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천명관/문학동네
촘촘하게 짜 놓은 스웨터 한 벌을 입은 느낌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추위를 막아주는 따뜻한 옷처럼,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무언가 내 삶의 결에 한 겹이 덧씌워지는 느낌이다.
얼기설기 살아가는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촘촘하게 짜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천명관의 소설 <고래>가 그렇다.
전체적으로 특이하다.
누구하나 특이하지 않는 인물이 없고, 어떤 상황도 특이하지 않는 상황이 없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사연을 가지고 있고, 모두 삶을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고래는, 일부러 찾아 봐야 하는 동물 중에 하나다.
어쩌면 선택받은 사람만이, 고래를 꿈꾸는 사람만이, 고래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래를 꿈꾸는 금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지만, 반대로 그 꿈이 점차 금복을 무너뜨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노파의 돈에 대한 집착, 금복의 매력과 정체성과 끝없는 욕망, 춘희의 고요함과 섬세함은 이 소설의 큰 축이다.
크고 거대한 것에 대한 동경, 크고 거대한 것들의 비극, 크고 많은 돈에 대한 욕심.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있다.
노파의 몰인정하리만큼 돈에 대한 집착은, 그 재물로 인해서 결국은 패망하게 되고, 금복이 이루고 또한 이루려고 한 모든 것들은 자신의 욕심으로 채워져 있어서 결국은 망하게 된다.
춘희의 세상과 담쌓은 듯한 무심함과 무반응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다. 덩치가 크지만,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않고 그저 당하고 있는 춘희의 모습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일들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文의 벽돌을 향한 완성도 높은 고집과 신념은, 결국 최상의 상품을 생산해 내고, 그 상품이 대극장의 초석이 되는 재료로 쓰이게 되는 것은, 文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오래도록 남을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의 산물이지 않을까.
춘희의 섬세함, 그리고 모든 것들과 감각으로 소통하는 능력은, 코끼리와의 교감을 통해서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게 해 주고, 세상과 소통하게 해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본문 188쪽
나의 행동으로 인해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타인의 행동을 보고 그를 판단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금복이 하는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금복이를 판단하는 것처럼, 노파의 행동도, 춘희의 행동도, 여타 다른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모두 그들 스스로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모든 등장인물들은 인과응보처럼, 자신들이 하는 행동으로 인해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누구하나 해피앤딩으로 끝나지 않고, 제대로 보상받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인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오로지 붉은 벽돌만이 끝까지 남아, 대극장의 탄탄한 기초로 쓰일 뿐이다.
물질의 욕망만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모두 다 사라지고, 그 물질만이 남아 있어 그들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본문 421쪽
고래극장도, 벽돌공장도, 심지어 그 평대마을 마저도 사라지고, 잊혀지고, 폐허로 존재하게 된다.
코끼리의 말처럼, 기억이 사라지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반대로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은 오로지 벽돌, 물질 뿐인 것인가?
비록 다양한 기법을 총동원해서 장르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적 불명의 제품처럼, 자유롭게 쓰여 진 소설이지만, 인간 삶의 허무함, 인간 삶의 쓸쓸함, 인간 삶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 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