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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韓蕆) - 11世
청주한씨 제주입도조 서재공 한천선조님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소재지 :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묘주인 : 청주한씨 제주입도조 韓蕆, 고손 繼老
좌 향 : 亥坐巳向
주 산 : 병곳오름
특 징 : 묘는 병곳오름에서 동남향으로 뻗어내린 가시리 마을안에 위치하며, 낮지만 입수부,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으며 안산이 금성체로 아름답다.
위치 ; 표선면 가시리 마을 안 가시리 충의사 忠義祠
시대 ; 조선 초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유형 ; 무덤
한천의 행적에 대해서는 '가시리 충의사' 참조
충의사에는 서재한공유허비(恕齋韓公遺墟碑, 崇禎後五己卯 즉 1879년에 月城 崔益鉉이 쓴 글. 〈淸州韓氏世譜卷上〉 1956년刊 참조)가 오래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입도선조인 서재공의 묘소를 찾지 못하여 당황하던 중 1953년 이웃 성산읍 신산리 고재관 씨의 꿈 속에서 계시를 받아 잃었던 묘를 찾았다고 한다.
고씨는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있던 제각(祭閣, 지금의 충의사 자리에 있었음)을 보수해 달라는 한씨문중회의 부탁을 받아 이를 수락하고 1963년 2월 정성을 들여 보수작업을 마쳤다. 그런데 보수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는 온몸에 기운이 빠져 환자의 몸이 된 것 같았다. 무슨 병인지 알 수도 없고 해서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이튿날 꿈에 영감님(서재공)이 나타났다. 가시리 제각보수공사장이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마당이 나오고 정면에는 큰 기와집이 꽤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대청마루 서남쪽에 앉아 일을 시작하는데 집주인인 듯한 영감님이 나타났습니다. 영감은 내가 하는 일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집 뒤편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다. 아내는 걱정하면서 몸이 쇠약해서 그런 것이니 마음을 안정시키고 푹 쉬어야 한다고 권하였다. 한편 전날밤부터 두살난 딸이 열이 있더니만 병원에 다녀와도 효과가 없고 뒷날밤 자정쯤에 죽고 말았다. 아내는 가시리 제각 공사 때문에 일어난 변고라고 하면서 연장들을 바닷물에 집어던져 버렸다. 죽은 딸을 이웃 사람과 더불어 산에 가서 묻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 초죽음이 되어 쓰러져 잠들었는데 두번째 꿈을 꾸었다.
"홀연히 큰딸아이가 죽자 파묻으려고 딸아이를 안고 한길을 막 나섰는데 웬 노파가 길을 막아서며 하는 말이 딸아이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딸아이를 건네 주었고, 노파는 딸아이를 안고 서남쪽을 향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습니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가다 보니 가시리 제각 앞에 이르렀습니다. 문간을 들어서고 보니 남향으로 지은 사칸 큰 기와집이었습니다. 노파는 아이를 안고 부엌쪽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찾아야겠다고 부엌엘 가 보니 십팔구세 처녀들이 흰모자에 앞치마를 두르고 떡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혼잣말로 웬 떡을 이리 많이 만드는고-- 하는데 전날 꿈에서 본 그 영감이 들어왔습니다. 영감이 방석을 권하며 앉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슨 떡을 저렇게 많이 만드십니까? 하고 물으니 저 떡은 내 집 늙은이가 아이를 안고 와서 잔치를 하려고 만드는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내 딸인데 찾아가겠다고 말하니 영감은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하면서 그만한 덕(德)이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 말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있는데 서쪽 구석이 헐어서 비가 새고 있으니 네가 고쳐 주어야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대로 돌아가고 이 다음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영감 재촉에 사립문을 나와 큰길로 발길을 옮기면서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온몸뿐만이 아니라 자리에까지 땀이 흥건히 고여 있었고 고씨는 이제 내가 죽는 것이로구나 하는 두려움에 떨다 보니 밤이 새었다. 다음날 밤에 세번째 꿈을 꾸었다.
"창밖에는 가랑비가 촉촉히 내리고 선잠이 들까말까 하는데 고재관이 있느냐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벌떡 일어나 보니 밖에 영감님이 와서 '어찌 무심하게 잠만 자느냐' 하면서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예 몸이 아파서 자고 있습니다 하니 아프다고 잠만 자면 되나 걸어다녀야지 그리고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 지금 몸이 아파서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어서 이제 나하고 같이 가야 한다면서 영감이 문밖으로 나가기에 나도 뒤따라가려고 첫발을 내딛는데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영감이 내 잠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니 필경 곡절이 있기는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틀 후에는 네번째 꿈을 꾸었다.
"내가 가시리 마을을 막 들어서는데 영감이 길을 막아서고는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영감님의 명령대로 그 뒤를 좇아 마을 서남쪽으로 가로질러 곧장 걸었습니다. 앞서가는 영감님이 서너발쯤의 거리인데 아무리 힘을 내어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넓다란 초지가 나왔고, 그 동북쪽으로 외산담한 묘가 있었고 묘 앞에 큰 돌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묵묵히 앞서 가고 있던 영감님은 저 외산담한 묘와 돌멩이를 잘 보아 두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참 걷다가 보니 오른편으로 동산이 있고 동산 건너편으로 넓은 초원이 전개되었는데 멀리 외솔나무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소나무 옆을 곧장 걷다 보니 편평한 새왓(띠밭)이 나왔고 띠밭 담벽에 붙어 오름이 하나 있어 영감을 따라 담벽을 뛰어넘으니 앞서가던 영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길 표적을 해 두라는 영감의 말대로 표적을 하려고 높은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동산 동남편 양지바른 곳에 옛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무덤 서남쪽에 타다 남은 '맹개낭'(청미래덩굴) 한 뭉텡이가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방묘(方墓)에 제절 만들 때 썼던 것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하 영감님이 여기 살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그래서 나보고 집을 고쳐 달라고 했구나 하면서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표적을 해 둔 방묘가 서재공 할아버지 묘가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후부터는 꿈도 꾸지 않고 몸도 좋아졌으며 애들도 건강하게 자라는 등 모든 일들이 마음먹은 대로 풀려갔다. 이러한 말이 나자 한씨문중회에서 찾아와서 꿈속에서 본 것을 참고로 선묘를 찾아 달라고 했다. 꿈속의 방향을 따라 옛무덤을 찾았는데 땅속에서 옛비석을 찾아냄으로써 서재공의 무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표선면향토사.71-75쪽)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卷上에는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府君의 號는 恕齋라. 表善面 加時里에 한居하시다가 終世하셨으니 公의 衣履之藏이 附近에 在할 것이로되 後裔가 同地를 移居한 지 年久함에 香火가 久絶하여 失護之恨이 連代累嘆이라. 後孫들이 追慕不己하여 遺墟地에 立碑建齋하고 年例行祀이러니 近年에 이르러 府君의 墓所를 發見하였다. 檀紀四二八八年(乙未) 三月 後孫들은 熱誠을 다하여 齋閣을 建築하였는 바, 落成前夜에 城山面 新山里 居住 高才官(建閣當時從事石工)은 非夢似夢間에 白髮老人이 '나는 韓氏先祖라. 나의 집을 子孫들에게 傳하여 달라.'고 하여 墓在地点을 案內하여 주었다 한다. 如斯之事가 連三日 繼續되므로 前記 高氏는 奇異하게 여겨 隣近 韓氏에게 傳言한 바 後孫 仕律 文燮 등 新山里 居住 後孫 十余人이 接報 卽時로 現地에 赴往하고 드디어 加時里 遺墟地 西便 五里許에 巢乙岳 南麓에서 南向大塚을 發見하였다. 玆에 門中會長은 卽時 各處 宗中에 通文하여 五十余名 代表로서 實地踏査케 한 바 比(此)墳의 位置 構造 形態 等이 我祖聖墓임을 立證할 만하고 더욱 繼續하여 調査한 結果 加時里 居住 吳應邦 等 古老 數人이 此塚이 韓氏墓라는 二三百年 以來의 傳說이 有함을 立證하다. 故로 開壙搜誌를 않드래도 史實的 考察과 實際的 判斷으로 公의 墓임이 確認되니 宗議에 依하여 改修封瑩하였다. 아 - , 公과 더불어 麗朝中興을 圖謀하시던 圃隱 鄭夢周 先生은 死後에 善竹橋에서 靑竹이 生하였다고 傳하여지거니와 公이 가신 後 五百余年에 靈魂이 再顯하시었으니 실로 君子之魂은 永世不滅이로다.〉
위치 ; 표선면 가시리 마을 안
시대 ; 조선 초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유형 ; 위인선현유적
가시리는 1392년 7월 고려조의 멸망과 동시에 고려조의 충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청주한씨 서재(恕齋)공 한천(韓蕆) 씨가 충절을 지켜 귀양와서 설촌하였다고 한다. 청주한씨 제주문중회에서 조사한 사료에 따르면 서재공은 고려 멸망과 동시에 부인과 두 아들을 거느리고 개성을 출발 정읍, 해남을 거쳐 해로로 성산포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인가가 없는 이 곳에 정착했다는 것이다.(표선면향토사 71-75쪽)
한천
공양왕 때 대제학
온건세력의 대표주자인 정몽주와 함게 왕조 재건 모색
공양왕의 사위 우성범을 중심으로 이성계 제거를 위해 역성혁명 세력의 대표주자인 정도전 탄핵하는 등 정치적 공략 시도
공략실패 정몽주 살해당하고 나머지 인사들 대거 숙청
한천도 1392년 제주도 정의현에 유배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 20년(1370) 2월에 한천(韓蕆)이 경상도순문사가 되었고, 공양왕 3년(1391)에는 판개성부사가 되었다.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에 방치하고 왕대비가 청정(聽政)하게 되자 단양군 우성범 및 진원군 강준계를 회빈문 밖에서 베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한천(韓蕆)을 귀양보냈다.》라고 하였다. 서재(恕齋) 공은 이곳에서 사장(射場)과 서당(書堂)을 개설하고 지방민을 교훈하였고 훈민시덕(訓民施德)하였다. 중세에 실호(失護, =失墓)하였다가 1955년 찾게 되었다.(淸州韓氏史鑑 1976년刊 31∼32쪽)
제주향교지(濟州鄕校誌)에 의하면 〈고려말에 전리판사 판개성부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한 중신으로 고려의 중흥을 도모하다가 이태조의 등극에 불복하여 제주로 유배되어 표선면 가시리에 적거하면서 학당을 세워 인화와 예의의 기준이 될 향약을 정하고 학문을 가르치니 한학의 개척자적인 역할을 다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하였다.(濟州鄕校誌 692쪽)
그러나 한천의 거취에 대해서는 이와는 다른 자료도 있다. 즉, 디지털한국학 《한국의 역대 인물》란에는 〈한천(생몰년 미상)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우정승 악(渥)의 손자로, 도첨의사(都僉議事) 대순(大淳)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 14)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부(古賦)로 민안인(閔安仁) 등 55인, 십운시(十韻詩)로 임한(林翰) 등 41인을 뽑았으며, 1371년 경상도도순문사가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거쳐,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으로 찬성사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유배되었으나 뒤에 풀려나와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 2) 태조로부터 전조대신(前朝大臣) 71인을 포상하라는 명에 의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어 원종공신전 15결과 노비 2명을 받았다. 1400년(정종 2) 권희(權禧) 등과 함께 판삼사사로 치사하였다. (참고문헌 ;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張寬開國原從功臣錄券)〉라고 하여 유배된 후에 계속 제주에 살았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처음으로 집을 지어 살던 곳에 한씨 문중회에서 충의사(忠義祠)를 지어 입도 선조의 유업을 기념하고 있다. 이 주변의 지명을 보면 큰뒷밭(충의사 있는 곳), 작은뒷밭, 안위연, 동백남밭(원정착지), 외밭, 서당팟, 절구터, 사장(射場)터, 중이왓 등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한천 공의 묘는 마을 가까이에 있다.(가시리 서재한천묘 참조)
▲ 위치도
▲ 좌향도
▲ 우측에서 본 묘
▲ 정면에서 본 묘
▲ 좌측에서본 묘
▲ 정면에서 본 묘
▲ 안내판
▲ 앞묘(고손 한계로) 앞에서 본 묘
▲ 앞에서 본 묘
▲ 앞묘(고손 한계로) 앞에서 본 묘
▲ 뒤에서 본 묘와 조,안산
청주한씨제주입도조 恕齋公 한천(韓蕆)묘로 한천은 제주의 삼절신으로 불리며, 1392년 7월 고려조의 멸망과 동시에 고려조의 충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청주한씨 서재공 한천은 충절을 지켜 귀양 와서 설촌하였다고 한다. 서재공은 고려 멸망과 동시에 부인과 두 아들을 거느리고 개성을 출발 정읍, 해남을 거쳐 해로로 성산포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인가가 없는 이곳에 정착했다 한다.(충의사에는 서재한공유허비(恕齋韓公遺墟碑, 崇禎後五己卯 즉 1879년에 月城 崔益鉉이 쓴 글)가 세워져 있었으나 입도조인 서재공의 묘소를 찾지 못하던 중 1953년 이웃 성산읍 신산리 고재관씨는 충의사 제각 보수 작업을 마치고 집에서 4차례의 꿈속에서 묘소의 위치를 계시 받아 잃었던 묘를 찾았다고 한다. 현재 이 묘는 정혈에 자리하고 있다. 묘는 원래 산에 있었는데 성묘와 벌초의 애로로 인하여 제주종친회장께서 발의하여 현 위치로 이장한지 약 15년 정도 되었으며 이장을 위한 파묘결과 황골이 나왔다고 하였다. 마침 현장에서 제주종친회장을 만나 설명을 들었다. 한천묘 앞에는 高孫 한계로와 부인남평문씨의 무덤이 조선초기형태로 있으며 묘비에는 '昭威將軍韓公繼老 配淑人南平文氏祔右 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 인근의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1994-1에 忠義祠(청주한씨한천 사당) 恕齋韓천遺墟碑가 있으며 비석((유허비)은 높이 128cm, 너비 55cm, 두께 22cm)이 있다.
● 사당입구에 면암 최익현의 제주 유배 사유 및 면압집에 한천관련 기록에 대한 고마움으로 비석을 세워 두었다.
본문 내용 일부를 (고영철의 역사교실 (www.jejuhistory.co.kr/))에서 인용함
- 경암 풍수지리연구회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