾聞『男女不瀆。』況君臣乎?今大王使妾獻觴於諸臣,以示敬也。牽妾之袂,而王不加察,何以肅上下之禮,而正男女之別乎?」
갑자기 한 줄기 돌풍이 불어 당내의 등불이 모두 꺼졌다. 좌우에서 미처 불을 켜지 못했는데 연회석에 있던 한 사람이 허희의 미모를 보고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허희가 왼손으로 소매를 끊고 오른손으로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당겨 갓끈이 떨어지자 그 사람이 놀라 손을 놓았다. 허희가 갓끈을 손에 쥐고 돌아서 초장왕 앞으로 걸어와서는 귓속말로 아뢰기를, “첩이 대왕의 명을 받들어 백관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는데 어떤 무례한 자가 등불이 꺼진 틈을 타서 강제로 첩의 소매를 잡아당겼습니다. 첩이 이미 그의 갓끈을 쥐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불을 켜서 그자를 찾으십시오!” 하니, 초장왕이 등불을 밝히려는 자에게 급히 명하기를, “잠시 등불을 켜지 말아라! 과인이 오늘 연회를 연 것은 여러 신하와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이다. 여러 신하는 모두 갓끈을 끊고 마음껏 마시기 바라오. 갓끈을 끊지 않은 자는 즐기지 않는 것이오.” 하니, 이에 백관들이 모두 갓끈을 끊었다. 그제야 등불을 켜게 하니, 마침내 소매를 잡아당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연회가 끝나고 궁궐로 돌아오니, 허희가 아뢰기를, “첩이 듣기로 ‘남녀 간에는 서로 무례하게 굴면 안 된다.’ 했습니다. 하물며 군신 간이겠습니까? 오늘 대왕께서 첩을 시켜 여러 신하에게 술을 따르게 하여 제가 공경함을 보였습니다. 제 소매를 잡아당긴 자를 대왕께서 찾아내지 않으셨으니, 무엇으로 상하의 예를 엄숙히 하고, 남녀 간의 유별함을 바르게 할 것입니까?” 했다.
莊王笑曰:「此非婦人所知也!古者,君臣為享,禮不過三爵,但卜其晝,不卜其夜。今寡人使群臣盡懽,繼之以燭,酒後狂態,人情之常。若察而罪之,顯婦人之節,而傷國士之心,使群臣俱不歡,非寡人出令之意也。」許姬嘆服。後世名此宴為「絕纓會」。髯翁有詩云:「暗中牽袂醉中情,玉手如風已絕纓;盡說君王江海量,畜魚水忌十分清。」一日,與虞邱論政,至於夜分,方始回宮。夫人樊姬問曰:「朝中今日何事,而晏罷如此?」莊王曰:「寡人與虞邱論政,殊不覺其晏也。」樊姬曰:「虞邱何如人?」莊王曰:「楚之賢者。」樊姬曰:「以妄觀之,虞邱未必賢矣!」
초장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일은 부녀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옛날에 군주와 신하가 같이 술 마실 때 석 잔을 넘기면 예가 아니었다. 다만 그것도 낮에만 허용되고 밤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오늘 과인이 군신들에게 마음껏 즐기라고 하고, 등불을 밝혀서 계속하게 했다. 술을 마신 후에 미친 짓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만약에 내가 무례한 자를 찾아내어 벌을 주었다면 부인의 절제는 드러나겠지만, 나라의 사대부들은 마음을 상했을 것이다. 군신들의 마음이 모두 불쾌하게 되면 그것은 과인이 명령을 내린 의도가 아니다.” 하니, 허희도 감탄하여 복종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연회를 절영회(絶纓會)라고 이름 붙였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어둠 속에서 소매를 잡아당김은 취중의 정인데, 섬섬옥수가 바람과 같이 갓끈을 이미 끊었네! 군왕의 마음이 강과 바다처럼 넓다고 말할 것이니, 고기를 기르려면 물이 너무 맑아서는 안 된다네.” 했다. 하루는 영윤 우구(虞邱)와 정사를 논하다가 어느덧 밤이 되어서야 궁궐로 돌아왔다. 부인 번희(樊姬)가 묻기를, “조당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늦게서야 파하셨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우구와 정사를 논하다가 이렇게 시간이 늦은 줄 몰랐소.” 했다. 번희가 말하기를, “우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초나라의 어진 사람이오.” 했다. 번희가 말하기를, “제가 망령되이 보건대 우구는 틀림없이 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했다.
莊王曰:「子何以知虞邱之非賢?」樊姬曰:「臣之事君,猶婦之事夫也。妾備位中官,凡宮中有美色者,未常不進於王前。今虞邱與王論政,動至夜分,然未聞進一賢者。夫一人之智有限,而楚國之士無窮。虞邱欲役一人之智,以掩無窮之士,又烏得為賢乎?」莊王善其言,明早以樊姬之言,述於虞邱。虞邱曰:「臣智不及此,當即圖之。」乃遍訪於群臣。鬥生言蒍賈之子蒍敖之賢:「為避鬥越椒之難,隱居夢澤,此人將相才也。」虞邱言於莊王。莊王曰:「伯嬴智士,其子必不凡。微子言,吾幾忘之。」即命虞邱同鬥生駕車往夢澤,取蒍敖入朝聽用。
초장왕이 말하기를, “부인이 어떻게 우구가 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오?” 하니, 번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섬기 것과 같습니다. 첩은 중궁의 일을 주재하고 있는데 궁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대왕께 바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구가 대왕과 국정을 밤늦도록 논하면서 아직 한 사람의 현인도 천거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무릇 한 사람의 지혜는 유한하고 초나라의 인재는 무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구는 자기 한 사람의 지혜로써 무궁한 인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찌 그를 어질다고 하겠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그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다음 날 아침에 번희의 말을 우구에게 전했다. 우구가 말하기를, “신의 지혜가 여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곧 인재를 찾아보겠습니다.” 했다. 우구가 여러 신하를 두루 찾아다니며 물으니, 투생이 위가의 아들 위오(蔿敖)가 현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투월초의 난을 피해 몽택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장상의 인재입니다.” 했다. 우구가 초장왕에게 말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백영(伯嬴 ; 蔿賈)은 지혜로운 선비였소. 그의 아들이라면 틀림없이 범상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잊을 뻔했소.” 하고, 즉시 우구에게 명하여 투생과 함께 수레를 몰고 몽택으로 가서, 위오를 데려와 임용하려고 했다.
卻說,蒍敖字孫叔,人稱為孫叔敖。奉母逃難,居於夢澤,力耕自給。一日,荷鋤而出,見田中有蛇兩頭,駭曰:「吾聞兩頭蛇,不祥之物,見者必死,吾其殆矣!」又想道:「若留此蛇,倘後人復見之,又喪其命,不如我一人自當!」乃揮鋤殺蛇,埋於田岸,奔歸向母而泣。母問其故,敖對曰:「聞見兩頭蛇者必死,兒今已見之,恐不能終母之養,是以泣也。」母曰:「蛇今安在?」敖對曰:「兒恐後人復見,已殺而埋之矣。」母曰:「人有一念之善,天必祐之。汝見兩頭蛇,恐累後人,殺而埋之,此其善豈止一念哉?汝必不死,且將獲福矣。」
한편, 위오(蒍敖)의 자는 손숙(孫叔)인데, 사람들이 손숙오(孫叔敖)라 불렀다. 어머니를 모시고 투월초의 난을 피하여 몽택에 살며 밭을 갈아 자급했다. 하루는 괭이를 메고 나갔는데, 밭 가운데에서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을 보았다. 위오가 놀라며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머리가 둘 달린 뱀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그것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데 내가 죽게 되었구나!” 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만약에 이 뱀을 살려 두었다가 다른 사람이 다시 보게 되면 또한 그 사람도 목숨을 잃을 것이니, 내 한 사람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즉시 괭이를 휘둘러 뱀을 죽여서 밭둑에 묻은 후, 어머니에게 달려가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가 우는 까닭을 묻자 위오가 대답하기를, “제가 들으니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본 사람을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 그 뱀을 보았으니, 앞으로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그 뱀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니, 위오가 대답하기를, “뒤에 다른 사람이 다시 볼까 두려워서 이미 죽여 파묻었습니다.” 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사람이 한번 선을 생각해도 하늘은 반드시 그를 돕는다. 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 뒤에 볼 사람을 걱정하여 죽여서 묻었다니, 그 선행이 어찌 한번 선하게 생각한 것에 그치겠느냐? 너는 반드시 죽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장차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했다.
逾數日,虞邱等奉使命至,取用孫叔敖。母笑曰:「此埋蛇之報也。」敖與其母,隨虞邱歸郢。莊王一見,與語竟日,大悅曰:「楚國諸臣,無卿之比!」即日拜為令尹。孫叔敖辭曰:「臣起自田野,驟執大政,何以服人?請從諸大夫之後!」莊王曰:「寡人知卿,卿可不辭。」叔敖謙讓再三,乃受命為令尹。考求楚國制度,立為軍法:凡軍行,在軍右者,挾轅為戰備;在軍左者,追求草蓐,為宿備;前茅慮無,中權後勁。(前茅慮無者,旌幟在前,以覘賊之有無,而為之謀慮。中權者,權謀皆出中軍,不得旁撓。後勁者,以勁兵為後殿,戰則用為奇兵,歸則用為斷後。)
며칠이 지나서, 우구와 투생이 초장왕의 명을 받들어 손숙오를 데려가 임용하려고 도착했다. 그 모친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뱀을 묻은 선행에 대한 보답이구나.” 했다. 손숙오와 그 모친이 우구를 따라서 영성(郢城)으로 돌아왔다. 초장왕이 손숙오를 한번 만나 그와 하루 종일 대화하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초나라의 여러 신하 중에서 그대와 견줄 사람은 아무도 없소.” 했다. 초장왕은 그날로 손숙오를 영윤으로 임명하였다. 손숙오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농사 짓다가 올라온 사람인데 갑자기 큰 정사를 맡기면 어찌 사람들이 신에게 복종하겠습니까? 청컨대, 여러 대부들의 뒤에서 따르기를 원합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경을 알고 있소. 경은 사양하지 마시오.” 했다. 손숙오가 재삼 사양하다가 결국 명을 받아 영윤이 되었다. 손숙오는 초나라의 제도를 살펴서 군법을 세웠다. 무릇 군대 조직은 군우(軍右)와 군좌(軍左)로 나누고, 군우에 속한 군사들은 전투 준비를 하고, 군좌에 속한 군사들은 마초와 깔개를 구하여 군사들의 숙영을 준비하게 했다. 전대(前隊)는 모려무(茅慮無), 중군(中軍)은 중권(中權), 후대(後隊)는 후경(後勁)이라고 했다. (전대인 모려무는 깃발을 앞세우고 적병의 유무를 살핀다는 뜻에서 꾀하여 살핀다[謀慮]라고 했으며, 중권이라는 것은 모든 군령과 작전 지시가 이곳에 나오니, 외부로부터 흔들릴 수 없다는 뜻이고, 후경은 강한 군사로 뒤를 맡는데, 싸울 때는 기습 군사로 쓰고, 후퇴할 때는 뒤를 끊는 임무를 담당했다.)
王之親兵,分為二廣,每廣車十五乘,每乘用步卒百人,後以二十五人為遊兵。右廣管丑、寅、卯、辰、已五時;左廣管午、未、申、酉、戌五時。每日雞鳴時分,右廣駕馬以備驅馳,至於日中,則左廣代之,黃昏而止。內宮分班捱次,專主巡亥子二時,以防非常之變。用虞邱將中軍,公子嬰齊將左軍,公子側將右軍,養繇基將右廣,屈蕩將左廣。四時蒐閱,各有常典,三軍嚴肅,百姓無擾。又築芍陂以興水利,六蓼之境,灌田萬頃,民咸頌之。
왕의 호위군은 이광(二廣)으로 나누었다. 매 광은 전차 15대로 하고, 전차 한 대에 보졸 100명과 뒤에 25명의 유병(遊兵)이 따랐다. 우광은 축(丑;밤2시), 인(寅;밤4시), 묘(卯;아침6시), 진(辰;아침8시), 사(巳;아침10시) 다섯 시각을 경비하고, 좌광은 오(午;정오), 미(未;오후2시), 신(申;오후4시), 유(酉;오후6시), 술(戌;저녁8시) 다섯 시각을 경비했다. 매일 닭이 울 때가 되면 우광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사방을 순시하다가 정오가 되면 좌광과 임무를 교대하고, 황혼이 되면 순찰을 중지했다. 궁궐의 내시들도 반을 나누어 순서에 따라 해시(亥時;밤10시)와 자시(子時;밤12시)에 순찰하게 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우구를 중군장으로 삼고, 공자 영제를 좌군장으로 삼았으며, 공자 측을 우군장으로 했다. 양요기는 우광의 장수가 되고, 굴탕(屈蕩)은 좌광의 장수가 되었다. 사시(四時)로 군사들을 집합시켜 사열하니, 각 부서에 법이 있어 삼군의 기율이 엄격했다. 그래서 백성들도 동요하지 않았다. 또한 작피(芍陂)에 둑을 쌓아 수리 공사를 일으키고 육(六) 땅과 요(蓼) 땅에 논 만경(萬頃)을 개간하여 백성들이 모두 칭송했다.
楚諸臣見莊王寵任叔敖,心中不服,及見叔敖行事,井井有條,無不嘆息曰:「楚國有幸,得此賢臣,子文其復起矣!」當初令尹子文,善治楚國,今得叔敖,如子文之再生也。是時鄭穆公蘭薨,世子夷即位,是為靈公。公子宋與公子歸生當國,尚依違於晉楚之間,未決所事。楚莊王與孫叔敖商議欲興兵伐鄭,忽聞鄭靈公被公子歸生所弒,莊王曰:「吾伐鄭益有名矣!」
초나라의 여러 신하가 초장왕이 손숙오만을 총애하자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았으나, 손숙오가 처리하는 일이 하나하나가 모두 조리가 있어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르기를, “초나라에 복이 있어 이렇게 현명한 신하를 얻었으니, 자문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라고 했다. 당초 영윤 자문이 초나라가 잘 다스렸는데, 지금 손숙오를 얻어 마치 자문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 것이다. 이때 정목공(鄭穆公) 난(蘭)이 죽고, 세자 이(夷)가 즉위하니, 이가 정영공(鄭靈公)이다. 공자 송(公子宋)과 공자 귀생(公子歸生)이 정나라의 정사를 맡았는데, 그때까지 진(晉)나라와 초나라 사이를 우물쭈물하면서 어느 쪽을 섬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초장왕과 손숙오가 상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치려고 했다. 갑자기 정영공이 공자 귀생에게 시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내가 정나라를 치는 것이 더욱 명분이 있겠구나.” 했다.
不知歸生如何弒君,且看下回分解。
공자 귀생이 왜 군주를 죽였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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