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여행12차 내몽고 참가자 신현수 선생님의 글입니다. ^^
[공정여행 송년회 후기2] 신현수의 우리나라 여행. 14 - 창덕궁 후원, 북촌
불로문은 경복궁역에도 설치해 놓았다. 불로문을 지나 숙종 때 만든 애련지와 애련정을 건너다 봤다. 숙종은 이름을 ‘애련’이라고 지은 이유를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이라 지었다'고 말했다. 연꽃 같은 인물이 더욱 절실히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연경당으로 갔다. 연경당은 역시 효명세자가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지은 120여칸의 민가형식의 집이다. 한 칸이란 방 한 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를 말한다. 사랑채와 안채로 나뉘어져 있고, 집 앞에 말을 타고 내릴 때 딛는 돌이 있다. 그게 바로 김원중 노래 ‘직녀에게’에도 나오는 노둣돌이 있다. 사랑채의 당호가 연경당이다. 오른쪽 끝에는 서재와 서고로 이용하던 선향재가 있다. 서향이라 차양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연경당 입구에 있는 괴석들은 조선 8도에서 모아온 것들이다.
낙엽 깔린 길을 내려가니 반도지라는 이름의 한반도 모양의 연못이 나온다. 이름을 보니 분명 대한제국 말이나 아니면 일제 때 우리나라를 반도에 불과한 나라라고 깎아 내리기 위해 지어진 것 같다. 반도지 끝에 있는 정자가 관람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지붕이 부채꼴인 정자는 많지만, 평면이 부채꼴 형태의 정자는 이곳 관람정이 유일하다.
옥류천은 인조 때 조성한 개울이다. 인조 때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잔이 한 바퀴 돌아오기 전까지 시를 지어야했고 못 지으면 벌주를 마셨다. 암벽에는 시문도 새겼다. 주변에 존덕정, 청의정,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등의 정자를 적절히 배치했다.
후원에는 앵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감나무, 배나무, 산딸기나무, 다래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도 많이 심어졌다.
약 두 시간에 걸쳐서 후원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출구 쪽에 천연기념물로 나이가 약 700살로 추정되는 늙은 향나무가 있는데 용틀임 듯한 줄기가 장관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태풍에 가지가 많이 부러졌다.
돈화문은 창덕궁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불에 탔지만 광해군 때 중건한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궁궐의 대문이다.
궁 밖으로 나오니 벌써 점심 먹을 시간. 비원칼국수집에 가서 만두전골을 먹었다. 굴전, 모듬전 을 안주로 맑은 동동주도 한 잔 했다. 새벽 5시까지 퍼먹고, 또 술을 몸 안으로 집어넣으니 ‘몸뚱아리’가 해도 너무 한다고 내게 욕을 했다. 내 ‘몸뚱아리’에게 조금 미안했다. 미안한 건 또 있다. 모임에 아무 공헌하는 바도 없이 숟가락만 하나 달랑 들고 와서 먹기만 한다. 일박이일의, 더구나 버라이어티한 송년회 행사를 주관하기 위한, 수명씨를 비롯한 집행부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움이 많았을 터. 아, 그래도 이번엔 나도 한 일이 조금 있네. 사진 찍었구나.
북촌투어를 시작했다. 북촌은 지난번 <신현수의 걷기여행> 쓰느라 일박이일이나 투어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히 봤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불성설.
점심을 먹고 나서 칼국수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그곳이 바로 북촌일경. 원서동 쪽에서 내려다보이는 창덕궁의 경치다.
창덕궁 담을 따라 원서동을 걸었다. 잠시 지난번에 썼던 글을 다시 한 번 울궈먹어 보자. 원래 북촌은 청계천 또는 종로(종로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길이다. 종로길을 피해 다니기 위해 종로길을 따라 좁게 만든 길이 피맛길이다)의 북쪽을 뜻하지만, 현재는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인 율곡로의 북쪽을 말한다. 율곡로 북쪽 중에서도 주로 삼청동길(=사간동길)에서 창덕궁길(=원서동길)까지를 북촌으로 부르고 있다. 율곡로에서 북촌으로 이어진 길은 대충 6개 정도가 되는데, 맨 왼쪽이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삼청동길,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시작하는 감고당길,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별궁길,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가회로(재동길), 안국역 3번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면 현대빌딩이 나오는데 거기서 시작하는 계동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덕궁 담장을 따라 난 창덕궁길(=원서동길)이 있다. 편의상 북촌을 직사각형으로 생각한다면, 가운데 열십자의 모양으로 길이 나있는데 세로로 난 길이 가회로이고, 가로로 난 길이 북촌길이다. 삼청동길이 가장 번화하고, 가회로가 이른바 메인 로드이며, 계동길이 북촌의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이므로 당연히 길지 중의 길지다. 그러니 주로 세도가들이 모여 살았고, 그래서 아무 아무개 집터가 많은 거다. 반대로 남촌, 즉 현재 남산 근처는 가난한 선비나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다. 딸깍발이니, 남산골샌님이니 하는 말들이 그래서 나왔다. 책만 읽느라 찢어지게 가난했던 허생전의 주인공인 허생의 집도 남산골이었다. 일제는 북촌의 힘을 빼기 위해 남산 근처를 집중 개발했고, 그게 현재 명동과 충무로 등이다. 북촌에 살던 세도가들이 힘을 잃으면서 그 집안의 유물들이나 세간(=살림에 쓰는 온갖 물건)들이 밖으로 흘러나왔고, 그것들이 거래되던 곳이 풍문여고 길 건너 인사동이다. 하기야 율곡로는 일제강점기 때 창덕궁과 종묘의 맥을 끊기 위해 만든 길이니까 그때는 길 건너도 아니다.
길에서 어느 아주머니 둘이 팥죽을 쑤어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준다. 아 동지가 멀지 않았구나. 이처럼 북촌은 서울 한복판이지만 아직도 공동체가 살아있는 곳이다. 이 길 풍경이 북촌이경이다. 궁중음식원을 지나 창덕궁의 궁녀들이 빨래하던 빨래터(라고 하니까 빨래터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모습은 무슨 하수구 같다)를 구경했다.
빨래터에서 올려다 보이는 건물이 한샘디자인 연구소, 그 왼쪽이 백흥범가이고, 다시 그 왼쪽이 L그룹 일가의 집이다.
일부러 뚫어 놓았는지 대문 밑으로 주둥이를 내밀고 있는 애완견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이 자식들이 우리와 헤어지는 게 아쉬웠는지 담장 위에까지 올라와서 배웅을 해준다.
학교가 드라마에 나온 후 학용품이 아니라 브로마이드만 파는 중앙고 앞의 문방구를 지난 가회로로 나왔다.
가회동성당은 바로 길가에 있었군. 지난번 투어 때는 못 찾았었는데. 지금은 몇십년째 냉담중. 언제 다시 성당에 나가게 될지.
북촌의 랜드마크, 돈미약국을 지나 북촌사경으로 갔다. 북촌사경은 남의 집 축대 위에 올라가 북촌을 내려다보는 것. 한옥 지붕이 한국적이다. 그러나 그 집은 좀 짜증나시겠다.
드라마 등을 찍어 유명한 가회동 31번지로 갔다. 올려다보는 풍경이 5경, 내려다보는 풍경이 6경. 좀 억지스럽지만.
여기서 잠시 한 번 더 내 글을 울궈 먹어보자. 가회동 31번지는 서울시에서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한 곳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가회동 31번지는 한옥은 아니다. 일제 때 큰 필지를 잘게 쪼개 집을 여러 채 짓느라 담장과 지붕과 처마가 맞닿은 변형한옥으로 지었다. 그렇더라도 가회동 31번지는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을 자아낸다. 그래서 이곳은 서울시에서 정한 이른바 ‘북촌팔경’에 2개나 들어간다. 올려다본 풍경과 내려다본 풍경. 약간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1박2일 프로그램 때문인지, 잦은 드라마 촬영 때문인지 골목은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내외국인으로 몹시 붐빈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이런 현상이 썩 달갑지만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한옥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져 이곳의 집값과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땅 한 평(=3.3㎡)에 5000만원이란 얘기도 있고, 1억원이란 얘기도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곳도 돈 많은 사람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올려다본 풍경에서 단체사진을 한 장 찍었다. 무턱대고 셔터만 누르는 내 사진실력은 언제 늘까?
삼청동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촌의 ‘몽마르트’로 불리는 화개1길로 올라갔다. 경복궁 민속박물관 오른쪽으로 건물이 하나 보인다.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 북촌8경을 밟고 내려간다. 경치를 밟고 내려가다니 그게 무슨 말인고? 북촌팔경은 삼청동길 쪽에서 화개1길 쪽으로 올라오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계단이다. 그런데 바위를 그대로 계단처럼 깎았다. 그래서 8경에 들어간다.
이제 일박이일의 공정여행카페 송년여행을 마쳐야 하지만, 서강대에서 은퇴하신 정교수님이 점심 먹고 나서 제안하신 교수님댁 가정방문이 남았다. 어제부터 시작된 강행군으로 약간 피곤했지만, 언제 다시 가보겠냐 하는 마음으로 교수님을 따라 나섰다. 삼청동길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무슨 수문장 교대식을 하는가 보다. 광화문을 보고 았으니 ‘쥐20’에 맞추기 위해 완공을 서두르다가 현판에 쩍 금이 갔다는 보도가 생각난다. 또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고궁박물관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실 유물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대만 등 다른 나라에 비하면 박물관의 외관이 너무 초라하다. 경복궁역에 불로문 모조품이 설치 되어 있다. 늙지 않기 위하야 일부러 이 밑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도 있나?
3호선을 타고 홍제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1번을 타고 미성아파트 앞에서 내려 걸어올라 가서야 교수님 댁이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간 만큼 전망이 대단했다. 도저히 서울이라고 할 수 없는 산속에 지어진 집이었다. 거실 문을 열고 나가니 바로 그냥 바로 산이다. 1층과 2층, 천장까지 뚫어서 천장 위로 해가 시간 맞춰 지나다닌다.
맥주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일박이일동안에도 못다 나눈 이야기를 펼쳤다. 사실 난 처음 보는 분들도 많다. 난 공정여행을 10차 때 다녀왔는데, 10차는 한 명도 없다. 특히 처음에는 낯을 많이 가려 불편할만한데, 어느새 무장해제가 되어버렸다.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른데 이렇게 급친해지는건 아마도 여행을 좋아하는 등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모인 카페 회원들이라 그럴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집사람’이란 단어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지 하는 얘기에서 시작되어, 주로 남녀 간의 평등에 관한 토론이 많았다. 뭐 쉽게 결론내기 어려운 주제지만.
어른 없는 세상에, 정교수님 처럼 젊음이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면서 오히려 생각은 더 열려 있는 어른이 계셔서 다행이다. 밖으로 나오니 빗방울이 듣는다. 늦게 참석한 H신문 L기자가 서울역까지 태워다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대전에 있는 친구와 외모와 말투가 똑같은지 너무 신기했다. 다음에 한 번 함께 만나게 해줘야지. 비록 하루만 참가했지만 새로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난 이날 동생도 하나 얻었다. 청주에 사는 카페명 ‘지리산’이 나랑 너무 닮았단다. 뭐 그리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ㅋ), 어쨌든 동생을 한 명 얻었으니 반가운 일이다. 여행은 나를 낮추는 일인데 아직도 남에게 먼저 말거는 일에 서투르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먼저 말을 붙여야 하는데, 아직도 그게 잘 안 된다. 전날 출판기념회부터 공정여행카페 송년여행까지 일박 이일의 강행군이 서서히 끝나고 있다.
끝.
첫댓글 저 가온이에요^0^요번 송년회 재밌었어요..다음 송년회 때 뵈요^3^안녕히계세요~!
이날 저흰 일찍 나왔는데, 다들 즐거우셨나요! 사진으로 다시보니 그 때 생각이 또 가득히 느껴지네요. 모두 새해복 많이 받으시구요. 보고싶습니당~~
단체사진에서 엄청 낯익은 사진을 보다가 고민해보니 후배라는요.,,,,,,,, ㅋ
형님! 그날 얻은 동생 지리산입니다. 답글이 늦었네요. 그날이 엇그제처럼 생생합니다.
다음 모임때 뵙길바랍니다. 신학기라 무척 바쁘시겠네요 수고하세요.... 썩 유괘하지 않은(ㅋ)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