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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을 배경으로 독일 육군 제3기갑사단의 3호전차 N형의 제작기와 완성작을 올리고나서 따블오남편만의 고집으로 3호전차의 고증 리포트를 준비했습니다. 3호전차의 경우 워낙 파생형이 많은 탓에 언제 한번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기회가 다시 오기 힘들겠다 싶어서 이번 리포트는 아예 파생형 족보부터 정리하고 넘어갈 생각입니다.
나치 독일 기갑부대 창설의 선구자이자 전쟁 중 동부전선에서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과 그가 이끄는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0년대 초 대전차포 1정과 기관총 1정으로 무장한 탱크와 보다 강한 화력의 주포로 무장한 탱크 2가지 종류의 개발을 구상하게 됩니다. 전자가 바로 훗날 3호 전차이고, 후자는 4호 전차가 됩니다. 일단 4호 전차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3호 전차만 오늘 이야기 하도록 하지요.
A형(Pzkpfw Ⅲ ausf A)
최종적으로 개발 회사는 다이믈러-벤즈 社로 결정되었고, 전차장,장전수,포수,조종수,무전수 이렇게 5인이 탑승하는 탱크로 개발되게 됩니다. 시속 40km로 달릴 수 있고, 37mm 주포와 3정의 기관총으로 무장되었습니다.
1937년 10대만 생산되어 8대는 육군 제1,2,3 기갑사단에 배치되어 오스트리아 병합 및 폴란드 침공에 사용되었고, 나머지 2대는 실험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후에는 지휘관용 탱크로 활용되었습니다. 실제 전쟁터에 배치된 결과 A형의 약한 서스펜션과 당시 상황에서도 철갑 방어 능력이 시급하게 강화되어야 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 곧바로 B형 개발로 넘어가게 됩니다.
B형(Pzkpfw Ⅲ ausf B)
A형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서스펜션이 우선 바뀌었고, 철갑 두께가 보다 두꺼워진 B형은 A형 생산 후 같은 해에 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15대가 생산되어 그중 5대는 3호전차 차체를 사용한 돌격포 전차 개발에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A형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침공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A형에 비교해서 서스펜션과 철갑 두께를 개선하였음에도 15대 이후 추가 생산없이 보다 성능 강화를 위해서 C형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C형(Pzkpfw Ⅲ ausf C)
(1939년 9월 폴란드)
C형 역시 1937년에 15대만 생산되어 폴란드 침공에 투입되었고 B형 대비 약간의 서스펜션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D형(Pzkpfw Ⅲ ausf D)
(1939년 9월 제11 기갑사단 소속)
A형에서 D형까지 오면서 아직 본격적인 양산을 할 수 있는 만족도를 보여준 모델이 없었습니다. 네 모델 모두 같은 마이바흐 엔진을 사용했지만 서스펜션은 서로 다른 서스펜션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서스펜션과 철갑 방어에서 문제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애초에 전격전 전술이 기동력을 강조하다보니 15톤으로 무게를 맞추려 하였고 그런 생각이 철갑 두께를 두껍게 하는데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대전차 라이플이나 기관총 사격 정도만 간신히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두께로 5mm에서 15mm 정도가 되다보니 실전에서 의외로 타격을 쉽게 입고 무력화 되는 경우가 발생하였습니다. 일부 전차는 임시방편으로 철갑을 덧 대서 30mm 두께로 보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D형까지는 실패작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1938년 1월에서 1939년말까지 55대가 생산되어 30대는 폴란드와 노르웨이 침공에 투입되었고, 25대는 시험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40년 노르웨이,D형은 4호전차 B형의 포탑을 사용했습니다.)
)
E형(Pzkpfw Ⅲ ausf E)
E형은 3호전차의 최초의 양산 버젼입니다. 특히 3호전차가 A형부터 D형까지 서스펜션의 문제는 해결이 안되었는데 E형에 이르러서 드디어 전혀 새로운 설계의 서스펜션을 적용한 결과 안정된 성능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됩니다.
(3호 전차 A형~N형까지 서스펜션 변천사)
엔진은 더이상 마이바흐 엔진을 사용하지 않고 HL 108 TR 엔진으로 바뀌고 10단 변속기를 장착하게 됩니다. 그동안 사용해온 37mm 주포도 1940년 8월부터는 드디어 50mm 주포로 무장하여 화력을 업그레이드 시키게 됩니다. 이런 개선은 그 이전 버전의 무게 15톤이 E형으로 넘어오면서 19.5톤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에 3호전차의 그 이전 버젼들이 소수 생산되어 투입된 반면 E형은 1938년 10월부터 다이믈러-벤즈 社, 헨젤 社, MAN 社 이렇게 3개 회사가 총 96대를 생산하였습니다.
E형은 나치 독일의 거의 모든 전투 지역들(프랑스, 폴란드,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 그리고 러시아)에 투입되어 전격전의 선봉을 서게 됩니다.
F형(Pzkpfw Ⅲ ausf F)
E형이 최초의 양산 버젼이었다면, F형은 1939년~1940년 2년간 435대가 양산되면서 3호전차는 그 기간 동안 독일 기갑 부대의 주력 전차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3호전차가 주력전차로 나서게 된 시기는 나치 독일이 제대로 기갑 전력을 갖추지 못한 폴란드나 프랑스와 같은 상대와 전투를 벌인 시기였습니다.
E형과 외형 상으로 크게 차이가 없지만 내부적으로 엔진 점화 장치에 새로운 설계가 적용되어 개선되었습니다. 또 생산된 435대 중에서 초반 300대 정도는 37mm 주포로 무장되었지만 그 후 100여대 이상 나머지 생산 수량은 50mm 포를 적용하여 화력을 강화하였습니다.
1942년을 기점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이 미국이 공급하는 제대로 된 전차들을 보유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같은 해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의 T-34가 전면에 나서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3호전차는 한풀 꺾이게 되었으므로 결국 3호전차의 전성시대는 1939년(프랑스 & 폴란드 침공)~1942년(북아프리카 군단 항복 및 스탈린 그라드 전투 패배)의 약 4년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수의 F형은 1940년 프랑스 침공에 투입된 후에 함락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서부 전선에 주둔하여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발발하자 방어부대에 편성되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1941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포획된 F형 전차는 미국으로 옮겨져서 미국이 당시에 개발 중이던 탱크의 서스펜션 설계의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후 미육군이 개발하는 신형 전차들은 3호전차 F형의 서스펜션 설계를 복제하게 되는게 그 결과물이 바로 M18 헬켓, M24 채피, M26 퍼싱등입니다.
(M26 퍼싱 탱크)
(M24 채피 탱크)
(M18 헬켓 탱크)
G형(Pzkpfw Ⅲ ausf G)
이어서 등장한 G형은 F형과 매우 흡사한 외모입니다. 1940년 4월 최초 50대 생산분은 37mm 주포를 장착하였고 나머지 550대는 50mm 주포를 사용합니다. 기관총은 앞에서 소개한 "히틀러의 전기톱" MG42 기관총의 바로 이전 모델은 M34 기관총을 2정 장착하게 됩니다.
(폴란드에서 촬영된 3호전차 G형)
G형의 후방 철갑은 30mm로 보강되어 그 이전 버젼들이 15mm 내외였던 수준에 비교하면 상당히 강화된 셈입니다. 최초 37mm 적용 생산분은 대부분 프랑스 지역으로 보내져서 한참 프랑스와 전투 중이었던 독일 기갑부대 전력을 강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같은 해 7월부터 생산된 50mm 주포 장착의 G형은 이미 프랑스가 함락된 후라 서부전선에서 활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대신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보내져서 영국군 전차들과 맞서게 됩니다.
(G형 북아프리카 군단)
(G형 동부전선 동계 위장)
원래 G형의 발주 계획은 1,250대 였는데 당시 함께 사용중이던 체코제 38t 탱크의 성능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서 600대만 생산하게 됩니다.
H형(Pzkpfw Ⅲ ausf H)
1940년 10월부터 1941년 4월까지 총 381대의 H형 버전이 생산되어 주로 동부전선에 투입됩니다. G형 초기 생산분은 그동안 이전 버전이 장착한 50mm KwK 38 L/42로 무장하였으나 뒤에 생산분은 좀 더 긴 포신의 50mm KwK 39 L/60 주포로 바뀌었습니다. 전면 장갑 두께가 두꺼워지고 새로운 변속기를 적용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무게는 21.8톤으로 더 무거워지게 됩니다.
(동부전선에서 파괴된 3호전차 H형)
J형(Pzkpfw Ⅲ ausf J)
1941년 3월부터 1942년 7월까지 무려 2,616대라는 어마어마한 수량의 J형이 생산되었습니다. H형과 마찬가지로 초반 생산분 (1,549대)까지는 50mm KwK 38 L/42로 무장하였으나 1941년 말 생산분부터는 보다 긴 포신의 50mm KwK 39 L/60으로 바뀌게 됩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들은 긴 포신의 50mm 주포를 장착한 후반 생산 버전을 "마크 3 스페셜"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갑작스런 주포의 변경은 북아프리카에서 맞닥뜨린 미국산 M4 셔먼 탱크(75mm 주포)와 영국 발렌타인 탱크(47mm 또는 75mm 주포 장착)을 상대하게 되면서 50mm 주포가 파괴력에서 열세인데다가 포신도 짧아서 사거리에서 밀리게 되다 보니 임시 방편으로 사거리라도 늘려보려는 의도였습니다. H형은 장갑 두께도 다시 50mm까지 두껍게 보강하게 됩니다.
(1943년 시실리 전투시 후기 버전의 J형,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살아남은
J형들은 서둘러 바다를 건너 연합군의 시실리 상륙작전에 투입됩니다.)
불과 1~2년 전에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시에 1호,2호,3호전차들의 빈약한 화력과 장갑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동성만 앞세워서 개발했던 독일의 탱크 개발 방향은 시급한 변화가 요구되었으며 북아프리카 전선 뿐만 아니라 동부전선에서 등장한 두 강력한 탱크들 (T-34와 KV-1) 을 보면서 당장 1~2년 앞을 예측하지 못한 그들의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식견의 결과는 엄청난 당혹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K형(Pzkpfw Ⅲ ausf K)
(K형에는 신형 소형 무전기를 설치하는데 그 이유가 포탑의 내부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
하여 더 큰 주포를 장착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3호전차의 화력을
원하는 만큼 강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은 이미 패색이 짙어갔고,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기갑부대의 신형 전차들에게 열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독일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서둘러 기존의 3호 전차의 화력을 적 전차들이 보유한 75mm 주포에 맞추기 위해서 75mm 포를 장착하려고 시도합니다만 기존의 3호전차 포탑은 75mm 포를 장착하기에는 너무 크기가 작았습니다. 따라서 K형는 4호전차 G형의 포탑을 3호전차 위에 붙혀버린 어정쩡한 모양으로 생산되었습니다. 하지만 포탑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75mm 주포를 장착하자 그 무게로 인해서 엔진 고장이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본래의 목표였던 75mm 주포 장착은 포탑을 교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J형 후기 버젼과 마찬가지로 "약간 더 긴 포신을 가진 50mm 포"인 KwK 39 L/60를 장착하는 것으모 만족해야 했습니다.
K형의 사례를 보면서 당시 독일이 연합군과 소련의 75mm 포를 장착한 전차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게 되자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L형(Pzkpfw Ⅲ ausf L)
1942년 6월~12월까지 653대의 L형 전차가 생산됩니다. 여기서 잠깐 L형이 생산된 그시기에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전에 제가 만들었던 "한눈으로 보는 2차대전" 조감도에서 보면 그때 북아프리카 전선은 엘 알라메인 2차 전투를 앞둔 시기였고 영국군과의 전투의 클라이맥스를 달리던 기간이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본격적으로 시작한 소련과의 전쟁은 일방적인 독일의 연전연승을 이어가다가 모스크바 공방전과 스탈린 그라드의 비극이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L형은 75mm 주포를 3호전차에 어떻게 해서든지 얹어놓겠다는 독일 지휘부의 무모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K형과 마찬가지로 50mm 주포를 장착하는 것으로 최종 개발이 완료되었습니다. 대신 장갑 두께를 위치에 따라서 무려 57mm까지 두껍게 만들었습니다.
(북아프리카 군단 L형 TP 초기 생산 버전, J형 포탑을 그대로 사용하고 50mm KwK38 L60을 적용
하였습니다. "TP"의 의미는 사막전을 위한 적용한 추가 공기 필터와 냉각 장치등 특수 장비(Tropish)
를 의미합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스튜어트나 크루세이더와 같은 소형 탱크나 하프 트럭은 3호전차
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셔먼이 공급되기 전이지만 이미 M3 리/그랜트 전차부터는 3호전차
에게 힘겨운 상대가 되었습니다.)
(K형의 후기 생산 버전.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된 이 전차는 대부분의 소련 전차들에게 위협적인
주포였지만 절대 수량이 부족했던 PAK-38 대전차포를 주포로 장착하였고, 소련군 보병 부대의 대전차
화기를 막기 위해서 포탑을 보호 철판으로 둘러 싼 모습이 보입니다.)
M형(Pzkpfw Ⅲ ausf M)
1942년 10월~1943년 3월까지 250대가 생산된 M형은 60mm 39 L/60 포를 장착하여 적의 75mm 주포에 조금이라도 더 따라가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지만 60mm포가 생각보다 공격에서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250대만 생산되고 애초 계획했던 나머지 수량은 당시 개발이 완료되고 생산에 들어간 차세대 전차 5호 전차 판터의 생산에 반영되게 됩니다.
(M형의 초기 버전,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 참여한 제11 기갑 사단 소속 전차입니다. 상당수의 쿠르스크 전투
투입 3호전차는 포탑 보호 철판 막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소련군 보병이 보유한 대전차 라이플이 3호전차의 포탑
장갑 정도는 뚫고 안에 전차병을 사살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었기 때문에 이런 보강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도하 시에 필요한 배관 장치가 후면에 장착되어있는 것도 이전 버전들과 차이점입니다.도하시에 모든 배기관
들은 밀폐되게 되는데 엔진의 연소를 위해 필요한 공기는 포탑에 있는 통풍구로 들어온 공기를 사용하며
엔진 연소후 배기 가스는 바로 뒤에 장치된 연장 배기관을 통해 나가게 되기 때문에 특수한 배관 장치가
부착된 것입니다.)
(M형의 후기 생산 버전, 사이드 스커트(Schurzen)로 측면을 보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보호 장치가 1943년에는 대부분의 3호와 4호 전차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당시 소련군과 서방 연합군들이 사용한 대전차 라이플이나 바주카포와 같은 대전차 개인
화기가 타이거 1이나 판터에 비해 장감이 취약한 3호,4호 전차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었는지
알 수 있는 단면입니다.)
(200대의 M형은 화염방사기용 전차로 개조되었습니다. M형(FI)또는 Sd.Kfz 141/3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주포로 보이는 140mm 포는 포탄을 발사하는 대포가 아니고 화염을 뿜어내는 "더미"(Dummy)
였습니다. 장갑 두께는 일반 M형에 비해서 추가로 30mm에서 50mm까지 보강되었는데 이유는 화염
방사기란 무기가 매우 단거리용 (기껏해야 60m) 공격 무기인 탓에 단거리에서 공격한다는 것은 단거리에서
공격에 노출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그만큼 장갑이 보강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화염방사기 전차는
주로 무장친위대(SS) 기갑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에 방어 부대에
배치된 화염방사기 탱크입니다. 당시 복잡한 위장 무늬와 지머릿이 보입니다.)
N형(Pzkpfw Ⅲ ausf N)
드디어 3호전차의 마지막 버전인 N형까지 왔군요. N형은 역발상으로 구경은 넓으나 포신은 훨씬 짧은 75m 37 L/24 포를 장착하였습니다. 즉 단거리에서 강한 파괴력을 가질 수 있지만 먼 거리에 떨어진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한 조건입니다. J형에서 3대, L형에서 447대, M형에서 213대가 N형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즉 새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기존의 탱크들을 포를 교체하여 개조했다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설계가 바뀐 3호전차 파생형의 끝은 M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의 탱크가 적 전차들과의 전투에 나설 수는 없겠지만 보병 지원의 경우 매우 효과적임을 입증하게 됩니다. 또한 1943년 드디어 독일의 중형 전차의 목마름을 해결해준 타이거 1와 판터가 등장하자 N형은 타이거 1 중전차중대에 함께 편성되어 타이거 1 주변에서 공격하는 보병 대전차화기나 적의 소형 탱크들을 파괴하는 일종의 지원용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초기 타이거 중전차중대의 상황이었고 타이거의 생산이 어느 정도 충분히 이루어지자 타이거 중대는 100% 타이거 1이나 타이거 2(킹 타이거)로 구성하게 됩니다.
또한 N형은 동부전선에서 독소전쟁 내내 원치않는 전쟁에 독일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끌려나갔던 루마니아 기갑 부대에도 공급되었습니다.
1943년 구데리안 장군은 3호전차의 생산을 멈출 것을 결정하고 1938년부터 6년간 독일 기갑 부대의 한획을 그은 3호전차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게 됩니다.
(N형-FI, 다른 버전들과 마찬가지로 화염방사기용으로 개조된 N형입니다. 50mm 더미 포
에서는 화염이 뿜어져나왔습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 사용되었습니다.)
3호전차의 차체를 사용하여 StuG (Stumgeschutz)와 같은 돌격전차가 개발되어져서 뜻밖에 보병 전투 지원에서 큰 효과를 보기도 합니다. 일단 돌격전차의 경우 언젠가 제가 제작기를 올린 후에 고증 리포트로 설명드릴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오늘은 여기서 글을 끝맺겠습니다.
결론
3호전차는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이어지는 프랑스 침공 및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초기 전투까지는 뛰어난 기동력과 안정적인 설계(E형부터 얘기지만...)로 분명히 독일 기갑부대 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한 모델이었습니다. 1차대전에 최초로 탱크가 전선에 등장했지만 당시 탱크는 상대 탱크와의 "결투"가 아니라 보병들의 작전을 지원하고 앞서 나가는 역활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정도의 장갑 능력을 갖춘 어느 지형에서나 질척거리지 않고 밀어붙힐 수 있는 차량"이 2차대전 초기의 탱크의 역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탱크와 탱크의 "결투"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고 그런 양상은 북아프리카 롬멜과 몽고메리의 숙명의 대결을 예로 들기 전에 이미 프랑스가 함락되기 직전에 영국 탱크들과의 전차전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튜니지에 도착한 3호전차 N형들, 얼마 후 북아프리카 군단은 항복을 합니다.)
1호부터 3호까지 나치 독일의 초기 전차들은 약한 상대를 몰아붙히는 "전격전"의 요구에는 맞을 수 있지만 막강한 화력과 장갑 능력을 가진 강자와의 "전차전"에는 맞출 수 없는 조건이었고 이런 판단 착오는 독일이 전쟁을 시작한지 불과 3년만에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탱크들에게 밀리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뛰어난 차체의 성능을 달성한 반면 화력과 장갑 능력은 판단 착오였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라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타이거 1과 판터가 나온 싯점이 단 1년이라도 앞섰다면 어쩌면 유럽 전선에서의 판도는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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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고 감사합니다!
여태까지 자세한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서 영어로 되어있던 Osprey 나 Velinden을 뒤졌었던 수고를 한방에 날려주는 자료네요. ^o^
저 역시 외국 사이트들이나 전문 서적들에서 얻은 지식들로 쓴 글입니다만 세상이 좋아져서 제가 궁금한 지식들을 너무 쉽게 그리고 자세하게 찾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제가 만드는 작품의 역사를 고증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지금 제작중인 셔먼 역시 3호전차 못지않게 긴 역사를 가진 명작이라서 작품 고증 리포트 분량이 만만치 않을 듯 싶네요. 뭐 천천히 천천히..... 이건 취미지 일이 아니니 여유롭게 즐길 생각입니다.
3호 전차도 참으로 다양한 모양이 나왔네요. 저 작은데 5인승이라니. 늘 재미있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순서는 셔먼입니다!
우왓! 그럼 셔먼 만들고 계세요?
네......:-)
저도 모르는버전도 있었군요..너무 자세한 설명이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