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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승희야
고대 일본 야마토 왕국(大和王國)의 실체
고대 일본 야마토 왕국(大和王國)의 지배층은 백제인들이었다.
2001년 12월 일본의 아키히토 왕[明仁王]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야마토[大和]의 칸무 왕[桓武王]의 어머니가 백제(百濟) 무령왕(武靈王)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나는 한국과 갚은 인연을 느낀다." 그동안 일본인들은 만세일계라고 주장하며 그들이 천황이라 부르는 일본 왕실을 신성시하였다. 그렇다면 일본 국왕의 혈통은 백제 왕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다시에는 이름부터 한국인들의 이목을 끄는 사당이 있다. 일명 백제왕 신사다. 신사관리를 담당하는 후지스 유끼코 씨는 신사가 생긴 경위를 적은 15세기의 기록을 우리에게 공개하였다. 8세기 중엽, 일본의 통치자 쇼무 왕[聖武王]의 칙령으로 건립됐고 그후 칸무 왕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이다. 일본 국왕이 이렇게 큰 백제왕신사를 세운 이유는 백제왕자 경복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선 2001년 12월 아키히토 왕[明仁王]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희들은 평소부터 다가노노 니이가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봐왔기 때문에 그분이 칸무 왕의 어머니이고 백제인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국왕이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주신데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역사는 720년을 기준으로 그전은 일본서기에 그후는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키히토 일본 국왕이 언급한 기록은 '속일본기(續日本紀)'. 속일본기는 칸무 왕의 혈통을 밝히고 있는데 칸무 왕의 어머니 고야신립은 무령왕(武靈王)의 아들 순타세자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 국왕의 외척이 백제 왕실 사람인 것이다.
칸무왕[桓武王]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일본 교토의 평안경. 794년 수도를 교토로 천도하고 평안경시대를 연 인물이 바로 50대 군주 칸무 왕[桓武王]이다. 칸무 왕[桓武王]은 교토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지금도 교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수도천도 외에 칸무 왕[桓武王]의 행적 중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다. 칸무 왕[桓武王]이 자신의 외척을 백제인이라 밝히고 조정의 요직에 백제인을 앉힌 것이다. 칸무 왕은 수도천도후 궁궐북쪽에 직접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우는데 이것이 히라노신사다.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네명의 조상신들 중 세명은 백제 국왕이고 나머지 한명은 고야신립, 칸무 왕의 어머니이다. 칸무 왕은 그만큼 어머니의 혈통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백제(百濟) 제25대 국왕 무령왕(武靈王)이 존재했었던 같은 시기에 일본엔 칸무 왕[桓武王]이 있다. 무령왕의 아들이 순타세자인데 순타세자의 직계후손 중에 하을계라는 사람이 있다. 하을계는 일본 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다. 그의 딸이 고야신립인데, 그녀는 광인왕에게 시집을 갔고 광인왕과 고야신립 사이에 태어난 이가 칸무 왕으로 일본왕실의 외척이 백제인이 된것이다.
여기서 왜 무령왕의 직계후손과 일본 왕실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무령왕릉(武靈王陵)의 발굴이 있었다.
무덤 입구에 발굴된 묘지석에는 무덤의 주인이 무령호왕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가 사망한 해를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은 계묘년(523년) 5월7일에 62세의 나이로 붕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령왕이 462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수 있는 기록이다. 일본서기에는 무령호왕이 축자의 각라도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쿠오카 북쪽에 위치한 가까라시마 섬이다. 향토사학자 시카구치 다카노리 씨는 "이 섬 곳곳에는 사마(무령왕)와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먼 옛날 가까라시마 섬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가기위한 중간 기착지였다.
오사카의 국립역사박물관에는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박물관 앞에 터만 남아있는 나니와궁은 일본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백제니사의 명문토기는 이곳에 백제니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5세기에 일본의 오사카에 백제의 토목, 관개 기술자들이 건너와 오사카의 관개시설을 담당하였다.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딲은 것이 백제인이란 것을 알수 있다. 이때 일본에 이주한 백제인 가운데 무령상제의 숙부인 곤지일행도 난파진에 도착하였다. 곤지는 일본에서 15년간 머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곤지의 후손들은 아스카베 노미 야스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오사카 지역의 아스카베신사는 백제인 곤지를 모신 사당이다. 아스카 지역 일대는 백제식 토기가 발굴되는 백제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다.
이하라 미노루 교수는 "아스카베신사에 최초로 모셔진 신은 백제의 곤지왕(昆支王)인데 이 일대의 아스카천총을 만든 사람들은 그 곤지왕의 후손, 즉 백제인들의 무덤일 것으로 생각합니다."고 말한다. 수많은 고분으로 이루어진 아스카베 천총은 전형적인 백제무덤 양식인 황혈식 석실형태를 띠고 있다.
이도학 교수는 "곤지가 461년에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적어도 15년 정도는 열도안에 가나치 아스카 일대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에 비추어 볼때 무령상제가 일본열도 안에서 아스카 일대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고 할수 있지요."라고 설명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사마(무령왕)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인 475년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이 3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왔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백제는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하게 된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왜왕 무가 갑자기 상을 당했다고 하면서 3년상을 마치고 고구려에 보복하겠다는 적개심을 드러낸 내용의 서신을 중국 양나라에 보낸 것이다. 모든 정황이 개로상제의 죽음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서신을 보낸 왜왕 무는 사마(무령왕)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이 있다. 오사카부 하시모토시에 있는 쓰다하지방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청동거울에 9명의 왕족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가운데, 사마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보이는데 백제의 국왕인 무령호왕(武靈浩王)을 뜻한다. 이 거울은 503년 무령호왕이 일본에 있는 남제왕에게 보낸 것이다. 사마는 개중비직이라는 관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중비직은 일본 기내지방에서 왕 다음의 권력을 가진 직책이다. 왜왕을 지맸던 무령호왕이 귀국후 일본의 남제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이 거룽을 보낸 것이다. 고대의 거울은 주국(主國)의 군주가 신국(臣國)의 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주는 선물이었다.
무령왕이 왜왕이었을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이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오사카 일대에는 지금도 백제양식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그만큼 고대 백제인들이 많이 거주했었던 곳이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여러 분국(分國)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에 존재한 나라가 바로 야마토 왜국[大和倭國]인 것이다.고대 대화지역에 인구는 8~90%가 백제인이었다. 따라서 왜왕이 백제인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한때 고대 야마토를 지배한 인물은 백제인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칸무왕[桓武王]의 왕자가 저술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고대 일본의 왕족과 귀족의 계보가 적혀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근거가 하나 발견된다. 민달왕의 손자인 백제인이란 글귀이다. 즉, 비다츠 왕[敏達王]이 백제왕족이란 뜻이다.
이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또 있다. 비다츠 왕[敏達王]이 즉위한 해인 572년 일본서기의 기록인데, 세자가 일본 국왕에 즉위하였고 이 달에 백제의 대정궁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만약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 내용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왜 일본 국왕이 백제궁을 지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게된 것이다. 비다츠 왕[敏達王]이 백제인이므로 백제인 국왕이 백제궁을 짓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다츠 왕[敏達王]의 손자인 조메이 왕[舒明王]이 백제천 옆에 백제사와 백제궁을 지었다고 한다. 이름이 백제강인 이곳에서 지난 1997년 2월에 백제사터가 발굴된 바 있다고 한다. 641년에 조메이 왕이 백제궁에서 사망하고 왕궁 북쪽에 안치한 뒤 이것을 백제대빈이라고 불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백제대빈은 백제의 3년상을 의미한다. 백제인 비다츠 왕[敏達王]의 손자 조메이 왕[舒明王]. 그는 백제인들이 모여사는 지역에 백제사와 백제궁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례절차도 철저히 백제의식을 따른 것이다.
당시 백제와 왜국의 관계를 알수있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663년 8월 백강구 전투. 당(唐)과 신라, 백제와 왜국이 참전한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었다.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백제왕족 복신(福信)은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복신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이메이 왕[齊明王]이 하카다에서 직접 군사훈련을 주도한다.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의 왜군의 성격을 알수 있는 내용이 구당서에 있는데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내용이다. 즉, 백제왕자가 왜국의 군사들을 인솔했다는 말인데 백제왕족이 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The Yamato Kingdom:The First Unified State in the Japanese Islands Established by the Paekche People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업코리아>는 오늘부터 한일 고대사와 관련, 홍원탁 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도 왕국의 시조는 호무다(應神)이고, 창건 시기는 4세기 중 이라는 것이 (극우 성향의 사람들을 제외한) 일본 사학계의 정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야마도 왕조를 세운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필자가 1988년, 1994년 2003년에 출판한 저서들에서 주장한 것은, “4세기 말경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건너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고, 천황족의 근원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필자의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이다.
보완적인 성격의 근거는 신찬성씨록, 속일본기, 풍토기, 삼국사기, 중국 왕조의 정사(正史) 등의 기록들, 다양한 고고학적 물증들,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등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The Yamato Kingdom: The First Unified State in the Japanese Islands Established by the Paekche People in the Late Fourth Century Wontack HongProfessor, Seoul University Homuda (Oujin), the founder of the yamato kingdom Most Japanese historians seem to believe that the Yamato kingdom began with King Oujin (Homuda), despite the fact that, according to Kojiki and Nihongi, Oujin was the fifteenth, not the first, king of Yamato kingdom. Why do they believe this? I will now present a well known thesis.An early twentieth century professor of history at Waseda University, Tsuda Soukichi (1873-1961), argued that the records of Kojiki and Nihongi on the Yamato kings prior to Oujin were nothing but a simple fabrication for the purpose of making the Yamato royal family the rulers of Japanese archipelago since ancient times. 1The first evidence advanced by Tsuda to support his thesis is as follows. In the original text of Kojiki and Nihongi, all thirteen kings between Jinmu the Founder and the fifteenth king Oujin were recorded in (traditional Japanese style) posthumous formulaic titles, none of them individual or unique.
From this, Tsuda reasons that posterity manufactured the titles, rendering them uniform. Beginning with Oujin, however, the unique name that was actually used since the time of the princedom was recorded as the posthumous title of each king. From this, Tsuda reasons that the name of each king was authentic. For example, the name of Oujin when he was a prince is Homuda, and the latter became his (traditional Japanese style) posthumous title. 2 The Chinese-style titles, such as Jinmu or Oujin, though most familiar to the general public these days, are not the ones we see in the original Kojiki and Nihongi. These are the titles that are believed to have been manufactured later by a scholar called Oumi Mihune (721-85).The second evidence presented by Tsuda is as follows. According to Kojiki and Nihongi, from Jinmu to the fifteenth king Oujin, the pattern of succession was strictly lineal, from father to son. Between Oujin and Tenji, however, the pattern of succession was mostly fraternal, with kingship passing from brother to brother.
The practice of father-to-son succession was not firmly established even after Tenji in the late seventh century. Tsuda therefore contended that the records of Kojiki and Nihongi on all kings prior to Oujin were fictitious. The logic of Tsuda’s proposition is very persuasive. 3 There is, indeed, scarcely any substance in the records of Kojiki and Nihongi from the second king up to the ninth king, nor about the thirteenth king. The section on the fourteenth king, Chiuai, in Kojiki and Nihongi consists almost entirely of accounts of the fictitious entity called Empress Jingū. Many post-War Japanese historians believe that Teiki, a chronicle compiled in the early sixth century, had indeed contained records of only 12 kings from Oujin to Keitai. I find that there are four additional pieces of evidence to support the thesis that the Yamato kingdom began with Oujin.The first supporting piece of evidence is as follows.
Tsuda had focused on the fact that both Kojiki and Nihongi record strict father-to-son successions prior to Oujin. More importantly, however, is the fact that the credibility of them is cast into doubt by the peaceful nature of the transitions ascribed to them, so unlike other transitions. Let us look, for example, at the post-Oujin period. There was a bloody feud among brothers when Nintoku succeeded Oujin. There was another bloody feud when the Richiu-Hanzei brothers succeeded Nintoku. There developed very peculiar circumstances when Ingyou succeeded Hanzei. There was another bloody feud when the Ankau-Yūriaku brothers succeeded Ingyou. There developed very peculiar circumstances when the Kenzou-Ninken brothers succeeded Yūriaku-Seinei, and also when Keitai succeeded Ninken-Buretsu. In other words, conflict and bloodshed, mostly between brothers, characterize post-Oujin successions, giving us no reason to suppose that pre-Oujin successions were peaceful. Yet such is the claim, a claim that thus casts into doubt the factuality of the account. Secondly, according to Nihongi, the 70-year interval between the death of the so-called fourteenth king Chiuai (in 200) and the enthronement of the fifteenth king Oujin (in 270) was ruled by Empress Jingū as regent (201-269).
Yet Jingū is commonly acknowledged to be a fictitious figure apparently inspired by the third century Pimihu recorded in the Wajin-den of Wei-shu (of San-guo-zhi compiled by Chen Shou, 233-297). 4 The story of Jingū’s regency makes the thesis that only the post-Oujin kings did actually exist sound more reasonable. Thirdly, immediately after the compilation of Kojiki in 712, the Yamato court ordered the governors of all provinces to compile surveys of products, animals, plants, and land conditions, etymologies of place names, and written versions of oral traditions. These records were apparently used as a source by Nihongi. Harima Fudoki, one of the few such records extant, is believed to have been compiled between 713 and 715. Harima Fudoki includes so many anecdotes related to Homuda (Oujin) that one readily believes Homuda must have been the founder of the Yamato kingdom. Harima Fudoki is blanketed with a myriad of accounts about Homuda’s activities such as visiting villages and people, going on hunting expeditions, and the naming of places after Homuda’s trifling words and deeds. Other kings are scarcely mentioned in Harima Fudoki.
5The fourth supporting piece of evidence is this. According to Kojiki and Nihongi, among all Yamato kings, only Jinmu the official Founder and the so-called fifteenth king Oujin were born in Kyūshū: Jinmu shortly after the imperial ancestor deity Ninigi descended to Kyūshū from heaven, and Homuda immediately after his mother (Empress Jingū) landed on Kyūshū, crossing the sea from Korea. From Kyūshū, Jinmu makes an epic Eastward Expedition, while Oujin makes a miniature expedition eastward with his mother. The fact that only Jinmu the official founder and Oujin the fifteenth king were recorded to have been born in Kyūshū (only to conquer unruly elements in the Yamato area) implies that both Jinmu and Oujin represent the one and only founder of the Yamato Kingdom. 6Dating the Foundation of the Yamato Kingdom According to Nihongi, the Yamato kingdom was established in 660 BC.
Neither the Japanese historians nor the general public believe the year of the foundation of the Yamato kingdom recorded in Nihongi to be correct. This raises, of course, the question of when the Yamato kingdom was established.According to Nihongi, Oujin became king in 270. If one examines both Nihongi and Samguk-sagi, however, one arrives at the conclusion that Oujin became the king in 390. This is the well known 120-year (two sexagenary cycles) difference between the records of Nihongi and those of Samguk-sagi in this period (see Aston 1889, pp. 51-65). For instance, according to Nihongi, Paekche sent crown prince Cheon-ji to the Yamato court in the eighth year of Oujin’s reign (277). The Samguk-sagi records that the crown prince was sent to the Yamato court in 397. According to Nihongi, Paekche King Asin (Ahwa) died in the sixteenth year of Oujin’s reign (285). The Samguk-sagi records that King Asin died in 405.
All these records (given the usual two-cycle correction) imply that Oujin became the king in 390. 7If the Yamato kingdom was established in 390, how do we trace the roots of the royal family? The correct answer to this question that the ardent Japanese wish to hear goes as follows: “the imperial clan represents a truly ‘native’ ruling force that had emerged as the result of natural socio-political evolution on the Japanese archipelago from the ancient Ice Age.”Model-building by egami, ledyard and hong Observing an “archeological break” including the sudden appearance of horse bones and trappings in the late fourth century, Egami (1948) has contended that some horseriding people from the continent had conquered the Japanese islands and established the Yamato kingdom. Ledyard (1975) has specified the Puyeo people as a plausible candidate for the conquerors on the basis of the chaotic stories of the period between 350 and 380 recorded in Nihongi.
By allotting appropriate weight to the post-Oujin records of Kojiki and Nihongi, however, Hong (1988, 1994, 2002) has contended that the Paekche people from the Korean peninsula conquered the Japanese islands. The essence of my model is as follows. I contend that the Neolithic Jōmon culture (c. 10,000–300 BC) on the Japanese archipelago was the product of Ainu and Malayo-Polynesian people, while the Bronze-Iron Yayoi culture (c. 300 BC-300 AD) was the product of Kaya people from the southern Korean peninsula together with Ainu and Malayo-Polynesian aborigines. 8 The proto-Japanese people, speaking proto-Japanese language, were formed during the Yayoi period. I also regard the early tomb culture (c.300-375) as an extension of the Yayoi culture.The late tomb culture (c. 375-675) was, however, brought about by the Yamato kingdom, the first unified state on the Japanese islands that was newly established at the end of the fourth century by the Paekche people from the Korean peninsula. 9 I postulate that the Paekche people conquered the Japanese islands sometime between 370-390, that Homuda (Oujin) acceded to the throne as the founder of the Yamato kingdom in 390, and that there were some time lags between the commencement of conquest and the burial of conquerors in gigantic tombs with horse trappings. By the time King Mi-cheon of Koguryeo conquered the Le-lang Commandery in 313, Paekche came to occupy the Dai-fang Commandery.
In 369, King Keun Chogo of Paekche conquered the entirety of the Ma-han states in the southwestern peninsula and then, in 371, struck northward into the Pyung-yang area, killing the King Kogug-won of Koguryeo. During the fourth century, before the appearance of the King Kwang-gae-to the Great (391-412) in Koguryeo, Paekche could maintain an offensive posture in armed conflicts with its neighbors. Paekche under the reign of the martial King Keun Chogo (346-75) and his son, Keun Kusu (375-84), reached its peak in military might and territorial expansion. It was during this period that the Paekche people conquered the Japanese islands and established the Yamato Kingdom. BIBLIOGRAPHY[각주]1 For a good summary of Tsuda’s thesis, see
井上 等編, 日本歷史大系 : 原始古代 (1984: 271-3).2應神 卽位前紀 初天皇在孕而 天神地祇授三韓 旣産之 肉生腕 上 其形如鞆 ...故稱其名謂譽田 天皇 上古時俗 號鞆謂褒武多焉
(NI:363) 3 Before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the emperor and the imperial institutions were elevated to such a lofty legal and spiritual position that any questioning of the orthodox account of their origin was tantamount to treason. In 1940, four of Tsuda’s major writings were banned. In 1942, he was sentenced to three months injail for the crime of desecrating the dignity of the imperial family.
4 日本書紀 神功皇后 攝政元年是年也 太歲辛巳 卽爲攝政元年 (NI: 349) 神功 攝政三十九年 魏志云 明帝景初三年 倭女王遣大夫難斗米等 (NI: 351) 神功 攝政六十六年 是年 晉武帝泰初二年. . .倭女王遣重譯貢獻 (NI: 361)神功 攝政六十九年. . .皇太后崩. . .時年一百歲. . .是年也 太歲己丑 (NI: 361) 三國志 魏書 卷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倭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 . . 其年十二月 詔書報 倭女王曰 制詔親魏倭王 卑彌呼 . . . 正始. . . 八年. . . 倭女王與狗奴國 男王卑彌弓呼素不和. . . 相攻擊 . . . 卑彌呼以死.
5 According to Aoki (1974: 35-39), Harima Fudoki is full of accounts of Homuda’s “fighting career and aggressive profile,” and ye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neither Kojiki nor Nihon-shoki speak much of the belligerent activities of Homuda, while other provincial accounts are full of such episodes. . . . This must be an indication of some effort made to cover up Homuda’s undesirable aspects for records. In fact, the compilers of the Kojiki and Nihon-shoki seem to have taken pains to conceal his belligerence before and after his emergence as the ruler of Yamato state . . . Compilers’ mention of his birthmark of an archery arm-piece seems to imply that he was a man of martial strength. . . .The silence of both Kojiki and Nihon shoki regarding Homuda’s aggressiveness seems intentional.” Whatever the cover-up, until this very day, as many as 25,000 Hachiman Shrines all over the Japanese islands continue to worship the deified spirit of Homuda, not Jinmu, as the god of war.
6 天照大神之子. . .娶高皇産靈 尊之女 (N1: 135) 而生. . .次生 天津彦根火瓊瓊杵根尊 及至奉降 (N1: 161)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穗穂槵觸之峯 (N1: 149) 後遊幸海濱 見一美人 (N1: 155) 於是. . .日子番能邇邇藝能命 於. . .遇麗美人. . .一宿爲 婚. . .所生之子. . .次生子. . .弟火遠理命. . .海神之女. . .見感目合而. . .卽今婚其女. . .於是海神之女. . .乃生置其御子而. . .卽塞海坂而返入. . .是…日子. . .娶其姨. . .生御子名 五瀨命. . .次.. .次. . .次若御毛沼命. . .亦名神倭伊波禮毘古命 (K: 130-146)整軍雙船度幸時. . .押騰新羅之國. . .其政未竟之間 其懷妊産 卽爲鎭御腹 取石以纏於裳之腰而 渡筑紫國 其御子阿禮坐 阿禮二字以音 (K: 230- 232) 神功 攝政前紀 皇后從新羅還之. . .生譽田天皇於筑紫 (NI: 341) 7 應神 八年 春三月 百濟記云 阿花王立...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NI: 367) 應神 十六年 春二月 是歲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NI: 373)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三 阿莘王 六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S2: 45). 腆支王 或云直支...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 .十四年王薨. . .國人. . .迎腆支卽位
(S2: 46) 8 A sudden change in climate, such as the commencement of a Little Ice Age, could have prompted the southern peninsular rice farmers to cross the Korea Strait c. 300 BC in search of warmer and moister land. About 400 BC, mountain glaciers seem to have started to re-advance, with cooler conditions persisting until 300 AD. The beginning of this Little Ice Age coincides with the great Celtic migrations in the west end of the Eurasian continent and the Warring States period (403-221 BC) in the east end. See Mayewski and White (2002: 121), Lamb (1995: 150), and K W. B, ed., “Climate Variations and Change,”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a, Vol. 16 (1986: 534).9 The Little Ice Age (400 BC-300 AD) produced the heyday of the Roman Empire located in the warm Mediterranean zone and the Han Chinese Empires in mainland China. There followed a drought period of maximum intensity in the Mediterranean, North Africa and far to the east into Asia around 300-400 AD. This period coincides with the great Germanic folk migrations in the west end and the Five Barbarians and Sixteen States period (304-439) in the east end. According to Lamb (1995: 150), such a drought could have devastated the places where agriculture had been carried on with the aid of elaborate irrigation works.
It is then possible that such an abrupt change in climate had a serious impact also on the Paekche farmers around the Han River basin.Due to a long spell of drought following the Little Ice Age, the Kaya farmers on the southern shore of the Korean peninsula could have renewed, by the turn of the 4th century, their emigration effort into the Japanese islands to join their distant cousins, while the more innovative farmers led by the martial rulers of the Paekche State at the Han River basin could have decided to conquer the Ma-han in the southwestern quarter of the peninsula (in 369 AD), and then to branch off in the direction of the Japanese islands in the late fourth century.
야마토 왕국의 시조, 창건 년도: 4세기말에 백제사람들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 홍원탁 (서울대 교수)야마도 왕국의 시조: 호무다 (褒武多, 品陀, 譽田, 應神)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호무다(應神)를 제1대가 아니라 제15대 왕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야마도(倭) 왕국이 호무다로부터 시작 한다고 믿는다.
1 어째서 그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이제 일본 사학계에서 거의 정설의 위치를 확보한 쯔다(津田左右吉)의 학설을 소개 한다.
20세기 초, 와세다 대학의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호무다 이전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쯔다가 첫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시조 진무(神武) 이후 신공왕후의 남편이라는 주우아이(仲哀) 왕까지의 (즉 2대부터 14대 왕까지의) 13명의 왕들은, 단지 죽은 다음에 만들어서 부여된 시호(和風諡號)로만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명칭들을 검토 해 보면, 전혀 각자의 고유성이 없다.
반면, 15대 왕이라는 호무다(應神) 부터는, 각기 왕자 때부터 실제로 사용된 특유한 이름을 그대로 왕의 시호로 기록했다.
오오진(應神)의 왕자 때 이름은 호무다(褒武多, 品陀)이고 (和風)시호도 호무다 (譽田)이다.
진무나 오오진이라는 중국식 명칭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원본에 기록된 명칭들이 아니라, 8세기 후반에 오우미 미후네(淡海三船, 721-85)라는 학자에 의해 새삼 중국식(漢風)으로 만들어 부친 시호들이다 쯔다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14대 왕이라고 하는) 주우아이 왕까지의 왕위 승계 형식을 보면, 단한번의예외도없이,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대 중국왕조의 전통인] 부자간의 왕위 승계란, 7세기 후반 덴지(天智, 626-72) 이후에도 제대로 확립이 안 되었던 것이다.
오오진(應神) 이후 덴지 이전의 왕위 승계는 대부분 부자간이 아니라 [투르코-몽골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제간의 승계이었다.
쯔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다.
3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2대 왕부터 9대 왕까지, 또 13대 왕에 대해, 기록이란 것이 거의 없다.
14대 왕 주우아이(仲哀)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신공(神功)왕후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다수의 전후세대 일본 역사학자들은, 6세기 초에 편찬된 제기(帝紀)에는 호무다(應神)로부터 게이타이(繼體)까지 12명만 기록이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야마도 왕국이 오오진(호무다)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쯔다가 제시하는 근거에 추가해서) 네 가지 더 제시하려 한다.
첫 번째의 추가 근거. 쯔다는 오오진 이전의 왕위승계가모두 부자간의 승계라는 특이점에 의혹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왕위승계가 아주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오진 이후를 보자. 오오진에서 닌토쿠(仁德)로 승계될 때, 한바탕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닌토쿠에서 리츄우(履中)-한제이(反正) 형제로 승계되어가는 과정에서도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한제이에서 닌교오(允恭)로 승계될 때, 유혈극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닌교오에서 안코오(安康)-유략쿠(雄略) 형제로 승계되는 과정에서도, 또 한바탕 골육상쟁의 유혈극이 있었다.
유략쿠-세이네이(淸寧)에서 겐조오(顯宗)-닌켄(仁賢) 형제로 승계될 때에도, 또 닌켄-부레츠(武烈) 에서 게이타이로 승계될 때에도,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형제간의 왕위승계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왕위승계가 항상 순탄치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오오진 이후의 고사기-일본서기 기록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두 번째의 추가 근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14대 왕이라는 주우아이가 죽었다는 해(200)로부터 15대 왕이라는 오오진의 즉위(270)까지 장장 70여년에 달하는 공백 기간(201-69)을, 자타가 공인하는 가공의 존재인 신공왕후가, 섭정을 하며 채우고 있다.
신공왕후는 3세기에 쓰여진 위서 왜인전(魏書倭人傳, 233-97년 간에 생존한 陳壽가 편찬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왕 비미호(卑彌呼)라는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조한 가공의 인물로 간주된다.
4 따라서 오오진(호무다)부터가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이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 세 번째의 추가 근거. 712년에 고사기가 편찬 완료되자, 야마도 조정은 즉시 전국에 명을 내려, 각 지방의 토산품, 특이한 동식물, 토지 조건, 지명의 유래, 구전돼오는 이야기 등을 조사하고, 기록을 해 올리도록 했다.
이들 기록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리마 풍토기(播磨風土記)는, 713-715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 하리마 풍토기를 보면, 독자로 하여금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의 시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호무다는 수없이 순행과 사냥을 하고, 수많은 지명들이 호무다의 사소한 언행들과 연관 지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다른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이 없다.
5 네 번째의 추가 근거.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모든 왕들 중에 유독 공식적 시조 진무와 15대 왕인 오오진(호무다) 만이 큐슈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진무는 황족의 조상신인 천손 니니기(邇邇藝)가 하늘에서 내려 온지 얼마 후에, 또 오오진은 모친(신공왕후)이 한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 큐슈에 상륙한 직후에 각기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진무는 큐슈에서 동정(東征)의 위업을 이루는 장도에 오르는데, 갓난 아기 호무다는 큐슈로부터 모친(신공왕후)과 함께 축소판의 동정을 수행한다.
공식적 시조인 진무와 15대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호무다(應神)만이, 오로지 야마도 지역의 무뢰한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큐슈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이 두 개의 존재가 바로 야마도 왕국의 시조 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6 야마도 왕국의 창건 연대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이 기원전 660년에 수립 되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지만 일본 사학자들 조차도 이를 믿지 않는다.
이는 곧 야마도 왕국이 언제 세워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일본서기에는 호무다(應神)가 270년에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비교해보면 호무다가 왕위에 오른 것은 390년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시대의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들 사이에 120년(2周甲)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전지(直支) 왕자가 오오진 8년(277)에 야마토 조정에 온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전지왕자가 야마토 조정에 보내진 것이 397년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경우, 이 시대를 연구하는 세상 모든 사학자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도를 택한다.
또, 일본서기에는 백제 아신(阿花)왕이 오오진 16년(285)에 죽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으나, 삼국사기에는 405년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 시조 오오진이, 270년이 아니라, 390년에 왕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7 그렇다면 390년경에 야마도 왕조를 수립한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도대체 야마도(倭) 왕국은 어떻게 창건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의 해답이 있다.
우선 “일본인”이란 이 세상의 어느 민족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고유한 민족”인데, 야마도 왕국은, “수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발전단계”를 거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순수한 토착 지배세력”인 천황가 선조들의 노력으로, 야마도 지역을 본거지로 해서 성립된,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얘기다.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이 모범답안을 다양한 형태로 포장해서 일본 국민에게 제공을 해오고 있다.
수요가 공급을 창조한다는 고전적 경제 법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에가미(江上波夫)-Ledyard-洪元卓: Model의 진화 동경대의 에가미 (1948) 교수는, 일본열도의 고분들에서 4세기 말 이후에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등, "고고학적 단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일단의 기마민족이 대륙으로부터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의 Ledyard (1975) 교수는 350-380년 기간에 해당하는 혼란스런 일본서기의 기록을 분석한 다음, 346년에 부여가 모용선비에게 깨진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기마민족 정복자가 부여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홍원탁(1988, 1994, 2002)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전편에 흐르는 기록 내용들, 특히 호무다(應神) 이후의 기록들에 초점을 맞추어,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수립했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모델(Model)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일본열도의 신석기 죠몬(繩文, 10,000-300 BC) 문화는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이 이룩한 것이지만, 청동기-철기 야요이(彌生, 300 BC-300 AD) 문화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사람들이 건너가 아이누-말라요 폴리네시안 원주민들이 함께 이룩한 것이다.
8 원시 일본어를 사용하는 원시 일본인은 야요이 600년 기간 중에 형성되었다.
고분(古墳)시대 초기(c.300-375)는 야요이 문화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고분시대 후기(c.375-675) 문화는 4세기 말경에 백제사람들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왕국이 이룩한 것이다.
9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 한 것은 370-390년 기간 중이며, 야마도 왕국의 시조 호무다(應神)는 39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정복이 시작되는 시점과 정복자들이 거창한 고분에 각종 마구와 함께 매장되는 시점 사이에는 얼마간의 시차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정복할 즈음, 백제는 대방군을 점령하였다.
369년경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371년에는 평양 지역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였다.
광개토대왕(391-412)이 출현하기 이전의 4세기는 백제가 이웃 국가들과의 무력충돌에서 지속적으로 공세를 취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왕국을 세운 것이다.
상무적인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375-84) 재위 중, 백제의 군사력과 영토 확장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필자의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 이다.
보완적인 성격의 근거는 신찬성씨록, 속일본기, 풍토기, 삼국사기, 중국 왕조의 정사(正史) 등의 기록들, 다양한 고고학적 물증들,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등이다동아시아 역사 강의: 2-1 (2005. 4. 9)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BIBLIOGRAPHY [각주]1.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倭”혹은 “日本”이라고 한자를 쓰고 “야마도”라고 읽는다.
夜麻登(倭) (K: 162) 日本 此云耶麻謄 (NI: 81) 2. 쯔다의 논문이 잘 요약되어 있는 것으로 井上 等 編, 日本歷史大系 1: 原始古代 (山川 1984: 271-3) 참조3.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천황과 천황제도는 초법적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감히 천황과 황실의 원류에 대한 정통적 서술에 의문을 제기 하는 행위는 반역죄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940년에 쯔다의 주요 저술 네 권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1942년에는 황실의 존엄성을 훼손한 죄목으로 3개월간의 금고형을 언도 밭았다.
4. 日本書紀 神功皇后 攝政元年是年也 太歲辛巳 卽爲攝政元年 (NI: 349) 神功 攝政三十九年 魏志云 明帝景初三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斗米等 詣郡 求詣天子朝獻 (NI: 351) 神功 攝政六十六年 是年 晉武帝泰初二年 . . . 十月 倭女王遣重譯貢獻 (NI: 361)神功 攝政六十九年 . . . 皇太后崩 . . 時年一百歲 . . . 是年也 太歲己丑 (NI: 361) 三國志 魏書 卷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倭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 . . 其年十二月 詔書報 倭女王曰 制詔親魏倭王 卑彌呼 . . . 正始. . . 八年. . . 倭女王與狗奴國 男王卑彌弓呼素不和. . . 相攻擊 . . . 卑彌呼以死.
5. Aoki (1974: 35-39)는 “하리마 풍토기 등에는 호무다(應神)의 공격적인 품성과 전투적인 생애의 기록이 가득 한데도 불구하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호무다의 호전적인 행동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 이것은 호무다의 바람직하지 않은 면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호무다가 야마토 왕국의 지배자로서 등장하는 시기를 전후로 한 그의 호전적 행위를 감추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 편찬자들은, 호무다가 태어날 때 팔에 궁사(弓士)들이 사용하는 가죽 팔찌 모양의 굳은살이 있었다고 기록을 함으로서, 호무다가 강한 전투적 체질을 소유한 인물임을 암시했다.
..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호무다의 호전적인 측면에 대해 침묵을 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간에, 오늘날 일본열도의 25,000여 개의 하찌만(八幡)신사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져 오는 것은 진무가 아니라 오오진(호무다)이다.
6. 天照大神之子 . . 娶高皇産靈 尊之女 (N1: 135) 而生 . . 次生 天津彦根火瓊瓊杵根尊 及至奉降 (N1: 161) 天神之子 則 當到 筑紫曰日向高千穗穂槵觸之峯 (N1: 149) 後遊幸海濱 見一美人 (N1: 155) 於是 . 日子番能邇邇藝能命 於. . 遇麗美人 . 一宿爲 婚 . . 所生之子. . .次生子 . . 弟火遠理命. . 海神之女. 見感目合而. . .卽今婚其女. . 於是海神之女 . . .乃生置其御子而. . 卽塞海坂而返入 . . . 是…日子. . 娶其姨 . . 生御子名 五瀨命. . 次. . 次. . 次若御毛沼命. . .亦名神倭伊波禮毘古命 (K: 130-146)整軍雙船 度幸時. . 押騰新羅之國. . 其政未竟之間 其懷妊産 卽爲鎭御腹 取石以纏於裳之腰而 渡筑紫國 其御子阿禮坐 阿禮二字以音 (K: 230- 232) 神功 攝政前紀 皇后從新羅還之. . 生譽田天皇於筑紫 (NI: 341) 7. Aston (1889: 51-65) 참조 應神 八年 春三月 百濟記云 阿花王立...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NI: 367) 應神 十六年 春二月 是歲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NI: 373)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三 阿莘王 六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S2: 45). 腆支王 或云直支..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 十四年王薨. . 國人. . 迎腆支卽位 (S2: 46)
8. 소 빙하기의 시작과 같은 기후의 급작스런 변화가, 기원전 300년경에, 한반도 남부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로 하여금 좀더 온화하고 강우량이 많은 땅을 찾아 대한해협을 건너게 했을 수 있다 기원전 400년경에 북극 빙산들이 남진하기 시작하면서 기온이 저하 했고, 그 상태가 AD 3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이 소 빙하기의 시작은, 유라시아대륙 서쪽 끝에서는 캘트족의 대이동과, 동쪽 끝에서는 전국시대(403-221 BC)의 시작과 일치한다 Mayewski and White (2002: 121), Lamb (1995: 150), K W. B, ed., “Climate Variations and Change,”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a, Vol. 16 (1986: 534) 참조 9. 소 빙하기시대(400 BC-300 AD)는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던 로마제국과 중국대륙 한족 제국의 전성기를 창출하였다.
소 빙하기가 끝난 직후인 AD 300-400년 사이에는 지중해 주변, 북아프리카, 그리고 멀리 아시아의 동쪽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최고조로 달하였다.
이 시기는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끝에서의 훈족에게 밀린 게르만민족의 대이동과 동쪽 끝에서의 5호16국 시대(304-439)의 전개와 일치한다.
Lamb (1995: 150)은, 이 같은 가뭄은 정교한 수리시설의 도움을 받아 농경생활을 영위하던 지역을 황폐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기후의 급격한 변화는 한강유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백제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소 빙하기의 뒤를 이은 긴 가뭄 때문에 한반도 남부 연안에 살던 가야 농부들 중 일부는 4세기가 시작되면서 새삼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들의 먼 야요이 친족과 합류하여 초기 고분시대(c.300-375)를 전개 했을 수 있다.
반면, 전투적인 지도자의 영도 하에 한강 유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백제 사람들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우선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마한의 여러 성읍국가들을 정복하고(369 AD), 그 일부는 곧 이어 일본열도로 진출해 후기 고분시대(c.375-675)를 전개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정통 역사학자들은 직업의식에서인지 기후변화에 의한 접근방법을 아주 꺼리는 것 같다.
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衰亡)
9세기, 야마도 왕국의 귀족 씨족들과 거대한 사찰들은 장원(莊園)을 만들기 시작했고, 10세기에 와서는 국가 토지소유제와 함께 중앙정부의 권위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했고, 주변의 영향력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쳤다.
농민들은 귀족 부재지주보다는, 귀족 출신을 자처하는 지방 토착의 실력자를 선호하였다.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도태 과정을 거쳐 전문 싸움꾼으로 진화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전문적 무사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무라이는 중세 일본의 새 지배자가 될 운명이었다.
왕족 후손인 미나모도(源) 씨족과 다이라(平) 씨족은 농민 무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두 개의 집결지가 되었다.
왕족출신 지도자들은 농민출신 싸움꾼들의 무력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일본 열도를 점령하여 야요이-고분 시대의 쌀농사 농민들 위에 지배층을 형성했던 백제 사람들은, 농민출신의 무사계급에게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천황이란 존재가 지금까지도 상징적으로나마 지배자로 군림 할 수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에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은, 800년경을 전후로 전세계적 한발의 시작과 일치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衰亡) - 왕조의 멸망 홍원탁 (서울대 교수)새로운 지배 계급의 등장: 사무라이 소가 씨족이 제거되고, 645년의 다이카 가이신(大化改新)이 얼마 지나지 않아, 663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야마도 조정은 예상되는 당나라의 침입 통로를 황급히 요새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전국적인 군사적 동원체제를 갖추기 위해 율령제를 강화하였다.
1 701년에 다이호(大寶) 율령이 포고되면서, 모든 국민은 중앙집권화된 관료적 정부와 당나라 식의 국가 율령(律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모든 토지는 국가에 귀속 되고, 농민은 토지를 분배 받아 세금을 내고 부역을 바치게 되었다.
가바네(姓)를 가진 우지(氏) 지도자들이 관장하던 베민(部民)들은 자유인(公民)이 되어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지배 씨족들은, 군대를 보유하면서 야마도 군주를 호위하거나 전쟁에 나가던 전통적인 권리를 빼앗겼지만, 고위 관직 혹은 지방정부의 관리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얻었다.
2 (國造와 같은) 하급 지배층은 지방관청의 관리가 되었다.
정부 관료들은 신분과 지위, 공적에 따라 식읍을 받았다.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 식의 과거제도를 채택해 본적이 없으며, 세습적인 귀족사회를 유지했다.
하지만 수입을 해 온 율령제는 씨족제도에 바탕을 둔 일본 사회에 맞지가 않았다.
특히 안록산의 난(755-63)의 여파로 당나라 팽창정책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자, 야마도 지배자들은 율령제를 집행할 열의를 잃었다.
기울어가는 당나라 조정과의 외교적인 접촉도 838년 이후에는 단절되었다.
3헤이안 시대(794-1192) 기간 중, 일찍이 대화개신을 실행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후지와라 (이전의 나카토미) 씨족은, 왕실과의 외척관계를 강화시키고, 858년에는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최초로 섭정에 올라 사실상의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으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독점하였다.
중앙의 중하위와 지방정부의 직위는 다른 중소 귀족들이 세습적으로 차지하였다.
9세기 중, 수도와 지방에서 귀족 씨족들과 거대한 사찰들은 장원(莊園)을 만들기 시작했고, 10세기에 와서는 국가 토지소유제와 함께 중앙정부의 권위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4 장원의 소유자와 강력한 귀족 및 중요한 사찰의 승려들은 지방의 유력한 가문의 사람들과 농민들을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5사유토지의 확산은 국가의 세수를 격감시켜, 왕실은 직할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에만 의존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법질서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혼란과 폭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백성들이 자위를 위해 무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10세기 초가 되면, 중소 규모의 농민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하기 시작하고, 그들 주변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쳤다.
7 농민들은 귀족 부재지주보다는, 귀족 출신을 자처하는 지방 토착의 실력자를 선호하였다.
한편,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병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Friday(1992: 174-5, 139)에 의하면, “9세기 말에는 정부의 이름을 빙자한 사적인 세력들의 지휘를 받은 사병(私兵)들에 의해서 국가의 병역의무 대부분이 수행되었고, 또 914년경에 와서는, 게이비시(지방 경찰관)의 직책도 모두 지방의 농민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 Sansom (1963: 239)은 “특히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거의 모든 농부 하나하나가 무사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라고 말한다.
싸움에 동원된 농민들은 일단 싸움이 끝나면 그들의 농토로 돌아왔었다.
8 그러나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도태 과정을 거쳐 전문 싸움꾼으로 진화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전문적 무사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무라이는 중세 일본의 지배자가 될 운명이었다.
유교적인 과거제도 대신에, 무술에 바탕을 둔 능력주의 사회로 진화된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비천한 계층의 출신이거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출신이 애매모호한 사람도, (개개인의 두뇌와 칼 솜씨 앞에 평등한) 싸움꾼이라는 똑같은 위치에서 출발을 했다.
불가사의 하다면, 이 농민 출신 무사들이 자신의 절대적 힘을 인식하는데 왜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하는 점뿐이다중앙정부에서 고위직을 얻지 못하고 지방으로 내려와 정착을 하게 된 지방의 강력한 씨족들은 농민 무사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마병력을 유지했고, 농민들을 칼잡이와 활잡이로 썼다.
왕족 후손인 미나모도(源) 씨족과 다이라(平) 씨족은 농민 무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두 개의 집결지가 되었다.
9 왕족 출신 지도자들은 농민출신 싸움꾼들의 무력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그래도 12세기 말까지는, 무사들이 국가와 조정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사무라이(侍)”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武士가 아니라)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농민 무사들의 우두머리들은 정치적으로 순진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권력구조 밖에 있었다.
Farris(1992: 176)에 의하면, 조정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저택을 사병을 가지고 지켰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무사들을 이간질해 서로 적대시하도록 만드는 방법으로 조종을 하였다.
처음엔 다이라 씨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1156-60)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모두 독점하였으나, 곧이어 1185년에 미나모도 씨족에 의해 축출되었다.
미나모도 요리토모는 동쪽 해안가에 가마쿠라 막부(1192-1333)를 창설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도 계속 지방관리를 임명하고, 장원의 소유자들도 그 지역 관리들을 임명하고, 쇼군(將軍)도 자신의 가신들은 지방의 관리로 임명을 했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지 짝이 없는 봉건제도가 출현한 것이다.
10왕족 출신이라는 사무라이 지도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무로마치 막부(1333-1573)를 세우고, 봉건 다이묘(大名)들로 하여금 각 지방을 독립적으로 다스리게 했다.
사무라이와 농민들은 자치적 지방조직을 만들었고, 다이묘들은 이들 다양한 자치 조직들을 자신들의 정치체제에 흡수하고, 지역 무사들을 주군-봉신(封臣) 관계에 기초한 군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11일본 열도를 점령하여 야요이-고분 시대의 쌀농사 농민들 위에 지배층을 형성했던 백제 사람들은 마침내 농민 출신의 무사계급에게 지배력을 상실한 것이다.
신라 왕조의 멸망한반도의 3국은 초기의 다원적 조직체로부터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로 진화했다.
이전의 부족 혹은 씨족의 우두머리들은 계급적인 관료체제 내에서 적절한 직위를 얻게 되었다.
군대는 최고 사령관인 왕의 지휘 아래로 이전되었고, 왕이 손수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직접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 중대사의 대부분은 고위 귀족들의 협의회에서 결정되었다.
각 지방에 성채를 세웠으며, 성주들은 지방장관인 동시에 군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정부 관직과 군 지휘권을 보유하는 귀족들은 많은 토지와 포로-노예들을 보상으로 받았다.
신라는 당나라 식의 과거제도를 채택한 적이 없었고, 시종 세습적인 귀족사회였다.
성골과 진골이 왕위와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12 각 지역에는 (옷깃의 색깔로 식별하는) 정(停) 혹은 당(幢)이라는 명칭의 군 부대가 조직되어, 진골 장수의 지휘를 받았다.
지방에는 자신들 지휘관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서당(誓幢)도 있었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의 문화와 예술은 그 절정기에 달한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이면에서는 지배 귀족과 왕족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어 왕국은 쇠락과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한반도가 몇 개의 왕국으로 갈라져 끊임없이 정복이나 생존을 위해 서로 싸울 때에는, 각 나라의 지배자들은 즉각적인 전국적 동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전제적 권력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농민들의 애국적 충성심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제도적인 장치를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통일이 달성되자, 중앙집권적 귀족체제는 바로 농민을 착취하는 잔혹한 수단으로 퇴화하기 시작했다.
야심적인 귀족들은 노예를 무장시키고 유랑 농민을 모아 들여, 자기 개인의 군대를 만들었다.
공개적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신라의 마지막 155년(780-935) 기간 중에는 무려 20명의 왕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왕위 경쟁자들은 종종 지역의 우두머리들과 연합을 했다.
지방 성주들 일부는 중앙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신라 말기에 와서는 지방 토착의 우두머리들이 수도에서 파견한 지방 관리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성주가 되었다.
13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은 889년에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반란이 이어졌다.
가난한 농민 출신의 지도자 한 명과, 왕궁에서 쫓겨난 왕자 한 명이 마침내 농민 반란 세력들을 규합하여 892년에는 후백제를, 901년에는 후고구려를 각각 세웠다.
한반도의 후삼국 시대(892-936)는 중국 본토에서의 5대10국 시대(907-60)와 대충 일치한다.
왕건은 개성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해상무역에 종사해왔던 강력한 토착세력 출신이었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장수로 시작을 해서, 주변 장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 왕조(918-1392)를 창건했다.
935년에는 신라왕의 항복을 받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14 고려는 젊고 강건한 농민들을 선별하여 세습적인 병호(兵戶)를 구성하고, 농지뿐 아니라, 2개의 가구를 부속시켜 주어 병호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왕건은 골품제도를 해체하고, 다양한 씨족들로부터 세습적 귀족계급을 구성했다.
15 고려 왕조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관리들을 선발하기 위해 중국식의 과거제도를 도입했으며, 정교한 중국식 정부조직을 제도화하였다.
하지만 귀족 혈통이 계속 정치권력을 결정했다.
그들은 정부의 고위관직을 독점하였고, 그들의 딸들을 왕과 결혼시켰으며,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교육기관을 지배하였다.
비록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리들이 고려 왕조 말기에 와서 전통적 귀족계급을 견제하는 적극적 역할을 하게 되지만, 고려 역시 본질적으로는 세습적 귀족 사회였다.
왕건은 자기 자신을 고구려 왕조의 후계자라고 생각하여, 발해가 926년에 거란(916-1125)에게 망하자, 발해의 마지막 태자와 지배계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5만 명 이상의 발해 귀족들이 고려로 피신하였으며, 왕건은 발해 태자를 공식적으로 고려 왕족에 포함시켰다.
관리, 기술자, 농민들을 포함하는 발해 피난민들의 물결은 1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발해의 지배를 받아왔던 대부분의 여진족은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고려를 그들의 종주국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6동아시아 역사 강의: 2-15 (2005. 7. 16.)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BIBLIOGRAPHYhttp://www.EastAsianHistory.pe.krhttp://www.WontackHong.pe.kr[각주]1. 645년, 나카노 오오에(천지, r.661-71) 왕자가 나카토미 가마다리(中臣鎌足, 614-69)의 도움을 받아 소가 씨족을 제거하였다.
가마다리의 아들 후지와라 후비토(659-720)는 다이카 가이신을 실행하고자 노력했으며, 날로 늘어가는 관료 조직을 수용하기 위해 개국이래 최초로 영구적 수도를 세울 생각을 했다.
지토오(持統, r.686-97)는 694년에 후지와라교(藤原京)로 옮길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영구적 수도”로 옮긴지 불과 16년 만에, 후비토는 다시 수도를 후지와라교에서 북쪽으로 16킬로 떨어진 헤이죠교(平城京)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710년 이전까지 야마도 왕국은 영구적인 성격의 수도가 없이, 새로 왕이 즉위 할 때 마다, 마치 유목민들이 천막을 접고 이동하듯, 아스카 지역 내 다른 장소에 왕궁을 새로 짓고 도읍을 옮겼다.
이런 식으로 옮겨 다니니, 왕궁이나 도읍의 규모가 클 수가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야마도 왕국 고유의 특징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 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농민들은 국가에 의해 바로 징집되어 (3년간) 자기 고향 땅에서 지방 관리의 지휘를 받거나, 수도, 전방, 혹은 (조정에서 일시적으로 군사적 임무를 부여 받은 귀족들의 지휘를 받으며) 주요 전쟁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전에는 모노노베와 오오토모 씨족이 왕의 군대를 직접 지휘했으나, 군사적인 권력과 비군사적인 권력은 마침내 지방행정 단위에서부터 분리가 되었다.
3. 784년에는 헤이죠교에서 나가오카교(長岡京)로 수도를 옮겼고, 794년에 다시 헤이안교(平安京)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 천도들은 800년경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한발이 시작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4. 조정의 귀족들은 지방의 토지 소유자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빌어 면세혜택을 받도록 해 주고, 그 대가로 생산물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후지와라 씨족은 가장 큰 규모로 장원 소유 권한을 보유했었다.
결과적으로, 호구의 등록과 농지의 배분이 중단되고, 국유지는 모두 개인 소유지로 흡수되었다.
5. Tsunoda (1958: 109)에 의하면, “중앙에 의한 지방의 통제라는 것은 애초부터 미약했던 것이었지만, 9세기와 10세기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에서 수입한 토지-조세 제도를 조롱거리로 만든 호족들에게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중세 (12-16세기) 일본의 봉건적 특징은 헤이안 시대(794-1192)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6. Sansom (1963: 236) 참조. 일찍이 792년에 야마도 조정은 이미 전국적으로 농민을 징집하는 정책을 포기하였고, 지방단위의 관리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각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고통 받는 백성들은 종교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10세기경, 비참의 정도가 극에 달한 백성들 마음에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불교 지도자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7. Friday (1992: 4) 참조.8. Farris (1992: 150-2, 375)에 의하면, “10세기 일본의 농민들은 너무나 자유롭게 움직였기 때문에 농민 우두머리의 경제적 사회적 역할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으며, 무사들은 제 좋은 대로 오고 갈 자유가 있었다” 농민 병사들은 약간의 땅을 경작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도둑질과 약탈에 의존하여 삶을 유지하였다.
9. 5-6세대가 지나면서도 왕을 배출하지 못한 왕족의 후손들은 왕실로부터 분가되어 다른 귀족들처럼 성(姓)을 하사 받았다.
왕실은 성이 없었다.
814년, 사가(嵯峨, 809-23)왕은 자식들 50명 중 33명을 분가(分家)시켜 미나모도(源)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본래의 사가겐지(源氏)이외에도 세이와(淸和, 858-76), 우다(宇多, 887-97)왕 등을 원조로 하는 미나모도 씨족들이 있다.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세운 미나모도 요리토모(源賴朝)와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도 세이와 겐지의 분파(分派)이다.
825년, 간무(桓武)왕은 손자에게 다이라(平)라는 성을 하사해 분가 시켰다.
그 후, 왕실로부터 분가한 왕족들의 성씨는 모두 미나모도 아니면 다이라 이었다 간무의 증손자도 다이라 성을 하사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무사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미나모도 요리토모 사후에 막부(幕府)를 장악했던 호조 가문도 다이라 출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그들의 선조를 미나모도 계열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10. 비록 조정의 귀족들은 계속 사무라이들과 권력과 영향력을 놓고 경쟁을 했지만, 가마쿠라에 군사정권 수립으로 야마도 조정에 의한 실질적 통치는 사실상 끝이 난 것이었다.
세습 귀족적 야마도 조정의 몰락으로 새로운 지배층이 무대에 등장하였으며, 국가 운영에 지방민의 참여가 한층 커졌다.
군사정권은 그 형태만 약간씩 바뀌면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Tsunoda, et al. (1958: 181) 참조.11. 봉건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는 1572년에 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했으나, 그 자신도 1582년에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살해당하였다.
1590년의 일본열도의 통일은 조선 침략(1592-8)으로 이어졌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도입한 사회 조직을 기반으로, 에도(江戶)에 근거지를 둔 다이묘가 세운 도쿠가와 막부(1603-1868)는, 일본 열도에 264년에 걸친 (무사계급이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을 지배하는) 안정적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2. 진골 왕족의 바로 아래 위치한 6두품(頭品)은 왕족들에 의해 관직에서의 승진을 제한 받았다.
6품에서 4품까지의 귀족은 하위직만을 차지할 수 있었다.
3품에서 1품은 평민을 가리킨다.
골품제도는 사용할 수 있는 의복, 수레, 일상 집기의 종류와 식솔의 숫자까지 규제를 하였다.
진골 협의회는 왕위 계승과 전쟁선포 등을 결정하였다.
13. 그들은 지방 백성들과 농토가 없어 떠도는 유랑자들을 모집하여 자신들 개인의 군대를 만들어 지휘를 하고, 농민들로부터 세금과 노역을 징수했다.
결국에 가서는 왕족이 아닌 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기의 시작은, 800년경을 전후로 하는 전세계적 한발의 시작과 일치한다.
14. 왕건과 그의 뒤를 바로 이은 후계자들은, 사회 전체를 제도적으로 재조직하여, 보다 공평한 토지-조세 제도를 도입하고, 많은 수의 노예를 해방시켜, 평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개선시켜 주었다.
15. 왕건은 강력한 성주들에게 왕의 성(王姓)을 하사해 주고, 수많은 지방 씨족의 지도자들과 혼인을 통한 연맹을 형성 해, 6명의 왕비와 23명의 처를 두었다.
그는 신라 마지막 왕과도 각자의 딸과 서로 혼인을 함으로서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16. Henthorn (1971: 96) 참조. 발해의 말갈-여진족의 일부는 한반도 동북쪽의 함흥 평원으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압록강 주변으로 이주하였다.
이기백(1984: 126)에 의하면, “말과 모피를 받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곡식, 의복, 철제농구, 철제무기 등을 제공한 것은 고려였다.
그들 일부는 고려 영토 안으로 이주를 했지만, 원래 거주하던 곳에 남아 있던 많은 여진족도 고려를 신뢰했다.
고려로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농지와 주택을 주고,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