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聞慶) 견휜의 고향을 찾아서
10여년 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KBS사극 『태조 왕건』 (2000.04.01.~2002.02.24.종영)은 그 인기 만큼이나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가슴에 크게 여운을 남겼다. 대부분 시청자들은 궁예와 왕건에게 관심을 집중하였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견훤의 활약이 못내 아쉬웠다. 그랬던 마음이 이제와서 그의 삶의 흔적을 찾아나서보자는 호기심으로 발동하던 차에 그의 삶이 시작된 곳, 경북 문경으로 떠나보았다.
견훤의 본성은 이(李).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이다. 당시 신라 땅인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 지금의 문경) 태생으로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 농민출신 장군이었다. 당시 신라는 혜공왕(惠恭王) 이후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 중앙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지방에서도 호족들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여 각 지방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서남해 방위에 공을 세워 변방비장(邊方裨將)으로 있던 견훤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 등 여러 성을 공격하였고, 드디어 900년(효공왕 4) 전주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견훤은 북원(北原 :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고구려의 궁예(弓裔)와는 자주 충돌했으며 그뒤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합천)을 비롯한 10여 성을 빼앗았다. 927년에는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자살케하고 경순왕을 옹립하는 등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으며 왕건이 세운 고려와의 전투에서(조물성(曺物城: 지금의 안동 또는 상주 부근) 이기는 등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다.
견훤은 외교와 국제관계의 변동에 큰 관심을 보이고 군사적으로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으나
당시 신라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개혁하지 못하여 신라나 후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구습적인 세력에 머물렀으므로 차츰 힘을 잃게 되었다. 특히 929년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 싸움에서 고려에게 대패한 뒤, 후삼국의 판세는 크게 변했는데 유능한 신하들이 왕건에게 속속 투항하였고, 934년에는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순하는 등 고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후백제 내에서 견훤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게다가 이듬해 왕위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기까지 하였다. 가까스로 견훤은 금산사에서 3개월이 지난 그해 6월에 막내 아들 능우(예), 여자 충복, 애첩 고비 등과 함께 탈주하여 금성(나주)에 이르러 고려에 사람을 보내 왕건의 의중을 물은 후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보(尙父) 칭호와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고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켰지만 고려의 왕건이 신검을 우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못 이겨 앓다가 얼마 뒤 황산(黃山: 충남 논산군 연산면) 불사(佛舍)에서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그의 능(1981년도 지정기념물 제 26호로 지정되었고, 직경 9m, 높이 4.5m)은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다.
견훤과 관련된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의 탄생설화일 것이다. 나 역시 학창시절에 역사시간에 그가 본래 지렁이였다는 얘기를 듣고나서 의아했던 차에 그가 태어났다는 금하굴로 향했다. 그와 관련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단다. 딸이 아버지에게 아뢰기를 밤마다 자색(紫色)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였단다. 아버지가 그 남자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고 일러서 딸이 그 말대로 했는데, 이튿날 아침 실을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서 실끄트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얼마 후부터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完山郡), 즉 지금의 전주(全州)에 도읍을 정했다.
<삼국유사> 에는 견훤의 출생에 관한 설화(구인생(蚓生)설화)가 상기와 같이 실려있는데 그설화는 왕건왕조 시절인 고려때 지은 것이기 때문에 사실여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금하굴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산 170-1에 있는 동굴로 진흙으로 메워져 있던 것을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 석회암층이 발달한 석회동굴로 깊이는 23m이며 동굴 내부와 바닥에는 두껍게 진흙이 덮여 있어 석순, 종유석 등의 동굴생성물은 확인할 수 없다.
지렁이를 발견한 곳이 금하굴인데, 이곳에서 당시에 풍악소리가 났다고 한다. 풍악소리로 구경꾼이 몰려들자 동네에서 굴을 메워버렸는데, 이후로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그 후 마을에는 좋지 않는 일들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굴을 복구했는데, 그 후로는 풍악 소리는 나지 않았고 평범한 동굴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금하굴 앞에는 현재 창고로 쓰고 있는 듯한 순천 김씨 고택이 있고 금하굴 위로는 2002년에 견훤의 위패를 모신 숭위전(사당)이 세워져있다. 금하굴 앞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견원의 살던 집터가 있는데 현재는 우사로 사용되고 있어서 역사보존의 중요성을 새삼느끼게 하였다.
후백제(892~936) 42년의 역사를 버텨온 견훤왕의 직명은 "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로서 무려 47자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