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구원은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이루어야 하는 것인가?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지금은 교세가 말이 아니지만 과거에 한참 포교활동을 하던 구원파 전도자들이 기성교인들에게
물어보던 말이다. 이 질문을 듣고 쩔쩔매던 많은 기성교인들이 바로 그들의 전도대상이다. 장로교단에서 세대주의 학파의
성도들도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당신의 구원의 날자는 언제 입니까? 몇년 몇월 몇일을 쓰세요. 라고 질문하는 것이
그 학파 신학교 입교시에 답안을 써야만 한다. 나도 유학시절 그 학파 신학교가 명문신학교이기에 입학하기 위하여
질문에 답하여야 하는데 도무지 자신이 없어 대강 기억나는 날자를 적었다. 그 후에 신학을 하면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구원은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던 시기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던 날자인가?
아니면 맨 처음 세례를 받은 날자인가? 참으로 어려웠다.
성경에 보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에 차 있던 전도자들이 예수님에 게 한 방 먹는 황당한 경우가 있다.
바로 마태복음 7장이다.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복음 사역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이들을 치료하던 그들이 막상 죽어서 주님 앞에 가니,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거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모든 심판의 잣대의 기준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들 모두 누구에게나 한 순간에 이루어 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불법을 행한 다는 것을 범죄자를 지칭하는 말로 해석 해서는 안됩니다.
원어의 뜻은 무법자, 즉, 법없이 시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의 법을 모르고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른 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사도 바울 마저도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구원의 줄을),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라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오랜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지만 광야 생활중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들이 쌓이고 쌓여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도 들어 가지 못합니다. 지도자였던 모세에게도 허락되지 못하였다는 것 입니다.
이 가나안 땅이 바로 천국이라면, 애굽의 대 탈출은 우리성도들이 세례를 받던 그 싯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죠. 즉, 구원의 선택을 받은 것이죠. 광야 생활은 우리들의 기나긴 인생입니다.
광야 생활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판단, 구원의 기준이 되는 것은 우리의 광야 생활 즉, 인생살이가 고달프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왔는가가 각 사람의 구원의
최종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100% 완벽한 무죄의 생활은 아무리 성직자라도 우리가 이루기 어렵지만 사소한 잘못된 행동들에 대하여는,
이 마지막 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자비(은혜)가 최종 심판의 잣대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항상 성령안에서 하나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삶을 살도록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럼으로 구원은 우리의 믿음으로 시작이 되지만 (즉, 은총으로 주어졌지만 ) 구원의 완성은 우리의
삶의 최종 정리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얼마나 더 은혜를 받을
것인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고 권고하신 것처럼 항상 겸손하고 낮은 자세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 사역에 참여하라는
의미입니다.
결론은 구원은 주어진 것이고 믿음으로 시작은 되었지만 구원의 최종 완성은 우리가 실천적 행동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를 어지럽히는 타락한 교계 지도자들을 뭐라고 할 것도 아니고 눈살 지프리는 행동을 하는
자칭 그리스도인 이라는 자들도 상관하지 말고 오직 사도 바울과 같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주자의 심정으로
푯대를 향하여 달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문제에 떨지말고 항상 하나님이 신뢰하는 아들 딸,
그리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사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종교, 행함이 있는 종교, 신뢰의 종교, 기독교라는 것은 바로 그런 종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