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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경이 만난 사람
“당선되겠다” 최선을 다했던 총선, 출마도 못 해보고……
송치용 평택 보람동물병원장 (수의대 83)
임은경(농학95,선구자취재기자)
지난 4월에 있었던 19대 총선은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번에야말로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의 장이 될 거라고 모두가 기대를 걸었던 선거. 하지만 ‘생존의 위기’ 앞에 이를 악물고 뛴 새누리당과 ‘선거의 여왕’ 박근혜의 저력을 확인했을 뿐, 고대하던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야권의 성적표는 아쉽기만 했다. 이 가운데 올해 초 김상진기념사업회의 온라인 소통 공간인 ‘상록 얼숲’에 올라온 한 게시물이 눈길을 끌었다. 통합진보당 평택시갑 19대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선관위에 등록을 마쳤다는 내용. 수의대 83학번인 송치용 평택 보람동물병원장의 인사말이었다.
“주위의 걱정과 기대를 잘 알면서도, 제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이기에 용기를 내어 이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가지 않았던 길이기에 두려움과 설렘이 많이 교차합니다. 저를 아끼는 주위 분들의 격려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군요…….”
예기치 못했던 송 원장의 출마 선언은 그를 알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주변의 격려와 응원이 쏟아졌다. 후원회도 조직되었다.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출사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던 주변의 요구가 있었고, 나올만하니까 나왔다는 데에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원래 정치나 시민사회 활동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국민참여당이 만들어지면서 평택지역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도의원 후보가 되어달라는 당의 요청이 들어오고, 저에 대한 기대가 점점 높아지는 거죠. 정치를 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날건달 된다, 집안 말아 먹는다 선입견이 있잖아요. 유시민 씨가 도지사 출마했을 때 제가 평택 선거대책위원장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해보니까, 자봉이 많아서 법정 선거비용만 가지면 선거가 되겠더라고요. 후보가 나와야 당을 알리는 것이 사실이고. 제가 지역위원장으로 있으니까 최소한 그런 역할은 해야겠다, 무조건 안 된다고 빼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사무실 얻고 현수막 걸려면 천 오백만원만 있으면 되겠다 싶었죠.”
기왕 하는 것 꼭 당선되자는 마음으로 올해 1월 1일 아침, 새벽 여섯시 반부터 등산로 인사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정말 열심히 뛰었고, 지역에서 인지도도 상당히 생겼다. 안 가본 상점이 없었고, 안 만난 사람이 없었다. ‘아, 저 치는 정말 되려고 나온 사람이구나.’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결국 본선 레이스는 나가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야권 연대가 이루어지면서 평택갑 지역은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기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뛴 후보의 의견은 한 마디도 묻지 않은 채. 하지만 송 원장은 당의 결정 사항에 승복하고 선거 운동을 접었다. 이후 4월 11일까지는 통합진보당(정당 투표는 남았으니까) 선거운동에 매진했다.
당을 알리려고 시작한 선거, 당의 결정에 따라 출마 포기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저는 그래도 경쟁력 있는 후보니까 당연히 민주당하고 경선을 할 줄 알았어요. 민주당 후보도 초짜였거든요. 근데 여기는 그냥 접는 지역으로 결정이 나버렸어요. 중앙에서 대표들끼리 협상을 해서. 경선을 하면 천만 원을 내야 하거든요. 여론조사를 해야 하니까. 준영이(김준영 수의대 84)가 천만 원 모아준다고 한참 모으던 중이었지요. 후보를 계속 했으면 계속 후원금이 들어왔을 거예요. 후원금 내려고 스탠바이 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근처 오산에 안민석처럼, 민주당이 쎈 후보가 나온 데는 통합진보당이랑 경선을 하더군요. 진보당이 경선에서 이긴 데도 천호선 심상정 이정희 그런 유명한 사람들이 나온 데만 됐죠. 제 지역구 같은 곳은 아예 경선을 안 했어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흔치 않은 기회이자 사건일 것이다. 할 얘기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소탈하고 웃음이 한없이 둥근 송 원장이 원래부터 ‘열혈 청년’ 기질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 때 신민당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그걸 유인물로 만들어 돌리다가 형사들의 추적을 받았죠. 산으로 도망을 가면서 길 옆 밭고랑에 엎드렸는데 하필이면 나를 쫓던 놈이 제 등을 밟은 거예요. 안양경찰서에 끌려가서 많이 맞았지요. 그때가 86년 9월이었는데 그해 크리스마스 때 가석방으로 풀려났어요. 다음해 재판에서 공문서, 사문서 위조 및 동행사로 실형 받고 집행유예로 처리되었지만, 학교는 미등록으로 제적된 상태였어요.”
아이스크림 대리점에 취직해서 일을 했다. 집안이 어려워져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제 고향이 옥천이라 했죠? 조선일보 반대하는 언론 운동이 유명하죠. 잘 아는 선배가 창간해서 옥천 신문사 기자로 오라고도 했는데, 워낙 월급을 안 주니까 그렇게 못했어요. 그 뒤에 졸업하고 사료 회사에 취직해서 돈만 벌고 살았죠.
다들 그렇게 세상에 섞여들던 시기였어요. 어떤 사람은 들어간 현장에 눌러앉아 노동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못 견디고 바로 나오기도 하고. 그때 우리는 어리고, 순수했고, 정말로 심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마추어였던 거지요.”
우성 사료에 입사해서 처음엔 양계 부문을 맡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의 서비스를 했다. 대리점 세 개를 담당했는데 대리점 당 2~30농가를 관리했다. 사료는 매일 먹는 거라서 일단 거래를 트면 매일 공급이 들어갔다. 그냥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 공급을 통해 농가의 생산 계획을 짜주고 목표 달성을 관리해주는 일이었다. 일은 보람이 있었다. 진심으로 농가에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고, 농가 소득 증대에 기여해준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회사 내에서 영업 실적 1등을 하면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스미스 클라인 비참 코리아라고 동물약품회사에서 일했지요. 근데 약을 너무 비싸게 팔더라고요. 사료 장사를 할 때는 내가 열심히 하면 농가에 수익을 내준다는 보람이 있었는데. 농민들이 너무 모른다는 상황을 악용하는 놈들도 많고. 그냥 감기 걸린 건데 항생제 먹여야 한다고 해서 더 비싼 약을 팔 때도 있고……. 농민 입장에서는 가축이 아프면 다 죽을까봐 불안하잖아요. 저는 늘 농가를 위해 조언을 했어요. 이건 감보로병인데요 폐사는 내일이면 끝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 사이에 덕망은 생기는데. 사장은 좀 싫어했어요. 영업을 많이 안 한다고.(웃음)”
평택에 보람동물병원을 개업할 때도 그렇게 쌓은 인간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퇴직금 150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담보도 없는데 보증을 서주는 이가 있어서 대출도 받고, 부지며 가게도 모두 좋은 조건으로 소개를 받았다. 송 원장이라면 무조건 믿는 ‘신도들’도 생겨났다. 선거 운동을 한다고 지난 3,4개월 자리를 비웠지만 농가들은 대부분 다른 곳과 거래하지 않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주었다. 최초로 정치 참여를 하게 된 계기도 수의사로서 활동과 관련지어졌다.
“노무현 대통령 될 때 개표방송 보고 뭉클했죠. 그때까지는 관심만 가지는 적극적 지지층이었을 거예요. 워낙 먹고 사는 일에만 급급해서 계기가 없었으니까. 사실 그때보다는 그 다음해 민노당이 10석 되었을 때, 그때가 진짜 좋았죠. 민노당 정도는 내가 가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는데 촉수가 나에게 미치지 않았어요. 인터넷으로 개혁당 만들어졌을 때도 가입을 하고 싶었는데 컴맹이라 가입이 어렵더군요. 서프라이즈를 눈팅하다가 조류 독감이 왔을 때 처음으로 서프라이즈에 댓글을 달았어요. 농가가 어려우니 치킨을 더 먹어주어야 한다고. 조류독감 걸린 닭 시중에까지 안 나온다, 잘 익히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했죠. 그게 좀 화제가 되었어요.”
노사모 모임 처음 나갔더니 옆자리에 다 아는 사람들
곧이어 노사모에서 닭 번개에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오프 모임에 나가서 처음으로 경기 남부 지역의 노사모와 개혁당 사람들을 만났다. 모임 장소는 수원역이었다. 최루탄 가스 마시고 버스비 아끼려고 걸어 다니던 그 추억의 수원역 말이다. “옛 모습은 사라지고 몰라보게 변했더라”고 그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게 괜찮을까? 걱정걱정하면서 나간 자리. 알고 보니 모인 사람들이 다 건너건너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알고 보니 80학번 성남이형 와이프였고요, 담배 피고 있던 여자는 관석이라고 대학 때 같은 집(써클)에 있던 사람 부인이더라고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 제 자리를 찾아가보니 다시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죠. 가끔 어울려 얼굴 보면서 참 재미있었어요. 그러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갑자기 돌아가셨지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수원역에 모두 모여서 분향소를 설치했다. 일주일 동안은 수원역에 살면서 밤 11시 막차로 귀가했다. 송 원장은 소위 ‘노무현 광신도’는 아니었지만, 그 사건 이후 그는 많이 변했다. 노무현의 죽음보다 인산인해 몰려드는 사람들에 더 놀랐다. 그것은 한 인간을 변화시킨 ‘감동’이었을 것이다. 이후 평택 시민광장 카페지기가 되고, 이후 국민참여당이 만들어지면서 평택 지역위원회 위원장이 된 것이다. 매사에 성실했던 그는 작년 말 마침내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후보가 되었다.
선거운동 즐겁게 신나게 하자
“나를 밀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충 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빡세게 했죠. 1월 1일 새벽 6시 반부터 시작했어요. 시청 공무원들 다 인사 다니고, 영하의 날씨에도 쉬지 않았죠. 내가 동작은 좀 느린데 하기로 하면 계속 하거든요. 쉬는 시간에도 뭘 해야 효율적일까, 어디 가서 판넬을 들면 잘 보일까, 그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가 후원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때마침 수의대 동문들이 방문을 해주는 거예요. 10만원씩 내는 건 소득공제가 되니까. 동물병원, 회사, 교수, 등등 아는 데가 자꾸 연결이 돼요. 열 명, 스무 명이 한꺼번에 돈을 모아서 주기도 하고.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돈을 쓰면서 했죠. 사람들이 계속 격려를 해주니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새누리당 원유철 이번에 꼭 잡아야 한다, 이렇게 말해주니까.
내가 꼭 되어야겠다는 생각만 없으면 욕 안 먹고 재미있게 보람 있게 할 수 있어요. 간혹 자기가 꼭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문제가 돼요. 접으라면 접으면 되는데, 서약서 써놓고도 딴소리를 하죠.”
결국 단일화 이후 선거운동은 접었지만, 통합진보당 정당득표율을 올리기 위해 끝까지 뛰었다.
후보가 돼서 뛰다보니까 유권자들에게 미안해지더란다. 갑자기 나와서 국회의원 시켜달라고 하는 게 염치가 없고, 평소에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상가는 대부분 다 다녔다. 두 번 돌은 데도 있고, 어떤 아줌마들은 명함을 주니까 세 번째 받았다고 하더라. 미용실을 가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인사 잘하고 방긋 웃으면 심심한 아줌마들이 앉아 있다가 수다 떨고 말을 붙여줬다. 명함 잘 받아주고 말만 붙여줘도 어찌나 고맙던지. 처음엔 쑥스러워서 명함 돌리는 일이 꽤나 어색했다. 하지만 얘기를 한번 나눠보면 사람들이 호감을 가진다. 유권자들은 그 호감으로 사람을 찍어주는 것이더라고.
“이번 선거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민노당 출신 사람들과 함께 일했는데, 그들한테 받은 인상이 참 깊었지요. 그쪽에서는 국민참여당 출신에 거부감이 많거든요. 저것들 신자유주의자들, 노무현 때 우리 탄압했던 노무현 추종세력들, 하면서. 근데 한번 쌍용자동차 앞 집회에서 영하의 날씨에 함께 오뎅을 팔면서 친해졌어요. 수익사업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평택은 쌍용차 투쟁이 최대 현안이거든요. 특히 민노당 계열 사람들에게. 그날 참 힘들었죠. ‘아, 국민참여당 할 때는 이것까지 안 해도 되었는데’ 생각도 했고.(웃음)”
이번 선거에서 과거 민주노동당 내 소위 ‘경기동부연합’이 당의 의사결정을 쥐고 흔드는 실질적 당권파로 핫이슈가 된 바 있다. 송 원장은 ‘경기동부연합’은 잘 모르지만, 민노당 내의 조직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여실히 느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국회의원 후보 출마 사진을 찍는데 CNP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갔더니 압구정동이에요. 사진 찍고, 의상, 메이크업부터 풀 서비스……, 야 이거 돈 많이 드는 거 아닌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모두 무료라는 거예요. 국회의원 후보가 됐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때 생각했죠. 아, 여기 정말 시스테믹하게 돌아가는구나. 제가 후보로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정말 물심양면으로 잘 해주더군요. 후보가 되려면 당원 투표를 해야 돼요. 50%이상 투표율이 나와야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지역구 90% 이상이 민노당원이죠. 당직자 네 명이 붙어가지고 며칠 동안 전화를 돌리더라고요. 쌍용자동차 송탄 분회, 만도 분회 등등. ‘송치용 후보 이번에 나왔는데 투표 좀 해주세요.’ 그렇게 마감 하루 전에 50%를 넘겨서 성사가 됐죠. 후보 찬성율은 100%였고요.”
눈물겹게 진보정당 운동하는 사람들 눈앞에서 봐
문화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정말 달랐다. 조직이 탄탄하게 잘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당직자들의 헌신성이었다.
“볼 때마다 안쓰럽더라고요. 어떻게든 잘해주고 싶었어요. 나랑 덩치가 비슷한 친구가 있
는데,
진보정당을 끌고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통합진보당이 되면서 더 지친 것도 같았다. ‘고난의 행군’에서 이제 원내교섭단체가 될 거라는 희망이 생겼고, ‘우리도 필거야. 생활이 나아질 거야’ 하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어딘지도 모르고 갈 때는 그냥 가다가도, 거의 다 왔다 싶으면 발바닥 아픔도 느껴지고 더 피곤해지고 하는 원리일 것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뜻을 품고 노력하는 친구들인데, 뜻한 바는 이루어지지 않고 대중하고는 점점 멀어지고……. 내가 평택에 살아서 더 그렇게 느끼는 지도 모르겠어요. 민주노총도 이제 이명박 정권 하에서 해고자가 너무 많으니까 투쟁 기금도 서서히 바닥나고. 얼마 전 쌍용차 지부장이 22번째로 죽었지요. 지난번만 해도 형식적이었거든요. 노동자의 죽음을 가지고 또 선전의 장으로 만드는구나, 싶은 느낌도 들었고. 그런데 이번 집회에서는 ‘힘들다’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제 할 말이 없습니다’ 하는데, 다음번에는 저 친구가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데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선거가 모두 끝났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정치인이란 직업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 세계에 하루 8시간 노동이란 없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 1시까지 뛰어야 한다. 그에 비해 유권자들의 의식은 너무 저급하고 요구사항도 많다. 뭐 해 달라, 우리 동네에 가스가 안 들어오는데 해결해 달라 등등. 그러다보니 일은 비서관들이 다 하고, 국회의원은 동네별로 쫓아다니며 행사에 얼굴 내미느라 바쁘다. 송 원장은 선거 제도가 대선거구제로 바뀌어서 지역구를 없애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당에서 농업 관련해 제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 직책은 국민참여당 농업발전특위위원장이에요. 우리 정치계에 농업 정책이 너무 없어요. 이쪽 일을 아는 사람도 없어요. 하지만 축산 분야는 내가 진짜 잘 알거든요. 이 바닥 비리도 알고, 구름 잡는 수준인 정치권의 정책도 잘 알지요. 진보 정치권에서 특히 유기농, 생태 얘기 많이 하는데 그건 사실 0.1% 부자만을 위한 얘기지요. 현실을 몰라서 그래요.”
“진보 정치권에 제대로 된 농업 정책 만드는 데 기여할 것”
국민의 혈세가 엉뚱한 데로 새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사용하는 가축 방역 비용은 재작년 기준으로 3조원 규모였다. 대부분 지자체에서 쓰는 세금이다. 비용이 책정되면 무조건 사용하는 것인데, 문제는 전문가 의견을 듣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엄청난 돈이 어디로 어떻게 쓰이는지, 방역은 제대로 되는 것인지 확인이 불가하다.
“몇 년 전에 마이스터 대학이라는 데 시간 강사를 나간 적이 있어요. 평생 교육기관이라고, 9억 예산을 받아서 어떤 사무관이 만들었다고 해요. 우리나라 농업 선진화, FTA 대비 등을 목표로 만들었다는데, 평생 교육을 통해서 우리나라 농민의 수준을 독일 수준으로 올리겠다, 그런 취지였어요. 독일에도 마이스터 대학이 있거든요. 마이스터는 전문가라는 뜻이죠. 그래서 딸기반 포도반 한우반 양돈반……, 각 분야에 하나씩 반을 만들었어요. 저는 충북 농업 마이스터 대학 소속 강사였는데 그것도 그쪽에서 강의 맡아달라고 사정사정을 해서 한 거였지요.”
대학이라고 만들어놨는데 강사가 없었던 것이다. 강사료는 강사료대로 나가고 그때그때 주먹구구식으로 구한 강사들로 강의의 질은 떨어지는 악순환이 생겨났다. 처음부터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일부터 벌인 탓이다. 바로 다음해부터 예산이 삭감되었다. 그 사무관 어디 갔냐고 했더니 다른 부서로 갔단다. 이런 식의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모든 분야에 근본부터 생각하는 것이 안 돼 있다고 송 원장은 한숨을 지었다.
“우리나라 일인당 GDP가 2만 달러인데 서민 생활은 왜 그렇게 가난할까요? 돈이 엉뚱한 데 쓰여서 그렇지요. 시스템만 잘 돌아가면 서민들이 피어날 거예요. 너무나 많은 돈이 새는 거예요. 소독약 등 납품 비리가 많아요. 웃기는 건 마진이 높을수록 채택이 돼요. 마진이 낮으면 로비자금이 안 나오니까요. 물론 감시 시스템이 있지만, 형식적일 뿐이죠. 한 분야에서 25년 정도 있어보니까 이쪽 분야가 한눈에 보여요.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바른 농업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제가 할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