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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 50년』 리카르도 캐신 저
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 이용대
《등산 50년》(50Years of Alpinism)은 이탈리아 알피니즘의 대부 리카르도 캐신(Cassin, Riccardo 1909-2009)이 남긴 등반 50년의 회고록이다. 사람들은 그를 “대장장이 캐신”이라 불렀다. 이런 별명이 붙여진 배경은 그가 1947년부터 피톤, 카라비너, 해머 등 금속제 장비 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그가 직접 제작한 ‘캐신’이란 상품명의 암벽 장비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한국 산악인들에게 캐신(현지에서는 ‘카신’으로 불린다.)의 이름이 익숙한 것은 1970-80년대 그가 제작하여 보급한 하켄. 아이젠. 피켈 해머. 카라비너와 같은 ‘캐신 브랜드’ 때문일 것이다.
캐신은 2차 세계대전 전후세대를 연결하는 이탈리아 등반계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세계 등반 사에서 193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곧 전설이며, 등반의 역사에 기록된 중요한 초등 몇 개는 곧 그의 이름과 동의어다.
캐신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레코(Lecco)에 살면서 그리냐(Grigna)의 석회암장에서 1926년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 신 등반 그룹(New Italy Climbing Group)을 결성하고 이를 주도하면서 서부 알프스와 돌로미테 등지에서 6급의 암벽 등반 시대를 열어 나갔다. 1934년 이탈리아의 국민적인 클라이머로 추앙 받는 인공등반의 마술사 에밀리오 코미치를 처음 만나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인공등반의 신기술을 전수 받아 돌로미테의 거벽을 차례로 정복해나간다. 그는 코미치를 만나기 전 까지는 압자일렌 하강기술도 모르는 상태였으며 바위에서 양손으로 줄을 잡고 하강할 정도로 기술적으로 미숙한 상태였다.
코미치를 만난 후 그의 등반기술은 일취월장한다. 언제나 디렛티시마를 추구한 코미치는 “정상에서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다음, 그 선을 따라 오르고 싶다”라는 말로 자기의 등반 스타일을 표현했다. 캐신은 코미치 특유의 이런 등반 철학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굽힐 줄 모르는 투혼으로 알프스등반 사를 새로 쓴 ‘대장장이’
캐신은 1935년 치마 오베스트 북벽(Cima Ovest ,North Face. 2974m)과 1937년 피츠 바딜레 북동벽(Piz Badile, N.E. Face. 3308m)을 초등한다. 그의 생애 최대 업적은 1938년 단 한 번의 시도로 이룩한 그랑드조라스 워커릉(Grandes Jorasses Walker Spur) 초 등반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굴할 줄 모르는 투혼을 지닌 인물이다. 그가 이룩한 역사적인 등반에는 이런 특성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천재성을 지닌 암벽 등반가로 어떤 열악한 기상조건에서도 불굴의 투지로 밀어 붙이는 과감한 등반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치마 오베스트(Cima Ovest. 2974m)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극적인 등반이었다. 낙뢰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이틀 동안 비박을 감행하며 불굴의 투혼으로 500미터의 오버행 벽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는 이 등반을 성공시킨 후 이탈리아의 영광을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감격했다. 피츠 바딜레 북동벽 초등 당시 캐신 일행은 52시간 동안 등반하였으며, 등반 중 눈. 비. 우박. 낙석. 낙뢰 등이 12시간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눈보라를 뚫고 정상에 섰으나. 두 사람이 폭풍설에 노출되어 사망한다. 두 사람은 등반 중에 우연히 만난 다른 팀의 동행자였다. 등반에는 성공했지만 비극으로 얼룩진 대 등반이었다. 이후 피츠 바딜레는 12년 동안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8년 독일 오스트리아 등반대에 의해 알프스 최후과제라 불리던 아이거 북벽이 초등되자 이벽의 초등을 노리고 있던 카신은 실망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같은 산악인으로서 아이거 북벽 초등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기대가 무너진 것에 대해 몹시 실망했다. 그래서 몇 번 정도 듣기만 했던 그랑드조라스를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유럽 최강의 등반가들이 이 벽을 노렸으나 모두 패퇴했지만 그는 단 한 번의 시도로 그랑드조라스 워커 슈퍼를 깔끔하게 돌파한다. 그랑드 조라스 등정은 국민주의 산악운동이 강하게 작용한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지금까지도 세기적인 대 등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 등반의 성공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탈리아의 영광이 될 만한 업적을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감격했으며, 이탈리아를 일거에 산악 강국으로 부상시킨다.
당시 유럽 산악계의 분위기는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의 등반가들이 자기 조국의 영예를 걸고 경쟁적으로 미등의 벽에 초등의 흔적을 남기던, 등반에도 국가 간의 내셔널리즘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대였다. 이 기습적인 쾌거는 이 벽을 노리던 수많은 등반가들을 실망시켰으며, 독일 게르만 민족의 아이거 북벽 승리에 대한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으며, 알프스 3대 북벽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마지막 과제를 해결한 쾌거였다.
그랑드 조라스는 프랑스 산악인들이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무명의 이탈리아의 촌뜨기 세 명이 소리 없이 해치운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신 일행이 레쇼 산장에 도착하여 등반을 준비 할 때 그곳에 있던 프랑스 산악인들은 비웃으며 조롱했다.
카신의 천재성은 루트에 대한 정확한 판독에 있다. 세기적인 대 등반으로 평가받는 워커 스퍼 초등이 이를 입증했다. 그는 자연스러운 선을 따르면서 디렛티시마(直登)를 추구하였다. 워커 스퍼 등정 후 그는 “알피니즘의 본류는 빙.설.암의 어려운 조건을 추구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4대륙을 섭렵한 등산50년의 굵직한 기록들.
캐신의 행적을 살펴보면 세계의 고산과 거벽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활동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활동반경은 유럽의 동. 서 알프스. 아시아의 히말라야. 북미의 알래스카. 남미의 안데스에 이르기 까지 세계의 산을 상대로 지구의 4대륙을 섭렵하는 굵직한 기록을 세운다.
그는 유럽동부알프스의 돌로미테와 서부알프스의 그랑드 조라스. 피츠 바딜레를 초등한 후. 1953년 이탈리아 정부 지원의 K2 원정대 아르디토 데시오 대장과 K2를 정찰했으나 대장과 견해차로 불화가 생긴 가운데 스키 사고로 발목 부상을 입어 1954년 K2 초등대에 합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는 1953년의 정찰 대원이었지만 대장 데시오 교수의 지휘체계에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 고소 스트레스에 대하여 신체적으로 부적합하다는 불공정한 이유를 내세워 본대에서 탈락시킨다.
1957년 가셔브룸 IV봉(7925m)원정 대장으로 참가 마우리와 발터 보나티의 등정으로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그는 산에서도 몸소 실천하는 리더 싶을 발휘하는 대장이었다. 가셔브룸 IV봉 원정에서는 포터들 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8일 동안 카라반을 하며 대원들에게 솔선수범의 본보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가셔브룸 IV봉의 성공은 K2 초등대에서의 배제당한데 대한 멋진 설욕전이었다.
1961년 52세의 나이로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원정하여 사우스 버트레스 루트를 초등정 했다. 이 루트는 초등자 카신을 기려 ‘카신 리지’로 명명되었다. 이 초등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이탈리아 그론치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 그의 공적을 크게 치하했다. 1969년 페루 중부 안데스의 히리샹카 서벽(Jirishanca West face. 6126m)을 초등한다. 1975년 히말라야 3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던 등반 고도 3500미터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요새 로체 남벽원정에 대장으로 참가하였으나 그의 등산 인생에서 최초의 패배를 맛본다. 그는 이곳에서 7500미터를 얻은 후 베이스캠프를 휩쓸어버리는 눈사태와 강풍의 횡포 앞에 결국 전의를 상실한 채 무릎을 꿇는다. 그는 이 원정을 위하여 젊은 등반가 라인 홀드 메스너를 포함한 강력한 등반대를 조직했다. 그는 로체 원정 실패 후 로체 남벽을 가리켜 수시로 눈사태와 낙석. 낙빙을 쏟아내는 ‘걷고 있는 산’이라고 불렀다. “아마 20년 후에 누군가 이 벽을 오를 수 있을지 모르나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20년 후 누군가 오른다 해도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 하다.” 라는 말을 남겼다.
백전노장의 저력을 과시한 피츠 바딜레 재등
그는 로체 남벽에서 패퇴했으나 그의 알피니즘은 끝나지 않는다.
1987년 78세의 나이로 자신이 50년 전에 초등한 피츠 바딜레를 10시간 만에 재등하여 백전노장의 저력을 과시하며 지칠 줄 모르는 등반능력으로 전설적인 위상을 획득한다. 그는 등반을 끝낸 뒤 “등반을 즐기면 50, 60, 80세까지도 등반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이 건재함을 입증했다. 그는 같은 나이 또래의 등반가들이 오래전에 집안 안락의자의 편안함에 안주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계에 도전하여 젊은 등반가들의 롤 모델 역할을 했다. 그가 100세까지 장수한 것은 등산을 통해 단련해온 건강 때문일 것이다.
그는 등산경력 못지않게 삶 자체도 매우 다채로웠다. 젊은 시절에는 단순 취미를 넘어선 국가대표 급의 권투를 했고,50번이상의 경기를 치르며 이탈리아 챔피언 자리까지 넘볼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벽돌공장 직공 일을 했고, 레코에서 전기 공장의 감독으로 일하였다. 전쟁 중에는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되어 대독 항전에 참여한다.
전 후에는 후진지도와 산장 복원 사업에 주력했고 자신의 이름을 상표로 한 등반장비를 제작 보급하기도 했다. 그는 1999년 이탈리아 최고 명예인 ‘대십자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2009년에는 알파인 클럽 명예회원으로 위촉되기도 한다. 등산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산악인 리카르도 캐신은 2009년 8월 6일 고향 레코에서 101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캐신의 50년 등반활동은 그것이 곧 세계등산사이며 250년 알피니즘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귀중한 기록이다. 돌로미테 등반에서 부터 데날리 초등까지 상세한 정보와 많은 사진자료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우리산악인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라 믿는다.
고산. 거벽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인리 하러. 리오넬 테레이. 가스통 레뷔파. 발터 보나티 등 대전 전후의 유명 등반가들의 전기나 등반기록물들은 이미 출간된바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가장 좌장격인 캐신의 저서가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올해는 알프스 6대 북벽 중 하나인 피츠 바딜레가 캐신에 의해 초등 된지 80주년을 맞는 해다. 이제 그의 회고록 출간으로 한국독자들은 뒤늦게나마 위대한 산악인과 만나는 경사를 누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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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