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강성 역사적 시조 강여상(姜吕尙)
32대 667년 제나라 강성(姜姓) 열전<2>
강여상의 육도삼략(六韜三略)과 목야지전(牧野之战)
강여상은 문왕 희창(姬昌)과 덕치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정밀한 계획을 짰습니다. 산서성 평륙현 우(虞)와 섬서성 대련현 예(芮)가 영역 문제로 다투었는데, 문왕에게 공정한 판단을 요청해 그가 양국의 분쟁을 이치에 맞게 해결하자, 명사들은 문왕이 하늘의 명을 이어받았다고 칭송했습니다. 문왕은 또한 하남시 등봉동 숭산에 있던 숭국(崇国), 감숙성 영대현 서부 밀수(密须) 및 견이(犬夷)와 려(黎), 한(邗)을 공격하고 강소성 서주시 풍현 풍읍(豊邑)을 대규모로 건설하여 도성으로 사용했습니다. 세력을 넓혀 장강, 한수, 여수(汝水) 등의 유역까지 이르렀는데, 자연 상나라와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상나라와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한 것은 상나라를 전복하기 위한 시간 벌기로 강여상의 간언으로 많은 용병과 기발한 군사 계략을 세웠습니다. 문왕은 임종하면서 둘째 아들인 희발을 불러 서둘러 강여상과 상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도모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서백의 아들 희발(姬發)이 기원전 1046년 서부 지역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아버지 시호를 문왕(文王)으로 추존했습니다. 희발의 시호는 무왕(武王)입니다.
상나라 주왕(紂王)의 숙부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주왕의 이복형 미자(微子)는 주왕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하여 목숨을 걸고 간언했습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탐닉하고 있던 주왕에게는 마이동풍이었습니다. 주지육림이란 문자 그대로 연못에 술을 채우고 고기 안주를 연못 주위 나무에 걸어놓고 금모구미(金毛九尾)의 여우의 화신이라 불리는 달기와 밤이 새도록 마시며 극도로 음탕한 짓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간언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주왕은 그들을 걸림돌처럼 생각했습니다. 그중 비간의 간언이 가장 신랄했습니다. 주왕은 숙부 비간(比干)의 속내를 알고 싶다며 비간을 죽이고 잔인하게 비간의 가슴을 열게 하고 심장을 꺼내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본 기자(箕子)는 미친 척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노예가 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주왕의 이복동생 미자(微子)는 제2수도 조가(朝歌)로 도망쳤습니다. 무왕이 즉위한 9년에 아버지 문왕의 대업을 계속 완수하고자 태공망(太公望) 강여상(姜吕尚)을 비롯한 주공(周公) 희단(姫旦), 소공(召公) 희석(姫奭) 등을 중용하여 조정을 안정시켰습니다. 주나라 조정은 상나라 주왕이 민심을 잃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주왕(紂王)을 제거할 준비를 서두르기로 했습니다.
상나라 말기 주왕의 포악한 정치로 정치는 부패하고 형벌은 가혹했습니다. 매년 나라 안팎으로 정벌전쟁을 일삼아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습니다. 게다가 귀족사회 내부 모순으로 사회 불안과 혼란으로 국기가 흔들리고 있어 잽만으로도 쓰러트릴 수 있었습니다. 한면 상의 제후국으로 서쪽에서 일어난 주(周)나라는 이미 그 세력이 호북성 일대까지 뻗어 나갔고 주나라 문왕(文王) 희창(姬昌)은 은밀하게 상을 토벌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뒤를 이은 무왕 또한 제후(诸侯)들과 연합하고 상나라 수도 조가(朝歌)에 세간을 보내 상의 실상을 정탐하고 때를 기다려왔습니다. 주왕(纣王)이 동이(东夷)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며 수도가 비어 있을 때가 잦았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주나라 무왕이 강여상(姜吕尚) 등 대신들은 주왕이 민심을 잃었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무왕 11년 1월 갑자일, 무왕은 거북 갑옷 점을 쳤습니다. 거북 점괘가 불길하게 나왔습니다.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대신들 모두 놀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장수들은 무왕에게 단호히 출병을 권했습니다. 무왕은, “아직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왕은 그 후 태공망 강여상과 함께 군사들에게 맹서를 다짐하는 <태서약(太誓約>을 저술했습니다. 무왕은 병사들에게 정신 무장을 시켰습니다.
드디어 주나라 무왕 11년 1월 갑자일, 무왕은 병법에 정통한 태공망에게 군사 5만을 주어 황하를 건너 동쪽을 쳐나가게 했다. 강여상은 군대를 모아놓고, 왼손에 노란 도끼를, 오른손에 흰 야크 꼬리의 군기를 들고 장병들에게 엄명했습니다.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겠노라! 이제 만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포악한 상나라 주왕을 쳐죽일 기회가 왔도다. 힘차게 전진하라.”
병사들은 환호 소리를 지르며 주나라 대군은 주왕(紂王)을 토벌하기 위해 동쪽 하남성 맹진(盟津)으로 출정했습니다. 진군하고 있었는데, 두 노인이 양팔을 벌리고 앞을 막았습니다. 무왕을 뒤따르던 거기장군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무엄하다. 당장 비키지 않으면 목을 치리라.”
두 노인은 눈도 깜짝 않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강여상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두 노인장께서는 누구이며 왜 이러시는지 여쭤보겠습니다.”
“우린 주나라 백성이오. 우리 형제도 포악무도한 주왕을 타도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소이다.”
그들은 하북성 노룡현에 있는 고죽국(孤竹國)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고죽국 왕이 둘째 아들 숙제(叔齊)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형 백이(伯夷)가 고죽국을 떠났습니다. 동생 숙제도 왕이 되는 것이 싫다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문왕 생전에 주나라에 와서 살았습니다.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러 간다는 소문을 듣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나라의 명운을 걸고 전쟁터로 가는 군대를 막는다는 것은 대역무도한 짓이었습니다. 거기장군이 시퍼런 칼을 높이 쳐들고 그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강여상이 말했습니다.
“장군, 참으시오.”
강여상은 그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책벌레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병사가 그들은 강제로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산서성 영제현 서남쪽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세상을 한탄하며 곡기를 끊고 자살했습니다. 그 두 사람의 관계를 후세인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합니다.
B.C. 1046년 정월 주나라 무왕은 전차 300대, 정예무사인 호분(虎贲) 3,000명, 갑사(甲士) 45,000으로 상(商)의 정벌에 나서 같은 달 하순 맹진(孟津)에 도착했습니다. 주(周)의 군대는 정월 28일 지금의 허난 맹현(孟县) 남쪽 상(商) 지역의 민심이 주나라 호의적이라는 것을 알고 맹진(盟津)에 이르니 상에 저항세력으로 지금의 한수(汉水) 유역에 있던 용(庸), 로(卢), 팽(彭), 복(濮), 촉(蜀) 및 지금의 위수(渭水) 유역에 있던 강(羌), 미(微), 지금의 산서(山西) 평륙현(平陆县) 남쪽의 무(髳) 등에서 8백 제후들이 이미 모여 있었습니다. 제후들은 주왕의 흉악함과 잔인함을 성토하고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주왕을 토벌할 것을 무왕에게 호소했습니다.
맹진(孟津)을 출발하여 도중에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진격을 계속하여 불과 6일 만인 2월 초사흘 목야에 도착했습니다. 지금의 하남성 형양(荥阳) 사수진(汜水镇)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하며 하남성 휘현(辉县) 서북인 백천(百泉)에서 동쪽으로 조가(朝歌)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주군(周军)의 진격 소식은 조가에 전해졌고 상의 조정은 모두 공포에 질렸습니다. 그러나 상나라 주왕은 주나라 군사가 5만 명이라는 보고를 받고 5만 명의 스무 배 병력으로 대적하면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황급히 노예들은 물론 동이에서 잡아 온 포로들까지 70만여 병력을 긁어모았습니다. 주왕은 주나라 5만 명쯤은 식은 죽 먹기란 듯 의기양양하게 목야로 달려갔습니다.
주나라 300대 전차와 4만 50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린 제후국 연합군은 하남성 지현(汳縣) 부근 목야(牧野)까지 진출했습니다. 2월 5일의 전투에서 주나라는 단승전차(單乘戰車)를 앞세워 상나라 군대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단승전차 위에는 활을 잘 쏘는 우두머리 좌거(左車)와 창과 칼을 들고 접전을 벌이며 전차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우거(右車)와 말을 모는 어자(御者) 세 명의 갑사(甲士)가 있습니다. 또 전차 뒤를 여러 명의 보졸이 뒤따랐습니다. 보무도 당당하던 상나라 군대는 주나라 300대 전차가 까맣게 몰려오자 그 위용에 겁먹고 우왕좌왕했습니다. 상나라 군 대부분은 강제로 동원된 노예병들과 동이에서 잡혀 온 포로들로 구성된 병사들이었습니다. 상나라 장수들이 앞장서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병사들은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점차 대오가 흩어지며 달아나가거나 노예병들의 창끝이 상나라 군으로 향해 무왕은 쉽게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주왕(紂王)은 상나라 제2수도 조가(朝歌)로 도망쳐 창고 겸 전망대인 녹대(鹿台)에 몸을 피했습니다. 추적자가 주왕을 죽였습니다, 스스로 녹대에 불을 지르고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튿날, 무왕은 사직단 제단에 앞에 서고, 군신들은 맑은 물을 들고, 위 나라 무왕의 동생 강숙(康叔)이 무늬 돗자리를 펴고, 사상부는 제사에 제물을 가져오고, 사관(史官)은 신에게 올리는 축문을 지었습니다. 신명(神明)에게 주왕의 포악한 죄행을 토벌했습니다고 고했습니다. 상나라 왕이 녹대에 모아 쌓아놓은 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상나라의 곡식 창고 지금의 하남성 학벽준현 거교(钜桥)의 곡물 창고를 부수어 가난한 사람들의 허기를 도왔습니다,
무왕은 상나라의 주왕(紂王)에게 간언하다 살해된 비간(比干)의 장례 다시 치르고, 유폐되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었습니다.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구정(九鼎)을 주나라로 옮기고, 주나라의 정사를 공명정대하게 했습니다. 목야 전쟁은 주왕조(周王朝)의 중원지역 지배력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댓글 상(商)나라를 은(殷)이라 하는데 상나라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입니다. 상나라는 중국 최초의 고대 국가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하(夏)나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나라는 탕왕이 세운 나라입니다. 탕왕의 손자 상토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말을 길들였고 마차를 탔다고 합니다. 은의 갑골 문자는 한자의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상나라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상업(商業), 상인(商人)은 상나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