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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 영성지수로 키워라(이영희 저)
Ⅰ. 내용요약
-서문 -
이 책에서 논의 될 SQ는 Spiritual Quotient로 영성지수라고 정의한다.
브래들리 한센은 사람에 따라 소지한 지성적, 정적, 의지적인 특성들의 통합을 가리켜 ‘영성’이라고 정의 했으며,
이 정의를 따른다면 “예수 잘 믿는다.”는 말은 전인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 만능의 시대, 우주 여행까지도 가능케 한 혁신적인 진보들이 있었지만, 정작 인간의 삶은 타락을
염려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심리학자들은 기계문명과 물질 만능의 풍조가 가정을 파괴하고 마음을
사악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 모든 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의 상실한 마음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게 되고 사람의 인격이
파괴되는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는
말씀을 붙들고 우리 시대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SQ(Spiritual Quotient)를 길러주어야 한다. SQ는 ‘하나님의
에너지’이며, 크리스천이란 하나님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충전받아 사는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1부 아이큐 전성시대
본래 지능지수(IQ : Intelligence Quotient)라는 용어는 프랑스 심리학자 비네가 정신 박약아를 검출하기 위해
고안한 심리검사법이었다고 한다. 즉 비네의 이론을 대중적으로 지수화한것이 바로 아이큐이다.
다니엘 골먼의 저서 [감성지능]을 번역한 후 황태호 박사는 “20세기를 스텐포드 비네의 아이큐(IQ)시대라고
한다면 이제 다가오는 21세기는 골먼 셀로비의 이큐(EQ)시대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인지혁명’은 지구의
자원을 생산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그에 따른 인간의 정서나 영성에 미친 영향과 희생이 너무나도
컸다. 사람을 사람답게 보기보다 기계적 기능주의로 평가한 결화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갈등이 야기 되었고,
그러다보니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크게 늘었고 정서의 결핍과 영성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새로운 갈등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한 경쟁시대에 등장한 이큐(EQ)라는 숨통
경제 세계 속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경제 분야의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 남으려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겠는가? 이런 세상 길에 갓길이라도 하나 만들어놓지 않으면 꼭 죽을 것 같기에 만들어낸 것이
이큐(EQ)의 등장이다. 이큐란 인생의 최선책만 고집하다가 잘못된 길로 가지 말고 차선책으로도 시선을
돌리라는 ‘정신적 여유’를 말한다.
아이큐는 무엇인가? 교육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뇌를 이성적으로 길들이는 인지적 지능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아이큐는 인간을 이렇듯 차갑고 냉철한 기계적 합리주의자로 만들었고,
그 결과 드디어 아이큐에 대항하는 새로운 경쟁자가 출현한 것이다.
새로 맞이할 21세기에는 나 홀로 잘 되려 하다가는 금세 소외당하기 십상이다. 이 말은 이큐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이큐를 무시한 채 새로 고개를 든 이큐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는 원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결국 아이큐와 이큐, 이 둘은 우리 사회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인정하고 대등하게 공존하는 사회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공부해야만 살아남는 민족
세계가 한국식 교육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이들을 더 이상 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교육방향을
몰아가고 있는 미국의 교육개혁만 보아도 그렇다. 외국이 바라보는 한국, 한국에 희망을 거는 이유가
한국은 인적 자원을 길러내는 교육의 나라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시대의 국제 사회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점수 따기 경쟁식의 극단적인 공부 방법을 지양하고
우리의 장점을 키워나가는 교육을 해나가야 한다. 현대와 미래는 창의성이 요구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법칙을 발견한 곳은 교실이 아니라 목욕탕이었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곳은
도서관이 아니라 사과나무 아래였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현장에서 위대한 법칙을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실에서 고민하고 씨름하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큐, 고쳐가며 활용하기
- 주체 못할 호기심 조절시키기
호기심은 역사 발전의 숨은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죄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호기심은 창조와 파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호기심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비건전한 호기심, 충동적인 행동은 어려서부터 그렇게 허용되고 길들여 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안에 부모들에 의해 방치된 호기심으로 인해 무책임성을 드러내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게 하라.
성경에는 혼자 사는 아담에게도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것에 대해 얘기하면 분명한 선을 긋고 잇다.
십계명에도 ‘하지말라’는 전대적이고 항구적인 원칙이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옳다와 옳지 않다,
해라와 하지 말라, 나쁘다와 좋다, 악하다와 선하다,”를 분명히 구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 공과 사를 구분 시켜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독 거절하는 일을 어려워하낟. 사람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모습은 좋게 말하면, 정이 많다고 하겠고, 나쁘게 보자면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하겠다. ‘예’라는 말에 너무
익숙하다 보니 ‘아니오’라는 단어가 웬지 어색하고 거북하게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불의한 일에 대해 ‘아니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용기를 길러주는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오직 너의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좋아나느니라”(마5:37).
- 취미가 특기가 되게 하라
어떤 사람에게 좋아하는 분야가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은 불행하다. 하지만, 건설적이지 않은 분야에 빠지는 일은
더 불행하다. 즉 어떤 분야에 흥미를 갖고 좋아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들의
건설적인 취미를 살려 주특기로 만드는 일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2부 쉽게 하는 이큐 형성
이큐란 무엇인가?
아이큐가 인지 영역에 강조점이 있다면 이큐는 정서 영역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큐의 본질은 정서이다.
감성(emotion)이란 말의 어원은 본래 라틴어 ‘emovere'에서 파생되었는데 “밖을 향해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렇게 때문에 감성이라는 말에는 행동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감성능력이란
행동화되려는 충동을 참는 능력을 말한다. (다니엘 골먼, [감성 지능], 비젼 코리아). 결론적으로 감성학자들이
정리한 감성능력이란 자기 감저응ㄹ 제대로 인식하는 능력, 자기 감정을 조절 할 줄 아는 능력,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 어려운 상황에서 잘 대처할 수 있는 낙관적 동기부여,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관리하는 능력을
수치로 나타낸 것이다.
스킨쉽과 대화의 중요성
갓난아기가 보고, 듣고, 피부로 느끼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운동하는 감각 등이 하나로 체계화되려면
부모와의 접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스킨쉽과 함께 중요한 것이 바로 대화이다. 스킨쉽은
성장 호르몬을 촉진시켜서 몸을 자라게 하고, 대화는 인간의 정신 능력을 키워주고 정서에 놀라운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실제로 해보는게 낫다.
손다이크는 사물본성에 대한 이해력과 탐구능력은 연습에 의해 탁월해 질 수 있다는 이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의 이름을 짓게 하시면서 시행하신
교육방법 이었다.
사물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기억력과 사고력, 변별력과 독창성을 요구하는 인지 테스트인데,
아담은 이렇게 직접 부딪혀서 만져보고, 냄새를 맡고, 머리를 쓰는 일을 통한 고도의 두뇌활동을 함으로
탁월하게 되었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지도자가 되었다. 이처럼 자연과의 교감은 인간의 인지발달 뿐 아니라
정서 발달을 매우 풍요롭게 한다.
이큐 높으면 예수도 잘 믿는다.
여성들은 그들의 긍휼히 여김, 연민, 동정심을 발휘하여 예수님을 장례하고 낫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고
무덤을 찾아갔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쪽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었다. 이처럼 믿음과
낙관적인 사고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겨자씨만한 믿음을 발아시키는 것은 낙관적인 사고이다.
여성에게 있는 예리한 직관이나 동정심, 사랑, 긍휼, 온유함이야말로 영성을 계발하는 데 많은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감성지능은 어떻게 발달하는가?
- 마음이 발달하는 시기
일반적으로 태아의 정서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태아 때부터 발달한다는 주장이 강하다.
그리고 영아시절의 감성은 감각에 의해 키워지기 때문에 감각자극을 줘야 한다. 사실 영아기는 말보다는
이심전심, 마음으로 통하는 시기이다. 아기들이 엄마를 좋아하는 이유도 자기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이다.
3세 미만에 기독교 신앙교육을 시켜야 하는 이유도 이 시기가 소위 ‘마음이 발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할 때 어떤 인격이 형성되겠는가?
인간이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시기는 놀랍게도 마음이 발달하는 3세 미만부터이다.
- 아프지 않고 커야 감성이 풍부하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인격을 형성하려면, 신체, 인지, 사회, 정서, 도덕, 영성이 균형을 이루며 고루 발달해야 한다.
특히 신체적으로 미숙하다거나 결함이 있다면, 정서의 장애까지 가져 올 수 있다. 자주 앓는 아이가 신경질적인 것처럼
유아 시절 발육 상태는 성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사랑이 보약이다.’라는 말처럼 그저 먹는 것만
잘 먹인다고 발육 상태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 엄마 품에서 배우는 풍부한 감성
아기들의 풍부한 정서와 우수한 두뇌 계발은 엄마의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영아기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며 또 원만한 성격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베푸는 지극한 사랑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생후 0~12개월의 기간 동안, 보호받으려하고 안정감을 얻으려는 아기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정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불러 일으킬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사랑, 관심,
스킨쉽이 성장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킨다는 사실은 젖병을 혼자 물고 돌아다니다가 다 먹으면
내던지는 아이와 , 엄마 품에서 눈을 맞추고 맞장구를 쳐대며 젖을 먹는 아이, 비록 겉으로는 비슷해보여도,
뇌 속에서는 이미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젖병을 혼자 물고 돌아다니게 놔두는 것이야말로
참을성없고 난폭한 기질의 아이로 자라게 하는 지름길이다.
- 자연 속에서 자라게 하라.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자연으로부터 들려오는 쳔여느이 소리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소리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만끽하며 자라는 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교육이다.
천연의 햇빛, 물, 바람, 이런 것들만큼 정서를 풍부하게 하고 두뇌를 좋게 해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 식물도 기도해 주면 더 잘 자라듯이
식물도 동물처럼 사물에 대한 느낌이나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은
클리브 백스터라는 사람이다. 그는 거짓말 탐지기의 권위자로서 ‘66년에 천남성의 실험’ 로 이 사실을 알아냈다.
태초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번식시킨 것도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창3:18)
인간도 마찬가지다. 저주의 말을 먹고 자란 사람의 마음은 오그라들고 가시덤불과 엉겅퀴처럼 사납고 세다.
그러나 기도를 먹고 자란 사람의 마음은 풍요롭다. 인간이 자라는 조건 중에 기도처럼 위해한 것은 없다.
아기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일은 결코 헛된 작업이 아니다. 식물도 기도해 주면 더 잘 자라듯이
축복의 언어가 담긴 기도야 말로 감성을 키우는 필수비타민이다.
부모의 감성 다스리기
-부모의 감성은 유전된다.
정서란 1차적으로 가정에서 키워지기 마련이다. 사회적인 친밀관계는 가정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활동을
토대로 성숙하게 된다. 유아의 두뇌는 탄력적이어서 감성적인 학습이 어느 때보다 빨리 이루어진다.
특히 영아는 마음의 동향이 전적으로 정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야기의 정서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매를 들어야 하나 안 들어야 하나
인생을 살아가는데 부모의 역할은 막중하다. 특히 부모의 감정을 부모 자신이 잘 다스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의 인생도 달라지게 된다.
‘사랑의 매’란 이성적으로 냉철할 수 있을 때 가능한 행동히다. 부적절한 감정이 앞서고 그래서 화풀이로
매를 든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의 매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매를 준비하는 짧은 시간 동안
감정을 추스르고, 종아리를 걷고 맞을 준비를 하는 아이는 그동안 자신의 잘못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얻는 셈이 되었다. 매를 치며 조목조목 잘잘못을 가리는 선조들의 체벌을 반항심을 키우기 보다,
“나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쁜 습관은 답습된다.
다니엘 골먼은 공격적인 성질이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이유는 유전적인 성향과는 별도로, 공격성을 띤
부모의 모습이 가정에서 자녀의 교육 현장에 그대로 펼쳐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곧 부모가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교육을 시킨 셈이 된다. 그런 아이들은 자라서 부모가 된다고 해도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고 한다. 습관적으로 싸움을 걸든지, 자기 주장을 말로 하기 보다 물리력으로 관철시키려는 호전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 사랑의 매가 지혜를 만든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사랑의 매를 들 수만 있다면 아이들을 교육하는 문제가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 지 그 중심이 흐려지고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교육자들은 교육자들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교육개혁은 부모의 권리
성경은 자식의 교육을 위해 매를 들지 않는 부모에게 경고하고 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기 때문에
징계하는 채찍이 있어야 그 미련함을 다스릴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함이란 완고함을 뜻하는데 자식을 가장 쉽게
망가뜨리려면 그 아이의 임의대로 하도록 방치하면 된다. 부모는 자신의 감성을 조절하는 훈련을 해야 하고
그 절제된 감정을 가지고 아이에게 적극적인 교육을 시켜야 한다.
영국의 서머힐 학교의 학부모들은 영국 정부의 교육법을 적극적으로 시정해 나간다. 특정한 철학이나 종교와
관련지어 학교를 설립하려 할 때는 학부모의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유럽법을 근거로 해서
영국 학부모들은 영국 정부의 교육법이 시정되기를 적극적으로 촉구해 간다. 이제야말로 바른 교육제도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크리스쳔 부모들이 나서야 할 때다. ‘시정의 권리’가 부모에게 있기 때문이다.
3부 성경적 이큐를 찾아서
감성지수의 종류
크리스천들이 알아야 할 일의 영역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감성학자들이 분류한 다섯 가지
감성지수의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자신의 감성을 인식하라. 둘째, 자기 감정을 조절하라. 셋째, 감정 이입의 능력을 키워라.
넷째, 긍정적인 동기부여자가 되라. 다섯째, 타인의 감정을 잘 관리하라.
- 첫 번째 감성지수의 영역(내면 인식의 능력)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 수록 자기 감정 또한 잘 처리할 줄 안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 세계를 응시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나 성향을 잘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자율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노련한 선장은 바다 위에 보이는 10퍼센트의 얼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닷 속에
잠긴 90퍼센트의 집채만한 얼음을 본다.”는 말도 있다. 우리에게는 내면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필요한데
자기 인식이 부족한 사람은 주로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는 거울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에게 자신을 보아달라고
하기보다 성경을 거울삼아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1) 내면 인식 방법 1 -메타감성
자신의 감정을 감지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일반 심리학자들은 자신과 내적 거리를 둘 것을 권한다.
즉 자기 성찰을 위해 자기만의 고요한 시간을 갖는다든지, 침묵이나 명상을 한다든지 해서 자신을
살펴보라는 뜻이다. 심리학자들은 이와 같은 방법을 두고 메타감성(META-MOOD)이라 부르는데,
감정을 감지하고 인지하려면 메타감성에 들어가 감성적 신호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매우 관련이 깊다. 치통은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경우가 많고, 위경련이나 위염은
대부분 신경성 스트레스가 원인이며, 어린아이가 몹시 성을 낼 때면 먹은 음식을 토하거나 설사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중고생들이 시험때만 되면 고열이 난다든지 음식을 먹고 체하는 일도 다 마음상태와 신체가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다. 실제로 사람이 기분이 나쁘거나 화를 자주내면 피가 산성화되어서 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또 의학적으로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심장병에 걸리기 쉽고, 화를 너무 참으면
암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따라서 신체적 징후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자기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는 좋은 출발점이자 방법이 될 것이다. 신체적 징후를 관찰함으로써 그 신호들을 유발시키는
원인들을 규명해 보는 것은 잠재된 감정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2) 내면 인식 방법 2 - 기독교인의 메타노이아
세상에서 말하는 감정 니식의 방법은 베타감성에서 보았듯이 신체와 마음의 관계를 다룸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감정인식은 ‘죄’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14:30)는 말씀처럼 죄는 자신을 파괴시킨다. 또한 질병의 원인은 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막2:5)
어떤 사람은 “인간의 마음은 죄의 씨를 너무나 잘 발육시키는 옥토”라고까지 표현했는데, 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삼십 배, 백 배로 번성하여 우리 자신을 부패시키고 만다. 메타노이아는 회심을 뜻하는데 이것은 마음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섬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심령 깊은 곳에 숨겨진 자신의 죄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치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내면 인식의 방법 3 - 하나님의 감정 인식
기독교인의 메타노이아는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는 좋은 방법이지만 기독교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감정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의 감정과 동질화시키려고 애쓴 사람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고전 2:10~14)
- 두 번째 감성지수의 영역 - 감정 조절
우울증, 분노에 대한 뇌의 흐름을 연구한 뉴욕의 신경학자 조세프르두는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런 일을 당할 때면 이성을 잃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갑작스런 일을 당할 때의 뇌의 흐름을 관찰 했는데. 그 결과 특정한 외부의 자극에 대해 신피질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전에, 감성적으로 먼저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되면 우선적으로
감성이 이성의 길을 가로막게 되므로 다혈질적인 사람은 이성을 잃고 흥분하여 길길이 뛰며 소리치게 되고
내성적인 사람은 우울증에 휘말리거나 그 마음을 숨긴 채 안으로 복수심을 키우게 된다.
-여호수아의 감정 조절하기
감정 조절에 대한 유대 격언에 “남을 이기려 하지 말고, 나 자신을 이겨라.”는 말이 있는데. 감정 조절은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모세도 므리바 반석에서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실패를 맛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반면 여호수아는 자기 감정을 잘 조절한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충동대로 행동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 감정을
잘 조절하며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여호수아는 당연히 승리할 줄 알았던 아이성 전투에서 크게 실패하자
하루 종일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수7:6) 온 종일 속수무책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장교답지 않은 태도이다. 여러 명이 죽었고 모두 혼비백산해서 돌아왔다는 보고를 접한 민심의 동요에
아랑곳도 하지 않고 그는 그저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는 내면의 기대가 어긋난 데서 오는 상실감과
갈등을 평화로 전환하는데 드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그의 남다른 점은 종일토록 엎드려 잇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해질녘에야 뗀 입으로 처음 말을 할 때 사람에게가 이니라 하나님께 했다는 점이다.
(1) 감정표현의 오류 1 : 이중성
감정을 표현할 때 종종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 첫째가 ‘이중성’이다.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감정을 포장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의 위선을 풍자한 영국의 전래신화 ‘두 얼굴의 하인 관리자’라는이야기를 읽어보면 이러한 이중성을
엿볼 수 있는데 이야기 속의 관리자는 자기가 관리하는 하인들을 볼 때면 언제나 사나운 표정을 짓고
반면 상전을 바라보는 얼굴은 언제나 친절하게 웃는 낯이다. 이중성은 결코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
(마23:27)
(2) 감정표현의 오류 2 : 정직하지 못함
감정표현의 오류 두 번째로 정직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개인보다 단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단은
개인의 기분 따위는 쉽게 묵살한다. 특히 개개인의 자율과 개성에 대한 자유로운 공간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던
동양의 문화권에서는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흉이라고 생각해 왔다. 마음이란 억제하고
숨겨야 하는 것이지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반면 서양인은 남 보기에 부끄러운 일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 때 자부심을 갖는다. 개개인의 자율과 개성에 대해
자유로운 공간에서 살아가는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것을 오히려 흉이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기독교 문화 의식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감정을 조절하고 표현해야 할까? 최요섭 목사님의
설교집에는 혼자 있든지 복잡한 대중 앞에 있든지, 남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늘 하나님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한다. 기독교인의 올바른 감정표현의 기준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든지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면전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3) 세 번째 감성지수의 영역 : 감정 이입
-감정이입의 능력은 성숙함에서 비롯된다.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능력은 먼저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는 성숙한 능력에서 나온다. 사람은 흥분하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모두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력을 잃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 속을 훤히 다 들려다 볼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좀 더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입이란 자기에게만 몰입되어 있는 감정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인데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면
이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 올바른 감정 이입
감정 이입이란 다른 사람의 내면적인 감성 세계와 경험 세계를 헤아리는 능력으로 영적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감정이입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긍정적으로 청취하고 이해하려는 올바른 자세이다.
상대방의 감성 세계와 이성 세계로 들어가되 그것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그 감정을 그대로 이입함으로써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먼저 남을 이해하기보다
오해부터 하기 쉽다. 따라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혀 주시길 (시119:32)간구하는 시편 기자의 기도는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때로 내 아이의 마음을 읽기도 어려울 만큼
감정 이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부모의 감정 이입 능력은 자녀교육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어린이의 감성이 발달하는 데는 부모의 감정 이입 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부모들이 아이의
신호에 예민하고 그때그때 적절하게 반응해줘야 아이들의 감성이 마음껏 계발 되는 것이다.
(4) 네 번째 감성지수의 영역 : 낙관적 동기부여
항상 긍정적일 수야 없겠지만, 긍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는다는 것이 성경적인 태도이다.
“마음의 즐거움이 양약”(잠17:22)이라는 말씀이 있듯이 기독교의 낙관성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막연한 희망이나 ‘될걸로 믿습니다.’라는 억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시므로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그런 사람은 혹여 실패를 겪을지라도
그 실패를 좋은 경험으로 의미 있게 받아들여 절망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갖는다.
그 사람에게는 만사가 불평거리가 아니라 감사거리로 작용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낙관적 동기부여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긍정적인 동기부여 능력은 변화에 대한 진취성, 탁월한 집중력가 자기 극복,
창의성의 증가를 가져오는 데 긴밀한 작용을 한다. 이러한 동기츄발을 위해서는 위로나 격려, 낙관적 사고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동기부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무기력이나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모든 일들이 진행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은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주님은 낙관적인 전제를 가지라고 하셨고, 거절 당했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하고 흔쾌히 그 거절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는 것이 낙관적인 자세이다.
(5) 다섯 번째 감성지수 영역 : 다른 사람의 감정관리
다른 사람의 감정을 관리한다는 말은 타인의 감정을 존중한다는 말과 같다.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만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감정 이입’이나
서로 상대방의 느낌이나 감정을 잘 읽고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탄은 우리가
배고픔, 갈증, 분노 등 우리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제대로 잘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늘 우리를 그의 표적으로 삼곤 한다. 종종 우리의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이 화를 내게끔 유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내가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죄 짓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 번 들어진 원수와 화목하기란 견고한 성을 취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할 만큼(잠18:19) 말 한마디는
상대방의 마음에 만리장성을 쌓아 놓을 수도 있다. 그만큼 타인의 감정을 관리하는 것은 어렵고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날카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원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대 사회적으로 솜씨 있고 능력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감정 관리의 필요조건
인간관계 능력이란 다른 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혼자 살지 않는 한 이 능력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남의 감정을 관리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타인의 감정을 관리하려면 먼저 긍정적으로 보는 눈과 정직성이다. 감정을 관리한다는 것은 배우들처럼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또 무조건 정직하기만 하다고 해서 좋은 감정관리자라고 말할 수 없다.
긍정성 또한 필요하다는 말이다.
성경말씀 중 “실족케 하지 말라.”는 말씀도 타인의 감정관리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어떤 면에서 화를 내는 사람보다
화를 내게 만드는 사람이 더 나쁠 수 이TEk.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이 나의 말로 인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 해야 한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관리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두 마음을 품기 쉽다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음으로써 이쪽 저쪽을 오가며 말을 옮기게 되기 쉬운데 이런 성격의 사람 또한 직선적인 사람만큼이나
남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 쉽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자녀의 이큐를 높이는 다섯 가지 방법
1. 행동의 지침을 가르치라.
-조급한 세대에게
이 세대는 ‘더 못 참는 세대’ 조급한 세대가 되어버렸다. 조금만 더뎌도 못 참는 요즘 아이들, 원하는 일이
즉시 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조르고 떼를 쓰는 아이들, 그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그들의 모습은 점차
반항적이 되고 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초조해하거나 조급해할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지 구체적으로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 솔직한 감정 표현력을 길러준다.
감정표현에 솔직할 수록 남의 속마음을 잘 읽는데 어린이들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과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알아내는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보라.부모들은 사소하 S일에 짜증을 내거나 우는 아이를 쉽게
야단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감정이입을 잘못하는 어린아이를 둔 부모가 번번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가운데
하나이다. 유아의 경우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부모라고 해도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읽기가 어렵다.
또 유아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남의 감정을 읽는데 미숙하다. 다른 사람 또한 자신이 경험한 감정과
동일 할 것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그에 맞게 대처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 어린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라.
어린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로 감정 이입시키는데 익숙하다.
3. 토론 능력을 키워준다.
단계 1 - 말대꾸를 받아 준다.
아이들의 의사 표현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의 의사 표현을 정확하게 알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자꾸 운다는 것은 말대꾸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요구사항이 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부모는 거기에
적절한 반응을 해 주어야 한다. 만약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서 무조건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입닥쳐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의사표현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러다보니 아이의 의사표현 능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우는 아이의 감정과 상관없이 울면 나쁜사람이라고 울지말라고만 말한다면 십중팔구 아이는 감정을 억압받게 되어
부정적인 정서를 만들고 말 것이다.
교육자들은 세 살 미만의 아이듸 바람이나 요구는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바로 욕구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유머감각을 발휘할 수 있는 유연한 두뇌훈련을
위해서라도 아이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하고 긍정적인 충동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격려 속에서 키워야 한다.
단계 2 - 격려로 자신감을 키워준다.
터키나 스페인에 가보면 격려문화가 얼마나 잘 정착되어 있는지 공항에서부터 알 수 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우뢰 같은 박수를 보낸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것에 대한 축하와 함께 수고한 비행기 조종사에게
보내는 격려의 박수라고 한다.
이화여자대학교 김재은 교수에 의하면 습관적으로 자녀를 노엽게 하면 머리 나쁜 아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반대로 격려하면 두뇌가 자랄 뿐 아니라 자아에 대한 자존감이 생겨서 무슨 일에든지 적극적이며
의욕적일 수 있다고 한다. 실수를 해도 크게 좌절하지 않으며 생산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러다보니 유머감각도 풍부해진다고 한다.
왓슨은 어릴 때 아이에게 풍부하고 좋은 자극을 줄 수록 시냅스의 엃힘과 배선이 좋아진다고 말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앞에 나와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많이 주고, 비록 잘하지 못해도
그 아이가 최선을 다했을 때 격려해줌으로써 좋은 자극을 주어야 한다.
4. 골목을 주름잡는 아이로 키워라.
소규모 아파느 단지의 아이들이나 골목이 많은 일반 주택가 아이들은 서로 어울려 데굴데굴 구르며 놀고 뛰논다.
그곳을 주름잡던 골목대장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리라는 생각이다. 그런 왁자한 동네야말로 비즈니스 계의
천재를 양성하는 학습장이 아닐까 한다.
5. 실패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주라.
부모가 아이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처리해준다면 아이는 어려움을 만나 적절히 대처하고 제어하는 능력을
계발할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러나 부모는 가능한 그들에게 어려움이 없도록 애를 쓰고 그 결과 아이들은
패배와 실망에 대처할 기회를 상실했으며, 동시에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긍지를 높일 기회도 빼앗기게 되었다.
결국 아이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줄 부모들이 없는 울타리 밖에 서면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아이들이 험난한 과정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지 못한 책임은 바로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자녀의 이큐를 낮추는 세가지 방법
1. 자연에서 멀어지게 한다.
기계문명은 인간과 자연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떼어 놓아버렸다. 길에 밟히는 작은 들꽃 하나도 그 생김새를
들여다보면 신비하고 오묘하기가 그지 없는데 우리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개체인양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세계 속에 감추인 비밀들을 한 겹, 한 겹 헤쳐보인다는 것처럼 의미 있는 수업은 없다.
2. 낯선 사람에게 무관심하라.
어린아이들은 강요에 의해 행동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낯선 사람에게 인사해야 하는 경우도 부모는
이미 아는 어른이므로 아이에게 인사를 강요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므로
인사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은 이로 여겨질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이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상대방을 배타적이며
공격적으로 대하는 성향이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일단 집 밖의 다른 세계에 나오면 경계심을 가진다.
친절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중요한 인간적 덕목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면 왜 인사를
하지 않는지에 대해 묻고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아이의 기분을 파악해서 그에 대해 함께 나누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작업을 하면서 “네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쳐야 한다.
3. 성차별을 하라.
하나님은 남자는 남성으로 여자는 여성으로 지으셨다. 창조 원리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은 역할 뿐 아니라
개념 면에서도 엄연히 다르다. 성경은 성구별을 위해 의복까지도 엄밀하게 구분했다.(신22:5, 고전11:14)
여성이 여성다움을 잃지 않고도, 남성이 남성다움을 잃지 않고도 사회에서서로 동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감성지수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기독교에서 말하는 감성 능력의 차원은 ‘인격’을 뛰어넘어 ‘신품’의 차원에서 논의 된다. 다시 말해 이큐의 차원을 넘어
에스큐의 차원으로 이행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자기 감정을 인식하고 조절하고 관리하는 훈련의 분명한 목표를 제시해 주는데,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마5:48)
사회적 감성 능력이란 세상을 대처하는 능력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분석적이고 지식적인 능력보다는
직관과 통찰력을 계발할 줄 아는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인격 훈련을 요구한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인간이 지고의 선으로 여기는 인격마저도 뛰어넘으라고
말한다. 나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보이도록 하라는 요구인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절대 가능하지 않으며
위로부터 난 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약3:17) 눈먼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처럼
온전함을 갖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영성‘이라는 놀라운 파워가 필요하며, 끊임없는 성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4부 에스큐, 그것이 알고 싶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초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거나 사탄으로부터 온다. 영성은 하나님의 에너지다.
영성이란 진리의 성령에 의해 성령이 거하시는 영역으로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초자연적 감수성을
계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거절하는 힘이다. ‘NO'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드러내는 힘, 크리스천의 생동적인 삶, 그 자체가 아닐까?
가난에 찌든 생활 가운데서도 나아만의 보화를 거절 할 수 있는 그것은 특별한 능력이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나았을 때 나아만의 눈에는 엘리사만 보였다. 그러나 엘리사가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거절할 때 비로소 나아만은 엘리사의 하나님을 보았다. 그래서 나아만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번제단을 쌓을 흙 두 바리를 싣고 돌아갔다.
영성이란 초인지, 꿰뚫음의 인식능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데 눈을 뜬 사람들의 거룩한 삶,
돈을 다스리는 삶이다. 삶을 다스리는 것은 신령한 능력이다.
감성이 인간의 관계론적인 면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 하는 것이라면 영성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영성이란 갈증이다. 영성이란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다.
부모의 영적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부모들은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도 자녀들은 규범에 순종할 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게 된다.
크리스천 부모들 역시 자기 권리를 다 쓰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의 권리를 순복할 줄 알아야 한다.
순종은 자제심 인내심을 길러줄 뿐 아니라 인지 영역을 발달시켜 준다. 부모와 다른 권위있는 자에게
복종하도록 하는 가르침을 받은 자녀는 더 나아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권위와 순종
인간은 청소년기로 접어드는 12세를 전후해서 가장 왕성한 신체 변화를 겪으며 성장한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신체를 제대로 제어할 힘이 12세 소년에게는 없다. 사랑스런 인간으로 성숙해가기 위해서는
12세 이후에도 부모의 제지와 통제를 통해 더욱 지혜롭게 되는 삶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유태인 자녀들의 성인식은 12세에 거행되고 성인식을 마친 자녀는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게 된다.
그 때부터는 매사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행위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그래서 대개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할 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의 의사에 따라 전공을 선택한다든지, 평생 함께 살아야 할
동반자를 결정하는 데도 무작정 부모가 짝지어주는 대로 따르는 등의 일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다.
5부 믿음의 영웅 키우기
어린시기는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이다. 훌륭한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일과 불신앙인을 만드는 일,
이 모두가 가능한 시기이다. 어릴수록 의존하려는 마음이 깊은데 부모에게 의존하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의존하는 마음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때도 바로 이때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가진 신앙은
앎, 지식에 머무르는 믿음일 때가 많다. 죽은 믿음은 소용이 없다. 그래서 아이가 믿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영적인 자리로 부지런히 이끌어야 한다. 에스큐는 믿음을 자라게 한다.
기독교교육은 가르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성령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이다. 기독교교육에 희망이 있는 것은
이미 굳어져 고치기 매우 힘든 내적인 비틀림까지도 성령에 의해 교정되고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하나님이 팔순 노인을 들어 쓰시기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영적 우선 순위
식구들의 옷을 세탁하거나 교회를 청소하는 일, 열심히 공부하는 일도 주의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라고 할 때 우리는 마땅히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판단해가며 행동해야 한다.
에스큐 자녀를 위해 필요한 지침 일곱 가지
1. 알곡인지 점검하기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거룩한 백성을 아끼셨듯이 기드온의 삼백 명을 강하게 하셨듯이
하나님의 승리는 수의 많음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의 눈은 죄인의 수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의인의 수를
기억하는 데 있다. 세상이 망하고 흥하는 것은 40억 불신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영적인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에 달린 것이다. 세계는 소수에 의해 움직인다. 그래서 알곡 하나가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마13:25~30)
2. 마당발로 키우라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리고 성을 어떻게 함락시켰는가?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너희 지경이 되리라”(수1:3~4)
그들은 정복할 땅을 밟는 일부터 먼저 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정처없이 팔레스타인을 배회하게 하신 것도
실은 그에게 줄 땅을 먼저 밟게 하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곳을 다니고 수시로 변하는
거센 환경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화를 가져다 주는 환경 속으로 나아가게 하라.
3.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체험시키라.
하나님은 이미 세상을 주시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세상을 직접 둘러보는 일에는 뉴스나 신문을 봄으로써 또 독서를 통해
시사에 밝아지는 일이 주효하다. 요즘 학생들의 해외여행이나 조기 해외유학도 많다. 많은 부작용과 폐해를
차치하고라도 다른 나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타문화에 대한 수용 능력이 그 나라 세계화의 척도가 되었고,
세계는 이미 공존체계로 들어가 서로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세계를 알아야 한다.
세계를 돌아볼 때 우리는 세계에 대한 비젼을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신앙의 훈련이 된다는 점에서 여행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4. 국적 있는 교육으로 기르라
세계화의 열풍과 함께 우리말도 못하는 어린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고 다들 야단이다. 어학 교육은
어릴때일수록 효과적인 것이 분명하지만, 영어는 잘 하는데 그것을 우리말로 표현하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아이를 보면 너무나 슬프다. 우리가 남이 갖지 못한 말과 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한글은 독특한 우리만의 고유 문화 자산이며 나아가 우리의 모국이이므로 국어교육을 우선하고 그 다음에
외국어를 가르쳐라.
5.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로 충만케 하라.
가족간의 인간관계에서 크고 작은 부정적 영향 하애 형성된 자아 개념은 사회에서 대인 관계에 문제를 가져오게 된다.
자존감은 태내에서 이미 형성된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실제적으로 전신의학이나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살인범이나 정신병자들의 동기분석이나 발병 원인을 살펴볼 때 태아 시절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토마스 바니 [태아는 알고 있다.] 샘터)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하면서도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닮아간다. 그래서 증오하면서 닮아간다고
하나보다. 우리는 아이들이 매스컴의 영웅 닮아가는 두려워하기보다 나를 닮아간다는데 더 두려움을 느껴야한다.
모델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하라.
모세의 어머니 오게벳은 모세가 애굽의 학술을 배우기 전,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기로 자라도록
모세를 숨겨 기르며 가르쳤다. “석 달을 숨겼더니”(출2:2) 우리도 너무 성급하게 아기를 세상에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그늘 속에 숨겨두는 기간을 적어도 석 달 정도 갖게 하자.
6. 올바른 기도를 하게 하라.
뉴스나 신문을 접하다보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계 구석구석 사소하게만
보이는 시시콜콜한 사건 사고도 그 하나 하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제목 아닌 것이 없다. 우리의 기도는
점점 더 폭이 넓어져야 한다. 이것이 기도로 세계를 정복한다는 말이다. A 드 멜로는 “우리는 세상 끝날에
가서야 비로소,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권력 잇는 사람들의 눈부신 활동이나 어떤 불가피한 사건에 의해
좌우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고요하고 묵묵하고 거절할 수 없는 기도에 의해
좌우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 기도의 응답 체크하기
말씀이 영적무기라고 한다면 기도는 영적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상황 판단을 잘 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지만 성령님은 아무 대책이 없는 연약한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탄식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신다. 조바심을 낸다거나 마음이
혼란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문제를 성령께 맡겨드려야 한다.
- 기도 서클 조직하기
자녀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지금은 부모가 기도해야 할 때이다. 어머니들이 기도학교를 조직해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모여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 모임을 만들자. 또 아이들은 성경말씀 과외 수업을
하게 하라.
하나님과의 은밀하고 깊이 있는 기도, 그런 기도로 들어가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특별한 기도 호흡 훈련이
필요하다.
7. 영적 가르침을 주는 스승을 귀히 여기라
자식 교육에 실패한 예로 사람들은 엘리를 말한다. 그는 말년에까지 자식 걱정하면서 숨을 거두어야 했던
비운의 아버지 였다. 엘리는 다른 사람의 충고를 되새기고 받아들여서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부모로써 자녀교육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인격적인 교사요 스승이었다. 한밤중에 세 차례나
엘리를 찾은 사무엘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고 노여워하지 않고 교훈과 가르침으로 이끌어준 엘리의
온유함이 사무엘이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교사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아버지로서 엘리는 실패했지만, 교사로서의 엘리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위해한 사무엘을 길러낸
사람이 바로 엘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자라도 자기 자식을 바로 잡아 교육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엘리가 참된 부모가
못 되어서 자기 아들들을 그릇 가르쳤다기보다 그 아들에게 참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유니게는 아들의 스승인 바울을 자기 동역자로 삼을 만큼 지혜로웠다. 바울은 디모데를 내 아들 디모데라고
불렀다. 우리도 우리 자식을 제 자식처럼 여기며 가르치는 헌신된 선생님을 만나는 축복을 갖기 바란다.
자녀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만날 수 있는 스무명이 넘는 교사 중에 자녀 양육의 동역자로 삼을
한 사람의 선생님을 붙들라.
영성을 상실하는 두 가지 원인
1. 돈을 사람보다 사랑하면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면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다.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물질로 주를 섬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믿지 않는 자의 부요는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 비웃을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시52:6~7)
부요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부요하게 되어 하나님을 멀리 할 수도 있다. 아굴은 돈이라는 것은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배부름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난 때문에
근심과 염려에 시달리며, 돈 대문에 목숨을 끊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육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쾌락의
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에 그 쾌락이 적을 경우 괴로워하고, 또 지나치면 염증을 느끼고 결국 비참해한다.
가진 게 많으면 남들에게 적잖은 시달림을 받으며 부자도 가난한 사람 못지 않게 피곤하다.
2. 사치가 에스큐를 좀먹는 네 가지 단계
첫째 단계에는 가기 몸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둘째 단계에는 자동차와 건물에 욕심을 낸다.
셋째 단계에는 가구류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넷째 단계에는 식탁에서 기분을 내는 것이다.
탐심이나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심각한 이유는 사치의 세력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사치에 눈독을 들이면 들일 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18:3)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주라’(계18:7)
자녀의 영적 건강을 위하여
-가난한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다.
조지아 주립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스탠리박사는 지난 20년간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연구했는데 미국 부호의
약 80퍼센트가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 받지 못한 중산층이나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노동자층 가정에서
나왔다고 한다. 물질적 유산보다는 자립 정신이나 근면, 정직과 같은 정신적 유산이야말로 자녀의 긴 장래에
훨씬 유익하다는 말이다.
- 주입식 교육
사탄은 주입식 교육의 비교육성을 들어서 주입식 교육을 버리라고 속삭이며 자유롭게 방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속삭임은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수놓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타의 음모이기도 하다.
주입식 교육은 창의력과 감성능력에 적이 되는 교육이기도 한 반면, 그 교육 나름의 장점이 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여 반복해서 들을 경우 그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마침내는 세퇴되어 믿게 되고
자기 암시에 걸려들어 그것에 지배받게 된다.”는 말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 찍혀 있어야 한다. 가족이 잘 볼 수 있는 거실이나 또는 화장실에라도
눈만 뜨면 하나님 말씀을 보게 해 주라. 집안에 성경읽기 진도표를 붙여놓고 가족의 이름을 적어놓아
각자 자지가 읽는 부분을 기록하게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아무리 성경공부 많이 하고 요절을 달달 외우고
100독을 해도 은혜받지 않으면 지식주의자가 되어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주는 신앙인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성경을 읽지만 말고 성경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하라.
성경을 읽지만 말고 묵상하게 하라.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하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는 통찰력과 분별의 영을 말씀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를 몇 차례나 만들어 주셨지만 다윗은 그에게 허락하신 모든 기회를 다 붙잡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기회를 붙잡느냐 버리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영적인 분별력이다.
- 하나님의 애프터 서비스를 받으라.
전기 제품을 다룰 때 우리는 여러 회사의 제품들을 접하게 된다. 냉장고만 해도 각 회사의 제품마다
그 기능이 조금씩 다 다르고 사용법에도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광범위하고
저마다 독특하고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래서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 자매간에도 전혀 다른
양육 방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름이면 온 교회들이 수련회와 각종 성경학교 현수막을 걸어놓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하절기 무료 점검 서비스’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우리 아이들을 가능한 자주 하나님 앞에 데리고 나와서 정기 점검을 받게 하자.
- 메타노이아의 위력
메타노이아란 마음을 돌이키는 것으로 생각 뿐 아니라 행동까지 바꾸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자격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회개의 마음은 제 힘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은혜의 자리 성령의 집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붙들어야 한다.
회개란 엄청난 생명력이 있다. 회개하면 다른 사람도 마음을 돌이키고 자연까지도 순해지고
급기야 하나님도 마음을 돌이키신다고 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양보하시는 유일한 사건은 인간이 돌이킬 때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스큐의 영웅들
1. 이큐가 탁월한 이삭
- 과학적인 영농 방법을 알았던 사람
농업과 목축을 생업으로 하던 고대는 전적으로 자연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자연을 소재로 비신, 해신, 소신 등
하늘과 땅의 갖가지 신들을 섬겼다. 이러한데 이삭은 씨를 뿌릴 때, 거둘 때, 물댈 때 등 때마다 신당으로 가는
참배행렬에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삭은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고독한 농부였는데,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100배난 수확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뭄을 극복하는 지혜를 터득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농사가 서툴렀을 때는
이삭도 가뭄이 오면 이리저리 물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은 가뭄을 피해다니지 말고 가뭄과 부딪혀서 해결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이삭이 관개농법을 개발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고, 자연을 극복한 훌륭한 농사꾼으로 가나안의
거부가 되었다.
-차선의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
이삭은 불레셋 사람들에게 세 차례나 물을 뺏기고 쫓겨 다녀야 했다. 이 상황에서 이삭이 보여준 방식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양보는 패배가 아니라 차선책이라는 것이다. 이삭은 그랄에 또 다른 수원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여유로웠고 땅 속 물길을 알고 있는 그는 한 개의 우물에 매달리지 않았다.
이삭에게는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는 융통성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할 때나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 완벽하고 치밀하게 세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이 때 어떤 일에든지 차선의 방법을 가지고 대비하는 자세가 이큐의 자질이다. 그런 사람에 의해 상황은 역전된다.
-조절 능력과 형평의 원칙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형 에서는 번번이
약삭빠른 동생에게 당하고 산다. 더구나 장차 형이 동생 노릇을 하게 되고 동생이 형의 권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생각하면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보는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는 아들 에서에게
아픈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고 이삭은 큰 질서 안엣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이 사건을 모두 맡겼다.
두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던 그는 큰 아들 에서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려 깊은 아버지였다.
이삭의 공정한 배려에 대해 성경은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히11:20)라고 말씀한다.
-부모의 따뜻한 품에서 키워진 이삭의 이큐
이삭은 오해를 받을 만큼 과묵했다. 아버지가 제물로 바친다며 칼을 들이댈때도 가만히 순종할 만큼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순종하며 산 것이 이삭의 삶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신회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을 믿은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했다. 따뜻한 부모의 품에서 자란 사람은 훨씬 더 안정적이고
감성지수가 탁월하다. 이삭의 영적으로 풍부한 삶은 참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이
야곱을 택정하셨다는 불가항력적이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예정론자가 아니었을까?
2. 이큐 아버지, 에스큐 어머니, 에스큐 사무엘
성경은 당시 사무엘의 나이에 대해서 “젖뗀 후”(삼상1:24)였다고 기록한다. 고대 이유기 연령에 따르면
4~5세까지 젖을 먹였던 것으로 볼때 아마 그 때 사무엘의 나이는 대략 6~7세쯤 되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보통 부모에게 의지하는 의존심이 본능처럼 강한데 이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지낸
사무엘은 보기 드문 아이임에 틀림없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에 소홀하지 않으려고 매일 성소에서 잠을 자고 성막을 청소했다.
-사무엘 아버지의 이큐
고라가 반란을 주도했다가 실패했던 경력 때문에 그 집안은 반역자의 가문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고라 자손 엘가나는 좋지 않은 소문에 휩쓸리거나 기분 내키는 대로 처신하지 않았다.
여전히 성전에 나갔고 아이가 없어 슬퍼하는 아내를 조용히 위로해주는 따뜻한 성물의 소유자였고
(삼상1:8),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성실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삼상 1:23) 그런데 엘리의 가족에세서는 사무엘이 배울 게 하나도 없었다.
엘리의 아들을을 보면 차라리 그 엄마 한나가 데려다 키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걱정스럽다. 사무엘의 부모 또한 사람들이 엘리 집안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지만
그는 온 식구 모두, 매년 동일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 성전에 나가 여호와께 경배했다. 사람들은 이 가난한
농사꾼 엘가나의 아들 사무엘이 이스라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 인물이 될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성막에 불을 밝히던 그 아이가 바로 엘가나의 아들이었다.
-사무엘 어머니의 영성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답답한 일이 생기면 늘 하나님을 찾아갔다. 한나는 하나님께 자식 주시기를 울며
간구했고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아이를 갖게 되었다. 너무나 기뻐서 뱃곡의 아기에게 늘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드린 나실인이다.” “내가 하나님께 서원했단다.” 한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되풀이 했는지도 모른다.
또 태아는 어머니의 말을 정보로 받아들여 “나는 나실인이다.” “난 하나님께 드려질 아기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라고
새겼을지 모르겠다.
그가 태어나자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사무엘’이라고 불렸다. 사무엘이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라는
뜻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감정이나 생각은 아기 뇌에 프로그램화된다. 한나가 태아때부터 입력시켜온 메시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젖을 먹이면서도 계속되었고 한나는 아기가 하나님을 바라며 자라도록 했다. 인간이 완전하려면
태아에서부터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야 한다.
홉니와 비느하스와 사무엘은 함께 엘리 밑에서 구약의 제사형식과 제도들을 배우고 있었는데, 서로 다른 점은
출생전, 빚어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의 어머니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삼상1:26)
3. 에스큐가 탁월한 요셉
요셉은 속 깊은 유대주의자이며 갈릴리 나사렛의 드러나지 않는 박애주의자였다. 임신해서 배가 부른
아내를 데리고 여행을 떠날 때부터 요셉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인수에도 들지 않는
여자가 호적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배가 잔뜩 불러서 남편을 따라 나섰느냐고 말이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기여한다.
4. 아이큐가 뛰어난 사람 야곱
태어날 때부터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그 손, 얍복 나루에서 천사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매달리던 그 손,
대단한 야심이 그에게 있었지만 야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근면,
성실성, 책임감, 부지런함, 자제력이 강하고 인내심까지 있었다. 곧잘 나쁜 쪽으로 머리를 쓰기도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양을 번식시키기도 했다. 야곱은 어떤 법칙을 알아내고 그것을 자기의 생업에 활용할 줄 아는
과학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하나님과 협상을 할 만큼 계산적이며
결코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불리한 조건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이 야곱이었다.
또 야곱은 완벽주의자 엿다. 그의 냉철한 이성과 감수성은 단단히 포장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춰내고 고운 가루를 내기 위해 빻듯이 부수어야 했다. 다행히도 그에겐 하나님을 향한 세찬 갈급함과
열망이 있었다. 두뇌가 명민하고 감성지수가 뛰어나 사람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게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모른다. 야곱처럼 예리한 지성과 탁월한 감성, 거기에 영성까지 갖추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면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5. 아이큐, 이큐, 에스큐를 겸비한 요게벳
요게벳이 처음 아들을 보았을 때 ‘그 준수함을 보고’ 이 아이를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요게벳의 영적 통찰력이었다.
또한 요게벳은 평범한 일상에서 얻은 발명품 갈 상자를 통해 모세를 구하게 된다. 그 당시 갈대로 엮은 바구니는
아낙네들이 흔히 사용하는 것이었고 자칫하면 아들을 잃을지도 모르는 극한적인 절망 속에서도 요세벳은
창의성을 잃지 않고 갈 상자에 역청과 나무진을 칠해 모세를 안에 담고 강가로 나갔던 것이다. 요게벳의
아이큐가 상당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요게벳은 노예생활을 하며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 농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세 아이까지
돌보면서 갈상자에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는 일에 여러 날을 수고 했을 것이다. 절망 앞에서도 희망을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은 그녀에게서 이큐의 능력을 본다.
결국 요게벳은 삯을 받아가며 자기 자식을 양육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이는
원수로부터도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이렇게 하여 자식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한 어머니의 뜨거운 열정이
한 민족의 시련과 운명을 결정하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 한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질그릇이 정성과 땀으로 덧입혀지기를 원하신다. 자녀를 신앙이라는
요람에 담아 21세기의 나일에 띄워 보내는 일, 그것이 믿음이다.
6. 에스큐를 상실했던 삼손
삼손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암시해 주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가 삼손이 태어날 것을 알려주고 떠나자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었을 것이라”며 비탄에 빠진다.
(삿13:22)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게 된다는 전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비관주의자는
자기 예언에 이끌려 그 예언이 적중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마노아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노아의 아내는 남편과 달랐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오셨다면 왜 우리 예배를 받으셨겠냐며,
더구나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냐”고 대답했다.(삿13:23)
마노아의 아들 삼손은 마치 ‘세상에 불을 던지는 아이’처럼 뜨겁고 강했지만 강한 선입견에 사로잡힌다거나
비관에 집착하는 기질은 아마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삼손은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자기의 머리카락을 믿었던 사람이다. 자기 머리카락을 밀렸을 때조차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신을 떠나셨음을 깨닫지 못했다.(삿16:20) 힘을 잃자 그것이 사실은 머리카락이
밀렸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머리카락은 서원의 표징이었지 힘의 원천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저버릴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떠나신다.
상실한 믿음 시들해진 영성이라도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삼손에게서 보게 된다. 영성이란 언제라도
재충전의 기회가 있는 능력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쓰는 사람들이며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Ⅱ. 책을 읽고 나서
-엘빈 토플러 한국 교육을 진단하다.
중앙일보 2007년 9월 20일(목)자 신문에 세계적인 미래 학자 앨빈 토플러가 한국을 진단한 기사가 실렸다.
“평등화,획일화 ... 한국교육, 미래와 정반대로 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지만
미래에 대한 준비가 소홀하다.”라고 꼬집었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사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점으로 교육을 중점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학생들은 하루 10시간 이상을
학교와 학원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에 필요하지 않을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더 나쁜 것은 국가 발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인 평등화,획일화 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기 한국의 대통령은 경제나 국가안보보다 오히려 교육개혁에 힘써야 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엘빈 토플러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 교육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전 국민이 아는 사실이다.
해마다 달라지는 입시제도와 교육부장관이 달라질 때마다 일관성 없이 이루어지는 교육방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입시위주, 학벌위주의 교육환경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독창성과 적성마저 무시한 채, 점수를 더 따기 위한
주입식 교육과 사교육의 부담을 더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나라의 교육도 미국의 교육정책을 따라 점차 개인별 학습능력 차이를 고려한 수준별
능력별 학습지도, 적성에 따른 학습방법, 자유수업, 주간교육, 교실 밖의 학습 등 지식의 전달 외에 감성적,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입시위주의 풍토가 만연한 분위기에서는
백약이 무효한 처방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저자 이영희가 말하는 아이큐와 이큐, 그리고 나의 견해
저자는 생산 사회를 주도해 온 아이큐가 자유경쟁이라는 자본주의 가치관을 여는 데 포문역할을 했고,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는 이면에 인지발달을 다루는 아이큐의 공헌이 상당했지만, 그 업적 이면에
그에 따른 인간의 정서나 영성에 미친 영향과 희생이 가져온 심각한 부작용으로 인해 갓길이라도 하나
만들어놓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이큐(EQ)의 등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큐란 인생의 최선책만 고집하다가
잘못된 길로 가지 말고 차선책으로 돌리라는 정신적 여유를 말하며, 결국 아이큐와 이큐 이 둘을 인정하고
대등하게 공존하는 사회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말하는데 동의한다.
그래서 저자는 아이큐와 이큐를 신장시키기 위한 쉽고도 좋은 방법으로 독서지도를 예로 들고 있다.
특별히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 주었던 어린이 집단의 평균 지능지수가 115인데 비해 그렇지 못한 집단의
지능지수가 85가 나와 차이를 보였다는 어느 보고([자녀교육 365일], 새터, 1993)는 어릴 때 형성된 독서 습관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이다.
나 또한 책읽는 습관을 통해 지적 지능을 높이며 이큐지수도 높이는 좋은 방법으로 아이들을 양육할 때
함께 서점을 방문하여 책을 구입하고, 책 읽는 것을 즐겨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꿈꾸는 요셉초등학교에서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독서이력철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도와
독서를 통한 다양한 활동등을 연구하고, 각 학년별 단계에 맞는 필독서를 정하고 다양한 책들을 접하게 함으로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켜갈 필요를 느낀다. 한 예로, 고학년을 중심으로 독서를 통한 토론과 필독서 내용 평가 등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 생각된다.
세계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만큼 병아리 감별 능력이 뛰어난 나라도 없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감각이
예민하고 뛰어남으로 섬유산업이 일찍이 발달했었고 집중력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양궁 스포츠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우리의 언어와 예술을 보더라도 우리민족이 본래 이큐가 높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소개하면서, 저자는 애초에 이큐는 얼음장같이 차갑고 비정한 미국 사회에서나 심각하게
고민 할 문제이지 본래부터 정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는 미국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일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굳이 이큐의 결핍 증세가 보인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라기보다
특수한 몇몇에 해당되는 증세라고 본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서 결핍의 문제라기 보다 정서 장애의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면서
냉정한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건전한 비판능력을 키워서 인정이나 의리, 명분에 끌려다니는
한국적인 가치 속에서는 오히려 이성적인 사고가 더 긴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미래사회에 필요한 이큐는 자기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는 능력, 자기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능력,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잘 대처할 수 있는 낙관적인 동기부여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관리하는 능력을 수치로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감성의 영역을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 스킨쉽과 대화의 중요성이 대두되는데, 스킨쉽은 성장호르몬을
촉진시켜 몸을 자라게 하고 대화는 인간의 정신 능력을 키워주고 정서에 놀라운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고
이야기 한다.
나 또한 스킨쉽과 대화가 아이의 신체적 정서적 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지 몸소 체험한 바 있다.
큰 아이를 기르면서 모유 수유를 하고, 수다스러운 엄마가 되어 아이가 알아 듣든지 못 알아 듣든지
이야기 해주고, 찬양해 주고, 기도해 주었던 시간들을 통해 아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신체적으로도 강건하고
발육이 빠를 뿐만 아니라, 언어 인지 면에서도 탁월하게 발달하여 감정표현을 놀랍게 하는 것을 경험한 바 있으며,
영성 또한 성령에 민감한 아이로 자라 젖병을 채 떼기도 전에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한 바 있다.
- 성경적 이큐를 찾아서 그리고 메타노이아를 통한 치유의 예
크리스천들이 알아야 할 이큐의 영역을 감성학자들의 분류에 근거해 감성지수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자기 감정을 조절하고, 감정이입의 능력을 키우며, 긍정적인 동기부여자가 되어
타인의 감정을 잘 관리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자신의 감정인식을 위한 내면인식 방법 중 기독교인의 메타노이아에 의한 방법은 일반 감성 심리학이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감정이 신체를 어떻게 다스리는가 하고 감정의 흐름을 주시하는 데 반해,
기독교는 감정의 흐름을 주시하기보다 감정 자체를 정화시키려는데 주의를 집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고백’, ‘회심’의 의미에는 이미 치유의 속성이 들어있는데, 메타노이아도 회심을 뜻하며
이것은 마음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섬을 의미하며,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심령 깊은 곳에 숨겨진 자신의 죄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진정한 치료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최근에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려워하고 있는 한 자매가 내가 선물한 ‘하늘의 언어’란 책을 읽으며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하게 되고,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주님 앞에 정기적으로 나아가 기도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의 치유와 관절염까지 치유되었고, 가치관과 생활습관까지도 바뀐 자신의 모습에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는 것을
보았다. 주의 영으로 충만케 되어 진 자매는, 그동안 자신이 남편과 잘 지내 보려고 마음을 먹어 보아도
하루에 한 두 번 이상 부딪치게 되고 미워하고 또 그로 인해 힘들어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너무나 쉽게 벗어져
남편이 더없이 귀하게 느껴지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다가온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에 충만함을 입는 것만이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의 감정과 동질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의 내면적인 감성 세계와 경험 세계를 헤아리는 영적 통찰력을 갖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청취하고 이해하려는 올바른 자세가 필요한데, 그래서 주께서 날마다 내 마음의
지경을 넓혀주시길 간구하는(시119:32) 시편기자의 기도가 곧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감성지수(SQ)와 영성 그리고 나의 삶
사회에서 말하는 감성능력은 인격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감성 능력의 차원은 ‘인격’을
뛰어넘어 ‘신품’의 차원에서 논의된다. 다시 말해 EQ의 차원을 넘어 SQ의 차원으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인간이 지고의 선으로 여기는 인격마저도 뛰어넘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나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보이도록 하라는 요구이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절대 가능하지 않지만
우리로부터 난 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약3:17)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온전함’,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는 ‘영성’이라는 놀라운 파워가 필요하다는 데 제기할 이의가 없다.
이큐가 자기 힘을 극대화시키는데 목적을 둔다면 에스큐는 자기 힘을 최소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영성은 무엇인가? 진리의 성령에 의해 성령이 거하시는 영역으로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초자연적 감수성을 계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힘,
크리스천의 생동적인 삶 그 자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데 눈을 뜬 사람들의 거룩한 삶,
돈을 다스리는 삶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주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영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본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는 말씀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여호수아가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처럼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만이 영성을 기르는 지름길이라 믿기 때문에 나 또한 날마다 시간마다 주님 앞에
나가기를 즐거워한다.
혼자 운동을 하며 사탄은 결코 알아 들을 수 없는 주님이 주신 하늘의 언어로 주님과 전략회의를 하고,
교회에서 혹은 집에서 조용히 무릎 꿇어 주님 앞에 나아간다.
- 에스큐 자녀를 위해 필요한 지침들과 적용
1.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방법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창1:28)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방법이다.
세상을 가득 채우려면 기독교인들의 출산을 장려해야 하는 것이 첫째인데 이미 기독교인은 이일에 실패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힘은 들었지만, 아이가 너무 많다라는 생각은 결코 해 본적이 없다. 다시금 임신과 출산의 수고와
육아를 감당할 용기와 믿음이 내게 없음을 본다....죄송!!!
2.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리고 성을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취하였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내가, 온 열방을 밟으며 밟는 곳마다 하나님의 유업으로 취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매년 해외 문화 탐방과
선교 여행을 통해 그 일들을 이루어갈 것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다.
3. 뉴스와 신문을 통해 세상을 주시하게 하고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여 세상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아이들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가야겠다.
매일 말씀묵상 시간을 통해 말씀을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 적용할 수 있는 기름부으심이 나와 아이들에게
넘치기를 기도한다. 또한 뉴스와 신문을 통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영적으로 통찰력있게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4. “부모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녀들은 자기 부모를 닮아간다.” 모델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무서운 말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듣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도 있다.
부모와 교사된 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좋은 모델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 절실히 필요하다.
5. 자녀의 믿음과 영성을 위해 지금은 부모가 기도해야 할 때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문제를 성령께 맡겨드리며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일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 무릎꿇어 기도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일하는 사람이기 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는 사람의 편에
서기 원한다.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자라리라 믿기에...
그런 의미에서 매주 목요일 몇몇의 지체들과 함께 하는 꿈요초 중보기도 모임의 리더로서의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6. 한 밤중에 세차례나 찾아온 사무엘을 노여워 하지 않고 교훈과 가르침으로 이끌어 준 엘리의 온유함이
사무엘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했다. 아버지로서 엘리는 실패했을찌라도 스승으로써 교사로서의
엘리는 위대한 사무엘을 길러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자라도 자기 자식을 제대로 교육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아이들의 교사를 동역자로 삼고 중보하며 돕는 자로 서야겠다.
- 세상을 변화시킨 에스큐의 영웅들과 새로운 주역 꿈요초의 꿈쟁이들
미래를 책임 질 우리 자녀들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부르련다.
이큐가 탁월했던 이삭의 삶을 보면 과학적인 영농방법으로 가나안의 거부가 되었고, 양보라는 차선책을
선택할 줄 아는 융통성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도 큰 아들 에서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조절능력과 형평의 원칙을 잘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이큐와 어머니의 에스큐, 영성으로 길러진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 인물이 되었다.
아이큐가 뛰어난 야곱은 어떠한 법칙을 알아내고 그것을 자기의 생업에 활용 할 줄 아는 과학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고 아이큐 이큐 에스큐를 겸비한 요게벳을 통해 한 민족의 시련과 운명을 구원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글을 마무리하며 헌신된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며 우리 꿈꾸는 요셉초등학교를 생각해본다.
첫째,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이다.
둘째, 그들은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일에 자기의 시간과 열정을 모두 쏟아 붓는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들(교사, 학생, 학부모)이지만, 주님이 붙드시고 함께 하실 때
망망한 대해를 다닐지라도 소원의 항구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자 이제, 함께 ‘꿈꾸는 요셉’이라는 갈 상자에 우리의 꿈쟁이들을 실어 21세기의 나일에 띄워 보내자.
그것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http://blog.naver.com/ahkim728/80044695515
첫댓글 흠.. 책을 사서 읽어 봐야 겠어요.. 귀한 내용이라서 .. 자세히 봐야될것같아요.. 귀한 자료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