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연꽃을 찾는 여심
심사 한판암
김정아님의 응모작 중에서 ‘궁남지 연밭에 들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신인의 작품인데도 오랜 연륜이 느껴질 만큼 글의 구성과 전개 그리고 어휘를 고르는 재주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고 기성작가의 맛이나 멋이 풍기는 프로 냄새와 판이한 글이다.
님은 우리말을 부리며 아우르는 재주가 출중하고 글을 자기화 시켜 생각과 느낌이 몸의 혈맥처럼 자연스럽다. 또한 글의 주제인 연(蓮)에 대해 전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해도 손색이 없을 식견과 열정은 마니아가 분명하고 글을 풀어가는 방법이나 묘사의 수준은 상당히 갈고 닦은 경지이다.
님은 글을 조곤조곤 이야기 하듯이 이렇게 시작한다. “비 내리는 궁남지 주변이 온통 연꽃 물결로 넘실거리고 있다. 해마다 7월말을 전후로 연꽃을 보러 다닌 지 어언 이십여 년은 된듯하다”. 이는 연(蓮)에 상당한 경지를 간접화법으로 들려주는 기지이다. 그리고 “연꽃을 보러 갈 때는 되도록 아침이슬 마르기 전의, 이른 시간대가 좋다. 아니면 비가 오는 날이거나 저녁 석양이 그 명을 다하는 어스름 무렵도 괜찮은 듯싶다”라는 대목은 그 세계를 조감(鳥瞰)할 정도임을 웅변하는 식견이다. 그렇게 농익은 글을 썼다는 얘기이다.
연을 구경 온 노부부를 보면서 “부부로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스며든다는 것이 아닐까.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씩이기에 짝을 지어야 비로소 날게 되는 새가 비익조(比翼鳥)라 하던가.”라는 깨달음을 자기의 톤으로 노래하고 있다. 아울러 세월과 함께 서서히 나이 들어가는 남편을 넉넉하게 이해하고 가시연이었던 자신이 촘촘했던 가시가 사라져 버린 모습으로 동행한다며 담담하게 묘사한 흐름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정갈한 연꽃을 찾는 여심을 넌지시 엿본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등단을 축하하며 앞으로 좀 더 정진하여 대성하길 기원한다.
<당선작>
궁남지 연밭에 들다
김정아
비 내리는 궁남지 주변이 온통 연꽃 물결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해마다 7월 말을 전후로 연꽃을 보러 다닌 지 어언 이십여 년은 된 듯하다. 연꽃을 만나러 갈 때면 가슴 속 깊이 그리워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듯한 두근거림과 만나고 돌아오는 감회가 예사롭지 않아 좋다.
오래 전, 백련을 만나기 위해 전남 무안군 일로읍 복룡리의 백련지까지 무박 기차여행을 감행했을 정도로 나는 연꽃을, 특히 백련을 사랑한다. 왠지 모르지만 백련 쪽이 훨씬 격이 있게 느껴진다. 홍련은 흔하지만 백련은 귀하다.
복룡저수지 끝이 가물가물한 너른 연못에 백련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대장관이었다. 백련을 보자마자 가슴이 터지도록 부풀어 올랐던 순간이 간간이 떠오르곤 한다. 전주의 덕진공원은 해마다 홍련의 물결로 출렁인다. 또한 경기도 두물머리 세미원도 내가 연꽃을 보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이다. 5년 전부터 가까운 부여 궁남지에 연꽃을 보러 가곤 한다. 백련과 홍련은 물론이고 멸종 위기식물로 지정된 가시연과 어리연, 빅토리아연 등 그 종류도 수많은 각종 수련들이 물빛을 거울로 화장을 고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꽃을 보러 갈 때는 되도록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의, 이른 시간대가 좋다. 아니면 비오는 날이거나, 저녁 석양이 그 명命을 다하는 어스름 무렵도 괜찮은 듯싶다. 한여름 땡볕에도 연꽃들은 제 홀로 고고하지만, 혹서기의 땡볕 아래서는 연꽃을 연모하던 마음이 어느새 간 곳조차 없이, 나는 채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지쳐버렸다. 무릇 연꽃 감상은 연밭 사이를 어정거리며 바람에 출렁이는 연잎과 연꽃의 물결에 마음을 죄다 얹었을 때, 어느 겨를에 찾아오는 일체감으로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적어도 한나절은 그 곁에 머물며 연꽃 향기에 듬뿍 취해야 할 일이다. 그윽히 멀리 퍼지며 더욱 은은해지는 연향을 단김에 쇠뿔이라도 뽑듯 해치울 일은 아닌 것이다.
코끝으로 연꽃 향기를 느끼며 연잎에 구르는 빗방울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방울도 연잎에게는 한 낱 수수알갱이들에 불과한 듯했다. 빗방울이 고일라치면 연잎은 요동치며 투명한 빗방울을 미련 없이 연못 아래로 쏟아내곤 했다. 자신이 감당할 만큼의 무게를 담았다가 조금이라도 버거워질 만하면 곧 비워내는 지혜라니.
빗길임에도 연꽃을 보러 나온 노부부에게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할아버지가 한 손으로는 우산을, 한 손으로는 할머니 손을 꼭 붙잡고서 꽃길을 거니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보기 좋았다. 수련과 연꽃과 붓꽃이 흐드러지게 핀 연못 길을 여든 가량의 노부부가 노니는 듯, 떠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할아버지가 쭈그리고 앉아 윗몸을 기울인 채 수련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할머니가 뒤에서 할아버지의 허리춤을 붙들곤 했다. 나이 들수록 애틋해지는 것이 부부의 정이라더니 눈부신 연꽃 세상에서 두 분의 사랑이 더 없이 은근해 보였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스며든다는 것이 아닐까.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씩이기에 짝을 지어야 비로소 날게 되는 새가 비익조라고 하던가.
요즈음 들어 목욕탕 하수도 배수구 망에 낀 남편의 머리카락을 긁어내며 자주 마음이 짠해지곤 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말다툼을 벌이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갈등들은 우리 곁에서 멀어진 듯하다. 40대 중반 이전의 나는 그에게 불만 꽤나 많았었기에 마음이 늘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웬만한 일에 내 마음은 좀체 흔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남편도 시나브로 마누라 마음을 얻고자 애쓴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었으니. 서서히 나이를 더하며 피부의 탄력감을 잃어가지만, 나이 든다는 사실이 하나도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드러나는 외모보다는, 마음의 평온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지나간 시간들로부터 값지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연꽃으로 치자면 가시연이었던 내게서, 차츰 촘촘했던 가시들이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이제는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게 된 지경에 이르렀으니 웬만큼 살기는 살아낸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유일하게 내 편이며, 친구 같은 그가 편해서 마냥 좋다.
비록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티끌도 물들지 않고 먼 데까지 향기를 풍기는 꽃, 언제나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간직한 꽃, 바람결에 몸피를 흔들며 함께 출렁이지만 결코 그 바람의 충격에 휘둘리지 않는 꽃, 보는 이의 마음을 온화하게 감싸주어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꽃, 떨어지고 나면 그 중심 자리에 깔대기 모양의 잘 익은 열매를 남기는 꽃, 하여 방편으로서의 제 임무를 다하고는 마침내 실상만을 오롯이 남긴 채 스러지는 꽃, 뿌리와 줄기, 열매 할 것 없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오랜 수행 끝에 얻은 깨달음처럼 연밥에 박힌 연자 또한 다록다록 익어가면서 머지않아 가을이 다가오리라.(*)
당선소감
김정아
남편과 1박 2일 여정의 여행을 떠나는 차 속에서 당선 전화를 받았다. 차창을 통해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처가 나를 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의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가시내는 자주 칭얼거렸다. 글쓰기는 그 아이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하여 마음속에 담긴 그 무엇을 꺼내기가 쉽지 않아 가슴앓이를 하던 많은 날들이 흘러갔다. 이제 그 아이를 배웅해도 될 시점이 아닐는지.
글쓰기는 ‘의식의 내면 풍경 그리기’라고 생각하며 치열하고자 했으나, 결코 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나름대로 물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유추적인 사고력을 가지려고 애쓰지만, 늘 마음만 앞설 뿐이라는 것을 실감하므로. 좀 더 시야를 넓혀 어둡고 그늘진 곳에 눈길을 돌리고 싶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뜨겁고 진한 그 무엇이 살아 있는 글쓰기를 위해 채찍을 가할 계기를 마련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문예감성’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아울러 늘 자기세계에 빠져 있는 아내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남편께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또한 수필 응모를 망설이던 내게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문우 채동선 선생님 덕분이었음을 잊지 않겠다.
◆충북대 철학과 졸.
◆200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일문인협회, 들꽃문학회 회원.
◆문화관광체육부, 한국국학진흥원 공동 주관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동화 구연가.
◆대전평생교육진흥원 명예기자
◆문예감성 제 10회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첫댓글 오래 전에 선생님과 오정문학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김성숙 입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 차분하시고 정갈하시고 .......
시집 출간을 축하드리고 수필 등단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