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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 배향인물: 최 부(崔 溥) 임억령(林億齡) 류희춘(柳希春) 윤 구(尹 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창건연도: 1652년(효종 3) 향 사 일: 8월 |
해촌사는 최부(崔溥), 임억령(林億齡), 류희춘(柳希春),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등 6현을 배향하고 있다. 본래 1652년(효종 3) 임억령 선생 단독 사우로 건립하였으나, 그 후 1689년(숙종 15) 해남유림의 발론으로 최부, 류희춘 선생을 추배하여 오다가 1721년 윤구 선생과 윤선도 선생을 추배하여 5현사가 되었다. 1868년 조정의 영으로 훼철되었다가 1901년 설단, 제향하였으며 박백응은 1922년에 추배되었다. 구교리에 있던 것이 현재 해리 금강골 저수지 옆으로 옮겨 자리 잡고 있다.
1)주벽-최부(崔溥, 1454∼1504)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문신.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본관은 탐진(耽津), 진사(進士) 택(澤)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2년(성종 13) 진사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서관(校書館)의 저작(著作) ‧ 박사(博士) ‧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 수찬(修撰)을 지냈다.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교리(校理)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87년 제주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도중 풍랑으로 중국 절강성 영파부(浙江省寧波府)에 표류, 온갖 고난을 겪고 반년 만에 귀국했다. 즉시 왕명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 중국연안의 해로(海路) ‧ 기후 ‧ 산천(山川) ‧ 도로 ‧ 관부(官府) ‧ 풍속 ‧ 민요 등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수차(水車 蹈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 뒤에 충청도 지방의 한발(旱魃)때 이를 사용케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92년 지평(持平)에 올라갔다가 사간(司諫)으로 전임, 1497년 (연상군 3) 성절사(聖節史)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가.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史禍)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봉당(朋黨)을 조직하여 국정을 비방했단 죄로 단천(端川)에 유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형(斬刑)을 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2)임억령(林億齡, 1496∼156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 득무(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秀)이고, 아버지는 우형(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박상(朴祥)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었고, 152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설서 등 여러 직위에 임명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백령(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552년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현인들이 존경하였으나 이직(吏職)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사신(史臣)들이 평하였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이 있다.
3)유희춘(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 출신. 양수(陽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준(公濬)이고, 아버지는 계린(桂麟)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부(崔溥)의 딸이다. 처부(妻父)는 송준(宋駿)이며,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 간이다. 김안국(金安國)·최두산(崔斗山)의 문인으로서,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한 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 때 김광준(金光準)·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 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 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응교·교리 등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했으며, 이어 장령·집의·사인·전한·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해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던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한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한 채 죽었다.
성격이 소탈해 집안 살림을 할 줄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나 학문, 정치하는 도리에 관한 말을 꺼내면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 續蒙求≫·≪역대요록 歷代要錄≫·≪속휘변 續諱辨≫·≪천해록 川海錄≫·≪헌근록 獻芹錄≫·≪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 詩書釋義≫·≪완심도 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 國朝儒先錄≫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4)윤구(尹衢, 149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橘亭). 할아버지는 경(耕)이며, 아버지는 생원 효정(孝貞)이다.
1513년(중종 8)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다음해 주서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되었다. 주서로 있을 때 왕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538년에 복직되었으며, 남해향사(南海鄕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귤정유고≫가 있다.
5)윤선도(尹善道, 1587∼1671)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 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 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해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 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6)박백응(朴伯凝)
자(字)는 혼원(混元), 호(號)는 취죽헌(翠竹軒). 조선 명종(明宗)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오른 뒤 진원현감(珍原縣監)을 역임하였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부춘동(富春洞)에 정사를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해남읍 해리에 있는 해촌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입구에 삼문이 있고, 좌측에 교직사가 있다. 배향된 해남출신의 명현들은 고산 윤선도를 제외하면 거의 동시대의 인물들로 금남최부 는 충의, 석천 임역령은 풍(해남읍지 기록), 미암 유희춘은 경술, 귤정 윤구는 문장, 고산은 충헌으로 각각 칭송되어 오고 있다. 이들이 해남과 인연을 맺고 생활한 시기는 해진군에서 해남군이 분군 된지 불과 1백여 년도 안 된 시기이므로 이들의 활동과 영향은 이 지역 인사들에게 매우 크게 미쳤다고 보겠다. 맨 뒤에 추배된 취죽헌, 박백응도 석천 임억령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과거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진력하여 학행으로 천거되었다. 만년에는 해남에 귀향하여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참고-해남군의 문화유적, 해남문화원, 1986.
해남의 문화유적, 해남문화원, 1995.
해남,정윤섭, 향지사,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남군 문화관광 http://www.haenam.go.kr/
사진-다음블로그 ‘국화처럼 향기처럼’
http://blog.daum.net/segon53/ <김세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