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간의 공백
얼마를 잤을까. 잠 속에서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깬 문호는 칼싸움하는 소리와 중국인이
뭐라고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미처 뜨지 못하고 어렴풋한 잠결에 들은 소리와 그 소리의 소재가 일찍 파악되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민형규는 아직도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젖히고 코까지
골고 있었고, 칼소리나 중국인 떠드는 소리는 고속버스 운전 기사 위에 설치된 비디오
TV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문호는 안내양을 불러 물을 한컵 얻어마시고는 의자 등받이를 45도 젖히고 시선을
비디오로 주었다.
영화는 중국 무술 영화였다. 화면에는 낯익은 중국 배우들이 칼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진성'이라는 악한과 '성걸'이라는 의협의 대결 장면이 나타났다.
소림사의 전통 무예를 기록해 놓은 책을 빼돌리려는 악한과 이를 지키려는 의협이 벌이는
대결이었다. 영화는 일급 배우들 출연의 영화답게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정신 없이 화면을 보고 있던 문호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영화가 끝나자마자 안내양을 불렀다.
"안내양 이거 미안하지만 무슨 영화였죠?"
"소림사 결투라는 영화였어요. 재미있죠?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거예요."
"이 영화 내가 중간부터 보았는데 다시 한번 볼수 없을까요?"
"글쎄요. 다른 필름도 있는데..."
"내가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영화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뭔가 꼭 보고 싶은 장면이 있어서 그러거든요.
꼭 좀 부탁하고 싶은데..."
"그래요?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필름을 되감아야 하니깐요."
필름을 되감는 동안 차내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창 밖은 완전히 어둠에 깔려 있었다.
문호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벌써 19시 20분이 되었다.
한 시간이 넘게 깜박 잠에 취해 있었다.
형규는 무척이나 피곤해 있었는지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문호는 조금 전에 보던 필름의 결투 장면에서 아주 미묘한 것을 포착했다.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은 영화 자체를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아까 문득 무슨
생각을 떠올리게 한 그 장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필름이 되감기는 시간은 의외로 길었다.
문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워물고 필름이 끝까지 되감기는 시간을 기다리며 어떤 상황에
집착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두 사람의 결투에서 문호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잠시 후 화면에서 지직지직 하는 잡음이 나오고 이어서 XX회사의 상품광고와 고속버스
자사 선전이 나온 뒤 본영화 '소림사 결투'가 나오기 시작했다.
뒤로 젖혔던 의자를 곧게 펴고 두 손으로 턱을 괴어 받친 채 계속 되는 쿵후와 칼싸움에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시선의 힘으로 TV의 부속이라는 꿰뚫어보려는 듯 힘을 집중시키고있던 문호는 형규를
깨워 일으켰다.
부석부석한 눈을 뜨고 짜증스러운 듯 문호를 바라보는 형규에게 손가락으로 TV를 가리켰다.
TV를 잠시 보던 형규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머리를 의자에 떨구자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 형규, 이 영화에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장면이 나와."
이 소리에 '엉'? 하며 놀란 형규가 벌떡 일어났다.
"사건이라니, 이 영화가?"
"가만 있어. 내가 설명해 줄께. 영화를 자세히 봐. 조금 있으면 주인공 둘이 칼로 결투를
벌이는데 이 장면을 자세히 봐두라고. 영화 끝나면 내가 다시 설명해 줄게."
그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형규가 TV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별로 영화에 관심이 없는 형규는 그저 문호가 시키는 대로 멀뚱멀뚱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필름이 약 40분 정도 돌자 조금 전에 보던 장면이 다시 나타났다.
문호는 형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잘 보아 두라는 신호였다.
한 검객이 다른 검객을 칼로 쳐서 죽이는 장면인데 칼을 번쩍 들어, 좌측에서 우측으로
내려갈기더니 이번에는 그대로 칼을 들어 우측에서 칼을 내리치자 적의 가슴에서는 X자
상처가 나고 상처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나오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뒤이어 나온 다른 장면에서는 둘이 칼싸움을 하는데 하나가 좌측으로 칼을 치면 하나는
칼을 우측으로 비껴 막고 있었다, 칼은 언제나 X로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너무나 흔한 칼싸움 장면이었다.
형규는 잠시 어리벙벙해 있었다.
무엇을 보아 두라는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잠시후 영화는 끝이 났다.
영화가 끝나자 안내양의 방송이 들려 왔다.
"잠시 후 추풍령 휴게소에서 10분간 휴식이 있겠습니다.
이 차는 H고속 9744호이오니 승차하실 때 착오 없도록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양의 방송이 끝나자 차는 휴게소 광장으로 빨려들어가더니스르륵 하고 멈춰섰다.
둘은 차에서 내려 용변을 본후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다시 승차했다.
다른 승객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무슨 얘기야? 아까 그 중국 영화."
"음. 아까 그 칼싸움하던 장면 생각나? 둘이 싸우던 것 말야."
"기억나지 둘이 싸우다 하나 죽은 거 말야."
"봤지, 가슴에 상처입고 쓰러진 거."
"봤어,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 상처 모양이 어땠어?"
"상처? 응, 글세 모양이? 기억이 잘 안나는데. 야 누가 그런 것까지 보냐. 하나가 죽으면 됐지."
"그러니까 잘 보라고 했잖아.
에이 참. 그래 그건 그렇고 둘이 칼싸움할 때 칼이 어떻게 부딪쳐? 그건 생각나겠지."
"이거 장난하는 거야 뭐야. 야 칼싸움 할 때야 칼이 서로 엇갈려 싸우지 어떻게 싸워.
둘이 같은 방향으로 칼싸움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확실하지."
"허 참. 남 자는데 깨워놓고 농담 따먹기 할 거야."
"이봐. 농담이 아냐. 두 사람이 마주서서 칼싸움할 때는 언제나 칼은 X자를 이루지.
이건 신체 구조와 관계가 없이 편리에 따른 관습이거든.
또 사람이 칼로 상대를 칠 때는 칼이 아래로 내려간 위치에서 다시 올려 반대편으로
내려치거든. 즉 엑스자(X) 이렇게 말야."
"그래서?"
"이봐, 기자라는 게 아직도 모르겠어? 이렇게 센스가 둔해서야. 원 참, 진남..."
"아, 알았다, 그래 맞아."
깜짝 놀란 형규가 벌떡 일어나려다 도로 주저 물러앉았다.
의자의 안전 벨트로 몸을 묶고 있던 것을 그만 깜박 잊었던 것이다.
형규가 턱을 괴고 앉아 무엇인가 골똘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호가 병원에서 꼼꼼이
그려온 진남포의 상처 그림을 펴보았다,
그 그림은 문호가 형규에게도 두어 번 보여 준 그림이었다.
"음, 맞아. 진남포는 칼로 여러 번 상처를 입었는데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간
상처만 있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간 상처는 없단말야. 이건 확실히 이상해,
이런 상처가 나려면 뒤에서 껴안고 한손으로만 내려긋는 방법밖에 없는데 진남포쯤의
노련한 싸움꾼이 네 개의 상처를 입도록 그대로 있을 리도 없고 또 옆구리 상처도 방향이
이해가 안 가는데. 그렇다면... 아, 혹시."
"혹시가 아닐 거야. 난 아까 영화 보면서 모든 수수께끼가 한 번에 풀리는 것 같았어.
진남포 피습 현장 말야.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거 참 이상한데... 이해가 안 가지?"
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 것은 진남포의 행위 자체였다.
그들 둘이 중국 무술 영화를 보고 판단한 것은 진남포가 자해 행위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순 빛을 보듯 두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진남포 피습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첫째, 가장 이상했던 점이 그 힘좋은 진남포가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자기 몸을 찌른 것으로 해명이 되었고 다음이 어떤 가정의 범인이 진남포가
바람을 쏘이러 나올 시간을 어떻게 알고 대기하고 있다가 습격했을까 하는 점이었는데
이것 역시 해결이 난 셈이었다. 또 싸움하는 소리도 못 들었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던
그 시간에 어떤 사람들에게 당했을까 의아해 했었는데 이것도 풀어진 셈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자해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최찬일 형사가 조사한 피흘린 자국이었다.
주변 어디에도 피흘린 자국은 없었다, 만일 결투를 해서 흘린 피라면 아무리 갑자기 습격을
당했다 하더라도 최초의 상처를 받으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서 피흘린 자리가 여러
곳에 있어야 하는데 피는 오직 한 군데만 떨어져 있고 아파트로 돌아오며 흘린 자국밖에는
없었다.
또 가슴을 먼저 당하고 옆구리를 찍혔다면 옆구리 상처는 스치는 정도밖에 나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옆구리 상처가 깊었다. 반대로 옆구리부터 당하고 가슴을 당했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옆구리를 찍히면 일단 앞으로 주저 물러앉게 되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가슴이 노출되지 않고 무릎이 보호하는 형태가 된다. 어떻게 칼로 가슴을 그을 수 있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상황이 자해라는 결론으로 풀리자 일순간에 다 해결되었다.
너무나 상식적인 상황을 두고 고민한 문호는 자기나 최찬일이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니
피식 하고 자조의 웃음까지 터져나왔다.
쪼그리고 앉아서 자기 가슴을 먼저 칼로 긋고 다음 옆구리를 찌르고 칼을 어딘가에
감추고 아파트로 돌아온다. 이것은 최찬일이 조사한 혈흔의 흔적에서 #1번과 #4번밖에
발견되지 않은 이유로 풀이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칼로 자기 몸을 찌른다는 상황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의 함정에 빠져 사흘이나 넘긴 셈이 되었다.
만일 문호와 형규가 추리한 대로 진남포가 자해를 했다면 피습 장소의 미스터리는 풀린다.
그러나 진남포가 자해를 했다는게 밝혀져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또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갈매기 주점'의 주모가 발견한 별 모양의 상호를 달고 왔던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의문이었다. 아파트에도 들어온 사람이 없고 방향은 아파트로 향했던 그 뚱뚱해 보인다는
사람의 정체와 행선지는...
이 때 타고 있던 고속버스가 몸체를 돌려 고속도로 위로 올라와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한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 속은 사건 현장 여기저기를 정신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윽고 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형규'하며 어깨를 툭 쳤다.
"응? 어, 왜."
생각에 잠겨 있던 형규는 문호가 갑자기 치는 통에 그만 깜짝 놀랐다.
"말이지, 만일 진남포가 자해한 것이 밝혀지면 말야. 지금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렇다면 안개가 끼던 날 밤 갈매기 주점 앞에서 내렸다는 그 뚱뚱한 사람 말야.
그 자는 누구이며 어디로 간 것일까. 또 진남포는 왜 자해를 했을까. 그게 궁금하단 말이 야."
"..."
"그 택시에서 내렸다는 사람 말이야. 이번 사건하고 관계 없는거 아닐까?"
"..."
"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사람 속 답답하게 벙어리처럼 앉아 있지만 말고."
"가만히 좀 있어. 지금 뭣 좀 생각중이야." 형규가 짜증을 냈다.
"..."
이번에는 문호가 입을 다물었다.
자꾸 떠들고만 있을 게 아니라 자기도 무엇인가를 생각해야겠다고 느낀 것이다.
고속버스는 두 사람의 어지러운 머리 속과 관계 없이 계속해서 어둠속을 달리고 있었다.
차 안의 TV프로도 꺼지고 음악 소리도 멈추었다. 대부분 어두운 차내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대전 10km' 라는 팻말이 라이트에 스쳐 보였다.
형규가 담배갑을 꺼내 뒤적이다가 그냥 구겨 버렸다. 담배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문호가 이 꼴을 보고 한 개비 꺼내 물려 주고 불을 붙여 주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어두운 차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진남포가 자해를 했을 경우 거기에는 어떤 깊은 사연이 감춰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칼로 자기 몸을 찌른다는 것이 보통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문호나 형규가 판단한 상황으로써는 '자해'라는 결론이 참으로 타당했다.
그렇다면 자해 행위와 또 다른 범죄행위와의 역동적 연관성을 추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확증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가 자해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까지의 스토리는 무엇인가.
그 밀접한 관련성의 발자국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더구나 자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 타인에게 공포를 주어 자신을 지키려는 목적과 스스로의 감정과 흥분을
인내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진남포가 자해를
한것은 계획적인 행위가 틀림없었다.
다시 그 상황으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진남포는 밤 12시 50분쯤 자기 아파트에서 나오며
약간의 과일을 가지고 경비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참을 앉아서 놀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밖으로 나갔다. 짙은 안개 속으로 진남포는
사라진다.
잠시 후 01시 10분경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아파트로 돌아온다' 이것이 그날 밤 진남포
행각의 전부였다.
그렇다면 그 당시 그의 정신 상태는 극히 정상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해'라는 추리로 방향을 틀자 문호는 매우 심한 정신적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해'라는 추리로써 풀어진 의문도 많았지만 그러한 추리 때문에 새로운 벽에 부딪치는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첫째가 조금 전에도 생각하고 있던 별표 택시에서 하차한 사람의 신원과 행선지였고
또 하나는 부산 동백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생의 행위가 이상하게 얽히기 때문이었다.
'자해'와 '자살'의 차이는 목숨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목숨을 포기하느냐의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진남포를 자살 미수로 볼수는 절대 없다.
또 하나 평소 누군가를 해치우겠다던 진남포의 발언이었다. '애송이 같은 놈'을
해치우겠다던 진남포가 왜 '자해'를 했느냐 하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는 의문 때문인지 문호는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진남포가 자해를 했건 자살을 했건 단 한 점의 혈육인 동생 박영숙은 병원에 나타났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병원에 나타나지 않고 외롭고 외로운 겨울 바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것이다.
그렇다면 동생은 오빠의 신변 변화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리고 그 원인이 동생 자신에게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사고 전 날 만난 두 남매의 대화 속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진남포는 무엇인가 커다란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자해 사건과 고강진 피살 사건에 어떤 연결되는 나사는 없을까.
그러나 문호의 머리에는 두 사건의 연결점은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문호가 집요하게 생각을 쫓고 있는 것 만큼 형규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턱을 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형규를 보며 문호가 의견을 제시해 왔다.
"이봐, 형규 이거 말야, 참 묘한데."
"응 묘해. 문호는 어떻게 생각해."
"난 말야, 진남포 자해 추리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해.
칼자국이나 핏자국을 보거나 당일 상황으로 보아 자해는 틀림없는데 몇 가지 의문이 있단 말야."
"..."
문호는 택시에서 내린 사람의 신원 및 행방과 동생의 자살 사건을 간추려 이야기하며
그 함수를 들려 주었다. 그 점은 형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고민은 진남포 고강진 두 사건의 연결점을 못 찾는 데 있었다.
과연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러나 둘은 어떤 보이지 않는 두 사건의 나사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건의 연결점만 찾으면 금년에 특종상 두 개는 얻겠는데."
"이봐, 특종 받을 생각말고 사건 파악이나 잘해 보라고.
이거야 원 어디 따라다니는 게 신통치 않아서, 쯧쯧."
"걱정 마. 그 보담두 형사 나리. 댁께서 한번 해보시지, 그래,"
둘은 픽 웃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차는 어느덧 안양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가면 곧장 집으로 갈 거야?"
문호가 형규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글쎄, 자넨..."
"난 마포 아파트에 들렀다 가야겠어, 진남포가 살고 있는 진아 아파트."
"좋아, 나도 따라가지."
"의리 하나 좋군. 가서 말야 갈매기 주점과 아파트 경비원을 만나 보고 주위 좀
살펴봐야겠어. 최 형사가 미처 보지 못한 무엇이 있을 지도 몰라.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알고 보면 사건하고 깊은 관련이 있는 게 많거든."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동 일대의 불빛이 불타오르듯 찬란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차는 몸체를 서서히 돌리며 터미널 광장으로 들어섰다.
문호와 형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택시를 타고 마포 진아 아파트로 달렸다,
동작동 국립 묘지와 흑성동을 지나 여의도를 거쳐 마포에 도착했다.
둘은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에 '갈매기 주점'부터 찾아들었다.
갈매기 주점은 진아 아파트 정문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고 마을에서는 끝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었다. 문호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훈훈한 온기와 구수한 찌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주머니 소주 한 병 하고 김치 찌개 좀 해주시고요. 공기밥 두 그릇만 주세요."
달아오른 연탄불에 손을 녹이며 의자에 앉았다. 다른 두어 팀의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뜨겁게 데워 드릴 테니..."
잠시 후 주모는 지글지글 끓는 찌개와 소주 한 병을 쟁반에 담아 왔다.
돌아서려는 주모를 문호가 불러세웠다.
"저 아줌마, 지금 바쁘세요?"
"왜 그러우."
"뭣 좀 여쭤볼 게 있어 그러는데...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젊은이들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 그런데 왜 그러우?"
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고 다가와 앉는다.
"저 엊그제 여기 누가 찾아온 사람 없었어요? 요 앞에 아파트에 사는 진남포라는 배우 때문에."
"아, 예 있었어요. 방송국에 있다는..."
"방송국? 경찰이 아니구요?"
"경찰? 방송국 사람이라던데... 그러고 보니... 어쩐지 경찰 냄새가 나더라니."
"저 다른 게 아니고요. 사건이 나던 날 아주머니가 보셨다는 그 택시 말입니다.
대가리에 별표 불빛이 보였다던... 그 기억나시죠."
"네 알고 있죠. 요전에 그 사람한테도 얘기해 주었는데. 그런데 왜 그러죠?
댁들도 경찰서에서 오셨어요?"
"아녜요, 전 경찰이 아니고 신문 기자예요. 취재 좀 하려구요.
아줌마 그 날 밤 기억나는 대로 말씀 좀 해주세요."
주모는 형규가 따라 주는 술잔을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홀짝 마셔 버리고는 술국을
후르르 마신다.
그리고는 그 날 밤의 상황을 이야기 해 주었지만 최 형사가 조사한 것에서 더 얻어낼 것은
없었다.
"안개 속이라 아주 자세히는 못 봤지만요,
대가리에 별 달린 택시가 저만큼서 턱하니 서더라구요.
그러더니 키 크고 뚱뚱한 사내가 내려서 아파트 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어요.
그래서 제가 이상하다고 했죠. '왜 돈내고 타는 택시를 아파트까지 몰고 들어가지 길가에
세워 놓고 걸어가나'하고 말이에요. 별 싱거운 사람 다 있네 하고 돌아서서 가게문을 닫았죠."
주모의 말로는 그 때가 자정이 약간 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밤 12시 10, 20분 경쯤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둘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아파트 경비실로 찾아갔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아파트는 몹시 낡아 있었다. 내년 여름부터 모 건설 업체에서 이곳을
매입 새로 연립 주택을 건립한다는 것이 매우 신빙성 있게 들렸다.
아파트는 외면으로 복도가 나 있었고 복도의 베란다는 사람 허리쯤 차 오르게 낮은
울타리 형식의 안전벽이 있었다. 층과 층의 차도 몹시 낮았다.
둘이 경비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경비원은 의자에 앉아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난로에는 불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형규가 경비원을 흔들어 깨웠다. 졸리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형규와 문호를 바라보았다.
"저, 경찰에서 왔습니다."
문호가 신분증을 보이며 말을 건냈다.
"네? 경찰요. 무슨...일로."
"잠깐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네, 이리 좀 앉으시죠."
경비원은 구석에 있는 야전 침대를 펴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대략 아시겠지만 여기 살고 있는 진남포라는 배우 때문에 왔습니다."
"어, 어저께 형사가 왔다갔는데..."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끝나질 않아서요."
경비원도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말해 주었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옷차림은 어땠습니까?"
형규가 경비원에게 다음 질문을 하는 동안 문호는 슬그머니 경비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옷이... 청바지에 T셔츠를 입었었지요. 좀 춥게 입고 나간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밖에 나가는 진남포 씨한테 '그렇게 입고 나가면 감기 들지 않겠느냐'고
물은 기억이 나요."
"그때 시간은..."
"뭐 새벽 한 시 십 분경이었죠."
"무슨 비명이나 싸우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까?"
"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별다른 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습니다.
혼자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왔으니까요. 다른 소리는..."
둘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사이 문호는 밖에서 무엇인가 알아보려는 듯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며 아파트를 둘러보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첩에 메모도 하고 있었다.
메모를 마친 문호가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형규가 돌아보자 그는 손가락으로 형규를
나오라고 손짓했다.
"이봐 형규. 수수께끼가 또 하나 풀릴 것 같아. 이리와 봐."
"뭐야?"
"거 왜 대가리에 별을 달고 왔다는 영업용 택시 말야.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의 행방이 이상하다고 했잖아."
"그랬지"
"자, 그건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어. 자네 말야. 지금 바로 다시 경비실로 들어가 있어.
난 여기 있을 테니."
문호는 밑도끝도없이 형규를 경비실로 되쫓았다.
형규가 경비실로 들어간 후 약 7, 8분쯤 되어 문호가 나타났다.
그러나 문호가 나타난 곳은 아파트 광장에서가 아니라 아파트 속에서 경비실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형규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만 해도 둘은 광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또 이 아파트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호가 웃으며 여유만만하게 들어왔다.
경비원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봐, 뭘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어. 이쪽으로 나와 봐."
문호는 두 사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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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호 형사의 사건 일지 미 해결 사건- 해결된 사건
1. 고강진 살해범 증발- ?
2. 이상한 이빨 자국- ?
3. 이화영 납치 사건- 조작으로 판명
4. 고강진 환경- #1김만호가 부친임, #2성기준과 밀착됨,
#3성격이 특이함(고강진)
5. 성기준 공범-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미지수임
6. 신부의 정체- ?
7. 진남포 피습- 자해 가능성이 농후함
8. 택시에서 내린 사람의 방향- 베란다를 이용하여 아파트로 잠입함
9. 위 사람의 정체- ?
10. 진남포 동생의 자살 이유는- ?
11. 진남포가 자해했을 경우 그 이유는- ?
12. 진남포는?- 과거 건달에서 배우로 전향
13. 아파트의 핏자국- 자해일 경우 해명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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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보라고. 영업용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분명히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고 했지.
그런데 정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이야.
누군지는 모르지만 차에서 내려 아파트로 들어온 후 자 봐, 보통 사람들이 가정집으로
들어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대문으로 들어가는 길과 울타리를 넘어가는 방법.
그런데 그 원리는 아파트도 마찬가지야.
이 경비실 앞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방법과 베란다를 타고 넘어 들어가는 방법이 있어.
일단 일층에만 잠입하면 몇 층이든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거든.
절대 경비원 눈에 뜨이지 않고."
"음, 그거 가능한데 ! 말이 돼."
"이제 알겠어? 차에서 내린 사람은 경비원이 모르게 의식적으로 피해서 아파트로 온 거야.
그것은 차를 길가에서 세우고 들어올 때부터 다분히 의도적이었지. 왜 그랬을까. 이해가 가?"
문호와 형규는 추위도 잊은 듯 오랫동안 서서 아파트의 베란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문호와 형규는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문호는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메모를 뒤적이며 진아 아파트 베란다 침입
사건과 진남포 피습 사건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몇 가지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도 하고 또 몇 가지는 아직도 미궁상태로 남아 있다.
문호는 백지에 도표를 그려가며 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풀지 못한 사건들이 크고 중요했다.
알아낸 사실보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이 이 사건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고강진과 진남포 사건의 관련성은 아직은 보이지 않고 있다.
문호는 내일의 스케줄을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신부의 신원파악,
다음이 진남포 자해 여부의 과학적 수사 및 본인 심문, 그리고 세 번째가 고강진 목에서
나온 이상한 이빨 자국의 탐문 수사, 끝으로 부산 곽 과장에게 연락하여 스타 호텔과
코스모스 호텔의 알력 관계 체크였다. 메모를 작성하던 문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을 뒤쫓기 시작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02시 정각이 다 되어갔다.
민형규 기자의 사건기록
시간 비고
11월 30일
20:00 고강진 피살(피살된 추정 시간)
21:45 침대 열차 승차(애꾸와 함께)
22:00 진남포 외출
23:45 고강진, 시체로 발견(대전)
00:10 진남포 귀가
00:30 진남포 경비실 도착
00:50 진남포 밖으로 산책
01:10 진남포 자해 후 귀가
01:30 병원으로 우송
12월 1일
23:00 진남포 동생 부산에서 자살
한편 문호가 사건 메모를 하고 있는 시간 형규도 무엇인가를 자꾸만 썼다가는 지우고
지웠다가는 또 쓰며 마치 기계를 조립하듯 무엇인가를 맞춰 보고 있었다.
진남포가 자해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자 그는 아파트 앞에서 내렸다는 뚱뚱한 사람의
신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마포에 도착해서 아파트로 들어간 것이 밤 12시 10분경
그리고 진남포가 과일을 들고 경비실을 나타난 것이 12시 30분경, 그리고 아파트 밖으로
바람을 쏘이러 나간 것이 12시 50분, 피습을 당하고 돌아온 것이 01시 10분경,
여기에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약 20분의 간격들이 나 있었다.
다른 시간이야 어쨌든 마포 아파트에 영업용으로 도착한 사람이 12시 l0분경이고 진남포가
경비실에 나타난 것이 12시 30분경이라면...
그 영업용에서 내린 사람 이 진남포 자신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다.
20분 간이면 아파트로 스며들어간 후 옷을 바로 입고 경비실로 내려올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형규는 문호에게서 얻어온 피습 현장의 핏자국 그림을 꺼내 보았다.
이 그림 중 피습 현장에 있던 핏자국의 형태는 #1번과 #4번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경찰측이나 형규의 추리대로 한 사람은 뒤에서 붙잡고 있고 한 사람은 앞에서
칼로 긋고 찌르고 했던 상상은 단숨에 깨어져 버린다.
즉 이 피의 그림으로 보아 그는 쪼그리고 앉아 가슴을 긋고 다음 옆구리를 찌르고 아파트로
돌아왔다는 상황이 정립된다.
그렇다면 진남포는 어디를 갔다와서 그 시간에 자해를 한 것이냐 하는 게 쟁점으로 남게
된다. 경비원의 진술로는 밤 10시까지 진남포는 자기 방에서 대사를 연습하는 소리가
났었고 전깃불도 보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10시부터 12시까지 또 다른 두 시간의 공백이 생긴다.
두 시간! 두 시간 동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고강진이 피살되어 가방에 담긴 채 열차에 오른 것이 밤 9시 45분이었으니 진남포가
가지고 있는 두 시간의 공백과는 아무런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남포와 고강진 사건은 별개의 사건인가?
형규는 노트를 꺼내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을 기록해 보았다.
시간을 적고 맞춰 보았지만 새로운 사실이 더 발견된 것은 없었다.
형규는 날이 밝는 대로 문호와 협력하여 진남포 자해 여부에 관하여 조사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시계가 0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