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 의 령 ( 憑 依 靈 )
빙의령이란,
지옥에 떨어진 영(靈)이 그 환경에 견디지 못하고,
이 현상계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조화한 어두운 상념을 갖고 있는 의식(意識)에게,
빙의하고 있는 영(靈)을 말한다.
유유상종의 법칙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일념삼천(一念三千). 선악(善惡) 어느 쪽의 세계로도 통하고 만다.
빙의령은,
옛날 이 현상계에서, 육체를 갖고 생활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랑 생물이다.
그들은 신리(神理)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 사명을 잊고 이기주의로 추락하여.
혹은 금전욕, 혹은 정욕, 혹은 권력 지위에 탐닉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부류이다.
물론 모든 것에의 감사의 마음 따위도 없고,
남은 돌아보지도 않고, 신불(神佛)도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또 마음없는 사상(思想)을 맹신하고,
투쟁과 파괴에 자기자신을 던져서,
욕망을 이루기 위한 폭력, 권력을 흔든다.
언행불일치의 부조화한 인생을 보냈던 영(靈).
신불(神佛)의 이름아래,
사리사욕을 채우고, 모순덩어리의 교의(敎義)를 정법(正法)이라고 설교,
맹신자, 광신자를 만들어내고 만 교조,
신자들도 살아가면서 지옥계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아침저녁으로 근행이나 행사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신앙이라고 하는 생활 속에서 평안함을 잃고,
신벌(神罰), 불벌(佛罰)을 무서워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행동이 동반하지 않는 생활을 해온 사람들의 영(靈)
이상과 같은 사람들이,
신리를 깨닫지 않았기 때문에 부조화한 상념 행위의 인생을 보내고
이 현상계를 떠나, 관성의 법칙대로 생전(生前)과 같은 의식(意識)의 세계로 가고 만다.
그 세계는 생전의 세계보다 더 가혹한 지옥계로서,
그 이상의 괴로운 생활이 재현되어,
그 환경의 생활 속에서 반성하여,
신불(神佛)의 자식이라는 자각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 지상계보다 지옥계가 더 가혹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예로 들면,
추울 경우는 그 추위가 끊임없이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이다. 영원히... )
그러나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지옥으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이 현상계에 같은 사람들의,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내고 있는 의식(意識)에게 빙의하여 생활을 한다.
사람들의 의식(意識)의 조화도에 따라
육체로부터 나오고 있는 후광의 어두운 부분에 장소를 정해 빙의하고 있는 곳이,
질병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영시(靈視), 즉 심안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빙의하고 있는 경우는 그 곳이 하얗게 보인다.
그들은 육체세포의 부조화한 집단의식의 장소에서 살고 있다.
그러한 장소는 위염을 일으키고 있고,
본인도 병적 반응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취해 있는 사람들도, 100% 빙의령이 지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술은 양약(良藥), 이라고 하는 동안은 좋다.
하지만 광기의 물로 변하고 말면,
빙의령의 매개체로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절도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 오랜 세월 사이에 만들어 내고 만 <습관>을 이겨내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리 실천(神理實踐)의 제 일보이다.
자신에게 달콤하고, 타인에게 엄격한 행위를 요구하는 사람은
자기 보존이 강한 사람이며,
자기에게 엄하고, 타인에게 자비심깊은 친절한 행위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진짜의 불심(佛心)이다.
불심(佛心)을 갖춘 사람에게는,
부조화한 빙의령은 빙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음에 구름이 없이 신불(神佛)의 빛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원한, 질투의 마음이 강한 사람에게는,
동물령이 빙의하고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생활을 잘 반성해보면,
육체적 현상으로 되어있어서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질병의 80% 가깝게는 빙의령의 작용이 많다.
이러한 빙의령을 제거하는데는,
그 영(靈)에 대해서, 빙의가 나쁜 것임을 잘 설득함과 동시에,
빙의되어 있는 자도 스스로 정법의 생활,
정법에 맞는 마음의 자세를 실천하는 이외에 방법이 없다.
가령 그 빙의령을 제거해주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어도,
본인의 마음이 정법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악령을 불러들이고 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왕국의 지배자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 이외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그 상념의 바늘이 가리키는 세계로 통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 시시각각 변하는 순간마다.....
마음의 바늘은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즉각 바뀐다.)
빙의의 실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내 친구가 오랜만에 나의 집에 왔다.
서로가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샐러리맨과는 완전히 다른 큰일이다,
등 이야기하면서, 어느새 나의 전문인 영적(靈的)인 것이 화제로 되었다.
이 친구는 영(靈)이라고 하는 단어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충고했다.
" 자네는 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주제에,
그런 비과학적인 것을 말하면 신용을 잃는다.
인간은 현실을 바라보고 일보일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영적(靈的)이라고 말하는 꿈을 쫓는 것은 안 된다.
그것은 인생의 도피이다. 자기 자신을 놓치고 있다"
고 아주 엄격했다.
십 년 가깝게 소식불통이었던 친구라서, 객관적이다.
거기에 고생했던 사람이라서 나오는 말도 엄하다.
나는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약간 경복(敬服)했다.
혼자 살아가는, 작은 회사의 사업주에게는
별로 타인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적다.
나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말해주는 친구를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 충고를 솔직하게 들을 수 있도록 된 나 자신의 마음의 넓이를 깨닫게 된 것이다.
성급했던 나에게는 이 이상의 수확은 없다.
반성하여 자기의 결점을 알고,
결점을 시정하는 것에 의해 높은 경애(境涯)로 마음은 진화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고 실생활이다.
경제학 박사나 경제평론가가 사업을 해도
성공하는 것은 반드시라고 할 수 없듯이,
인생도 이론대로 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