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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26)
- 네덜란드(암스텔담과 헤이그)의 미술관들
김철교(시인, 배재대 명예 교수)
2015년 7월 6일 (월) 암스텔담 국립미술관(레이크스 뮤지엄), 반 고흐 미술관, 렘브란트 하우스
‘네덜란드’ 하면 경영경제학자에게는 제일 먼저 튤립 투기 사건이 떠오를 것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는 성욕에 뒤지지 않는 인간의 기본 욕망이 아닐까. 지금도 도박으로 재산도 명예도 날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카지노와 복권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1637년 2월5일 네덜란드 튤립 경매장에서 튤립 한 뿌리가 당시 목수의 20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역사상 최고가인 5200길더에 팔렸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황금기였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스페인 펠리페2세는 속령이던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박해했고, 네덜란드는 1572년 반란 끝에 독립하게 되어 부를 축적한 시민집단(레헨트: Regent)이 지배계급이 되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귀족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1630년대 튤립열풍의 배경에는, 누구나 돈을 벌어 지배계급이 되고 싶은 열망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군사적인 위협이 사라졌고 유럽국가들 중 최고의 국민소득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네덜란드의 모든 산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성실하게 돈을 벌려는 의지보다 일확천금을 향한 욕망이 불길같이 사회를 휩쓸었다.
튤립광풍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정점에 이르다가 결국 2월에 비극적인 종말에 이른다. 실수요와는 상관없이 투기목적으로만 거래되던 튤립 값이 지나치게 치솟으면서 불안감이 퍼져갔고 갑작스런 공포가 네덜란드를 휩쓸자 투매현상과 함께 가격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파산자들이 쏟아졌고 공황상태에 빠지자 네덜란드의 의회는 원래 사기로 약속한 가격의 3.5%만 내면 계약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 수습책을 내놓아 진정시키기에 이른다.
이같은 네덜란드의 튜립 투기는 경영경제교과서에서 최초의 선물거래(先物去來) 사례를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일화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아직 꽃이 피어나기도 전인 땅속의 구근에 대해서도 매매가 이루어졌다. 구매자는 미리 선금을 주고 나중에 피어날 꽃을 확보해 두었다가 실제 꽃이 피었을 때 훨씬 비싼 가격으로 되팔아서 큰 이윤을 남겼다. 오늘날 특히 원유를 비롯한 국제원자재시장에서 물건을 직접보고 사는 거래보다 이러한 선물거래의 비중이 훨씬 높다. 예를 들면, 계약은 지금하지만 원유의 실물 인도는 1개월 후 등 일정기간이 지나서 이루어지는 거래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돈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도 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튤립 한 뿌리를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는 광풍이 네덜란드에 불었다. 어떤 사람은 돈도 되지 않는 예술에 한평생을 매달린다. 고흐의 작품도 생전에 싼 값으로 단 한 점만 팔렸을 뿐이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Red Vineyards in Arles), 1888, 캔버스에 유채, 73X91Cm, 푸슈킨 미술관, 러시아>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선교를 한다고 가족을 모두 데리고 해외 오지에서 죽을 고생을 한다. 결국 나이 들고 건강이 나빠져 귀국해도 선교 잘했다고 환영해 줄 교회나 단체도 없다.
나는 왜 편히 말년을 즐기며 살지 못하고, 한 때는 시 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미치더니, 이제 평론으로 등단을 하고, 소설을 쓰고 희곡을 쓴다고 밤새우기를 밥먹듯이 하는가. 집사람 말에 의하면 ‘당신보다 그림도 더 잘 그리고 작품도 더 잘 쓰는 사람이 지천인데’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답이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저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사람 꼴이 아닌가. 살아 있으면 뭔가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어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생을 사서하고 있는 꼴’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서 암스텔담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개최된 국제문예창작학회를 마치고 귀국하는 일행보다 한 시간 늦게 홀로 모스크바 공항을 19:55분에 출발하여 암스텔담에 22:35분에 도착하였다. 암스텔담 시키폴 국제공항에서 호텔이 있는 암스텔담 중앙역까지 기차로 20여분 걸렸다. 짐을 찾느라고 시간이 걸려서 호텔에는 저녁 12시가 거의 다 되어 도착하였다. 비행장에 내려 기차를 타는 곳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정다운 백인 부분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특히 부인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국내나 해외나 물어볼게 있으면 부부나 연인들에게 물어보면 백발백중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내가 묵은 암스텔담 이비스(ibis)호텔은 기차역사 옆에 세워져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기차길이 있다. 프론트에서 5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서, 기차길 위 구름다리를 가로질러 건너편에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 내가 묵을 방에 이르게 된다. 역사 밖 드넓은 광장에는 자전거 거치대가 여러 개 있고 엄청나게 많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대형 자전거 대여점이다. 암스텔담 시내는 넓지 않아 대부분 자전거로 다닌다고 한다.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중앙역광장에서 트램 2호선을 타고 암스텔담 국립미술관(레이크스 미술관: Rijksmuseum) 10시 개장시간에 맞추어 갔다. 걸어서도 30분이면 갈 수 있다고 하지만 날씨가 더워 우선 트램을 타고 가서, 돌아오는 길에 여기 저기 들르기로 했다.
네덜란드는 원래 스페인 지배에 있었다. 북부 7주는 독립운동을 통해 1579년 네덜란드로 독립하였고, 남부 10주(플랑드르 지역)는 나중에 1830년 벨기에로 독립한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들어와 외교,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융성하였고, 미술의 꽃도 활짝 피어났으며, 그 중심에 렘브란트(Rembrandt), 베르메르(Vermeer), 할스(Frans Hals) 등이 있다.
국립미술관 0층을 관람하고 1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비상사태가 발생했다고 모두 나가라고 한다. 사태가 정리되면 다시 입장할 수 있다고 하여, 나는 인접해 있는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으로 갔다. 1973년 반 고흐를 기념하여 문을 열었는데 고갱, 모네, 로트렉 등의 작품들도 눈에 띄였다. 다른 미술관과는 달리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반 고흐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국립미술관으로 돌아가니 상황이 종료되어 관람을 재개할 수 있었다.
국립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꽃시장을 거쳐 렘브란트 하우스(Rembrandthuis)에 들렸다. 렘브란트가 1639년부터 17년간 머물며 야간순찰(Night Watch)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을 완성한 곳이다. 작업실에는 각종 물감을 만들던 흔적과 별별 그림소도구들이 가득했다. <야간순찰>을 비롯한 렘브란트의 주요 작품들은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여기에는 많은 에칭 작품과, 렘브란트의 스승(Pieter Lastman; 1583-1633)과 제자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렘브란트가 처음으로 에칭 작업은 물론 드로잉 작업에 일본에서 가져온 한지를 많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자세한 한지의 수입 경로와 사용 사례에 대한 설명이 벽에 게시되어 있었다.
호텔로 돌아왔으나, 여름이라 낮 시간이 길어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아 1시간짜리 유람선을 타고 암스텔담 시내를 둘러보았다. 암스텔담은 운하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마치 서울 시내버스노선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유람선에서 내려 홍등가도 기웃댔다. 구교회(Oude Kerk)를 중심으로 형성된 홍등가 좁은 골목길은 야간 관광코스로, 많은 단체 관광객들이 호기심 많은 얼굴로 몰려다니며 여기저기 기웃대고 있었다. 작업 중인 곳은 커튼이 닫혀 있고, 임자를 만나지 못한 여인들은 커튼을 열어놓고 비키니 차림으로 지나가는 남정네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성매매가 합법화 되어 있다. 무엇보다 거대하고 고풍당당한 교회 주변이 홍등가라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요금은 50유로, 미인을 안아보는 가격치고는 저렴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 레이크스 뮤지엄(암스텔담 국립미술관)
이 미술관의 소장품은 1800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아우 루이 나폴레옹이 얀 아셀린의 <위협적인 백조>를 구입한 것이 최초이며, 1815년 프랑스의 통치가 끝난 후 레이크스 뮤지움이 설립된다. 프랑스에서 강제 몰수당한 미술품이 돌아오고, 미술품 구입이 적극적으로 재개됨으로써 새로운 미술관 건립이 필요했고 1975년 국립미술관으로 개관된다.
특히 중세부터 몬드리안에 이르기까지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소장 작품 중에 팔코네(Etienne-Maurice Falconet)의 <앉아있는 큐피드(대리석 조각), 1757>, 캄펜(Hendrick Avercamp)의 <겨울의 마을풍경(Winter Landscape, 1608>, 얀 아셀레인(Jan Asselun)의 <위협적인 백조, 1652>,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유쾌한 술꾼, 1628-30>과 <부부의 초상, 1621>, 렘브란트(Rembrandt)의 <자화상, 1628>과 <야간순찰, 1642>과 <사도바울로 분장한 자화상, 1661>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 1630>, 베르메르(Vermer)의 <편지를 읽는 부인, 1663>과 <연애편지, 1663>와 <우유를 따르는 아낙, 1658>, 고흐(Van Gogh)의 <자화상, 1887> 등이 유명하다.
(1) 얀 아셀레인, <위협적인 백조>
얀 아셀레인, <위협적인 백조(The Threatened Swan), 1640-52, 캔버스에 유채, 144 X 171Cm, 암스텔담 국립미술관>
커다란 백조가 날개에 힘을 주어 퍼덕이며 고개를 공격적으로 숙이고 백조의 둥지로 헤엄쳐 다가오는 개에게 꽥꽥 거리며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림 속의 백조알에는 ‘네덜란드(Holland)’라는 단어가 써져 있고, 개에는 ‘적(Enemy)’라는 단어가, 백조에는 ‘총리(Grand Pensionary)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백조는 당시 홀랜드 주의 지도자이며 총리인 드 비트(Johan De Witt)를 상징하고, 왼쪽 검은 개는 신생 독립국 네덜란드를 노리는 영국을 의미하고 있다. 네델란드와 영국은 두 차례의 전쟁(1652-54, 1665-67)에서 비트가 유리한 조약을 체결한바 있는데, 이 그림은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1652년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적극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얀 아셀레인(1610-52)은 네덜란드 디에프에서 출생하고,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하였다. 1641년경 로마로 가서 네덜란드인 화가 집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1645년에 귀국하여 암스테르담에 살면서, 이탈리아 추억에 바탕을 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2) 렘브란트 <야간순찰>
렘브란트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야간순찰), 1642, 캔버스에 유채, 379×453cm,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걸려 있는 <돌아온 탕자>,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에 있는 <야간순찰>, 헤이그 마우리츠 후이스 미술관의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은 반드시 보아야 할 렘브란트 걸작이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한 작품을 보기 위해 그 미술관을 방문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까.
원래 <프란스 바닝 코크와 빌렘 반 라위텐뷔르흐 민병대>로 알려진 <야간순찰>은 렘브란트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던 1642년에 그려진 ‘그룹 초상화’다. “전통적인 그룹초상화와 달리 완벽한 명암대비와 극적인 동작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초상화법의 관습을 전복시키면서 무미건조한 주제를 역동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장면속 34명 중 실제 인물은 18명이며, 수비대를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표현된 소녀처럼 나머지는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저마다 다른 복장의 대원들이 각자 다른 동작으로 화면 뒤에서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대열을 정비하고 있는,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순간이 화면에 담겼다. 그는 빛의 마술사답게, 어두운 배경 속에서 왼쪽에서부터 들어오는 측면광선으로 군인들 가운데 있는 소녀에게 인위적으로 강한 빛을 비추어, 빛을 그림의 구성요소로 완벽하게 사용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시민군은 14세기에 조직된 것으로 이 도시의 독립과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전통적으로 성문을 지키고 치안을 담당했던 이들은 17세기경에는 일요일마다 시가지를 행진하는 형식적인 모임이 되었다. 이 그림에는 귀족처럼 차려입은 사람도 보이나 시민군 대부분은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3)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The Milkmaid), 1660, 캔버스에 유채, 45 x 41 cm, 암스텔담 국립미술관>
베르메르(Johannes Vermer)의 작품도 여기 암스텔담 국립미술관에 있는 <우유를 따르는 여인, 1660>, 헤이그의 마우리츠후이스 미술관에 있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1665>,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소녀의 초상, 1665-67>은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의 가치를 높여주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소매를 걷어붙인 시골 아낙은 온통 질그릇에 우유를 따르는데 집중하고 있다. 아래를 처다 보면서 왼손으로 항아리를 조심스레 받쳐 들고 우유가 졸졸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후덕하게 생긴 몸매와 큼지막한 빵 덩어리도 조화를 이루면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마음은 한없이 푸짐한 모습이다. 베르메르는 검소하게 꾸며진 실내에서 빛의 효과를 교묘하게 극대화시키고 있다. 창문에는 유리가 깨진 곳으로 빛이 실내로 들어와 빛의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부엌 벽에 못이 그림자를 달고 있고 또 못이 빠진 자리도 움푹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사소한 세밀함이 빛의 역할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얀색의 우유는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검소한 부엌 시골 촌부의 식탁에서 이처럼 푸짐한 행복을 엿볼 수 있는 그림도 적지 않을 것 같다.
2. 반 고흐 미술관
1973년 개관한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은 고흐의 회화(약 2백여점)와 소묘 작품(약 5백여점)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어서 그의 일생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미술관에서 판매하는 도록에는 시대별로 대표적인 그림과 일생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고흐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나는 항상 미술관에 가면 우선 간략한 소개 팜프렛과 도록을 사는데 입장료보다 돈이 더 든다. 간략한 팜프렛에는 대개 해당 미술관에서 추천하는 그림과 그 위치가 표시되어있다. 도록은 소장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 있어서 화가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자료들이다.
반 고흐 미술관 본관은 게리트 리트벨트(Gerrit Thomas Rietveld)가 설계하였으며, 1999년에 문을 연 부속 전시관은 일본인 건축가, 쿠로카와(Kisho Kurokawa)가 설계를 맡았다.
1890년 빈센트 반 고흐가 삶을 자살로 마감하자, 그의 작품들은 그의 동생 테오(Theo)에게 상속되었다. 하지만 6개월 후, 테오마저 세상을 떠나 다시 테오의 미망인 요한나(Johanna van Gogh-Bonger)에게, 요한나의 사후에는 그녀의 아들 빈센트 빌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에게 상속되어, 1925년부터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에 전시되었다. 정부 주도로 빈센트 반 고흐 재단(Vincent van Gogh Foundation)이 창립되어 고흐의 작품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네덜란드 정부가 반 고흐 재단 컬렉션을 전시할 반 고흐 미술관을 건립하였다.
미술관 측에서 추천하는 대표작으로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1885>, <침실(Bedroom in Arles), 1888>, <노란 집(The Yellow House), 1888>, <해바라기(Sunflowers), 1889>, <자화상(Self-Portrait as a Painter), 1887-88>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흐의 작품 이외에도 고갱(Gauguin), 모네(Monet), 로트렉(Toulouse-Lautrec) 등 고흐의 동시대 작가들의 다양한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몇년전 나는 고흐가 주로 그림을 그렸던, 파리, 아를, 오베르-쉬르-와즈를 방문한 적이 있어 그의 삶과 그림들을 이미 앞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고흐가 그린 꽃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암스텔담 반 고흐 미술관 안내 팜프렛>
1888년 2월, 고흐는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따뜻한 프로방스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마침 도착한 후 봄이 찾아와 <분홍빛 과수원(The Pink Orchard)>, <분홍빛 복숭아 나무(The Pink Peach Tree)>, <흰색 과수원(The White Orchard)> 등을 그렸다.
이처럼 아를(Arles)에서는 아름다운 풍경과 꽃과 나무 등을 많이 화폭에 담았고, 1888년 10월에 아를로 내려온 고갱과 함께 9개월 동안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노란 집(The Yellow House)>, <해바라기(Sunflowers)>, <침실(Bedroom in Arles)>, <추수(The Harvest)>, <고갱의 의자(Gauguin’s Chair)> 등을 그렸다.
하지만 여기에서 고흐는 첫 번째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며 고갱을 칼로 위협하고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게 된다. 이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퇴원 후에도 안정을 찾지 못하다가 1889년 5월 스스로 다시 생 레미(Saint Remy)의 정신병원을 찾게 된다.
생 레미 시절은 육체적으로는 정신병에 시달리는 암울한 시기였지만, 예술적으로는 수많은 명화를 그린 시간이었다. <아이리스(Irises)>, <꽃 피는 아몬드 나무(Almond Blossom)>, <별이 빛나는 밤에(The Starry Night)>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또한 잘 알려진 종교화가들을 비롯하여, 고흐가 좋아한 밀레의 그림들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그리기도 했다. 드라크로와의 그림을 본 딴 <피에타(Pieta)>,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그린 <무덤에서 일어난 나사로(The Raising of Lazarus), 밀레의 그림을 참고한 <씨뿌리는 사람(The Sower)> 등이 있다.
1890년 5월 오베르-쉬르-오와즈로 옮겨서 7월 27일 자살할 때까지, 현지 정신과의사 가쉐(Paul-Ferdinand Gachet)의 도움을 받으며, 거의 매일 한편씩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특히 이 시기의 그림 중에 밀밭이 유명하다. <천둥먹구름이 낀 밀밭(Wheatfield under Thunderclous)>, <까마귀가 있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그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해바라기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은, <해바라기, 1887, 캔버스에 유채, 43x6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해바라기(Fifteen Sunflowers in a Vase, 1888), 캔버스에 유채, 93x73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해바라기, 1888년, 캔버스에 유채, 91x72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그리고 여기 고흐 미술관에 있는 <해바라기, 1889, 캔버스에 유채, 95x73Cm,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텔담>가 있다.
고흐가 맨 처음 해바라기를 그린 것은 파리에서 1887년 여름이었다. 그리고 1년후 아를에 와서 노란집(Yellow House)를 장식하기 위해 해바라기 그림을 몇점 그렸다. 세 점은 파란색을 배경으로 하였고 하나는 노란색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는 이 그림 중에 완성한 2점을 고갱이 와서 머물던 침실에 걸었다. 고갱이 아를을 떠난 후 고흐에게 자기 방에 걸렸던 해바라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고흐는 이 그림들을 보내주는 것이 싫어서 똑같은 그림을 다시 그렸다. 현재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것은 바로 고흐가 1889년 다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아를을 떠난 지 6년 뒤에 고갱은 아를에서 자신이 머문 방에 대해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해바라기가 노란 벽지를 배경으로 해서 걸려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고갱은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했고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기까지 했다.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1888, 캔버스에 유채. 고흐 <해바라기, 1889, 캔버스에 유채, 95x73cm,
73x91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텔담>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2) 아이리스
고흐는 붓꽃(아이리스)을 아를과 생-레미에 있는 동안 그렸다. 붓꽃이 불안한 영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 정원의 화단에 피어 있는 붓꽃을 보고, 아를의 노란집을 장식하려고 그렸던 <해바라기>와 그 구성 면에서 유사한 그림을 그렸다. 꽃병은 배경과 유사한 톤의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그림자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 보다 먼저 아를에서 <아이리스가 핀 아를 부근 들판>을 그렸다. 고흐는 아를 부근의 풍경들이 가지고 있는 색에 대해 매료되었고 특히 노랑과 보라색의 대비를 매우 좋아했다. 고흐는 특히 파리에서 일본판화 수집에 열을 올렸는데 그의 꽃 그림에 그 영향이 많이 배어 있다.
내가 몇년전 캘리포니아에 있는 폴 게티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본 아이리스(1889)에서도 강력한 생명력을 볼 수 있었다. 고흐가 생-레미에서 그린 것이었다.
고흐 <아이리스(Irises, 1980, 캔버스에 유채, 92x73.5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텔담.>
고흐 <아이리스가 핀 아를 부근 들판(Field with Irises near Arles),
1888, 캔버스에 유채, 54 x 65 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텔담>
고흐 <아이리스, 1889, 캔버스에 유채, 71 X 93Cm. 폴 게티 미술관, 미국 캘리포니아>
(3) 꽃피는 아몬드 나무
고흐 <꽃피는 아몬드 나무, 1890, 캔버스에 유채, 73.5 X 92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텔담>
고흐가 생레미 요양원에 있을 때, 동생 테오가 아들을 낳아 형 이름을 그대로 붙여 주었다. 조카가 태어나기를 오랫동안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고흐는 조카에게 <꽃 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려 선물도 주었다. 일본풍이 물씬 풍기는 그림이지만 봄의 숨소리가 가득한 아몬드 나무는 아기 탄생을 축복하는 선물로 가장 어울리는 소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7월 7일(화) 헤이그 마우리츠후이스(Mauritshuis) 미술관
암스텔담 중앙역(Amsterdam Centraal Station)에서 기차를 타고 헤이그 중앙역(Den Haag Centraal)까지 약 1시간 걸려서 도착하였다. 역에서 마우리츠 후이스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10여분 걸렸는데 10시 개장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주위에 있는 빈넨호프(Het Binnenhof)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옆에는 작고 아담한 호수도 있다. 빈넨호프에 있는 기사관(Ridderzaal)은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으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고종이 파견한 특사들이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려고 한 곳이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준열사는 평화의 궁(Vredespaleis)에서 순국했다.
(1)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 캔버스에 유채, 44.5 × 39cm, 마우리츠후이스 미술관, 헤이그 네덜란드>
빈넨호프 바로 옆에 있는 마우리츠후이스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바로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때문이다. 물론 베르메르가 태어난 고향인 델프트의 남쪽 항구를 그린 그림 <델프트 풍경(View of Delft, 1660> 도 유명하다. 이미 앞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소녀의 초상(Portrait of a Young Woman>을 설명할 때 자세히 언급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렘브란트의 그림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캔버스에 유채, 169.5×216.5cm, 마우리트하위스 왕립미술관>
렘브란트로 하여금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한 작품은 그가 처음으로 그린 ‘그룹 초상화’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Anatomy Lesson of Dr. Nicholaes Tulp)>다. 직업 조합이나 자치 단체에서 주문했던 그룹 초상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장르였다. 1632년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조합이 주문한 조합원의 그룹 초상화인 이 작품은 당시에도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덕분에 그는 명문가의 딸이 사스키아와 결혼하는 행운을 얻었다. 렘브란트가 독립적인 공방을 차린 후, 그룹 초상화로는 처음 주문을 받은 것인데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자 많은 단체에서 주문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단체사진을 찍을 때처럼, 모두 경직된 자세로 앞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그렸던 당시의 화가들과 달리 모델을 화면에 나란히 배치하지 않았다. 모델은 모두 그림의 왼쪽에 모여 있고, 화면의 오른쪽에는 해부대에 눕혀진 시신과 강의 중인 툴프 박사를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구도는 톨프 박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각자의 중요성에 따라 화면에 배치되었다. 7명의 수강생들은 책을 보는 사람, 상처부위를 자세히 살피는 사람, 강의 내용을 경청하는 사람 등 각자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비대칭적 구도, 다양한 표정과 각도의 인물의 얼굴이 만드는 다이나믹한 구성, 그림의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어둠의 대조는 렘브란트 특유의 기법으로 관람객들을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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