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 속 비대칭’과 ‘결’의 추상미학
조각가 고(故) 심봉섭은 해방 이후 ‘국내 미술대학을 통해 배출된 추상조각’의 일세대 작가이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 조각계가 서서히 추상의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에 조각의 수련기를 마쳤던 까닭에 작가 입문의 시절부터 추상미술의 다양한 실험들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고인이 195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를 졸업한 당시에는 인체를 소재로 한 구상조각이 그 동안 관행처럼 굳어져있던 조각계에 추상의 바람이 서서히 일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1950년대 초부터 조각계에 ‘자연주의적 추상’의 토양을 일궈나간 한국추상조각의 개척자 우성(又誠) 김종영(金鐘瑛 1915-1982) 교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만큼, 그의 초기 작업은 구상임에도 추상의 정신을 효율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재료를 지나치게 다듬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물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식을 추구하였다.
심봉섭은 오랜 추상 학습의 시간을 거친 후 불혹의 나이에 근접해서 본격적인 추상작품을 선보인다. 주목할 지점은 1950년대 후반 서양화단의 앵포르멜류의 추상의 영향을 받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의 청년조각계의 추상조각의 움직임과 그의 조각세계는 일정부분 그 궤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즉 심봉섭의 추상조각은 일정부분 곤잘레스(Julio Gonzalez, 1876-1942) 류의 앵포르멜 추상조각을 거쳐 서서히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1876-1957) 류의 구조적 환원주의 추상으로 정착해 나갔던 당시의 여러 조각가들의 흐름과는 분명히 다른 궤를 지니고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뛰어든 추상조각의 조형언어는 구상적 조형언어로부터 출발해서 귀결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남긴 ‘공간(空間)’이라는 제목의 다름과 같은 작업노트에서 여실히 확인해낼 수 있다.
“공간적인 것의 대소를 막론하고, 이 공간을 점령 아니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조각작품일 것 같으면 (중략) 한 실내에서 좌우공간을 지배하여야 할 것이다. / 이 공간을 지배하지 못하는 작품은 약하여 볼 수 없다. 한쪽 팔만 전체의 형태에서 돌출하면 그 조각의 공간량은 약하다. 그것은 조각 전체가 가지는 공간을 돌출된 팔 때문에 일부분이 파괴되어 형태가 정리되지 않고 공간량이 거기서 산란하여 진다. 한 팔을 올린다면 그 팔로서 만들어지는 공간을 조화되는 다른 공간으로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인체의 형상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는 구상으로부터 근원한 그의 추상조각의 언어라는 것이 시메트리(symmetry)와 에이시메트리(asymmetry), 즉 대칭과 비대칭으로 정리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그의 작업노트에서 ‘조화되는 다른 공간’이란 이렇게 해석된다. 조각이 공간을 효율적으로 점유하기 위해서는 비대칭적 양상이 극대화되는 것을 지양하고 대칭에 기초해야 되지만, 그 ‘비대칭/대칭’이라는 것에 또 다른 조화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창출하는 비대칭적 개입이 절실하다는 풀이가 가능해진다. 심봉섭의 ‘조각이 창출하는 공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물론 그의 스승인 김종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필자가 고 심봉섭의 작품세계로 파악한 “대칭 속 비대칭과 결의 추상미학”은 그가 작고할 당시에도 왕성하게 지속되어온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로서는 그가 생전에 남긴 글과 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추상미학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진폭으로 확장하려 했던 미래적 비전을 다만 유추하고 가늠해 볼 뿐이다. 일견, 그의 추상조각이 이항대립적 요소를 화해시키고 상호작용하게 하는 공간의 문제나 형식적 조형언어의 문제에만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겠다. 더욱이 후기에 올수록 수직지향의 모뉴먼트에 골몰함으로써 그가 애초에 추구하려던 ‘대칭 속 비대칭’ 또는 ‘결의 추상미학’이 너무 형식의 내면으로 숨어버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비판적 관점 역시 가능할 수 있겠다. 관건은 심봉섭이 남긴 유산에 우리가 ‘자유로운 소통’으로 참여하면서 자족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양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verbal communication)으로 매개할 역할이 우리 미술인들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이다. 감상자라는 ‘독자는 (예술작품이라는) 텍스트를 완성하는 유일한 목적지’이자 늘 예술작품이라는 ‘텍스트를 다시 읽고 쓰는 무한한 가능성의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검토한 필자의 입장에서, 그의 작품 앞에 선 우리의 개인적 미적 체험이 이번 회고전에서 서로 나누어지고 공유되길 기대한다. 그런 차원에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여러 평자들의 진지하고도 다양한 비평들이 이번 회고전을 계기로 다시 촉발되기를 기대해본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스승의 그림자
故(고) 里石 沈鳳燮 선생님
글 : 장상만(조각가, 부산미술협회 이사장 역임)
사람에게 있어서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지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평생 예술가로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도 그런 분이 계신다. 스승이자 조각가인 심봉섭 선생이다. 선생은 부산예술계, 특히 조각 분야의 기초를 다지신 분이시다. 부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초창기 조각사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예술계에서 선생을 부산조각계의 큰별, 한국조각계의 원로라고 말하고 있다. 고(故) 심봉섭 선생은 1929년 6월 9일에 진주시 진양면에서 태어나셨다. 본적은 부산직할시 동래구 연산동 1268번지이고 진주사범학교에서 부산의 경남상업중학교(6년제)로 전학을 오게 되면서 부산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955년 국립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부산사범대학 미술과 강사(1956~1957)를 시작으로 부산공업고등학교 교사(1958~1964), 부산공업전문학교 교수(1964~1974)로 재직하면서 부산한성여대, 동아대 문리대, 부산여대 등에서 미술과 강사를 겸임하셨다. 이후 부산상업고등학교, 부산공예고등학교 석공예 주무교사, 부산교육대학 미술과 교수직을 끝으로 정년을 맞아 퇴임하면서 교단을 떠나셨다. 선생은 한평생 교사로서 또 교수로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내셨고 또 그의 제자들이 현직 교단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으며 중진작가들로 활동하고 있다. 선생은 작가로서도 교수로서도 어떠한 야욕을 품지 않으셨고 조각가로서 출세하고 조각활동을 통해서 영화를 누릴 욕심을 전혀 갖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도 예술가로서 선생의 인품은 참으로 대단하셨다. 특히 존경스러운 것은 스승도 선배도 눈에 보이지 않는 패역한 세대를 탓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으로 조용히 피해 가셨던 슬기와 지혜로운 참 덕스런 인격의 소유자이셨다.
선생은 20세기 정신적 혼란기의 난세에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셨다. 세계 제2차대전, 8.15광복, 남과 북의 분단, 미군정 6.25전쟁, 4.19 민주항쟁, 5.16군사혁명. 참으로 혼돈의 세상을 건너며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 그런 속에서도 교육자로서, 예술가로서의 길을 꿋꿋하게 걸으셨다.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구축해가는데만 전념하셨다. 얼마나 많은 고뇌와 헌신이 요구되었을까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선생의 작품제작의 주재료들은 나무, 철재, 용접, 석고, FRP, 스텐리스, 청동 등으로 다양하다. 각종 재료의 성질과 형태들을 잘 살려 깎고 붙이고 새기고 연마하여 어떤 표현형식이나 이념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초기의 구상적 표현에서 크고 작은 개체들의 유기적 관계를 생략하여 단순화하는 구성형식의 추상적 작품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표현기법이 다원화되고 있는 현대미술 흐름의 어떤 시류에도 지배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변화와 발전을 시도하며 꾸준히 자신의 영역 외에는 눈길을 보내지 않으셨다. 스승의 작품세계를 감히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한마디로 맑고 깨끗한 교육자요 청빈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신 분이셨다. 선생이 부산 조각계 및 향토문화발전에 기여한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1962년 부산에서 첫 개인전을 여셨다. 당시만 해도 조각활동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개척자적인 의미와 그 위치를 동시에 지니고 계셨다.
올해 나이 71세인 필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하신 선생님과의 만남을 떠올리면 늘 감사한 생각이 든다. 선생과의 인연은 아스라한 세월 저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필자가 부산에 있는 초량초등학교 4학년 때 서양화가이신 김경(金耕) 선생님을 만났다. 당시는 6.25 전쟁 중이라 학교건물은 미군에게 징발되었고 학교 뒤 언덕 위에 세워진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받을 때였다. 부산 개성중학교 때는 서양화가이신 김종식(金種植) 선생님을 만났다. 어느 날 야외수업 시간에 필자가 스케치하고 있는 그림을 보고는 “장상만이 니는 부산상고에서 끌어 땡기겠다.”하셨다. 그 한 말씀 덕분에 미술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수학을 싫어했고 수치로 계산하기를 싫어했던 필자는 결국은 부산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미술시간이었다. 김경 선생님을 고등학교에 와서 또 만나게 되었다. 김경 선생님은 2학년 말까지 근무하셨다. 3학년 학기 초에 후임으로 오신 분이 심봉섭 선생님이셨다. 선생은 전임이셨던 김경 선생님의 부산공고 본교 담벼락 옆에 판자로 붙여지은 열 평 정도의 수상(水上) 가옥 작업실 겸 주거공간을 물려받아 사용하셨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시간이 훨씬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부산공고는 실업계 학교라서 3학년이 되면서 진학반과 사회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받았다. 필자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취업을 목적으로 사회반을 희망하였고 대학진학을 아예 포기하고 있었는데 학년 초 어느 날 미술 특활시간에 안광모라는 친구와 필자 두 사람이 새로 부임하신 심 선생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제자들을 너무 사랑하신 김경 선생님의 특별한 부탁이셨는지 심 선생님께서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목표 삼고 한번 도전해보라고 권유하셨다. 덕분에 안광모와 필자 두 사람은 1959년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어려운 시대에 지방대학도 아닌 서울에 유학을 하게 되다니. 스승과 두 제자는 도전의 승리에 너무나 기뻤고 감격하였다. 마침내 서울대에 입학하여 심 선생님의 스승이신 조각가 김종영(金鐘瑛) 교수님, 조각가 김세중(金世中) 교수님, 데생 실기실에서는 서양화가이신 박득순(朴得淳) 교수님, 서양화가 장욱진(張旭鎭) 교수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스승과 제자의 복된 만남이 무사히 졸업하고 오늘의 이 자리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보답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야할지. 식물들이 태양 빛을 향하여 뻗어가듯 저 하늘을 바라보며 주어진 달란트를 잘 갈고 닦으면서 조용히 잊혀지지 않는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며 본향 향하여 감사하며 묵묵히 나아가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후진양성에 힘쓰셨다. 또 작가로서 수십 회의 각종 전시회와 예술문화 행사의 운영 및 심사를 맡으셨고 앞장서 참여하여 척박한 부산문화의 불모지를 기름진 토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자들 그리고 후배들과 뜻을 같이한 동역자들의 리더가 되어 푸른 앞바다가 펼쳐진 중앙공원의 조각광장 조성 등 염원하던 큰일들을 이루시고 2001년 3월 17일 청룡동 작업실과 거닐고 명상하던 금정산 숲길과 사랑하는 이들을 다 두고 홀로 먼길을 떠나셨다.
연연(連延) 브론즈 60x60x36cm 1987
여인(女人) 나무 15x13.5x49 1962
적(積) 브론즈 14x18.3x61.2 1986
상(像) 철 52x21x25 1967
허(虛) 나무 16x13.5x53.7 1973
층(層) 브론즈 23x15x60.5cm 1977
구-용(球-踊) 브론즈 49x18.2x70 1988
연인(戀人) 나무 19.6x10x66cm 1962
소녀 주석부조 17.5x10x30.5cm 1967
결(結) 브론즈 21x12.5x68cm 1995
이석 심봉섭(里石 沈鳳燮), (1929-2001)
경남 진주 출생 / 195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5회) 卒
개인전 - 8회
그룹 및 단체전
1974 한국현대 조각대전 초대 출품
1981-85 서울 조각회 전 출품
1986 서울대학교 40주년 기념초대전[서울대학교 전시실]
1988 88올림픽 경축 초대전{부산 수영 요트 경기장}
1990 부산 미술 첫 세대전 출품
1991 한국 신구상회 파리전
1970-9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재부 동문전
1969-95 부산 조각 공간전
1981-95 부산미술제 외100여회
경력
1958-60 경남미전 심사위원
1962 부산시 문화위원
1965 대한민국 국민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74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 부지부장
1975-85 88올림픽 조형 기념물 부산 자문위원
1989 부산미술대전 심사위원장
1989 부산시 문화상 수상
1991 부산시 문화상 심의 위원장
1991 부산미술제 운영위원장
1990-93 부산 야외 조각대전 운영위원
1978-94 부산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