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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장
다행히 암기나 화살들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환한 정경이 빠르게 적응된 망막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얘기책에 나오는 지하 세상처럼 그렇게 넓은 곳은 아니었지만 연무장 몇 개를 합쳐 놓은 것만큼은 되는 공간이 밝은 광채 속에 펼쳐져 있었다.
진우청은 갑자기 나타난 그 공간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진우혁과 하수린, 그리고 원다영 모녀도 통로를 빠져나와 놀란 눈으로 환한 공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들도 이런 공간은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진우청은 고개를 돌려 공간 이곳저곳을 살폈다.
밝은 빛은 햇살만큼 강해, 지하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햇살은 아니었다. 여전히 이곳은 지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통로는 없고 공간만 있었다.
“ 길을 잘못 든 것이오?”
진우청은 원다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가 두 개의 통로에서 착각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 아니에요. 절대로!”
원다영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런데 길이 없지 않소?”
“ 길은 있어요. 단지 그곳이.......”
원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한곳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벽이 스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복면을 쓴 사내 네 명과 노인 두 명!
그들이 밝은 빛 속으로 쏘아져 나와 벽을 막고 섰다.
그곳에 원다영이 말한 길인 모양이었다. 복면인들을 훑어보던 진우청의 눈이 두 노인에게로 옮겨졌고 그중 한 노인에게 멈추며 크게 뜨여졌다.
천만뜻밖으로 안면이 있는 노인이었다. 죽음의 탈출을 감행하던 들판 끝에서 마주친 노인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 노인은 산 끝자락에서 걸어나와 산으로 뛰어들려던 자신을 가로막고 다짜고짜 사문을 묻던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 노인 옆에 더 나이 들어보이는 노인!
특이하게도 눈썹이 없는 백발과 백염의 노인이었다.
“ 당신이 어떻게?”
“ 당신이 어떻게?”
진우청과 구양혜림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구양혜림은 눈썹 없는 노인을 향해서 질문을 던졌고 진우청은 자신과 싸웠던 노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 아는 사람이오?”
진우청은 구양혜림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사문을 묻고 기필코 죽이려 했던 노인이 자신을 살리려 특명을 내린 남패천에 있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고, 그만큼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 저 노인은 우리 남패천 외성에 살며 고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이에요.”
구양혜림이 빠르게 답했다.
“ 두 노인 중 어느 노인 말이오?”
“ 눈썹 없는 노인!”
“ 내가 말한 노인은 그 옆에 있는 노인인데....”
“ 그 노인은 누군지 몰라요.”
“ 젠장!”
결국 진우청이 아는 노인은 구양혜림이 몰랐고 구양혜림이 아는 노인은 진우청이 몰랐다. 어쨌든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로 봐서는 한 통속이라는 말이었다.
특히, 예전에 진우청 자신과 싸웠던 노인이 눈썹 없는 노인 옆에 공손히 시립해 있는 모습으로 봐서는 눈썹 없는 노인이 한참은 더 고수란 얘기였다.
“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나요?”
이번에는 원다영이 눈썹 없는 노인을 향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눈에도 진우청이나 구양혜림 이상의 의혹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대단하군. 여기까지 올 수 있다니...”
눈썹 없는 노인이 대답 대신 감탄사를 토했다.
“ 물론 옆에 있는 그 아이 덕택이겠지?”
노인은 이번에는 진우청을 보며 말했다. 진우청은 시선을 들어 노인의 눈빛을 마주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일견하는 눈빛!
그러나 그 눈빛을 대한 진우청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울렁하는 기분을 느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그리고 그런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진우청은 짧은 순간 의문을 느꼈다.
공포일까? 아니면 본능적인 위기감일까?
공포는 아니었다. 살기를 담은 눈빛도 아니고 무슨 치명적인 공격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기감이었다.
이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언제 그런 느낌을 받았던가 하고 눈 사이를 좁히는 순간 생각이 났다.
황산 동굴에서 수련 중, 물지게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져 편해질 즈음이면 사부께서는 거의 배는 더 큰 물통으로 바꾸어 주셨다.
그때 가슴이 울렁하는 이런 느낌을 받았다. 지독한 부담과 넘기 힘든 벽 같은 물통의 크기! 그것을 보았을 때 꼭 이런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결국에 가서는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배는 더 커진 물통의 무게는 산을 오를 때는 배가 아니라 천 근처럼 느껴졌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졌지만 첫날을 그야말로 내장을 토할 지경이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진우청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축축한 습기가 느껴지는 대기였지만 대기는 언제나 자신이 뿜어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두어 번 더 그렇게 하자 울렁거림의 느낌이 사라졌다.
진우청은 다시 노인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진우청에게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는 노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노인은 아무 말도 않고 잠시 눈에 새기듯이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그때,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가르며 원다영이 입술을 움직였다.
“ 아직 제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녀는 노인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외성은 바깥 세상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비원각주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이상. 그들 개개인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
모든 것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비원각 내에 있는 서류만 잠시 들춰보면 외성에 사는 사람들 개개인이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고서점 주인인 저 노인을 여기서 대하고 보니 전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원다영의 눈빛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닐세. 그럴 만한 여유가 없기도 하고....”
대답을 회피한 노인은 미미하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이제껏 진우청 등이 달려온 지하 통로 쪽에서 둔중한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횃불 빛이 차단되었다.
통로가 막혔다는 말이다.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되돌아가도 무슨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퇴로가 봉쇄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통로가 봉쇄되는 소음이 거의 끝나갈 무렵 눈썹 없는 노인이 한 걸음 다가왔다. 순간, 원다영과 구양혜림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단 한 발짝 움직였지만 노인의 몸에서 해일이 몰려오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으음!”
어느새 자신이 할 걸음 뒤로 물러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원다영은 신음을 삼켰다.
거대한 파도.... 아니면, 거대한 바위산!
그건 천주이자 시아버지인 구양천에게서나 느껴보았지 아직까지 다른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도였다. 일개 고서점의 주인이 이 정도의 기도를 내뿜다니?
원다영은 더 이상 고서점 주인이란 단어를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서점 주인 노인이란 신분은 위장이고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완벽했다.
원다영의 뇌리 속으로 노인이 이곳에 정착했을 때가 언제였던지 떠올랐다.
이 년 전쯤에 노인은 새로운 식구로 이곳 외성으로 들어와 정착하고 고서점을 열었다. 그때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아마 더 철저히 조사를 했다면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 그때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원다영의 뇌리에는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라면 시아버지인 천주가 신비의 장막 속에 가려진 북제성주를 만났던 때였다.
다른 사건들도 많았지만 북제성주와 관련있는 청년, 그리고 그 청년에게 관심을 가지는 저 노인을 연결시켜 보면 그 사건이 제일 연관성이 깊었다.
“ 현덕의 제자더냐?”
한걸음 더 걸어나온 노인은 진우청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진우청은 눈을 끔벅거렸다.
‘ 현덕?’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진우청은 다시 한 번 눈을 끔벅거렸다.
“ 대답을 하거라!”
노인의 목소리가 비수 같은 단호함과 함께 재차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진우청의 입술은 자물쇠를 단 듯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럴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이 노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우웅-
무거운 진동음과 함께 노인의 손에서 다짜고짜 한 가닥 기운이 흘러나왔다. 진우청은 잠시 갈등했다.
옆에 있는 초로인과 싸웠을 때처럼 어깨로 한번 부딪쳐 볼까. 아니면 피해 버릴까 하는 갈등이었다.
진우청은 슬쩍 몸을 이동시켰다. 그건 정말 잘한 선택이란 결론이 즉시 뒤이어졌다.
콰앙-
노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한줄기 기운은 쏘아질 때는 미세한 진동음만 일었지만 벽에 부딪칠 때는 엄청난 폭발음을 일으켰다.
흙먼지와 함께 석벽의 두꺼운 껍질 하나가 벗겨지며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 망할!”
진우청은 노인이 바라는 대답 대신 욕지거리를 토했다.
이젠 정말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문을 묻는 초로인이나... 사부의 이름을 묻는 백염 노인이나....
“ 고얀 놈!”
몇 걸음 다가온 후 그 자리에 선 백염노인이 눈 사이를 좁혔다. 좁혀진 노인의 두 눈에 붉은 빛이 번져 나갔다.
“ 시간이 없으니 우선 장애물부터 치우거라!”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을 한 노인은 나직하게 명령을 내렸다.
“ 존명!”
짧게 끊어지는 대답과 함께 네 명의 사내들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달려나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체격에, 지극히 평범한 차림새들은 복면만 아니라면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방금 막 돌아온 촌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 작대기 속에서 검을 뽑아들고 달려 나오자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과 함께 커다란 경각심이 느껴졌다.
구양혜림의 손이 자연스럽게 체대를 말아 쥐었고 원다영 역시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사방을 살폈다.
“ 정말 지겨운 곳이야!”
짜증 가득한 중얼거림을 토한 진우청은 용곤과 호곤을 하나로 조립해 길게 앞으로 내밀었다. 더 이상의 접근은 불허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우웅-
낮은 으르렁거림과 함께 커다랗게 확대되어 앞으로 내밀어지는 묵빛 쇠몽둥이에 주춤하던 사내들이 두 쪽으로 나누어 더욱 빠르게 달려들었다.
“ 오른쪽을 맡아주시오!”
원다영 모녀에게 소리친 진우청은 바람처럼 왼쪽으로 쏘아지며 용호곤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상체를 쓸어오는 용호곤을 보며 두 명의 사내가 급히 회선보를 밟았다.
휘이잉-
진우청은 튕기듯 용호곤의 방향을 바꾸며 그중 한 명의 어깨를 향해 폭풍처럼 내려쳤다. 사내가 급히 검을 쳐올려 용호곤을 막았다.
까강-
검이 동강날 정도의 소리가 났지만 검은 부러지지 않고 오히려 사내의 검에 부딪친 용호곤이 옆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진우청은 약간은 감탄스러운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검에서 전해져오는 내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 만만치 않은 내력 때문에 검이 두 동강 나지지 않고 오히려 용호곤을 비껴 흘리기까지 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사내는 그 검으로 진우청의 가슴을 찔러왔다.
섬전처럼 쾌속한 일검이었다. 진우청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북면인의 검은 자로 잰듯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찔러들었다.
사내가 찌른 검첨과의 거리는 벌리지 못했지만 뒤로 물러나는 동안 그만큼의 시간은 벌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진우청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던 용호곤을 수평으로 들어 올려 그대로 휘둘렀다.
찔러오던 사내의 검이 더 이상의 전진을 멈추었다. 계속해서 찌르다가는 용호곤에 왼쪽 갈비뼈가 왕창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내는 다시 검날을 비스듬히 눕히며 용호곤을 비껴 흘렸다. 용호곤이 아까보다는 훨씬 더 쉽게 아래로 미끄러졌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사내의 검이 진우청의 허리를 쓸어갔다.
휘익-
검인에서 빈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흘러나오자 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아래로 떨어져 내렸던 용호곤을 짚고 신형을 띄운 진우청의 발 그림자가 사내의 망막을 가득 덮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필사적으로 몸을 틀며 진우청의 발을 피했다.
그 순간 주춧돌 위에 세워진 기둥처럼 진우청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용호곤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사내의 하체를 쓸어갔다.
그건 도저히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집의 무게를 온통 지탱하고 있는 기둥은 쉽게 뽑히지도 않을뿐더러 뽑히는 순간 집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러나 기둥처럼 진우청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용호곤은 너무나 쉽게 뽑혔고 사내의 하체를 쓸어가기까지 했다.
믿어지지 않는 중심 이동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근육들! 인간의 몸으로 그게 가능한가?
사내는 용호곤이 자신의 정강이를 두드리는 순간까지도 그런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퍼억-
사내의 정강이뼈가 썩은 나무토막처럼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답답한 비명 한줄기도 들려왔다.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용호곤을 휘두른 후 바닥에 내려선 진우청은 사내의 다른 쪽 다리마저 부러뜨리며 급히 상체를 뒤로 뉘였다.
다른 한 사내의 검이 조끼처럼 걸쳐 펄럭이는 옷자락을 베고 지나갔다. 누운 상태에서 진우청은 한쪽 손을 어깨 뒤로 해서 땅을 짚었다.
파앗-
진우청의 양다리가 휘었다가 놓은 나뭇가지처럼 튀어오르며 사내의 가슴과 턱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것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몸놀림이었다.
철판교의 수법처럼 드러누웠던 상체가 튕기듯 다시 일어나는 움직임은 예측가능했다. 그런 예측과 함께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는데, 튀어 오르는 것은 상체가 아닌 두 다리였다.
진우청의 몸은 예측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하체가 튀어 오름과 동시에 두 개의 발은 잘못한 예측 때문에 생기는 허점을 눈이라도 달린 듯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래도 수십 년을 갈고닦은 수련 덕분에 한 개의 발은 피해냈지만 다른 한 개의 발이 어깨를 찍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사내의 신형이 주르르 뒤로 밀렸다. 뒤이어 어깨를 통해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수없이 단련하고 수련한 어깨 근육을 무력화시키며 진우청의 발은 사내의 어깨뼈까지 부숴놓은 것이다.
사내는 벌써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주는 왼쪽 어개를 움직이며 팔도 함께 움직이려 했지만 고통만 가중될 뿐, 팔은 바윗덩이처럼 무거웠다.
그 팔을 향해 용호곤이 무섭게 날아들었다. 사내는 급히 몸을 틀었다.
방향을 바꾼 용호곤이 쾌속하게 사내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왔다. 애초부터 용호곤이 노린 것은 사내의 오른쪽 팔이었다.
먼젓번 사내의 두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 전투력을 상실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진우청은 처음부터 과하게 손을 써, 이번에는 두 팔을 못 쓰게 만들어 제압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 무공을 모르는 형과 하수린이 조금이라도 덜 위험해진다.
휘둘러 오다가 갑자기 늘어난 듯 찔러오는 용호곤에 사내는 대경하며 검을 휘둘렀다. 순간 진우청은 손목을 흔들었다.
퍼퍼퍽-
세 개의 파육음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손목을 흔드는 것만으로 연환 공격을 하는 해천 노인의 수법이었다.
“ 크윽!”
사내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렀다. 진우청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사내의 허리를 다시 두드렸다.
사내는 새우처럼 허리를 접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 사내의 신형을 타고 넘으며 진우청은 그물처럼 반대쪽으로 덮쳐갔다.
그 방향은 구양혜림과 원다영이 상대하고 있는 두 사내에게로였다. 남패천주의 큰 며느리와 손녀딸이 누군가에게 쉽게 당할 리는 없겠지만 사내 두 명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두 모녀가 밀리고 있었다.
“ 하앗!”
체대 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구양혜림은 자신의 절기인 빙옥지를 세차게 튕겼다. 다섯 가닥의 서리 같은 기운이 사내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주춤, 움직임을 멈춘 사내가 검로를 변화시켰다. 찔러가던 검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더운 열기를 내뿜었다.
찌이잉-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며 다섯 가닥의 빙옥지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사이로 사내는 쾌속하게 검을 찔러 넣었다.
사내의 검에서도 한 가닥 검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왔다. 구양혜림은 다시 검지를 튕겼다. 이번에는 한 가닥으로 힘을 모은 일지빙옥의 초식이었다. 빙옥지와 검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남패천주의 손녀답게 구양혜림이 튕긴 빙옥지의 위력은 명불허전이었다. 초식에 실린 위력으로는 빙옥지가 월등했다.
그걸 느꼈는지 사내는 손목을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사내의 검기가 흩어지며 빙옥지는 허공을 꿰뚫었다.
사내의 공격은 처음부터 허초였다. 사내는 수많은 실전 경험에서 오는 임기응변의 수법으로 순식간에 열세를 만회한 것이다.
빙옥지를 흘린 사내의 신형이 득달같이 구양혜림에게로 달려들었다. 구양혜림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체대를 휘둘렀다. 온통 자세가 흐트러졌지만 우선은 심장을 노리는 검부터 쳐내야 했다.
파앗-
체대를 관통하며 검은 계속 찔러들었다. 이를 악문 구양혜림은 빙옥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려 왼손에 집중하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집중된 빙옥기는 손바닥을 얼음벽으로 만든다.
이젠 사내의 검첨이 얼음벽 같은 빙옥수에 막히든지, 아니면 얼음벽을 뚫고 자신의 심장까지 꿰뚫든지 극단의 결과만이 남아 있었다.
까앙-
사내의 검첨에서 살을 뚫는 소리가 아닌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자신의 빙옥수가 사내의 검을 막아냈다는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구양혜림은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검첨과 부딪치며 쇳소리를 울린 손바닥에서 아무런 느낌이 전해져 오지 않았다.
아무리 빙옥수가 위력적이어도 사내의 검첨에 실린 힘이 만만치 않으니 찌르르 손목을 타고 드는 느낌이 있어야 했다.
‘허초!’
또 한 번 속았다는 생각을 한 구양헤림은 벼락처럼 신형을 틀었다. 허초 뒤에 따라오는 실초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쨍그랑-
놀란 구양혜림의 망막으로 사내의 검이 반토막 나며 바닥에 뒹구는 장면이 들어왔다.
퍼억-
뒤이어 사내의 허리에서 파육음이 터지며 사내는 던져지는 짚단이 되어 뒤로 날아갔다. 구양혜림은 바람처럼 횡으로 쓸어가는 용호곤을 쳐다보았다.
사내의 검첨에 부딪친 손바닥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손바닥에 부딪치기 전에 검은 반 토막 난 채 꺾였던 것이다.
‘ 이제 한 명!’
세 명의 사내들을 순식간에 때려눕힌 진우청은 나머지 한 명의 사내를 향해 덮쳐들었다.
구양혜림과는 달리 원다영은 어렵지 않게 사내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백염 노인의 말대로 떨거지는 최대한 빨리 치워 버리는게 나았다.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두 노인으로도 벅찰 것이 분명했다.
휘이잉-
용호곤이 천강음을 토하며 사내의 가슴을 쓸어갔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용호곤에 사내는 급급히 퇴보를 밟았다.
손목을 비튼 진우청은 휘두르는 속도 그대로 찔러들었다. 사내가 용호곤을 향해 검을 쳐올리는 순간, 진우청은 두 눈을 부릅뜨며 반대쪽을 향해 땅을 박찼다.
백염 노인 곁에 잇던 초로인이 형과 하수린에게로 짓쳐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떨거지를 치우라는 명령을 받고 달려들었던 부하들이 진우청 때문에 오히려 떨거지가 되어 순식간에 바닥으로 뒹굴자 초로인은 진우청의 움직임을 봉쇄하려 비열한 수작을 벌이는 것이다.
“ 비열한 노물!”
진우청은 씹어 삼키는 듯한 소리를 뱉으며 초로인을 향해 용호곤을 던졌다. 톱니처럼 회전하며 날아오는 용호곤을 피하기 위해 신형을 멈춘 초로인은 황급히 양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진우청이 들소처럼 부딪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웅-
어지럽게 교차하는 노인의 양 손바닥에서 붉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건 이미 들판에서 견식해 본 적이 있는 장력이었다.
진우청은 왼손을 활짝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두 개의 손바닥이 부딪치는 거의 같은 순간에 벽에 부딪친 용호곤에서도 충돌음이 터지며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한 손으로 초로인의 장력을 막아낸 진우청은 튀어나오는 용호곤을 잡아챘다. 그리고 초로인의 머리를 박살낼 듯 내려쳤다.
자신을 방해하기 위해 무공도 모르는 형과 하수린을 공격하려는 비겁한 행동에 더할 수 없는 분노가 담긴 일격이었다.
퍼엉!
폭음이 터지며 용호곤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진우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용호곤을 멈추게 한 것은 놀랍게도 앙상한 손이었다.
희끗한 그림자를 뿌리며 나타난 백염노인이 초로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용호곤을 손바닥으로 떠받치고 있었다.
“ 소문 이상이구나!”
여전히 손바닥 위에 용호곤 끝을 올려놓은 채 나직하게 말한 백염 노인은 초로인을 쳐다보았다.
“ 너는 저것들이나 처치해라.”
백염노인은 남은 사내 하나를 합공하고 있는 원다염 모녀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존명!”
초로인은 고개를 숙인 후 땅을 박찼다. 진우청은 용호곤을 잡은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초로인이 가세한다면 원다영 모녀는 훨씬 더 위험해진다.
그럼 형과 하수린도 마찬가지다. 초로인과 복면 사내 중 한 명은 자신의 손으로 처치해야 안심할 수 있다.
“ 이제부터 네 상대는 나다!”
힘이 들어간 용호곤 끝을 움켜쥔 백염 노인은 진우청을 막아서며 손을 움직였다.
스스스-
노인의 손이 쓰다듬듯 용호곤을 타고 올라왔다. 진우청은 세차게 손목에 힘을 주며 용호곤을 흔들었다. 그러나 노인의 손에 빨판이라도 달렸는지 용호곤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 현덕의 제자인지부터 확인해야겠구나.”
순식간에 용호곤 끝까지 타고 올라온 노인의 손이 갈고리처럼 진우청의 손목을 잡아왔다. 맥문을 짚어 내력을 확인하겠다는 수법이었다. 아울러 제압까지....
“ 하앗!”
용호곤을 놓은 진우청은 그 손으로 주먹을 말아 노인의 면상을 향해 냅다 갈겼다.
약간의 노기와 약간의 어이없는 빛이 담긴 안광을 내뿜으며 상체를 흔든 노인은 여전히 진우청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왔다.
진우청은 주먹을 뒤로 빼며 발등에 걸린 용호곤을 강하게 걷어찼다. 용호곤이 튕겨오르며 노인의 허리를 쓸었다. 노인은 진우청의 맥문을 잡으려는 의도를 포기하고 손을 뒤로 뺐다.
뒤이어 노인의 손이 한층 더 빠르게 움직이며 넓은 옷소매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까앙-
노인의 옷소매와 용호곤이 부딪친 곳에서 쇳소리가 터졌다. 펄럭거리던 옷소매가 칼날처럼 날이 선 채 용호곤을 튕겨내는 소리였다.
어이없는 심정이 된 진우청은 노인의 소맷자락 속을 살폈다. 그 속에 숨겨진 무기나 암기가 있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무기는 옷소매 자체였다.
그건 소매에 공력을 불어넣어 칼처럼, 방패처럼 사용하는 철수공의 수법으로 공력의 고하에 따르 그 소맷자락은 무쇠 방패보다 더 단단해질 수도 있었고, 칼보다 더 날카로워질 수도 있었다.
백염 노인의 소매는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
이제껏 그 어떤 도검과 부딪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던 용호곤 끝에 미세한 자국이 새겨졌다. 진우청은 노인의 옷소매에 부딪쳐 튕겨져 나온 용호곤을 다시 잡았다.
노인의 팔이 움직이며 칼날이 되어 있던 옷소매가 범선의 돛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노인의 손이 튀어나왔다.
진우청은 잡은 용호곤에 힘을 다 쏟아 부을 새도 없이 용호곤을 찔러넣었다. 노인은 손바닥을 활짝 편 채 용호곤 끝 단면을 쳐왔다.
퍼엉! 하는 폭음과 함께 진우청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으윽!’
온 팔에 바늘이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진우청은 신음을 삼켰다. 노인의 손에서 뻗어나오는 내력은 가히 짐작을 불허했다.
진우청은 마주한 상대에게서 두 번째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첫 번째는 사부와 마주했을 때였다. 사부는 그에게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황산 소나무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처럼, 허공에 떠 있는 구름처럼 허허로우면서도 황산 전체보다 더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부와 마주 설 때면 진우청은 언제나 경탄 가득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이 두 번째였다. 사부에게서 느꼈던 두려움과는 달리 뭔가 달랐지만 눈썹 없는 백염노인의 존재는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쨍!
진우청은 저려오는 팔에 두텁고 긴 숨결 한 가닥을 불어넣으며 용호곤을 분리했다. 팔의 통증이 사라지며 불끈 오기가 솟구쳤다.
가슴 밑 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오기!
그것이 사부에게 느꼈던 두려움과 노인에게서 느끼는 두려움의 차이였다. 사부에게서 느꼈던 두려움은 이런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그건 공경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선망 가득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 노인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은 두터운 반감도 같이 불러 일으켰다.
이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사부에게서 느꼈던,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두렵기는 하지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진우청은 양손에 든 용곤과 호곤을 더욱 굳게 잡았다. 용곤과 호곤을 움켜쥔 진우청의 몸에서 폭풍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기세는 순식간에 몸속으로 갈무리되며 진우청의 존재는 황산의 솔바람처럼, 운해처럼, 그리고 사부의 숨결처럼 변해갔다.
“ 현덕의 제자가 맞구나.”
온몸으로 발출되는 진우청의 기세를 읽은 노인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 그렇다면 창룡금시도 가지고 있겠지? 그것으로 북문을 열라는 명령을 받았느냐?”
노인은 여전히 뜻 모를 말을 토하며 찌르는 듯한 눈빛으로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아까보다 한층 더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노인의 눈빛을 잠시 마주하던 진우청은 원다영 모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초로인의 가세로 인해 두 여인은 다시 수세로 몰리고 있었다. 비원각주 원다영이 초로인을 맡고, 구양혜림이 복면인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두 여인에게 그들은 모두 벅찬 상대였다.
“ 네놈은 사부로부터 존장지례를 배우지 못한 모양이구나.”
자신의 질문에 단 한번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은 진우청을 향해 노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진우청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노인에게서 지독한 짜증을 느꼈다.
“ 멀쩡한 벽에 똥칠하는 소리 그만 하고 이 지겨운 굿판도 이제 그만 끝냅시다.”
진우청은 만사 귀찮은 음성으로 말했다.
“ 고얀!”
일갈과 함께 노인의 신형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진우청은 들숨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시며 온몸을 뜬구름처럼 가볍게 만들었다.
휘익-
흐릿한 잔상을 남긴 노인의 손이 진우청의 가슴을 쳐왔다. 진우청은 구름처럼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노인의 공격을 피했다.
“ 후후! 현덕에게서 배운 몸놀림이냐?”
노인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진우청의 움직임을 충분히 읽고 있다는 자신감에 차 미소였다.
노인의 신형이 더욱 희미하게 잔영을 뿌렸다. 진우청은 아랫배 밑바닥에 뭉쳤던 호흡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움직임은 벅차게만 느껴졌다.
다 늙어 고목처럼 쭈그러진 근육과 뼈마디 어느곳에서 저런 엄청난 기운이 뻗어나오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인의 신형은 빠르게 움직였다.
극강한 내력!
그것이 굳어가는 근육과 뼈마디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신형을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파아앗!
흐릿한 잔상 속에서 노인의 왼쪽 소매가 청룡도처럼 넓게 펼쳐져 진우청의 가슴을 베어왔다. 용곤으로 마주쳐 가던 진우청은 본능적으로 호곤도 같이 내밀었다.
칼날 같은 소맷자락이 그림자를 뿌리며 순간적으로 다섯 개로 변해 있었다.
쾌가 극을 이르러 환으로 펼쳐지는 공격!
까가강-
세 개의 소매가 용곤과 호곤에 연속으로 부딪치며 쇳소리를 뿜어냈다. 그 순간 진우청의 노리 속에서 맹렬하게 경종이 울려댔다.
용곤과 같이 호곤을 휘두를 때 느낀 노인의 소맷자락은 분명 다섯 개였다. 그런데 세 개밖에 마주치지 않았다.
진우청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며 옆으로 이동했다. 그건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움직인 동작이 아니었다.
고양이의 수염처럼 민감하게 깨어 있는 솜털과 세포들, 그리고 활짝 열려 있는 모공이 의식에 앞서 먼저 위험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팟!
파앗-
두 개의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소매를 떼어내고 조끼처럼 걸치고 있던 진우청의 상의 두 곳에 미세한 선이 그어졌다.
일반적인 검으로서는 만들수 없는, 일세의 보검으로나 새길 수 있는 섬뜩한 자국이었다.
주르르!
옷에 새겨진 선이 벌어지며 가는 선혈이 흘렀다. 머리칼 한 올 차이였지만 분명 피했고, 단추를 채우지 못해 펄럭거리는 옷깃만 잘렸는데 그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 우, 우청아!”
진우혁이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하수린을 몰아붙이듯이 구석에 밀어 넣고 혹시 모를 위험에 자신의 몸으로 막으며 서 있던 진우혁은 가공할 백염 노인의 기세에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굳어 있다가
동생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른 것이다.
무공은 익히지 않았지만 귀혼마진을 통과할 때 움직이는 동생의 몸놀림을 보며 십 년 동안의 공부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남패천주의 손녀와 큰며느리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복면 사내 세 명을 순식간에 때려눕히는 모습으로 봐서 보통의 고수가 아니라는 것 또한 느꼈다.
하지만 백염 노인의 움직임은 공포스러웠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진우혁으로서는 흐릿한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결국 노인의 공격에 동생의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진우혁은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 형!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마!”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서는 진우혁을 보며 진우청은 고함을 질렀다. 진우혁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고 진우청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백염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때 기관음이 한층 가까이서 울려왔다. 누군가 바깥에서 이곳으로 접근하며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기관음을 들은 노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초조한 빛이 어렸다.
“ 창룡금시를 내놓아라!”
약간 다급한 고함과 함께 백염 노인의 몸이 다시 안개 속으로 파묻히듯 움직였다.
진우청은 미끄러지듯 왼쪽으로 신형을 이동시켰다.
파앗-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노인의 손이 진우청의 가슴을 쳐왔다. 아까보다 한층 더 빨라진 움직임이었고 한층 더 맹렬한 기세였다.
‘ 이건 대체...’
진우청은 무의식적으로 용곤과 호곤을 겹쳐 막으면서 신음을 삼켰다. 현덕이니, 창료금시니 하는 말도 금시초문이었고 이런 무위도 산을 내려온 후 처음이었다.
사부의 몸놀림에 버금가는 움직임었고 무위였다.
휘익-
열십 자로 겹친 용곤과 호곤 사이로 노인의 손이 파고들며 가슴을 쳐왔다. 막거나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아니, 노인의 손이 너무 빨랐다. 진우청은 천룡탄주의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신형을 틀었다.
퍼억!
어깨에서 격타음이 터졌다. 뒤이어 옷이 타오르는 매캐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 우청아!”
진우혁의 고함소리가 다시 울렸다. 노인의 일장을 어깨로 받은 진우청은 우두커니 서서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도 정말 의외라는 표정으로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노인의 시선이 진우청의 어깨로 모아졌다. 진우청도 묵묵히 자신의 어깨를 쳐다보았다.
걸쳤던 옷은 새까맣게 탄 채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그 아래로 맨살이 드러났다. 옷처럼 타지는 않았지만 벌건 손자국 한 개가 맨살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어깨를 쳐다보는 진우청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 당신이군!”
잠시 후 진우청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무슨 소리냐?”
노인은 여전히 불신 어린 시선을 진우청의 어깨에 고정시킨 채 물었다.
“ 내 사부의 허리에 나 있던 상처가 항상 궁금했는데 노물...... 당신 짓이었군.”
구름처럼 허허롭고 바람처럼 초연한 사부였지만 다 떨치지 못한 세속의 무게 한 줌은 가슴 깊이 감추고 있었다. 무딘 놈이었지만 그건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백지에 찍힌 미세한 점 하나만한 것이엇지만 백지가 너무 깨끗했기에 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부의 왼쪽 허리에 나 있던 상처!
맹수의 발톱에 다친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의 손자국 같기도 했다. 궁금했지만 그런 것은 말씀해 주실 사부가 아니기에 덮어두었다.
그 상처 자국이 지금 백염 노인의 손을 통해 자신의 어깨에도 찍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부의 허리에는 상처로 남아 있었고 자신의 어깨에는 자국으로만 남아 있었다.
천룡탄주의 기운을 끌어올려 튕겨내지 않았다면 어깨에 찍힌 자국은 사부의 허리에 남겨진 상처와 똑같은 모양일 것이다. 노인을 쳐다보는 진우청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역시 현덕의 제자가 맞구나. 그놈이 결국 제자까지 키웠구나! 그렇다면 창룡금시는 네놈에게로 전해졌겠지?” 백염 노인은 씹어 삼키듯 말했다.
“ 창룡금시를 가지고 있다면 내놓아라! 그건 네놈 사부와 네놈의 물건이 아니다.”
노인은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 난 그런 것 따윈 모르오.”
진우청은 분노가 담긴 음성으로 고함을 쳤다.
“ 네놈 사부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렇다고 달라질 게 없거늘... 비상하는 용이 새겨진 열쇠! 그걸 보지 못했다는 말은 않겠지?”
노인은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생각 부스러기 한 조각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눈으로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 냄새 나는 입 제발 그만 좀 벌리시오.”
진우청은 짤막하게 답하고는 용호곤을 들어 올렸다. 초로인을 맞상대해 싸우는 원다영이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고, 구양혜림도 마찬가지였다.
거듭된 노인의 질문에 궁금증이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한시라도 빨리 노인과의 결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훨씬 앞섰다.
“ 반도의 제자답구나!”
여전히 뜻 모를 말과 함께 노인은 갑작스럽게 손을 뻗어왔다.
갈고리처럼 오무린 손이 걸리는 것은 모두 찢어발길 듯이 다가왔다. 용곤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진우청은 갈고리를 향해 세차게 휘들렀다.
순간 노인의 옷소매가 둥글게 휘말리며 용곤을 감쌌다. 진우청은 호곤을 휘둘러 노인의 팔뚝을 쳐갔다.
노인의 오른쪽 소매도 똑같이 휘말리며 호곤도 감쌌다. 용곤과 호곤을 감싼 노인의 옷소매가 밧줄처럼 옭아맸다.
“ 가상하긴 하다만 아직 멀었다.”
용곤과 호곤을 묶은 노인이 소매를 부풀리며 주먹을 뻗었다 뒤로 뺐다가 휘둘러 오는 주먹이 아니었다.
그냥 용곤과 호곤을 소매로 옭아맨 상태에 반동없이 가볍게 밀어 넣는 주먹이었다. 그런데 그 주먹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밀려왔다.
그냥 마주하기에 너무 무거운 힘이었다. 용곤과 호곤으로 막거나, 아니면 그것을 놓고 손바닥으로 마주쳐 막아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용곤과 호곤을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마치 아교로 붙여 놓은 것 같았다.
퍼엉-
폭발음 같은 파육음이 진우청의 가슴에서 터졌다.
“ 크윽!”
진우청은 비명을 토하며 또 한 번 주르르 뒤로 밀려갔다. 마치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건 사부가 날린 호두알을 처음 맞았을 때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사부께서는 살 깊은 어깨나 엉덩이 쪽으로 호두를 날렸지만 지금은 가슴 한쪽에 정통으로 맞았다.
용곤과 호곤을 놓고 물러섰다면 이런 충격은 받지 않았을 것인데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순간은 도저히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을 떼는 동작을 포기하고 천룡탄주의 기운만 급히 끌어올렸는데 충격이 컸다.
쉬이이-
갈고리 같은 노인의 손이 다시 뻗어왔다. 손과 옷소매들 중 어느 것이 진짜로 공격해 들지 알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진우청은 용곤과 호곤을 동시에 폭풍처럼 휘둘렀다. 손이든 소매든 산꺼번에 쳐내겠다는 움직임이었다.
펄럭-
노인의 소매가 활짝 펼쳐지며 장막처럼 앞을 가렸다. 진우청은 순간적으로 사방에 온통 먹구름이 펼쳐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 먹구름이 이번에는 용호곤뿐만 아니라 온몸을 빨아들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저 먹구름 어느 속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의식에 앞서 몸이 먼저 감지했다. 공격은 소매 안에서가 아니라 아래쪽에서였다.
노인의 발이 아래쪽에서 포탄이 터지듯 솟아오르며 복부를 쓸어왔다.
진우청은 맹령하게 신형을 회전시키며 노인의 정강이를 용곤으로 두드려 갔다. 용곤 끝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올려 차오던 노인의 발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쐐애액-
사라졌던 노인의 발이 섬전처럼 휘돌며 명치를 찍어왔다. 진우청은 호곤을 급히 앞으로 내밀어 노인의 발바닥을 막았다. 처음 노인의 일장이 어깨에 작렬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
노인의 발은 용호곤이 앞으로 나서는 것보다 간발의 차이로 앞서며 명치로 날아들었다. 명치에 제대로 된 일격을 맞고 멀쩡할 사람은 없다.
특히 이런 막강한 힘을 뿜어내는 노인의 일격이라면 더욱 그렇다.
발끝이 닿는 순간 암경이 먼저 밀려들 것이고, 갈비뼈가 부시지기도 전에 온 내장과 혈맥이 터져 혼백마저 터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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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ㅎ
잘읽었습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잘봅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
파육음이 들리면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여기지??
ㄳㄳ
즐독요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