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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분자 시집 해설
기억 저장소에서 꺼낸 낡은 악기의 싱생한 음률의 세계
박 윤 배 <시인>
Ⅰ
권분자라는 한 시인의 시집에서 골똘히 읽은 것은 <싱생>하다는 것이다. 싱싱함과 생생함의 차이를 두고 어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우선 싱싱하다는 것은 오래된 기억들을 뒤적여 낡은 이야기가 다가 아닌 싱싱한 결말을 도출해 내는 표현 능력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그 위에 시의 말이 지닌 구체적 정황에 맞는 시각적 현장이야말로 생생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도 경험한 낡은 이야기를 신선하게 표출하는 데서 그의 시들은 시간을 넘어서 과거가 현재로 혹은 미래로 상상싹을 초록으로 밀어올리고 있다.
하여 시집의 배경색을 나는 초록으로 권유한다. 어느 사막의 우기가 다녀가고 난 뒤 파릇하게 돋아 오르는 연한 초록 잎사귀들이 그의 시 전반에 깔렸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의 시들은 초록을 숨긴 어두운 절망의 건초더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어둠의 덩어리가 발효를 끝내면 새로 돋는 싹에 거름이 되는 어둠이기에 더러 몇 편의 시는 어둡기는 하지만 그 어둠조차 나는 희망의 배경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겨울 동면에서 막 풀려난 얼음 녹은 저수지에 돌 던지는 심정으로 그의 시를 읽는다. 우선은 그 물의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평소에 내가 가늠하던 권분자라는 한 사람의 깊이를 깡그리 잊어야 한다. 그리고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돌이 수면에 닿을 때의 소리는 분명 그냥 인상적으로 보는 권분자씨와는 달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돌이 닿은 자리의 파문이다. 얼마나 번지느냐는 문제일 것이다. 돌의 질량을 움켜쥐던 손에 남은 무게의 인식이 통계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던 나는 객관적으로 그의 시를 읽어낼 수 있으리란 생각에 도달한다.
Ⅱ
시집『너는 시원하지만 나는 불쾌해』는 그 내용상 분류 <과거> <현재> <미래>로 하여 3부로 나누고 있다. 1부에서는 기억의 저장소에 남아있는 과거를 서정으로 들여다보기이며 2부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가족사적인 데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이며 3부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넘나들며 사회 혹은 사회 속에서의 관계relation를 통해 생겨나는 갈등을 노래화하고 있다.
우선 그의 시 1부에서 보이는 서정의 의미들은 그 바탕이 ‘미시파’ 혹은 ‘네오이미지즘’이라 부를 수 있는 묘사 위주의 서정시들인데 나름 특징을 보면 언어의 조탁과 섬세한 이미지로 사물을 그려내고 있다. 동시에 시인만의 의미 부여를 놓치지 않는데, 이에 놀라운 직관의 세계로 다가가고 있음이 참 신선하다는 느낌이 든다.
늙은 배나무는
상처 덧난 새의 위장
명치끝 소화되지 못한 옹이에
흰 봉오리 매달고 있다
짓무른 발 바위까지 뚫으려는
번식의 욕구가 꽃을 피운 걸까
시든 몸이 오래 삭힌 종이 내밀듯
달팽이관 되짚어 가지 끝에 거는
귓불의 무게가 가볍다
오래된 나무가 먼 데까지 귀 기울여
내려놓는 꽃잎
발끝까지의 거리가
깊다
-권분자 詩 <배꽃>전문
물도 베이지 않는 칼에
슬쩍 손가락을 얹어 보았다
녹물을 누가 마른 풀잎이라고 했던가
밤새 달이 쓱쓱 날세워놓고 간 뒤
더 이상 날카로워질 수 없는 극점에서
이슬처럼 웅크린다
내 피는
-권분자 詩 <억새>전문
우물 속 두꺼비들 젖 먹이느라
4월 버드나무는 수유기 유방
기와들 쩍쩍 햇살에 구워져
두레박을 든 웃음 둥근 사람들
갈증 목젖이 우물 들여다보는 동안
돌 모서리는 점점 닳아가서
계집아이들 곱돌로 팔 뻗어 그린 땅의 반달
출렁거림에 대한 어떤 비법을 찾기 시작하는데
나는 달 빠진 우물물 앞에서 발 동동 구른다
두레박줄로 재지 않아도
충분히 우물 바닥은 깊지요
목이 마르면 두꺼비 당신 이끼의 벽이라도 핥을래요
핑그르르 돌아 나올 것 같은 버드나무 젖
잔뿌리가 퍼 올린 우물의 하늘엔
달의 배뇨가 흥건하죠
밤마다 이슬 새 옷 갈아입는 잎들 있어
천년 지나도 녹슬지 않는
당신에게 어떤 까닭이고 싶거든요
-권분자 詩 <우물>전문
각 3편의 시에서 중심 소재는 늙은배나무, 마른억새, 오래된 우물인데 그 늙은, 마른, 오래됨의 대상이 “상처 덧난 새의 위장”으로 “칼, 더 이상 날카로워질 수 없는 극점으로” “천년 지난 뒤에도 마르지 않는 유방”으로 환치시키는 상당한 미학적 세공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1부에 실린 시들의 주관적인 묘사를 끌어내기 위한 현상의 객관적 묘사들은 시 안의 말대로 깊음에 닿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들이 역역하다. “파릇하게 열리는 갈대의 문 안쪽엔/ 지난 가을 닫아 건 문이 있다“-<폐가> // ”상처의 삶, 옹이 자르려다 / 나는 이빨 무뎌진 조선낫 / 풀의 밑동을 매만지다 이쯤에서 / 죽음의 결을 푸는 노동 / 뚝딱뚝딱 땀방울을 두드린다“-<겨울풀무질> // ”생은 잠시일 뿐 성급하지 마시라 / 신생아실 인큐베이터 앞에서 / 유리창 너머 비춰진 아가를 그대 본다면 / 피는 꽃의 의미를 다시 알게 될 것“-<꽃을 때리지 마라> // ”바닥 깔린 노을이 깊을 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 기름띠로 닦아준 흔적 오래인 무쇠 솥 / 아이들 칭얼과 남편의 핀잔을 / 고요히 껴안아 풍겨내는 쇳내“-무쇠 솥, 상수리나무가 들여다보는 // ”빗나간 과녁의 사랑이 남긴 / 능소화 눈은 피멍이다“-<능소화 음계音階>// ”고무줄 잘라 도망치던 녀석들조차/ 다 어디가고 커다란 타이어 자국만/ 둥근 트랙으로 남아 있는 운동장 / 무게에 눌린 질경이들 낑낑/ 허리를 펴는 저녁은 쓸쓸했다“-<폐교에서> //등에서 보여주는 직관은 깊은 서정의 울림에 닿아 있다.
시인 권분자가 지닌 기교의 바탕은 환치다. 1부에서는 다분히 기억 속의 사물들을 데려와서 독창적인 이미지나 새로운 자기만의 인식의 세계를 드러내는데 그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 바탕의 정신은 아마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1부에 실린 시들을 한마디로 말하긴 어렵다. 각 시들마다 시적 대상들이 되는 사물들은 나름 시인의 깊은 체험과 맞물려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부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한편의 시를 놓고 보면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늦가을 잠자리처럼 꼬리 붉힌 여자는
망초꽃을 징검돌인 듯 밟는다
오래 앓은 상사의 눈빛으로
굿당 마당을 휘젓고 다닌다
발끝이 금줄 넘을까봐
벼랑 가로막는 새끼줄에서도
한숨처럼 오색 천 조각 틀어쥐더니
방울에 들어가 바람으로 부서지는 잠자리
무릎높이에서 꺾이는 노파의 휘파람
절정의 여자 알몸은
흰 천 덮인 석대에 얹혀
반듯한 수평이다
연금술이 허공에 꽂는 주술의 댓가지
상처 없이 흘러드는 가을구름에게
쿡! 찔린 마음 환부를
서걱서걱 작두날에 발 얹는 잠자리
늘 굿당의 관객이었던 나
장수잠자리 기다린 적도 없었는데
거울 빛 물웅덩이 파지도 않았는데
몸 안의 그리움들은 왜 저릿할까
서릿발 추위가 다가와도
함부로 꽃잎 뚝뚝 떨구지 않는 망초가
징소리 다 삼킨 새벽에야
말라가던 내 청춘에게
날개옷을 입혀주는 거였다
-권분자 詩 <굿당 별곡別曲> 전문
시인은 자신을 잠자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망초꽃을 징검다리로 밟고 다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이 굿당<굿을 하기 위해 지어진 집>이며, 자신은 오래 앓은 상사想思의 눈빛을 가진 잠자리다. 알고 보면 삶의 미련이나 살아온 날들의 어둠을 한 판 굿으로 날려 보내려는 몸짓이 바로 그가 꿈꾸는 시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가 살아온 날들은 발끝이 금줄 넘을까봐 벼랑 가로막는 새끼줄에서도 한숨처럼 오색 천 조각 틀어쥐던 삶이였을 것이고 무녀가 흔드는 방울에 들어가 바람으로 부서지는 잠자리의 운명을 굿으로 한바탕 풀어내고 있는 것이 그의 시들일 것이다. 즉 시인에게 다가온 영감을 그냥 두기엔 운명적으로 삶이 불편할 수도 있다. 대개의 시인이란 그 원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의 어느 언덕 돌무더기를 쌓아두고 먼 길을 걸어온 환자를 치유하는 주술사의 모습에서도 가끔은 시인의 모습이 엿보인다고 했던가. 권분자 시인은 그런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의 부스러기들을 서정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이때 자신의 몸은 알몸으로 벗겨지고 석대위에 반듯하게 눕혀지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와 권력 지위 등이 깨끗이 지워지는 상태일 것이다. 이는 반드시 선험을 가진 노파인 경지 높은 주술사 앞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백색의 천이란 결국 잡념이나 사사로운 걱정 따위도 지워지는 과정이 그가 추구하는 시의 과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연금술이 허공에 꽂는 주술의 댓가지야말로 주술사의 말이 시인인 자신에게 전달되는 과정이요. 상처 없이 흘러드는 가을구름에게 쿡! 찔린 마음 환부를 서걱서걱 작두날에 발 얹는 잠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자신이 상사를 앓을 이유를 고민하게 되는데 “늘 굿당의 관객이었던 나/ 장수잠자리 기다린 적도 없었는데”라고 넌지시 자신을 돌아보는데 아마도 그것 또한 본인이 알지 못한 사이 상사의 병은 있었던 것이 “거울 빛 물웅덩이 파지도 않았는데 / 몸 안의 그리움들은 왜 저릿할까”로 이미 장수잠자리를 그리웠음에 생겨난 병임을 시인은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서릿발 추위가 다가와도/ 함부로 꽃잎 뚝뚝 떨구지 않는 망초가/ 징소리 다 삼킨 새벽에야 / 말라가던 내 청춘에게 / 날개옷을 입혀주는 거였다”하여 징소리마저 시인은 삼키게 되고, 말라가던 내 청춘의 노래들을 시집 1부에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말라가는 청춘의 노래들이 결국 배꽃을 만나고 폐교를 만나고 억새를 만나고 폐문을 만난다. 또한 의문을 갖게 한다. <누가 모래의집을 허물까> 에서는 모래더미에 묻혔던 손이 빠져나간 자리 - 바닷가 허름한 여인숙 -갯지렁이 망둥이 숨소리-이제 닳은 손톱 아래 기억할거라고는 고작, 마른 모래의 쓸쓸한 노래임을 그는 직감으로 알아챈다. 그의 시 <무쇠 솥, 상수리나무가 들여다보는>에서는, 감자 삶고 보리쌀 안치던 무쇠 솥인 자신이 -자욱한 겨울 안개가 묵 끓이던 솥뚜껑을 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능소화 음계音階>에서는, 천 년 전 쯤 나를 훔쳐보던 남자를 만나러 가겠다고 앙탈을 부린다. 담장에 걸린 턱뼈에서 내가 뜯는 가얏고 소리로 어두워 표적 잃은 그대 눈에 이제 불타는 굴렁쇠 걸어주는 나는, 너의 저녁을 위하여 환한 과녁이 되어주고 싶다고도 한다. <손끝 노을에서는> 최면 속을 더듬는다. 그 더듬는 것에는 꽃의 입구를 더듬는 고양이가 산다. 지난날 내 옷을 다급하게 벗기던 노을은 유리조각처럼 번들거리는 기억 모서리도 만난다. 날카롭게 손끝을 할퀴고 지나가서 시멘트바닥에 뚝뚝 떨어진 나팔꽃 그리고 자전의 축에 매달렸던 꽃의 이마는 딱딱한 수평에 이르러 무척 아팠겠다고 위로를 건넨다. <폐교에서는>고무줄 잘라 도망치던 녀석들조차 다 어디 가고 커다란 타이어 자국만 둥근 트랙으로 남아있는 운동장 무게에 눌린 질경이들 낑낑 허리를 펴는 저녁은 쓸쓸했다고 하며 <후박나무 그늘>은 해외 이주 노동자로 보이는 한 사내 나무 곁 슬금슬금 걸어와 깊어 젖은 눈을 말리는 부적 같은 편지를 읽는 동안 마주 앉아 나는 겨울 스웨터를 뜰 거야라고 중얼거린다. 이국풍 나무아래 이국남자의 설움을 대신하고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의 자세인가. <항아리>에서는 만월에 이르고야 만 내 몸 나를 수시로 뚜껑 열어줄 누군가의 햇살 손길이 그립다고 했다가 <한가위>에서는 달과 지구는 통화중이라고 첫 행에서 화두를 던진다. <폐역에서>는 햇살 받으며 긴 의자에 앉아 계시는 평생 쉴 날 없을 것 같았던 속 다 내어준 어머니, 이제는 틀니조차 헐렁해진 입천장 우물거린 다로 폐역을 의인화 하고 있으며, <나팔꽃>에서는 건반을 두들기며 상쾌한 반주 내 귀에 칭칭 감아주는 나팔꽃을 이야기하며 <초롱꽃 시계>에서는 이리저리 얽히는 화음이 해마다 방아공이 나이테 닳듯 디딜방아, 너무 늙었다고 투덜투덜 관절 나이테 쪼고 있네요. 라며 묘한 몽환적인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보여준다. <나비효과>에서는 던지는 돌에 매달렸던 나비 유충 오래전 연못에서 날아온다고 순환하는 시간의 법칙을 발견한다.
Ⅲ
늦깎이로 문단에 나온 시인이다. 권분자 시인은 늦게 문단에 나왔지만 늦은 만치 준비가 잘 된 시인이다. 본인의 말을 빌리면 29살에 집에서 나와 시의 주위를 맴돌았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첫 시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런 그에게 <집>의 의미란 즉 삶 속의 생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한편 그가 꿈꾸던 시들은 그에게 확신을 주기엔 늘 시의 속성이 그렇듯이 삶의 정답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이참에 시에 대해 확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얼마간 체면치레를 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이 시집의 출간배경에는 깔려있다. 시인의 잠재된 의식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런 기억의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특히 2부에 등장하는 시의 배경들이란 다분히 가족사적이고 어쩌면 잠재의식 속에 상처들이 뭉클뭉클 독창적인 이미지가 되어 극복의 의지를 드러낸다. 더러는 절망을 억지로 희망으로 바꾸어 말하는 또 다른 억지의 방식으로 시인은 자신의 트리우마를 지워가고 있다. 치유의 시를 통해 정화된 자신을 만나고 싶은 의지를 드러낸다고나 할까. 그런 시의 중심에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와 아픈 어머니의 현실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늙은 어머니가
링거 줄을 잡았다 놓았는가 싶었는데
흘러든 가을 햇살에 단단하던 종주먹 손등은
힘줄 불거진다
궁금하기만 한 내일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미궁
지금 쯤 넌지시 여동생은
흰 귀밑머리 염색을 마쳤겠지
비바람이 내어 놓은 많은 길이
오래된 나무의 몸에 있어
굵은 몸통일수록 벌레구멍 깊어져서
수피 안쪽 피멍자국 뚫고 나온 여린 가지는
시리다 시리다 손사래를 매달았다
나는 껑충 자라버린 단풍나무였다는 것을
아는 순간, 먼저 온 바람의 등을 다독이다보면
배우겠지, 울음과 웃음을 뒤섞는 법
잎이 감춘 열매들의 꼭지에서
둥당둥당 붉어오는 풍금소리에
어머니 당신의 가계도는
흐린 낮별에 닿아있다
-권분자 시 <단풍나무 가계도家系圖>전문
벌레가 무릎 접고 앉아 누르던 풀의 등은
빈 집 뒤란의 달이어야 비로소 둥글어진다
손때마저 삭아가는 삽자루 밑에서
움푹한 술잔 그늘을 벗어난 달은
굴러갈 레일을 놓는 공사 중이다
풀의 하품을 일제히 벌레 울음이 깨울 때
몰래 기차 타고 떠났던 소녀는
도란거리던 검은 눈마저 이제 늙어 버렸다
갱도를 빠져나와 쑤시던 무릎에서
모래가 자글거린다며 아버지는
순식간에 수척해 있었다
쿨럭쿨럭 쭈글해진 폐를
눈 뜨고 지켜보던 까마중이 그러했을까
아프다며 검게 사위어가는 늦가을 뒤란에서
내가 본 것은 염소똥 같은 열매가 아니다
한 줌 알약인 듯 까마중 삼키던 소꿉놀이
음복주 한잔에 절대 취할 리 없는 내가
오늘은 오래된 삽에 기대어 운다
먼 기차여행에서 돌아온 까마중
하품에 울음도 섞을 줄 아는 나이가 되어
지금은 봉긋한 봉분을 찾아갈 시간
잘릴 티켓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잔기침 레일 뒤란을 서성인다
또 다시 겨울 황지 발發 첫 기차에 발을 얹는다
-권분자 시 <아버지의 뒤란> 전문
권분자 시 <단풍나무 가계도家系圖><아버지의 뒤란>이 두 편은 그의 시집 속에 많이 등장하는 가족사적인 시중 그 대표적인 시들이다. 그의 시 <단풍나무 가계도家系圖>단풍나무를 어머니로 의인화하며 그려내고 있으며 자신도 그런 가계도에서 단풍나무가 되어 여인으로서 어머니로서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 <아버지의 뒤란>은 이미 이 세상에는 안 계시지만 그리움의 대상인 아버지를 고향에 두고 온 빈집 뒤란에서 만난다. 손때마저 삭아가는 삽자루를 통해서 만나고 소꿉놀이 때, 알약처럼 손에 움켜쥐던 까마중 열매가 광부이던 아버지의 진폐증을 달래줄 약으로 시인의 눈에는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 무덤을 찾아가는 자신을 시 속에서 그려내므로 일종의 위로를 치유를 꿈꾸는 시인의 시들은 처절하게 아름답다. 아픈 어머니를 좀 더 오래 붙잡아두고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은 몸짓 또한 어머니를 아버지를 노래하는 여러 시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 그의 시들을 열거하면 <그녀의 활동기>, <늙음의 등에 오르다>, <폐가에서 꽈리불기>, < 새의 펜션>, <삼대의 야식>, <오래된 手話>, <분골낙서>, <뒤뜰>, <드라이플라워>가 있다. 이 밖에도 그의 시들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기에 무관할 수 없는 어머니의 혹은 가문의 내력을 시의 언어로 형상화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Ⅳ
권분자 시인의 시는 두텁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정의 형상화와 어머니 아버지 혹은 유년의 모습을 철저히 들여다보면서 존재의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탓에 그가 꿈꾸는 3부의 시들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사회 속에서의 관계relation를 요목조목 살피려 한다. 더러 보이는 몇 편의 시는 이미 누군가 개척한 시론에 자신의 생각을 짜 맞추려는 무모함도 보이곤 있으나 대체적으로 자신이 나아가려는 한 방향성을 모색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시를 고민한 그의 흔적에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하나의 주제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시가 있는가 하면 그런 고민 중에 부스러기로 흘러나온, 다시 말해 쉽게 씌인 시들이다. 어느 시가 더 좋은 시인지는 말하긴 어려우나 후자의 시들이 가슴에 더 울림이 크게 와 닿는다. 의식의 치열함으로 풀어낸 시보다도 그런 치열한 의식의 산물로 태어난 시들이 왠지 더 정감이 간다. 그의 시에 깔린 전반적인 정신은 고통의 중심에 있는 어머니 아픔의 면면에 대한 시인의 힘겨운 바라봄이며, 다른 하나의 바탕은 일상의 무료함 혹은 가장 믿고 싶은 사람으로부터 당한 어떤 배신감에 대한 감정의 폭발이었다가 그러한 절망의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희망으로의 탈출을 꿈꿀 수 있을까 하는 몸짓의 언어와 무관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들에서 지적할 순 없지만 시인 권분자는 사람 혹은 움직이는 것에 대한 신뢰보다는 식물적인 것에 더 많이 기대는 속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자신의 문제를 그는 극복하려는 노력의 흔적도 간혹 보인다
간신히 묶었던 보자기를 푼다
자동차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
오토바이 넘어지는 소리
지나가는 어리거나 늙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
다 싸맨 뿌리가 어느 순간
몸 속 물집을 밖으로 부풀려
묶음이 위태로운 순간이다
몸의 부품들을 하나씩 뽑아 버리고 있다
-권분자 시 <철쭉꽃 피다> 전문
위 시에서 그런 식물성에 대한 자신의 내면 경향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여 철쭉꽃이라는 대상을 그 꽃잎의 모양을 보자기로 묶고 풀고 그렇게 꽃이 피는 데는 뿌리의 역할이 오토바이 넘어지는 소리, 자동차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 사람의 발자국소리를 다 싸맨 뒤 결국 꽃이 보자기를 푼다는 독특한 시각으로 옮겨놓는다. 몸속 물집을 밖으로 부풀리는 것이 꽃이 피는 것이며, 그리곤 다시 지는 것은 몸의 부품들을 하나씩 뽑아버리는 경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철쭉꽃 피다>이 시는 그가 다룬 식물성에 기댄 다른 시들에 비해 가일층 발전을 보이는 시 인 것은 틀림없다. 산에서 피는 철쭉을 보게 된 것이 아니라. 권분자 시인은 도시의 길가에 핀 철쭉을 노래했다는 점이 그가 드디어 자신이 외톨이가 아닌 사회의 관계성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무 위 둥지에서
부지런히 뒤태를 움직이던 비둘기
내 머리 위에 똥을 쌌다
처다 본 게 죄야?
밑에서 당하는 내 억울함이
손가락질로 항변해 본들
꿈쩍인들 하겠어?
아뿔싸!
진적에 비둘기말을 배워둘 걸
높은 허공을 날기 위해서는
이륙할 수 있는 속력이 내겐 필요하겠지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밟고 가볍게 솟구치지만
한들거리는 코스모스도 타넘지 못했지
바닥에서 눈인사 나누던 배추들
트럭 위로 날아오를 때
비둘기의 아랫배를 훔쳐보던 나는
언어 또한 무디어지고 말았지
똥 묻은 모음을 데리고
우쭐거림도 내려놓고
나 어디로 발길 돌리는지
궁금한 거야?
비둘기는 연신 고개 갸웃거리고
-권분자 시 <너는 시원하지만 나는 불쾌해 > 전문
위 시 또한 그렇게 자신과 비둘기의 관계에서 어떤 깨달음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한 동작을 드러낸 시로 보여진다. “아랫배를 훔쳐보던 나는/ 언어 또한 무디어지고 말았지/ 똥 묻은 모음을 데리고 / 우쭐거림도 내려놓고/ 나 어디로 발길 돌리는지/ 궁금한 거야?/ 비둘기는 연신 고개 갸웃거리고” 우쭐거림도 내려놓는 시인의 자세가 결국엔 비둘기의 똥에 의해 깨닫게 되었다는 시인의 진솔함이 체험적인 장면과 어울려 한편의 좋은 시가 되고 있다.
혀끝이 짜릿한 전갈 한 마리
사각사각 사막을 걸어서 닿은 내 귀는
괜찮아, 참으면 약이 돼
바람일까, 잠시 별하늘에 출렁했다
내 몸 터져 나오려다마는 말
입술 꾹 다물고 견뎌내기 위해
나는 또 해독제를 만들어야 했다
내 속에 살고 있는 상처를
전갈은 끝없이 후벼 팠다
독백으로 별은 단단하게 굳어가고
몸을 지나간 나날들이 한산해질 무렵
쌀쌀한 바람이 내 종아리를 훑고 지나갈 무렵
사막은 버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전갈의 혀끝에서 별이 쓸리는 소리였다
비밀인데요 당신, 쉽게 드러내지 않는 내 속내는
이미 신비스러워졌거든요
겉모습만으로 당신을 판단하진 않겠다고
밀봉된 동쪽 맨홀 뚜껑을 그대가 밀고 나올지라도
치명적인 독의 매력을 품은 그대를
모래도시의 곳곳에 풀어 놓고 말지요
4월에 태어난 내 운명에는
늦가을 전갈자리에서 태어난 당신이
딱 맞는 궁합이라고
내 귓속 점성술사는 가르쳐주었거든요
-권분자 시 <전갈자리 남자 찾기 > 전문
그러니까. 이제는 시인 권분자의 시가 한동안 자신의 시 속에서, 어둡고 폐쇄적인 길 즉, 절망과 고통의 세계를 걸어왔다면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모티브를 발견하길 나는 슬그머니 권유한다. 폐쇄적 식물중심주의에서 이번 시집 말미에서 몇 편 보여주는 <철쭉꽃 피다><너는 시원하지만 나는 불쾌해 ><전갈자리 남자 찾기>처럼 재미있고 밝음으로 나 아닌 여타 대상과의 화해를 다음 시집에서 보여주길 기대한다.
두터움은 첫 시집인『너는 시원하지만 나는 불쾌해』에 게재된 시들로 보아 이미 갖추었고 29살에 시를 쓰겠다고 헤맨 고심의 말미에 스승이라고 나를 만났고 이제는 스승의 말도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이론에 불과하니, 적어도 한국시의 변천사를 찬찬히 살피고 넘어서 자신만의 이론을 끊임없이 만드시길, 이 세상에 아직은 없는 자신만의 음률을 다음 시집에서는 찾아내시길 바란다.
첫댓글 두루. 축하드립니다... 그동안의 시간과.....노력....열정이 고스란히 시가 되었군요...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늘 수상을 위하여 수고가 많으십니다.........ㅎ
그리고 김주명시인님도 곧 시집을 내실것 같은데요?........^^
스승님!! 시집 해설에 있어서 (좋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축하 드립니다. 드디어 시집이 세상에 나온다니 ,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무언가 액기스만 남은 진한 진국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집 출간 축하드립니다..오랬동안 사랑하시더니 등단과 시집,,한 묶음으로 결실의 꽃을 피우시네요..^^
시집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
멋진 모습,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가깝게 뵐때도 시를 감상할 때도 깊이와 무게를 느끼게 하시는 선배님!
축하 드립니다~~^^
축하합니다/꺼꾸로 읽어 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