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여행기 1
<우리는 슬로 투어가 좋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도 그쳤다.
높고 푸른 하늘과 적당한 기온은 여행하기 좋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코로나19로 인해 답답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2박 3일 함께할 버스기사의 마술사 분장을 보니 기분 좋은 여행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번 여행을 위해 지난 주말을 반납하고 사무실에 나갔지만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어서 순천에 오기까지 창 밖을 보지 못했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웬만한 일들은 가능하다.
보리밥 맛집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 일행은 순천 여행의 1번지 순천만습지를 찾았다.
순천만은 세계 5대 연안습지로 5.4k㎡(160만 평)의
갈대밭과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
데크길을 따라 갈대숲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갈대숲은 파도타기 응원을 하듯 사각거리며 출렁인다.
갈대의 목에 걸린 노란 잎은 우리 일행을 환영하듯 흔들어 댄다.
머리 위로 청둥오리가 날고 높은 창공에는 흑두루미가 비행하며 펼치는 대형은 예술이다.
은옥, 지숙, 순이, 필순, 미숙은 도우미와 함께 갈대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마치 짱뚱어처럼 쫑쫑거리며 데크길을 뛰어다녔다.
어디선가 작살처럼 생긴 장대를 든 사내가 나타났다.
짱뚱어를 잡는 사람인가 했더니 갈대숲 사이에 버려진 캔이나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습지가 온전하게 보전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었다.
이번 전라도 여행에도 수고하는 손길들이 있다.
버스에 오르내릴 때마다 숨을 헉헉거리며 애쓰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다음 코스는 순천만 국가정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확 트인 정원이 펼쳐져 있다.
2013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이후 봄과 여름에 두어 차례 다녀갔지만 가을에 오기는 처음이다.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정원은 예뻐지고 있었다.
호수정원 한가운데 있는 봉화언덕을 올라갔다.
전동스쿠터를 타고 갔는데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순천만 국가정원에는 곳곳에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좋았다.
때로는 누워서 하늘도 보고 낙엽 떨어지는 것을 보며 노래도 흥얼거렸다.
다음으로 올라간 곳은 해룡언덕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국가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체 사진을 찍기에 딱 좋은 곳이다.
포토타임에 자랑질 전화까지 모두들 여념이 없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데 별 불편이 없다.
노란 국화뿐 아니라 장미나 접시꽃 등 여름꽃들도 보였다.
튤립을 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내년에도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 가을은 순천에서 마주했다.
그동안 나무에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의 변화에 둔감하게 살았다.
이곳이 코로나19 시대의 관광지로 최적화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여수로 향했다.
임은옥 씨는 오늘따라 표정이 편치 않아 보인다.
오늘이 남편 문태술 씨의 생일인데 혼자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오방센터에서 점심때 생일 축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그제야 표정이 환해졌다.
역시 실로암사람들의 소문난 잉꼬부부 다웠다.
여수에 들어오니 도시 분위기가 달라졌다.
돌산공원에서 내려다보는 돌산대교와 노을은 인상적이었다.
수산시장에 들러 저녁 먹거리를 구입하기로 했다.
문제는 장애인 주차장에서 내려 휠체어를 타고 수산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입로가 없었다.
도로를 빙빙 돌아 겨우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돌산에 오니 1980년대 중반 고향 모교회인 척령교회 여름 수련회가 떠올랐다.
당시 척령교회 출신의 노영출 목사님이 돌산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고향 후배들이 왔다는 소식에 홍합을 가져와 찜통에 끓여 맛있게 먹었다.
그날 밤 새벽녘에 배가 뒤틀려 죽을듯한 고통에 방바닥을 뒹굴었다.
김보연 장로님께서 주신 된장국을 먹고 한 숨 자고 일어났더니 금세 좋아졌다.
바다와 야경이 보이는 숙소에 도착했다.
맹순 언니가 김치, 순이 씨가 멸치와 호박볶음, 영숙 씨가 나물 3종 세트(죽순, 연근대, 쑥부쟁이), 태순 씨가 찰밥을 준비해 왔다.
수산시장에서 구입한 대왕문어, 굴, 소라, 전어회 무침까지 더해 한 상을 차렸다.
한참을 허겁지겁 먹고 나니 정신이 돌아왔다.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이렇게 준비해서 먹으니 훨씬 푸짐하고 여유가 있었다.
한 밤중에는 비즈공예와 네일아트를 했다.
할 일 없는 나는 고 최명자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최순이 씨는 소화천사의집에서 함께 살았던 인연이 있었다.
‘맑은 시냇물 같은 시’는 모두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이런 건전한 모임이라니...
“정들고 나면 사람들은 떠나가 버린다
그리고 소식이 없다
혼자 그리워하다 서서히 잊혀져 갔다”
(최명자_'정들고 나면' 부분)
갑자기 침묵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시설에서 살았던 장애인이라면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다.
여행은 사람의 생각을 키우고,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힘이 있다.
저만큼 서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분주한 도시의 일상을 떠나서 대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여유로운 ‘슬로 투어’(slow tour)가 참 좋다.
그렇게 여수의 밤은 깊어 갔다.
(202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