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의 소리
마른 잎 메누엣의 맑은 音律
■마음부터 먼저 쫓긴 登山路—.
썰렁한 산길—. 그 숲을 일부러 찾아갔다. 한 때는 부처가 와서 머물다 갔을 화려한 그 절, 두견새 꾀꼬리가 자리를 바꾸면서 나를 맞았고, 다람쥐가 도맡아 단풍의 낙원을 지키는가 싶었던 등산로다….
몇 달 사이 이제 다시 오를 때, 幻影을 불러 모으는 골짜기마다 낙엽의 융단이 깔렸다. 찬바람에 점령된 숲길이 발길에 으스러지는 낙엽의 신음으로 지배된다.
잿빛 하늘에 부푼 구름—, 무슨 악몽에 시달렸는지 곧 진눈깨비 폭풍이라도 날릴 기세다. 부르르 몸을 떨며 언덕을 오르는 나 자신을 비웃기도 했다. 하긴, 大寒을 앞두고 있어 봄이 더 가깝다.
잠깐 스틱으로 허리를 바치듯, 등을 폈다. 고개를 쳐들다가 머리 위의 느티나무 높은 가지에 눈이 걸린다. 폭풍에 떠는 마지막 나뭇잎 하나—. 그리고 일체의 설명이 생략된, 꽉 막힌 감정으로 굳어진다.
눈엔 보이지 않아도, 저 초조하게 서성이는 나뭇잎 뒤에 누가 와서 생명을 위협할까…? 그 징후를 잘 알 수 없지만 두려운 어떤 큰 힘이 엄습해 오는 기분으로 내 머리끝을 쭈뼛하게 했다.
아무도 얼씬하지 않기에 두려웠다. 다람쥐 한 마리 얼씬하지 않기에 더욱
호젓해 괜히 마음부터 쫓겼다….
■썰렁한 空虛가 주는 切迫感—.
온 몸이 조여드는 불길한 수축감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잠시 후, 찰나적 순간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너무 고요한 둘레의 텅 빈 진공관에 갇히듯 온 몸에서 힘이 쪽 빠졌다.
낮은 산 중턱—. 새로 산일을 하면서 환경을 바꾼 어느 묘지 옆을 지나다가 멈추어 섰다.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무덤 상석에서 떡갈나무 마른 잎을 보았다.
주위가 고요했기에 바람에 밀려 마른 잎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괴이한 마찰음으로 내 몸의 신경을 후볐다. 멀리서 들려오는 마치 풀벌레 울음 같은 울림이어서 나의 몸이 무엇에 부딪혀 추락하는 무의식의 공포를 일게 했다.
이럴 때 본능적으로 아악! 소리를 외치며 솟구치게 마련인데 반대로 숨죽
텅 빈 분위기의 중심이 그 낙엽의 설레임 소리에 이어져, 듣는 쪽의 몸도 이듯 나도 몰래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경계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숲은 이전부터 고요할 뿐 내게는 아무런 기척조차 보내오자 않는다.
이 때 나를 되찾아 마음을 크게 놓았지만 실상 회복되지 않는 상태였다.마음도 함께 휩쓸리는 절박감으로 가슴이 차올랐다.
■風致 좋은 鵲岬亭 휴머니즘—.
적 막, 공허, 절망, 고독, 죽음—. 그런 허식에 찬 감상의 과장을 송두리째 팽개치고 다시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 고막을 찢는 소리…
돌연한 까치 소리에 폐쇄된 마음의 창이 활짝 열렸다.
저 길음—. 우러러보니 숲 사이 정자의 옥상이었다. 아직 이름이 없어 현판도 걸리지 못한 아담한, 등산객의 쉼터에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정자에서 쉬려니 했는데 터줏대감이 먼저 인사를 보내온 것이다. 이 까치는 철새와 달리 사철 이 정자를 지켜온다. 반갑게 처음으로 소리 높여 회답해 보였다.
"봉주르…!"
그 인사말이 까치에게는 통할 까닭도 없기에 곧 훌쩍 날아버렸다. 나는 알지만, 저 녀석은 할 일없이 바쁜 체 이리 뛰고, 저리 날며 생리적으로 안정감을 되찾지 못해 항상 촐싹이는 몸짓이다.
나는 이 정자이름을 저 녀석들을 위해 「鵲岬亭」(작갑정)으로 격상해주고 싶었다.
鵲岬亭의 휴머니즘ㅡ. T. 모어의 지적 정서대로 풍치 좋고 정자 좋은 쉼터의 시간은 `만족'이다. 그리고 서둘러 정자 명을 짓게 돼 흐뭇하다. 이제부터는 글을 쓸 때 鵲岬亭을 잊지 않겠다.
■文烈公集의 멋진 風流人生—.
이와 유사한 이름이 없지 않다. 一然의 [三國遺事](권4) 제5호 <圓光西學>에 있다. 나의 鵲岬亭엔 건립자가 미처 이름을 널리 모집하지 않은 듯 아직 현판 한 편 걸려 있지 않다. 옛 시대 같으면 이미 화려했을 것이다.
다음 옛 시는 나의 풍류를 읊은 느낌이다.
ㅡ쇠잔한 꽃 밟으면서/산에 올라/ 이리 저리 굽어보고/돌아갈 생각 잊네//훗날 만일 내 마음 말하면/선경 높이 누워/세상 일 잊었다 하게
(文烈公集ㅡ龍岩院).
한 겨울에도 포근한 날은 많다. 어떤 해는 설이나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지내기에 포근한 명절날이던가? 그 느슨하고 아늑한 날엔 쪽빛 아침 하늘부터 경쾌한 외출을 축원해 주었다.
이제 大寒을 앞두고, 상황은 뇌성벽력과 잦은 비가 없을 뿐, 어제의 을씨년스런 날씨를 이어 받았다. 鵲岬亭에 쉬는 사이 갑작스런 돌풍에 진눈깨비가 몰아왔다.
혼자 산에 온 여인이 눈보라를 피해 정자로 뛰어든다. 빨간 더블 클로스에 등산모 위로 벙거지를 겹쳐 쓴 30대였다.
■"우린 구면이던가요?" —.
그녀는 이쪽을 보고, 한 눈에 평가했던지 경계의 눈빛을 풀었다. 은은한 샤넬의 향기가 첫 인상을 대충 점칠 수 있게 했다. 강렬한 윤곽이 지적 풍모를 보였다.
"안녕하세요, 올 겨울은 시작부터 낭만적이죠?"
하고, 허스키를 날리듯 눈을 털며 마루에 와 앉는다.
벙거지 밖으로 밀려나온 갈색 곱슬머리, 산을 즐겨선지 조각처럼
다만 눈빛이 차갑기에 문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궂은 날에도 산행을 일과로 하시오?"
"습관이 됐어요. 저 모르시죠? 산에서 뵐 때마다 목례를 드렸는데…"
“우린 구면이던가요? 하하하”
그녀는 말주변이 좋았다. 하얗게 눈이 쌓이는 사이, 인습을 거부하는 자유분방한 기질이 눈 위를 달리는 토끼 모양 톡톡 튀었다. 활달한 외향성이 거부감을 없앴다.
젊은 신경외과 의사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눈보라가 멎자 행복같이 왔다가 낙엽처럼 떠났다. 스마트한 뒷모습에 내 시선을 딸려 보냈다. 눈보라가 지나가면서 색칠해진 산 숲은 백색의 우수로 감정을 역전하게 했다.
■곱슬머리 마른 잎의 메누엣—.
모스크바에서 파리로 돌아가던 기착지, 눈 내리던 11월 초 헬싱키 공항에서 쉬는 동안 로비를 어슬렁거리며, 진열장에서 북극 권내의 아기자기한 토산품을 보다가 그 가격표의 값에 흠칫 놀랄 때, 나를 보고 야릇한 미소를 던진 그 묘령의 북구 여인이 어쩌면 신경외과 부인의 풍모를 닮았을까?
신경외과 부인의 몸짓에서 나의 헬싱키 겨울여행 이미지가 꽃구름으로
한창 번지는데 정자의 눈이 멎었다. 그녀와 만날 기회가 또 있겠지… 그녀 더블 클로스와는 반대 방향인 평지로 나왔다.
길섶에 작은 구슬로 무늬 져 있는 불쏘시개 같은 마른 꽃대 줄기들이, 마치 울면서 상심해 있다가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풀 덩굴에서 얼굴을 드러낸 슬픈 소녀 같은 표정에는 조금씩 눈물이 괴어 서글퍼 보였다.
저 가냘픈 피리소리들… 훌쭉 여윈 몸을 떨며 찬바람에 저항해 보였지만, 난들 도울만한 무슨 재간이 있을 것인가?
돌풍에, 황금빛 곱슬머리 무희들이 메누엣을 추다가 지잇, 지잇 울며 날아드는 산솔새 떼같이 머리 위를 참나무 고엽들이, 소리 내 흔들린다. 키 낮은 남천에서도 송알송알 익은 홍옥 열매들이 장단을 맞추듯 마구 술렁인다.
그 음율. 생명의 묵시로 새카맣게 허공을 나는 사이— 겨울 소리는 까치 울음에 이내 넌지시 짝이 맞춰지고 있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