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플링의 정글북을 읽은 후 이종사촌형의 책장에서 다른 책도 읽었지만 모두 중도 포기했다. 그중에서 두 권만은 생각난다. 하나는 허먼 멜빌의 흰 고래 모비딕(원제목은 ‘모비딕’임 계몽사 문고판은 흰 고래 모비딕 으로 되어 있음) 이다. 그림에 끌려 중간쯤 읽다 말았는데 그건 아마도 무서워서였던 것 같다.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 허브 선장의 분위기가 너무 음산하고 어두워 변소를 가거나 조금 어두운데 혼자 있기라도 하면 그 선장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처럼 “내 다리 내놔” 하고 나타날 것만 같아서였다.
또 제목은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일생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너무 슬프기도 했지만 어린마음에 고흐의 그림을 사주지 않는 사람들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화가 났고 또 고흐가 그의 귀를 자르는 부분에 와서는 차마 더 이상 읽지를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책 만 봐도 소름이 돋았고 변소에서 볼일을 볼 때는 귀가 잘려 피를 철철 흘리는 고흐가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스윽 들이밀 것 같아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이모 집을 오가는 논둑길에서 보던 풍경은 책속의 배경과 오버랩 되어 펼쳐졌는데 바람 불어 벼들이 파도치듯 출렁이는 논에서는 폭풍우에 침몰 될 듯 기울어지는 포경선 피쿼드호와 거대한 모비딕이 입을 크게 벌리고 배를 향해 덮쳐 오는 모습이 그려지고 소나무 숲 오솔길을 지날 때는 정글북에서 나오는 절름발이 호랑이나 늑대들이 불쑥 나타날 것 같았으니 말이다. 유년기에 접했던 계몽사 문고판의 책들은 분명 내 영혼 속에 녹아 있을 것이며 내 무의식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시절 텔레비전에서는 인형극 삼국지를 했었다. 그 시간에는 동네가 조용할 정도로 인기 폭발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나에게는 하나의 위대한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항상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새농민 잡지, 기껏해야 그 책에는 ‘금싸라기 참외’ ‘마니따 고추’ ‘천하장사 무’ ‘삭자바 살충제’ 이런 것들로 가득했으므로 그런 그림들은 전혀 나와 상관 없는 것들이므로 관심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버지께서 보시다 덮어놓은 새농민을 들쳐봤다가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이유는 관운장이 긴 수염을 휘날리며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들고 적들 속으로 돌진 하는 그림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아버지, 아버지께서 새농민 잡지를 그렇게 탐독 하신이유는 고추밭을 초토화 시키는 탄저병도 아니요, 볏모가지에 달라붙어 아직 여물지 않은 나락을 쪽쪽 빨아먹는 멸구충을 섬멸하려고 묘책을 궁리하는 차원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나는 그 속의 삽화들을 죽어라 그렸다. 인형극 삼국지를 통해서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을 훤히 뀌고 있었으므로 읽는 것도 문제없었고 읽어가면서 나는 인형극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삽화와 상상 속에서 복원시켜 하나하나 그림으로 표현했다. 예를 들면 인형극 속의 여포의 경우 돼지 코가 달린 추남으로 나오는 것을 하얀 얼굴에다 한쪽 볼에는 상처 자국을 그려 넣고 눈은 쭉 찢어진 냉혈인 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복원 작업을 거친 인물들을 나는 다시 현실로 태어나게 하였는데 이를 테면 우리아버지는 유비(가끔은 동탁이 되기도 했음) 동내에서 오징어 가생이를 할 때 항상 나를 잡아당겨 내팽개치던 xx형은 조조, 씨돼지를 몰고 동내앞 신작로를 지나갈때면 막때기로 구경나온 나를 후려치려 했던 임씨 아저씨는 여포, 같은반 뚱땡이 내 짝꿍 오령규는 장비, 나를 항상 귀여워 해주던 담임선생님은 관우, 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아참 우리집 누렁이 똥깨는 황건적을 도맡아서 하였는데 지개 작대기로 날마다 찌르는 포즈로 위협을 하면 땅바닥에 바싹 엎드려 죽는 연기를 실감나게도 했다. 나는 일인이역을 소화했는데 두말 할 것도 없이 작대기를 들면 조자룡이었고 할아버지의 부채를 들면 제갈량을 무리 없이 해냈다.
2부에 계속 이어짐
첫댓글 ㅎㅎㅎ 잼있어 뒤집어졌어요 ^^ 쌤 삼국지는 저도 사연있는데 ..... 왜 싸움질많은 가 했죠
재미 있게 읽어 주셔서 감쏴~~~ 삼국지를 논 한다는 것이 본전도 못찾을 일일지도 모르지만 2부에서는 제가 감히 한번 해보렴니다......
선생님 잼나게 읽었어요~~~~~~~~~^&^
ㅋㅋㅋㅋ 저도 어렸을때 읽은 이상한 부싯돌같은 동화책 속 마녀가 산속에서 튀서나오는 상상하느라 하굣길이 무서웠던 기억이 있는데~ 재밌네요.황건적 누렁이. ㅋ
흐 흐 일거 주셔서 감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