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나의 마지막 수학여행
이영백
요즘은 수학여행을 “배움 나들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수학여행”이다. 그때 불국사초등학교 6학년에 세 반이 있다. 희망자만 가기로 하여 못 가는 학생들에게 사실 미안하다. 나는 혹시 중학교 진학 못 하면 이제 공부는 초졸로 끝인데 발전한 도시를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떼써서 1박 2일 마지막 수학여행비 금300원(구화 3,000환)을 제출하였다.
수학여행 하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전국에서 경주불국사로 오는데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으니까 장소 선정이 문제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가장 가까운 도시인 “부산”을 택하였다. 168명 중 희망자 61명(36.3%, 남26명, 여35명)과 교감 선생님을 포함한 지도교사 세 분 등 총 예순다섯 명이다.
엄마에게 수학여행만 보내준다면 말 잘 듣고 소도 잘 먹이겠다고 신신당부하였다. 3반 반장이 안 가면 안 된다고 밤새 떼를 썼다.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아버지 허락받고 돈까지 쥐어 주었다. 또 시장에서 기성품으로 파는 노란 단추가 달린 중학 교복처럼 생긴 옷 샀다.
동해남부선 불국사 기차역에서 한 칸을 전세로 타고 출발하였다. 마침내 동래역에 내렸다. “씨 없는 우장춘 수박농장”으로 갔다. 이어 동래 어느 목욕탕에 단체로 들어갔다. 또 빨간 돈 2원 내고 앞뒤 없는 전차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영주동 금성여관에 도착하여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관은 목조건물로 방마다 십여 명씩 배치되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새도록 떠들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조용하였다. 아침 먹고 65명은 194계단 우남공원에 올랐다. 항구가 내려다보이고 판잣집들이 즐비하였다.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12시에 영도다리 드는 것을 구경하러 급히 내려갔다. 그해 12월 31일까지만 다리 들고, 그 후는 붙박이가 된다. 다리 밑에서 대기하였다. 시간이 되자 갑자기 호각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다리 위로 가던 행인을 중지시켰다. 정말 다리가 끄떡 들리어져 올라갔다. 남항에 있던 배들이 송도 쪽으로 통통 지나갔다.
부산역에서 대기하여 기차 탔다. 부산역에서 역순으로 불국사역에 도착하였다. 태어나서 1박 2일 동안 간 크게도 처음으로 외박하였다. 신이 났다.
도시를 체험해 보니 생각보다 공간이 넓다. 마지막 수학여행 끝났다.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