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 (Saṃyutta Nikāya)’ 13강
아란냐 숫따
Arañña-sutta
숲 경(S1:10)
사왓티 니다낭
Sāvatthinidānaṃ. ~~(생략)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아란녜 위하란따낭 산따낭 부라흐마짜리낭;
Araññe viharantānaṃ santānaṃ brahmacārinaṃ,
에까밧땅 분자마나낭 껜나 완노 따시다띠띠
Ekabhattaṃ bhuñjamānānaṃ kena vaṇṇo pasīdatīti.
2. 저들은 숲속에 거주하며 평화롭고 청정범행을 닦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도 왜 안색이 밝습니까?
바가와(bhagava)
세존
3. 아띠땅 나누소짠띠, 납빠잡빤띠 나가땅;
Atītaṃ nānusocanti nappajappanti nāgataṃ,
빳쭙빤네나 야뻰띠, 떼나 완노 빠시다띠
Paccuppannena yāpenti tena vaṇṇo pasīdati.
아나가 땁 빠 잡빠야 아띠따스 사누 소짜나,
Anāgatappajappāya atītassānusocanā,
에떼나 바라 숫산띠 나로와 하리또 루또띠
Etena bālā sussanti naḷova harito lutoti.
3. 지나간 것에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서 얻은 것으로만 삶을 살아가니 그래서 그들의 안색은 밝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는 자, 이미 지나간 것을 두고 슬퍼하는 자
그들은 어리석어서 시들어 가니 푸른 갈대가 잘려서 시들어 가듯 한다.
부처님은 항상 양쪽을 가르치십니다. 공덕인 뿐냐(puññā)와 악행인 빠빠(pāpa)처럼 항상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공덕의 결과도 알아야 하지만 악행의 결과도 알아야합니다. 지혜는 한 쪽만 안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쪽도 알아야 도움이 됩니다. 지혜가 없는 결과에 대해서도 알아야 비로소 지혜의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상사(ānisaṃsa)의 뜻은 공덕의 결과인데 반대로 아디나와(ādinava)는 악행의 결과입니다.
우리들의 습관은 항상 한 쪽만 얘기합니다. 누구한테 조언을 할 때도 내가 좋아하는 쪽만 얘기합니다. 그래서 공덕을 쌓은 결과도 알아야 하지만 악행의 결과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양쪽의 결과를 다 알아야지 한쪽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는 아니상사(ānisaṃsa)라는 공덕의 결과이고, 두 번째는 아디나와(ādinava)라는 악행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공덕인 뿐냐(puññā)의 아니상사(ānisaṃsa)도 알아야 하고, 악행인 빠빠(pāpa)의 아디나와(ādinava)도 알아야 합니다. 공덕의 결과는 수행을 통해서 괴로움을 해결하고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자유를 누립니다. 악행의 결과는 수행을 하지 못해 괴로움이 커지고 영원히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에 ‘영원히’라는 말은 없지만 악행이 거듭되는 한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란냐(Arañña)는 숲입니다. 예전에 한번 말씀드렸는데 숲에 계신 스님들과 마을에 계신 스님들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숲에 계시는 스님들은 수행을 하고, 마을에 계시는 스님들은 교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중심의 빠띠빳띠(paṭipatti) 스님들이 머무는 곳은 숲이고, 교학중심의 빠리얏띠(pariyatti) 스님들이 머무는 곳은 ‘절’, ‘사원’, ‘정사(精舍)’라고 하는 위하라(vihāra)입니다. 위하라(vihāra)라는 부처님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대웅전(大雄殿)이라고도 합니다. 빠띠빳띠(paṭipatti)의 뜻은 ‘실천’, ‘행위’, ‘행도(行道)’를 말하는데 직접 수행을 하시는 스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빠리얏띠(pariyatti)의 뜻은 ‘경전연구’, ‘경전학습’, ‘교법’을 말하는데 경전을 암송하거나 경전공부를 하는 스님을 말합니다. 두 부류의 스님들이 하는 역할은 조금 다릅니다. 이 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빠띠웨다(paṭvedha)는 도과를 성취한 스님들입니다. 빠띠웨다(paṭvedha)는 ‘꿰뚫음’, ‘관통’, ‘통찰’, ‘실현’ 등의 뜻인데 통찰지혜로 도과를 성취한 스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상가는 세 그룹으로 나뉩니다.
아란냐(Arañña)는 숲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아란냐(Arañña)는 옛날 인도에서부터 수행이라는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가 숲에 들어갔다고 하면 수행하러 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숲은 산속에 있는 깊은 숲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깊은 숲에서는 아무나 머물면서 수행을 하지 못합니다. 깊은 숲은 원주민밖에 살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산에 갔다고 하면 여기서 말하는 숲에 갔다는 것과 같이 산에 공부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원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이 고양이는 아파트에서 살다 나온 집고양이인데 아파트에서 살았기 때문에 집고양이는 면역력이 약합니다. 그러나 야생에서 사는 길고양이들이 와서 음식을 먹고 가는데 이들은 면역력이 강합니다. 야생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런 도시 환경에 있다가 숲에 가면 적응하기 힘듭니다. 열대지방의 사파리에 가면 동물들이 많습니다. 나는 한 번씩 전기도 없는 깊은 숲에 가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곰 소리 등 동물소리가 많이 나고 벌레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수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붓다시대에 수행자들은 왕자들도 많았고 브라흐만 계급의 높은 신분들 가진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분들이 환경이 좋지 않은 데서 수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란냐(Arañña)는 숲이지만 수행에 방해되지 않는 숲에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아주 편한 장소는 아닙니다. 모기도 있고 벌레도 있고, 비가 오면 비도 맞아야 하고 스님들은 편안하지 않지만 자연스런 공간에서 수행을 합니다. 스리랑카는 기원전 3세기경 마힌다 장로가 불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스리랑카에 왔습니다. 그때 스님들이 출가는 했는데 수행할 공간이 없어서 동굴이나 큰 나무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 속에서 수행했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스님들이 명상하기 위해 이동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바위동굴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안거 때는 한 곳에 모여서 수행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릴 때 안거를 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에 모여서 수행을 했습니다. 지금은 냉난방 기구가 있어서 옛날 같이 수행을 하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인도는 지금도 12월이 되면 추워서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불 자체가 없고 호텔에도 이불이 없고 얇은 천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추울 때 가사를 덮고 잡니다. 이때 스님들이 필요한 것이 겹으로 된 대가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우면 수행을 못합니다. 사실 경전에서 말하기를 너무 불편한 공간에서는 수행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랸냐와신(araññavāsin)이라는 말이 있는데 ‘숲에서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숲에서 수행하는 스님을 말합니다. 여기에 반해 가마와신(gāmavāsin)이라는 말은 ‘마을에서 사는 자’라는 뜻인데 마을에서 의식을 행하고 법을 펴시는 스님들입니다. 요즈음 한국으로 말하면 아랸냐와신(araññavāsin)은 선방에서 정진하시는 스님을 말하고, 가마와신(gāmavāsin)은 마을에서 기도를 하거나 포교하시는 스님들입니다. 가마(gāma)는 ‘마을’, ‘촌락’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전통이 불교에서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왔습니다.
다음에 위하라(vihāra)는 ‘거처’. ‘머무는 곳’, ‘정사(精舍)’, ‘사원’, ‘사찰’, ‘절’이라는 뜻인데 스님들이 머무는 공간을 말합니다. 하지만 위하라(vihāra)는 보통 두 가지 뜻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하나는 ‘스님들이 머무는 사찰’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대웅전(大雄殿)’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의 대웅전(大雄殿)은 영웅이 계시는 곳으로 부처님을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위하라(vihāra)라고 할 때는 사찰 전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대웅전이라고 할 때는 사찰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빨리어로 위하라(vihāra)라고 하면 대웅전까지를 다 포함한 사찰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곳 한국명상원도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공간이라서 위하라(vihāra)입니다.
다음에 산따낭(santānaṃ)은 ‘평화로움’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산타나(santāna)는 매우 좋은 말입니다. 산띠(santi)가 ‘고요’, ‘평화’, ‘적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사람’이라고 할 때 산따나(santāna)라고 부릅니다. 다음에 브라흐마짜리낭(brahmacārinaṃ)은 ‘청정범행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브라흐마(brahma)은 원래 인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인도에는 네 가지 카스트 제도가 있는데 첫 번째 계급이 바로 브라흐마(brahma)입니다.
브라흐마(brahma), 또는 브라흐만(brhman)은 ‘범천(梵天)’, ‘우주의 창조자’, ‘하느님’, ‘바라문’, ‘사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의 범천(梵天)은 선정수행을 해서 천상의 색계, 무색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도의 브라흐마들은 자신들을 천상의 최고의 지위라고 여깁니다.
브라흐마짜리야(brahmacāriya)는 ‘신성한 삶을 사는’, ‘하느님의 삶을 사는’,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범행자(梵行者)’, ‘청정행자’라는 뜻입니다. 브라흐마짜리낭(brahmacārinaṃ)은 ‘청정범행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인도 사상에서 청정범행이라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āri)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인도의 베다에서 나오는 4가지 의무단계의 청정범행이 있습니다. 이러한 브라흐만(brahman)의 청정범행을 아사마(assama)라고 합니다. 첫 번째 카스트인 브라흐만(brahman)들은 이처럼 4가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브라흐만의 4가지 수행시기를 4주기(四住期)라고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āriya)입니다. 이 시기는 베다를 공부하는 범행자로 공부하는 시기입니다. 학생으로 공부하는 시기라서 범행기(梵行期)라고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가라스뜨야(Gārhasthya)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자녀교육과 결혼시키는 것까지 책임을 지는 시기입니다. 가정에서 결혼하여 생활하는 시기라서 가주기(家住期)라고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와납라스타(Vānaprastha)로 가족의 부양을 마치고 나이가 60정도 되면 삶을 정리하고 재산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숲에 가서 수행을 통해 지혜를 축적하는 시기입니다. 이차럼 가산을 정리하고 숲에 가서 수행을 하는 시기라서 임처기(林悽期)라고 합니다.
네 번째 단계는 빠리브라자카로 방랑하며 걸식하는 상냐신(Saṃyāsin)이자 비구로서 포교를 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숲에 가서 삽니다. 이처럼 유행하며 돌아다니는 시기라서 유행기(遊行期)라고 합니다. 유행(遊行)한다는 것은 전법을 위해 다닌다는 뜻입니다. 이상 네 가지 단계가 브라흐만(brhman)의 삶입니다.
인도의 카스트 4계급은 모든 부분에서 차이가 많습니다. 공부를 시작하는 시기도 다 다릅니다. 브라흐만(Brahmin)은 8살부터 공부를 시작하고, 크샤트리야(Kshatriya)는 10살부터 공부를 시작합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야(Kshatriya)이기 때문에 10살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바이샤는 11살에 시작합니다. 수드라는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브라흐만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브라흐만이 반드시 청정범행을 닦는 브라흐마짜리(Brahmacāri)의 뜻은 아니지만 그때 당시 인도에서 수행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청정범행을 닦는 브라흐마짜리(Brahmacāri)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말하는 브라흐마짜리(Brahmacāri)의 청정범행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청정범행은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기는 똑같이 청정범행을 닦는 뜻으로 브라흐마짜리(Brahmacāri)라고 하지만 경전에서 말하는 청정범행은 다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청정범행이라고 할 때는 사성제 팔정도를 말합니다. 카스트 제도의 브라흐만은 그냥 청정범행이지 사성제 팔정도를 말하는 청정범행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신이 말하는 청정범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를 말하는 청정범행이라서 사념처 수행으로 깨달음이라는 열반을 얻어 해탈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브라흐마처럼 범천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뿐인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경전 본문에서 천신이 부처님께 질문한 내용은 ‘아란녜 위하란따낭, 산따낭 부라흐마짜리낭(Araññe viharantānaṃ, santānaṃ brahmacārinaṃ)’입니다. 이 말은 ‘저들은 숲속에 거주하며 평화롭고 청정범행을 닦고’입니다.
다음 문장은 에까밧땅 분자마나낭 껜나 완노 빠시다띠띠(Ekabhattaṃ bhuñjamānānaṃ kena vaṇṇo pasīdatīti)입니다. 여기서 처음 에까밧땅(Ekabhattaṃ)은 한 끼를 말합니다. 수행자들은 하루에 한 번 탁발한 음식으로 삽니다. 그래서 에까밧따(ekabhatta)는 에까밧따는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 끼 개념은 탁발에서 나왔습니다. 탁발 개념을 보면 스님들은 하루에 한 번만 탁발을 해서 하루를 지냅니다. 그 음식으로 어떤 스님은 한 끼 드시고, 어떤 스님은 아침과 점심으로 나누어 드십니다. 하루에 한 번 탁발한 음식으로 하루를 사는 것이 스님들의 생활입니다.
요즘은 탁발 나가면 바로 받아서 오지만 옛날에는 6시에 탁발을 시작하면 2~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지금은 먹을 것이 많아서 빠르게 탁발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당시는 비구들만 탁발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수행자들과 얻어먹고 사는 거지까지 아침은 걸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래서 붓다시대에는 모든 종교 수행자들과 거지들이 전부 걸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걸식하는 수행자를 빅쿠(Bhikkhu)라고 했는데 승려, 사문(沙門)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지금은 비구가 계를 받은 스님이지만 처음에는 걸식하는 수행자를 비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걸식을 해서 먹는 수도자의 문화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걸식을 해서 어떤 날에는 공양을 받지 못해서 먹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인도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데 그때는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에까밧땅 분자마나낭 께나 완노 빠시다띠띠(Ekabhattaṃ bhuñjamānānaṃ kena vaṇṇa pasīdatīti)는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 왜 안색이 밝습니까?’입니다. 다음에 분자나(bhuñjana)는 ‘식사’라는 뜻입니다. 분자띠(bhuñjati)는 ‘먹다’, ‘즐기다’, ‘향유하다’는 뜻입니다. 께나(kena)는 ‘누구에 의해서’, ‘무엇 때문에’, ‘왜’라는 뜻입니다. 완나(vaṇṇa)는 ‘얼굴’, ‘색깔’,
‘안색’을 뜻합니다.
안색을 뜻하는 완나(vaṇṇa)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얼굴색을 말하는 묵카완나(mukhavaṇṇa)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피부색을 말하는 차위완나(chavivaṇṇa)가 있습니다. 여기서 안색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얼굴색과 피부색이 모두 좋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얼굴과 피부색이 검거나 희거나 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평온하고 맑고 윤기가 나는 것을 말합니다.
빠시다띠(pasīdati)는 ‘밝게 되다’, ‘즐거워하다’, ‘정화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간추려보면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도 왜 안색이 밝습니까?’라는 뜻입니다. 두 문장을 합치면 ‘저들은 숲속에 거주하며 평화롭고 청정범행을 닦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도 왜 안색이 밝습니까?’라는 뜻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모든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고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안한 얼굴의 밝은 모습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아직 아라한의 정신세계를 모르는 천신은 이러한 성자의 편안한 모습에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까지 앞의 경들은 신들이 부처님께 진지하게 물어 봤는데 이 경에서는 좀 가볍고 수다스런 질문을 합니다. 숲에 사는 스님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도 얼굴색이 괜찮은데 음식을 어디에 숨겨놓고 먹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느낌이 듭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천신들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천상의 천신이 있고 숲에 사는 땅에 있는 천신인 붐마 데와따(bhumma-devatā)가 있습니다. 이 천신은 천상에서 내려온 천신이 아니고 인간들이 사는 숲에 있는 큰 나무나 큰 바위에 붙어서 사는 천신입니다. 이들을 나무천신을 뜻하는 수신(樹神), 또는 야차(夜叉)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천신은 천신의 과보를 받아서 태어났지만 공덕이 부족해서 숲속에 살고 있는 붐마 데와따(bhumma-devatā)가 부처님을 친견한 것입니다. 붐마 데와따(bhumma-devatā) 천신은 나무신과 같습니다. 여기서 천신이 살펴보고 말하는 수행자는 보통의 수행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라한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비구들에게 다 적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부처님과 천신의 대화는 부처님께서 신통한 힘이 있어서 가능한 대화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지금에는 이런 천신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는 접촉할 기회가 없을 뿐이지 이런 생명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승들은 수행자가 좋은 일을 할 때 그것은 천신이 기뻐할 일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보이는 것만 보고 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생명들과도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천신들에게 답변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누구나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답변 첫 문장에 아띠땅 나누소짠띠(Atītaṃ nānusocanti)에서 아띠땅(Atītaṃ)은 ‘지나가버린’, ‘과거’를 말합니다. 나누소짠띠(nānusocanti)는 나(na)는 부정하는 것을 뜻하고, 아누(anu)는 ‘따라서’라는 뜻이고 소짠띠(socanti)는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띠땅 나누소짠띠(Atītaṃ nānusocanti)는 ‘지나간 것에 슬퍼하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띠땅(Atītaṃ)은 지나간 과거를 말하는데 이때 말하는 과거는 아예 생각하지 말고 그래서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나간 과거는 단지 과거의 기억으로 두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 와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는 이미 기억 속에 저장되어서 잊으려고 해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잊어버릴 수가 없는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현재로 오라는 말입니다. 문제의 해답은 오직 현재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는 현재가 아닌 단지 과거로 두고 현재로 와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다음에 납빠잡빤띠 나가땅(nappajappanti nāgataṃ)에서 납빠잡빤띠(nappajappanti)의 나(na)는 부정을 뜻하고 빠잡빤띠(pajappanti)는 ‘동경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띠땅(Atītaṃ)은 과거를 말하고 나가땅(nāgataṃ)은 미래를 말합니다. 이 말은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는 시간이 아닌 관념적인 것이며 수행자는 오직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후회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념처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두 문장을 합쳐서 보면 ‘아띠땅 나누소짠띠, 납빠잡빤띠 나가땅(Atītaṃ nānusocanti nappajappanti nāgataṃ)은 ‘지나간 것은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은 동경하지 않으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동경하지 않는다는 뜻의 납빠잡빤띠(nappajappanti)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입니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다음에 문장에 나오는 현재로 와야 합니다.
수행자가 과거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생각이 과거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후회하면서 머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정법을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를 살지 못하고 불안하고 죄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몰라서 그런 것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로 자탄했을 때 ‘몰라서 그랬네!’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 순간에 현재로 온 것입니다.
수행자가 미래에 대해 동경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들이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래와는 다릅니다. 미래에는 좋은 통치자가 나와서 가사, 거주처, 음식들이 더 잘 나올 거야, 하면서 미래에 대한 좋은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중수행을 하다 보면 수행이 끝나고 집에 가서 잠도 많이 자고, 이것저것 해야지 하면서 망상을 합니다. 바로 현재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망상입니다. 저는 시험기간에 시험이 끝나면 잠도 많이 자고 뭐도 해야지 하면서 망상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험이 끝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때 망상이 바로 현재에 머물지 못하게 한 것만 있습니다. 현재 얻은 것으로만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현재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이때 현재로 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현재의 몸으로 와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나오는 ‘빳쭙빤네나 야뻰띠, 떼나 완노 빠시다띠(Paccuppannena yāpenti tena vaṇṇo pasīdati)’에서 빳쭙빤나(Paccuppanna)는 ‘방금 발생한 것’, ‘현재’, ‘현재의 것으로’, ‘현재 얻은 것으로만’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야뻰띠(yāpenti)는 ‘가게하다’, ‘이끌다’, ‘생존 시킨다’, ‘현재만 진행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한 단어가 갖는 여러 가지 뜻을 이해하면 이 단어가 나타내는 뜻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빨리어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문장에 따라서 쓰임이 다릅니다. 그래서 해석도 다릅니다. 그래서 ‘빳쭙빤네나 야뻰띠(Paccuppannena yāpenti)는 ’현재에서 얻은 것으로만 삶을 살아가니‘라는 뜻입니다. 다음 문장은 떼나 완노 빠시다띠(tena vaṇṇo pasīdati)는 ’그래서 그들의 안색은 밝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빳쭙빤네나(Paccuppannena)는 스님들의 역할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스님들이 교육을 받을 때 이 말을 많이 강조합니다. 우리가 자애경을 독송할 때도 쉽게 다를 수 있는 것을 강조합니다. 수행하는 대상도 쉽게 다를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수행을 하는 존재도 쉽게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까칠하고 어려우면 상대방도 지키기 어렵고 나도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구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먹는 것도 무엇이나 쉽게 다루기 위해서 입니다. 옷도 그냥 천을 잘라서 입는 것도 쉽게 다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쉬운 것을 선택하는 것이 스님들의 중요한 역할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쉽게 되려면 단순해야 합니다. 복잡하면 생각이 들어가서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복잡하다는 것은 마음이 생각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단순해지려면 과거나 미래로 가지 않고 오직 현재로 와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면 반드시 현재로 와야 합니다. 오직 현재에서만 실재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항상 ’지금 여기‘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가 바로 현재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오직 현재를 아는 몸과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가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발견하여 집착이 끊어진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수행자가 ‘현재에서 얻은 것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말은 현재에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순간에 얻은 것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 말은 스님들의 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의 뜻에 진리로 가는 문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현재로 와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 문장에서 보면 ‘아나가 땁 빠 잡빠야 아띠따스 사누 소짜나(Anāgatappajappāya atītassānusocanā)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단어를 합성어로 줄여서 쓰면 아난가땁빠잡빠야(Anāgatappajappāya)가 됩니다. 그리고 앞 단어와 마찬가지로 줄여서 쓰면 아띠따스사누소짜나(atītassānusocanā)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빨리어는 여러 단어들을 모아 하나의 단어로 합성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문자의 뜻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는 자 이미 지나간 것을 두고 슬퍼하는 자’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천신에게 답변하신 마지막 문장은 ‘에떼나 바라 숫산띠 나로와 하리또 루또띠(
Etena bālā sussanti naḷova harito lutoti)’로 이 말은 ‘그들은 어리석어서 시들어 가니
푸른 갈대가 잘려서 시들어 가듯 한다.’는 뜻입니다.
안색과 피부색이 맑은 것은 그들이 선정수행을 깊이 닦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ā)라고 하는데 이렇게 마음이 집중을 하면 얼굴이 밝아집니다. 놀이나 게임을 하는 사람들도 집중을 매우 잘합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보다 더 집중하는 노력을 합니다. 그래야 남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선한 마음이 아닌 욕심을 가지고 집중합니다. 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ā)는 선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수행하여 마음이 편해지니 자연스럽게 몸에 있는 피가 맑아집니다. 그래서 스리랑카는 수행을 하시는 빠띠빳띠(paṭipatti)의 아란냐(Arañña) 스님들이 장기 기증을 많이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제가 10살에 출가 했는데 외부 공양법회에는 15살까지는 안 데리고 갑니다. 맛있는 것 나오니까 외부공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많이 일어납니다. 60명이 강원에 있었는데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17살에 처음으로 외부 공양에 따라 나갔습니다. 공양올리고 난 후에 선물을 올리는데 공양물을 다른 스님들보다 작은 것 받으면 기분이 나빴습니다. 큰스님은 얼굴표정을 보고 불만이 있는 것 다 아십니다. 큰스님께서 저녁에 불러서 법문하실 때 “우리는 받는 데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대중생활을 하다 보면 좋은 가사도 받고, 안 좋은 가사도 받고 합니다. 이럴 때 현재에 머물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뻰띠(yāpenti)는 현재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떼나 완노(tena vaṇṇo) 그들의 안색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아나가 땁 빠 잡바야(Anāgatappajappāya)는 ‘미래를 동경하는 자’입니다. 아띠따스 사누 소짠나(atītassānusocanā)는 ‘지나간 것을 슬퍼하는 자’입니다. 다음에 에떼나 바라 숫산띠(
Etena bālā sussanti)는 ‘어리석은 자들은 시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숫산띠(sussanti)는 ‘한숨 쉬는 것’인데 이는 걱정거리 있어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로와 하리또 루또(naḷova harito luto)는 ‘푸른 갈대 잘려서 시들어 가듯’이라는 뜻입니다. 뜨거운 돌 위에 대나무 갈대를 놓으면 바삭바삭 말라버립니다. 과거에 머물고 미래를 동경하며 사는 사람은 대나무처럼 말라버린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을 얘기할 때 브라흐만(brhman)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을 믿는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처음부터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에 대한 불교적인 표현도 할 수 없이 그냥 브라흐만(brhman)이라는 존칭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소부경전의 우다나(Udāna)의 상가마지 경(Sangāmaji-sutta)에 나오는 상가마지(Sangāmaji) 존자는 일찍 출가 하려고 했는데 부모님들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출가해서 아라한이 되셨습니다. 문제는 부인이 아이를 낳고 혼자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상가마지 (Sangāmaji) 존자에게 왔는데 존자는 그때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애를 존자의 무릎에 놓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 하나 깜작도 하지 않고 명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참으로 나쁜 아빠였습니다. 아이가 우는 데도 꼼작하지 않으니 부인은 애를 다시 데리고 갔습니다.
부인은 상가마지(Sangāmaji) 존자가 아이를 쳐다보지도 보지 않았다고 욕하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이 상황을 알게 되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어 주셨습니다. “다가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물러가는 것을 슬퍼하지 않으니 결박으로부터 벗어난 상가마지(Sangāmaji) 여!, 나는 그를 브라흐만(brhman)이라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의 브라흐만(brhman)은 아라한을 말합니다. 이런 일이 인간적으로 보나 세속적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출세간적으로 보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부처님이 야소다라를 떠나는 출가한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싯다르타 태자와 야소라라(Yasodharā) 와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싯다르타의 결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석가 족의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석가 족은 잘 생겼고 외모가 출중하였지만 아만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우월성이 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제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코살라국의 파사익 왕이 석가족 공주 중에서 왕비를 맞아야 하겠다는 생각했습니다. 사실 석가 족은 코살라국 왕을 자신들 보다 낮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석가 족 공주를 줄 수 없다는 생각에 하인을 석가 족의 공주로 변장시켜서 결혼시켰습니다. 코살라왕은 하인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바로 이 아들이 어려서 석가 족의 아이들에게 하인의 아들이라고 놀림을 당했습니다. 그 아이는 앙심을 품은 채 성장해서 나중에 위두다바(Viḍūḍabha)라는 비유리 왕이 되어서 석가 족을 몰살시키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한편 싯다르타의 왕자 비를 선발하기 위해 500명의 공주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모두들 싯다르타에게 잘 보이려고 신경을 많이 썼지만 야소다라(Yasodharā)는 무관심한 태도였다고 합니다. 싯다르타는 관심 없어하는 야소다라공주를 선택하였지만 야소다라 공주의 부모님은 유약한 성품을 가진 싯다르타에게 공주를 줄 수 없다며 싯다르타의 무술 실력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싯다르타는 생명을 죽이는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아가는 새를 새총으로 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싯다르타는 탁월한 무술실력을 보여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16살에 결혼에서 29살에 라훌라(Rāhula)를 낳았습니다.
야쇼다라(Yasodharā)는 결혼 후 아이를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한 편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어느 날 돌보던 아이 중 애정을 많이 가졌던 한 아이가 죽어서 야쇼다라(Yasodharā)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아이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싯다르타와 함께 많이 공유했습니다. 태자도 어릴 때부터 살생하지 않고 명상하며 성장해 왔기 때문에 두 분은 평소에도 서로 간에 이런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괴로움의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공부하러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야쇼다라(Yasodharā)와 했다고 합니다. 당시 알라라 깔라마나(Alara Kalama)와 우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와 같은 유명한 선인을 만나 공부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결정적인 계기가 와서 아들인 라훌라(Rāhula)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 라훌라(Rāhula)가 탄생한 것을 계기로 싯다르타는 출가를 합니다. 이때 싯다르타를 짝사랑한 끼사 고따미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왕궁으로 가는 길목에 살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가 사문유관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죽은 사람, 병자, 노인, 스님을 보고 너무 슬퍼서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노래의 내용은 ‘이런 아이를 가진 엄마와 아빠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남편을 가진 여인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아비지를 가진 아이는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노래였습니다. 싯다르타의 마음을 알고 위로 해주는 노래였다고 합니다. 이때 싯다르타는 몸에 걸치고 있던 귀금속을 그 여인에게 모두 보냈습니다. 노래에 대한 보답으로 고마워서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궁에 돌아와 보니 라훌라가 태어나 있었습니다. 그때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전쟁도 싫어하고 왕좌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를 만나서 수행도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가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지내다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에 라훌라가 태어난 것입니다. 라훌라(Rāhula)는 장애라는 뜻입니다. 기쁘면서도 아이가 장애로 느껴진 것입니다. 아버지 정반 왕께서 그간 안 좋은 것을 다 멀리해서 좋은 것만 보고 살았는데 세상을 보니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러 떠나게 됩니다. 떠나면서 야쇼다라(Yasodharā)에게는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야쇼다라(Yasodharā)는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쇼다라(Yasodharā)가 싯다르타가 공부할 수 있도록 굉장한 역할을 합니다. 숫도다나왕이 싯다르타를 데려오라고 사람들을 보내려 할 때 야쇼다라(Yasodharā)는 태자가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면서 시아버지인 숫도다나왕을 설득했습니다. 또 야쇼다라(Yasodharā)는 왕을 설득하기 위해서 왕궁에서 가사를 입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부처님이 성도 후 처음으로 카필라 성에 옵니다. 부처님이 성도 후 7년 만에 처음으로 왕궁에 왔습니다. 야쇼다(Yasodharā)라는 태자가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났기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러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야소다라(Yasodharā)를 만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야쇼다라(Yasodharā)와 남매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없었으면 나는 이렇게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번 생뿐만이 아니라 전생부터 우리는 많은 인연이 있었다”라고 야쇼다라(Yasodharā)에게 따뜻한 말을 전했습니다. 후에 야쇼다라(Yasodharā)도 출가해서 아라한이 됩니다. 부처님을 너무 위대하게 얘기하다보면 중간 과정을 생략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한 인간이었습니다. 상가마지(Sangāmaji) 존자 같은 경우도 너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멀리 했습니다. 과거, 미래, 현재에 우리가 평정심을 가지는 것이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본생경에서 보면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위해서 내가 유학을 갔다 오겠다’고 하고 공부하러 간 것입니다. 부처님은 숲으로 유학을 간 것입니다. 이미 부처님은 전생에 색계, 무색계 8선정까지 모두 다 닦았습니다. 우리도 색계, 무색계에서도 살았을 것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지금 여기 한국명상원에 모여서 경전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신이 부처님께 질문합니다.
“저들은 숲속에 거주하며 평화롭고 청정범행을 닦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도 왜 안색이 밝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천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것에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서 얻은 것으로만 삶을 살아가니 그래서 그들의 안색은 밝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는 자, 이미 지나간 것을 두고 슬퍼하는 자
그들은 어리석어서 시들어 가니 푸른 갈대가 잘려서 시들어 가듯 한다.”
< 묻고 답하기 >
(질문 1) 산띠(santi)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1) 평화나 고요함, 적정, 선정상태를 산띠(santi)라고 부릅니다. 힌두교 수행자들이 108염주를 들고 산띠, 산띠하고 다닙니다. 드라마 ‘붓다’에서 탁발하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집 앞에서 산띠, 산띠 하는 소리가 나면 ‘집 앞에 수행자가 와 계시는구나.’ 하고 압니다. 집 앞에서 아무 소리 내지 않으면 누가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산띠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산띠는 힌두교 전통이었습니다.
(질문 2) 청정범행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Brahmacāri)는 부처님이 처음 사용한 용어인가요?
(답변 2) 당시 인도의 힌두교에서 쓰던 말을 부처님께서 재해석해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당시 힌두교 전통에서 공부해 가는 과정을 브라흐마짜리(Brahmacāri)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어려서 공부하는 것이고, 나이 들어서 공부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풍습은 아니었다. 나이가 많으면 포교나 봉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브라흐마짜리(Brahmacāri)를 새롭게 해석해서 아라한이 되어 가는 과정을 브라흐마짜리(Brahmacāri)라고 하셨습니다. 인도의 문화는 브라흐마(Brahma)로 태어나서 브라흐마(Brahma)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출생에 따라 브라흐마(Brahma)가 되는 것이 아니고 행위에 따라 브라흐마(Brahma)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카스제도를 재해석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 칭찬할 것은 칭찬 하고 비난할 것은 비난하셨습니다. 그러나 칭찬할 것은 비난하지 않고 비난할 것은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첫댓글 이틀동안 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 13강을 정리하고 나서 나도 모르게 사두, 사두, 사두라는 말이 뛰어 나왔습니다. 이 글을 정리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더욱 행복합니다. 참으로 법의 맛처럼 감미로운 것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