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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명소 스크랩 창덕궁옥류천(11.10)
설악산 추천 0 조회 30 07.11.18 08: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창덕궁옥류천(11.10)


예전에 늦가을에 창덕궁을 간 적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단풍색깔이 뇌리에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같은 단풍도 색깔이 그렇게 다 다른지 이것이 우리나라 조경의 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가을에 창덕궁 단풍을 구경하기로 하고 인터넷에 옥류천 예약을 할려고 보니 어느 새 모두가 예약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옥류천은 11월까지만 예약이 되고  그 이후에는 관람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 청소를 끝내고 10시에 집을 나서서 안양역에서 전철을 탔는데 용산 급행이다.

용산에서 청량리 행으로 갈아타고 종로 3가에서 3호선으로 갈아탔는데 3호선이 일찍 오지 않아서 오래 기다렸다.

안국역에서 내려서 부지런히 창덕궁에 가서 옥류천 표를 살 수 있냐고 물으니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현장 판매 10매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건 12시 30분에 판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많아서 바빠서 인 지 다른 사람 표 팔게 비키라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니 빨리 어디가서 김 밥이라도 먹고 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덕궁에서 현대빌딩을 조금 지나가니 김밥천국 집이 있다.

그곳에서 김밥 1줄을 천원에 사서 먹고 다시 창덕궁에 가니 옥류천 들어갈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다.

거기에 낑겨 서 있으니 표 파는 사람이 그 옆 의자에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11시 30분부터 1시간을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표를 샀는데 다행히 7번째였다.

표를 사고 그 옆 화장실을 다녀오고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기다렸다.

오늘따라 창덕궁 들어갈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다들 창덕궁 단풍이 좋다는 것을 들어서 아는 것같았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도 많았고 초등학생들도 단체로 오기도 하고 노인들도 고궁이 무료이니 많이들 오신 것같았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와 엄마의 대화가 엄마 저 문에 있는 철망이 뭐여요? 묻는 것이다.

엄마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미국 대통령 이름이 뭐냐고 부시라고 하면서 저 철망의 이름도 부시란다.

부시는 새들이 저 위에서 집을 짓지 않도록 새가 집을 지으면 뱀이 올라가고 그러다 보면 새의 새끼가 떨어지고 살생이 벌어진다.

그리고 새가 그 곳에 살면 똥도 누고 지저분해 진다. 그러면 저 단청이 망가진다.

그래서 예전부터 명주실로 부시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동선으로 한단다.

가르쳐 주었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잘 아냐고 묻는다.

이것은 우리 나라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간단히 말해 주었다.

드디어 1시가 되니 출입을 시킨다.

돈화문 들어가서 바로 앞에 창덕궁 궁궐 설명과 그림이 있는 곳에서 해설사 선생님이 설명을 하신다.

개량한복을 입으신 ?으신 여자분이시다.

옥류천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옥류천이라고 쓴 패찰을 주셔서 모두 목에 걸게 하신다.

우리가 가는 길을 설명을 하신다.

후원으로 가는데 부용지를 거쳐 옥류천으로 간다고 하는 것이다.

먼저 부용지와 부용정에 갔는데 우리 해설사 선생님 정말 청산유수처럼 말씀을 잘 하신다.

줄줄줄줄.. 우리는 아무리 읽어도 말이 줄줄줄 안나오는데 젊어서 그런지 말에 거침이 없으시다.

천원지방도 설명하시고 주합루, 규장각, 영화정도 상세히 설명을 하신다.

그런데 창덕궁 안내판 있는 곳에서 여기 처음 오신 분 있나요? 하고 해설사 선생님이 설명을 하니 약 7, 8명이 손을 든다.

창덕궁 일반 관람을 하고 특별관람을 해야 하는데 이 분들은 번지수를 잘못 ?으신 것같은데 할 수 없지 아니한가.

부용지에서 아이가 물고기 문양을 발견하고 구경한다. 아이에게 그 물고기 무지 유명한 것이라고 하니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어수문 옆 단풍이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은 아직은 검은 빛을 띠고 있다.

예전에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 그 단풍을 배경삼아 필름 카레라로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단풍 무지 선홍빛 이었던 기억이 난다.

해설사 선생님은 영화당 앞에서 15분 뒤에 만나자고 자유시간을 주신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주위의 단풍을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이 가을에 창덕궁에 와서 단풍 사진을 찍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운인 지 모르겠다.

1시 45분쯤 영화당에서 옥류천을 향하여 출발을 하였다.

불로문 옆 애련지 옆에 차단목이 있는데 그 곳에서 아까 옥류천 관람패찰을 확인하고 출입을 시키는 것이다.

반도지에 갔는데 해설사 선생님께서 이 연못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고 묻는다.

우리나라 지도라고 가르쳐 주시고는 이 지도가 방향이 거꾸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다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신다.

그 연못 옆에 관람정이 있는데 정자의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부채꼴 모양이다.

우리나라 연못 옆의 정자는 대개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그고 있다. 이것이 신선사상에서 비롯된 족욕 같은 의미이다.

반도지의 원래 모습은 네모2개에 원이 하나라는 것과 호로병이라는 것이 옛날 문헌에 나온다.

관람정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존덕정이 있다.

존덕정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이 그려져 있고 정조대왕의 글이 현판으로 게시되어 있다.

한마디로 내가 임금이니 신하들은 잘 하라 이런 뜻이란다.

존덕정은 지붕이 이중으로 이어져 있다. 자세히 보니 그 사이에도 단청이 있었다.

그 옆에 펌우사와 승재정이 있다.

옥류천에는 정자가 몇 개 있다.

옥류천 바로 앞에 소요정이 있고 초가지붕을 한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이 있다.

옥류천은 평평한 바위에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것이 폭포처럼 떨어지게 한 미니어쳐 같은 것이다.

예전에 왕이 그 물에 술잔을 띠워서 신하와 함께 술잔이 흘러가는 동안 시 짓기 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옥류천이란 글은 인조의 글씨고 그 위의 한시는 숙종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옥류천에서 나가는 길에 언덕에 취규정과 취한정이 있었다.

여기저기 쉬어 갈 수 있는 정자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청심정을 갈려는데 먼저 간 사람들이 나가는 길로 나가는 것이다.

해설사 선생님이 불렀지만 사람들은 무조건 먼저 가신다.

청심정에 가보니 정자 앞에 돌 거북이가 한 마리 있다.

후원에 빙천과 능허정이 있었지만 그곳은 원래 안 가는 곳인 지 아니면 사람들이 먼저 나가서 그런지 그곳에 가보지는 않았다.

나가는 길로 나가니 연경당 옆길로 해서 나오는 것이다.

연경당에서 사진 몇장을 찍고 언덕을 넘어서 그 오래 되었다는 나무를 지나서 향나무 구경을 하고 내려왔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옥류천이 별볼일 없다고 하였지만 옥류천의 진가는 그 옥류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옥류천을 가는 도중과 돌아오는 도중에 보는 정자와 경관인 것이다.

아직은 단풍이 덜 들었다고 하였지만 이런 풍광을 본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같다.

우리 가까운 곳에 이런 경관이 있고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오늘 수고해 주신 해설사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래 자료는 창덕궁, 창덕궁의 아름다움, 인터넷창덕궁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7.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

조선의 궁궐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의 동남쪽 모퉁이 돌에는 뛰어오르는 형상의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부용정(1792년 건립)은 十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부용지(芙蓉池)는 가로세로가 30미터에 달하는 네모꼴의 큰 연못이다. 동궐도를 보면, 옛날에는 이곳에 배를 띄워 놀았음을 알 수 있다. 그 한 가운데에는 동그란 섬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전통적 우주관에서 비롯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것이다. 전통건축에는 이런 숨은 뜻들이 많다. 음양(陰陽), 오행(五行 - 木金水火土), 사신(四神 - 靑龍, 白虎, 朱雀, 玄武), 십이지(十二支 -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등이 그것이다.

부용지(芙蓉池)는 가로세로가 30미터에 달하는 네모꼴의 큰 연못이다. 동궐도를 보면, 옛날에는 이곳에 배를 띄워 놀았음을 알 수 있다. 그 한 가운데에는 동그란 섬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전통적 우주관에서 비롯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것이다. 전통건축에는 이런 숨은 뜻들이 많다. 음양(陰陽), 오행(五行 - 木金水火土), 사신(四神 - 靑龍, 白虎, 朱雀, 玄武), 십이지(十二支 -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등이 그것이다.

부용지의 물은 지하에서 솟아오른다. 그렇기에 이 큰 연못이 항상 마르지 않고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세종 6년(1424)에 이곳에서 우물 네 개를 찾아내어 마니(摩尼), 파리(璃), 유리(琉璃), 옥정(玉井)이라는 예쁜 이름들을 붙여준 일이 있다. 숙종 16년(1690)에 이 일대를 다시 잘 다듬으면서 옛 이야기들을 새긴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부용지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다. 숙종 33년(1707)에는 우물이 있던 자리에 연못을 파고 남쪽 가장자리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으며, 1792년에 정조가 부용정(芙蓉亭)으로 고쳐 지었다.

왼쪽 - 돌괴물 입을 통해 흘러드는 물은 비 왔을 때 잠깐 뿐이고, 사실은 땅에서 솟아나는 물이 대부분이다.

오른쪽 - 부용정은 十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그고 있다.

부용지 남동쪽 모서리엔 걸터앉기 딱 좋은 장대석이 하나 놓여있는데, 그 안쪽으로 물고기 모양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연못 속엔 진짜로 살아있는 물고기들도 있다. 부용정 맞은편에 있는 작은 문의 이름이 어수문(魚水門)이다. 왕은 물이고 신하는 물고기이니,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8.영화당(暎花堂)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부용지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영화당(暎花堂)은 1692년(숙종 18)에 고쳐 지은 건물이며, 그 현판은 영조(英祖, 21대)의 친필이다. 지금은 매점과 화장실이 있고 창경궁과도 담으로 막혀있지만, 원래 영화당 앞쪽엔 춘당대(春塘臺)라는 넓은 마당이 있었다. 정조 때부터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보고 인재를 뽑았다고 한다. 왼쪽 사진은 영화당에서 부용지를 바라본 모습이다. 연못 건너편에 보이는 조그만 건물이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다.


9.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지은 2층 누각이다.

아래층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 서고이고 위층은 열람실이다.

초기 왕실도서관으로 출발한 규장각은 점차 정책연구기관으로 기능하여

정조의 개혁 정치와 조선 중기 문예 부흥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이덕무 등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다양한 인재들이 여기서 활동하였다.

주합루라는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옆의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이 일대를 창덕궁 후원의 백미(白眉)라고 한다. 창덕궁을 소개하는 책이나 인터넷사이트에 빠지지 않고 이 곳 사진이 등장한다. 알록달록 단풍든 모습이 단청의 색깔과도 같이 느껴진다. 뒤에 큰 건물이 주합루이고, 그 앞에 작은 정문이 어수문이다

이 일대를 창덕궁 후원의 백미(白眉)라고 한다. 창덕궁을 소개하는 책이나 인터넷사이트에 빠지지 않고 이 곳 사진이 등장한다. 단, 겨울 풍경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하얀 눈이 쌓이고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되어준다면 모르겠으나, 그런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는 정말 힘들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초라한 연못을 보게 될 뿐이다. 역시 이 곳은 초록이 울창한 계절이 최고다.

1776년 정조(正祖)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奎章閣)을 짓도록 명했다. 규장각은 개혁정치의 상징이다. 정조는 규장각에 실학자들이나 서얼출신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제일 큰 건물이 규장각 본관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래층이 바로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로서 주합루(宙合樓)라고 한다. 요즘엔 건물 전체를 그냥 주합루라고 한다.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 낡아 보이기는 하지만, 옛스러움을 느껴보기엔 아주 좋다.

주합루의 서쪽엔 책을 보관하던 서향각(書香閣)이 있고, 뒤쪽엔 별당인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 있다. 제월광풍관은 단청을 하지 않은 아주 소박한 건물이다. 이름이 참 멋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제월(霽月)'은 비 갠 뒤의 달을 뜻한다고 한다. 학자들이 독서를 즐기던 곳이다.


10.불로문(不老門) 

불로문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정말로 늙지 않을까. 사실이든 아니든, 불로문(不老門) 밑을 지나가는 것은 사람을 즐겁게 만든다. 돌 하나를 쪼아서 이렇게 만든 것인데, 그 정성이 정말 대단하다.


12.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숙종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이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애련정(愛蓮亭)은 1692년(숙종 18)에 지은 정자다. 그 앞 네모난 연못은 태액(太液), 또는 애련지(愛蓮池)라고도 한다. 연못 옆에는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애련정(愛蓮亭)은 1692년(숙종 18)에 지은 정자다. 그 앞 네모난 연못은 태액(太液), 또는 애련지(愛蓮池)라고도 한다. 연못 옆에는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왼쪽 -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물이 애련지로 흘러 들어올 수 있다.

오른쪽 - 애련지 옆엔 또다른 조그만 네모 연못이 있다. 돌괴물의 입을 통해서 물이 들어오게 해 놓았다.


18.존덕정(尊德亭)과 폄우사(砭愚榭)

존덕정(1644년 건립)은 육각정자 형태로 겹지붕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정조의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 옛날에는 다리 남쪽에 일영대(日影臺)를 설치하여 시각을 측정했다고도 한다.

폄우사는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가 독서하던 곳이다. '砭愚'란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고쳐준다는 뜻이다.

폄우사는 존덕정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집이다. 맞배지붕이고 2칸 짜리 온돌방 하나와 마루가 달려있다. 이 집은 동궐도(東闕圖)에도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830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존덕정에서 여기로 가려면 薄石을 딛고 가야 하는데, 그 돌들이 점잖은 양반들의 八字 걸음에 맞도록 깔려 있다.

존덕정(尊德亭)은 1644년에 지었다고 한다.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두 겹 지붕이 중후한 품위를 느끼게 한다. 전체 평면이 여섯모꼴을 이루고 있으며 그 내부 치장은 대단히 화려하다. 청룡, 황룡 그림과 함께 현란한 꽃무늬 단청이 그려져 있다. 창방 위 한 쪽에는 나무로 된 현판에 글씨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정조(正祖, 22대)가 지었다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이다.

그 내용은, "뭇 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하늘에 있는 달은 오직 하나뿐이다.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다. 그러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한 일" 이라는 것이다. 정조 때의 강력한 왕권을 잘 말해주고 있다. - <우리 궁궐 이야기> 가운데서 옮김.


19.관람정(觀纜亭) 

관람정은 평면이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정자이다.

관람정 앞 연못은 대한제국 말기나 일제 초기에 현재와 같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람은 닻줄 즉 배 띄움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이 부채꼴 모양을 한 정자가 관람정(觀纜亭)이다. 마루 둘레에 두른 난간이 참 예쁘다. 이렇게 나무를 휘어가며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동궐도에는 나오지 않으나, 1908년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동궐도형(東闕圖形)'에는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 쯤에 만든 듯 하다. 여름에 본 관람정은 마치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연극배우같다.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서 주위가 어두운데, 연못 있는 곳에만 햇빛이 비친다.

그 앞 연못을 '반도지(半島池)'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반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동궐도에는 이 부근에 네모난 연못 두 개와 동그란 연못 하나가 있는 것으로 나오고, 동궐도형에는 동그라미 세 개로 만든 호리병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따라서 지금같이 거꾸로 처박힌 한반도 모습으로 변한 것은 일제시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주술적으로 '저주'하기위해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진짜 뜻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왼쪽은 <사진으로 보는 近代韓國>에 실린 사진이다. 대체로 1910년대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맨 앞 정자가 존덕정이고, 가운데 나무 뒤에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 관람정이다. 동궐도형에 그려진 것처럼, 연못 가운데 잘록한 부분에 다리가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연못 너머로는 창경궁 대온실 유리지붕도 살짝 보인다. 일제는 벌써 1909년부터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꾸며놓고 백성들에게 관람시켰으며, 뒷날엔 '창경원'이라고 이름까지 바꿔놓았다.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1933년에 펴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 10권에 실린 궁궐 사진들 가운데 창덕궁 후원 관람정 앞 연못을 찍은 사진이다. 연못 가운데 있던 다리는 이미 없어졌다. 이 책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뒤 이른바 '문화정책' 시기에 '문화재 보호'를 내세워 일제가 발행한 사진집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 문화재 약탈을 위한 예비조사 성격의 것으로서, 일제는 이후에 각종 문화재들을 쉴새없이 일본으로 실어갔다.

무덤을 파헤쳐서 고려청자를 훔쳐가는가 하면, 아예 석탑이나 경복궁 자선당(資善堂)같은 건축물을 통째로 옮겨가기도 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문화재에 대한 굶주림은 제국주의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로 인해 이집트, 그리스, 멕시코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약소국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바 있다. 최근에는 이를 되찾으려는 노력들을 활발히 하고 있다.

■ 반도지(半島池) 

불로문 앞을 지나 더한층 후원의 안쪽으로 접어들면 왼쪽 꺾인 곳에 연못 하나와 연못가의 정자를 만나게 되니 이것이 반도지라 부르는 연못이고, 정자가 관람정이다. 이 반도지는 그 모양이 한반도와 모양이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사실은 일본인들이 나쁜 의도로 한반도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본래의 연못 모양은 '동궐도형'과 '동궐도'에서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 것과 현저하게 다르다.


20.옥류천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리킨다.

인조 14년(1636년)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여기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

근처의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등과 함께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에게서 특히 사랑받았던

곳이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왼쪽에 있는 둥근 바위 주변을 옥류천(玉流川)이라고 한다. 오른쪽 앞의 정자가 소요정(逍遙亭)이고, 그 뒤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태극정(太極亭)이 있다. 왼쪽 뒤에 초가지붕을 한 것이 청의정이다. 흐린 겨울날에 찍은 사진이라서 전체적인 색감이 좋지는 않다. 이 일대는 창덕궁에서는 돈화문 다음으로 '속세'와 가까운 지역이 아닐까 한다. 바로 뒤에는 성균관대학교의 시멘트 건물들이 솟아 있고, 동쪽 담장 너머로는 주택가가 있어서 개짖는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들린다.

옥류천은 인조 14년(1636년)에 만들었다. 소요정(당시 이름은 歎逝亭), 태극정(당시 雲影亭), 청의정 등을 세우고, 그 앞 바위에 둥근 홈을 파고 물길을 돌려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玉流川'이라는 인조의 붓글씨를 새겨넣었다. 1636년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다. 여진(女眞)족의 후금(後金)이 나라이름을 청(淸)이라 바꾸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인조는 남한산성까지 피난갔다가 결국 항복을 결심하고는 삼전도(三田渡)의 청군 진영에 나아가, 피가나도록 땅에 머리를 찧으며 청태종에게 절을 했다.

1690년에는 돌 윗부분에 숙종의 詩를 새겨 넣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飛流三百尺(비류삼백척) 遙落九天來(요락구천래)

看是白虹起(간시백홍기) 飜成萬壑雷(번성만학뢰)

"폭포수 물길이 300척에 이르고, 아득히 먼 하늘에서 떨어진다.

이를 보니 흰 무지개가 일고, 만 골짜기에 우레가 가득하다."

가끔 어느 책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돌난간을 두른 어정(御井) 사진이 나오는데, 그 돌난간은 이미 없앴다. 어정은 옥류천 바로 뒤에 있는 약수터이다.


앞에 초가지붕을 한 것이 청의정(淸亭)이고 그 뒤가 태극정(太極亭), 그리고 맨 뒤에 농산정(籠山亭)이 있다. 정자들이 모두 아담한 크기이다. 청의정은 정말 독특하게도 초가지붕을 얹었는데, 임금은 이 정자 바로 앞 조그만 논에 손수 모를 내어 벼를 심고, 거기서 난 볏짚으로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논에 모를 심지 않아서 잡초만 무성하다.

청의정과 함께 인조 14년(1636)에 세운 태극정은 처음에는 운영정(雲影亭)이라 했다. 겹처마에 네모지붕을 하고 있는 아주 조그만 정자다. 그 뒤에 있는 농산정은 대청과 온돌방, 부엌을 고루 갖추고 있는 조그마한 집이다.


■ 옥류천(玉流川) 

왼쪽에 있는 둥근 바위 주변을 옥류천(玉流川)이라고 한다. 오른쪽 앞의 정자가 소요정(逍遙亭)이고, 그 뒤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태극정(太極亭)이 있다. 왼쪽 뒤편에는 초가지붕을 한 청의정이 있다. 옥류천은 인조 14년(1636년)에 만들었으며 바위에 둥근 홈을 파고 물길을 돌려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玉流川'이라는 인조의 붓글씨를 새겨넣었다.

■ 청의정(淸亭) 

궁궐 안에서 초가 지붕을 한 오직 하나뿐인 특이한 정자이다. 이 청의정에 이르는 길은 옥류천 쪽에는 두 장의 판석을 놓아 만든 소박한 돌다리로 건너오고 어정 쪽으로부터는 정자와 논 주위의 좁은 길을 따라 정자에 이른다. 정자를 앉힌 곳은 소요정에서 처럼 지면보다 한 단 낮게 터를 고르고 여기에 장대석 한벌대로 기단을 쌓았다.

정자의 꾸밈새는 지붕 아래는 극히 아기자기하여 공예적이고 또 단청을 하여 화사한데 지붕만은 초가로 소박하게 하여 묘한 대비를 이룬다. 임금님은 이 정자 앞쪽에 만든 논에 손수 모를 내어 벼를 심고 또 그 수확으로 엊은 볏짚으로 이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여 농사의 막중함을 행동으로써,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 청의정(淸亭)과 태극정(太極亭) 

맨 앞 초가지붕을 한 것이 청의정이고 그 뒤가 태극정, 제일 뒤에 긴듯한 건물이 농산정(籠山亭)이다. 정자들이 모두 아담한 크기다. 청의정과 함께 인조 14년(1636)에 세운 태극정은 처음에는 운영정(雲影亭)이라 했다. 겹처마에 네모지붕을 하고 있는 아주 조그만 정자다. 가장 뒤에 있는 농산정은 대청과 온돌방, 부엌을 고루 갖추고 있는, 조그만 집같은 얼개다.

■ 취규정(聚奎亭) 

이 정자는 인조 18년(1640)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동궐도'에 그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이 옳다고 본다. 이 취규정에서는 박석을 깐 오솔길이 내려다보이고, 산마루를 지나 언덕 너머에 옥류천이 있어 쉬는 곳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취규정(聚奎亭)은 인조18년(1640년)에 세웠다고 한다. 동궐도에도 취규정의 모습이 보인다. 팔작지붕에 홑처마이고 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다.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3간 측면1간의 단층 팔작집으로 장대석 한벌대로 된 낮은 기단 위에 네모 뿔대의 운두가 낮은 다듬은 초석을 두르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민도리집이다. 처마도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고 평면은 모두 마루를 깔고 사면 모두 창호와 벽체 없이 개방하였는데 단지 삼면에만 평난간을 두른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 능허정(凌虛亭) 

능허정은 숙종 때 건물로 알려져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높은 언덕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실제로 가장 높은 곳은 이 정자에서 몇 걸음 더 가야 한다. 그 곳에 올라가도 사방이 훤히 내려다 보이지는 않는다. 숲이 워낙 울창하기 때문이다.

숙종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능허정(凌虛亭)은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높은 언덕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가장 높은 곳(표고 98m)은 이 정자에서 몇걸음 더 가야 한다. 그러나 그곳에 올라가도 사방이 훤히 내려다 보이지는 않는다. 숲이 워낙 울창하기 때문이다. 혹시 '무슨 사진이 이래?' 하고 불만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진에 보이는 그대로다.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잡초만 무성하다.


■ 청심정(淸心亭) 

이 정자는 존덕정 골짜기와 연경당 뒤쪽 골짜기 사이에 있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정자정면 조금 떨어진 곳의 장방형 석지에는 거북이 한 마리를 놓아 정자를 바라보게 하였고 빙옥지라 새겨 놓았다 이 이름은 정자의 이름 청심정과 맞고 서쪽 골짜기에 있는 빙천과도 연계되는 이름이라 생각된다.


■ 빙천(氷川) 

빙천은 어쩌면 후원 안에서 가장 추운 곳인 듯하다. 연경당 서쪽에서 북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왼쪽의 골짜기로 접어든 한적한 골짜기에 빙천이 있다. 이 골짜기는 무더운 한 여름에도 양쪽 언덕 위의 우거진 나무 숲에 햇볕이 가려 그늘을 만들므로 그 어느 곳보다도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창덕궁 후원을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실록에는 금원(禁苑), 후원(後苑), 북원(北苑) 등 표현이 많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상림(上林)이라 표현되기도 했다. 비원이란 이름은 광무(光武) 8년(1904) 7월 15일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후원의 면적은 약 9만여평에 이른다. 북악(北岳)의 동쪽 봉우리인 응봉(鷹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용같은 산줄기 중간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능허정(凌虛亭)이 있는 언덕(표고 98m)이 제일 높은 지역이다. 임진왜란 이후 20여년간을 폐허로 있다가 광해군에 의하여 복구되었다.

후원에는 17개 동의 정자(亭子)가 있는데 연산군때 건물로 농산정(籠山亭)이 있고, 인조때 건물로는 청의정, 소요정, 태극정, 취규정, 희우정(喜雨亭), 존덕정이 있다. 숙종때 건물로는 영화당, 사정기비각, 애련정(愛蓮亭), 능허정, 청심정(淸心亭), 취한정(翠寒亭), 괘궁정(掛弓亭), 몽답정(夢踏亭)이 있으며, 정조때는 주합루, 서향각, 부용정이 있고, 순조때는 의두각, 기오헌, 연경당, 농수정이 있으며 조선말 일제 초의 건물로 승재정, 관람정이 있다.

연못으로는 부용지, 애련지, 반월지(半月池), 관람정 앞 연못, 몽답지, 빙옥지(氷玉池), 연경당 앞 방지(方池, 원래 魚水堂의 방지임)가 있다. 식물은 160여종에 297,000여주가 서 있으며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주목, 음나무, 회화나무, 산뽕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 194호로 지정된 다래나무와 천연기념물 제 251호로 지정된 향나무도 있다.

괴석(怪石)은 크기가 사람의 키보다 모두 작은데, 정자 옆이나 연못가, 집안 담장 옆이나 후원의 화계에 배치되어 있다. 옥류천의 소요암에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곡수구(曲水溝)도 조성되어 있다. 후원의 수목은 계절 변화에 민감하게 변한다. 봄이면 신록이 움트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타며, 겨울에는 손시린 나목(裸木)과 설경이 아름답다.

후원은 제왕이 수학(修學)하고 수신(修身)하면서 치도(治道)를 닦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어진 정치를 하기 위한 휴식처이기도 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계적인 명원(名苑)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후원(後苑)은 조선시대의 커다란 궁궐 곧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의 하나인 창덕궁 뒤쪽에 자리잡은 정원으로 왕가에서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후원(後苑)이라기보다는 비원(秘苑)으로 알려져있다. 본래 비원이라 하지 않고 처음만들어진 조선시대 초기부터 고종때까지 후원(後苑), 북원(北苑) 그리고 금원(禁苑)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의 옛 기록에서는 비원(秘苑)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고 후원, 북원, 금원만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서도 후원이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창덕궁이 자리잡은 곳은 지금의 와룡동 남쪽이고 비원은 그 뒤인 북쪽이므로 후원은 또는 북원이라 불렀으며, 한편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고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왕가에서는 금원 또는 고종 이후에는 비원이라 불렀다. 일본인들이 후원을 격하시켜 부른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그동안 사용해온 비원이라는 말은 사실 후원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마땅하고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는 금원이라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창덕궁 후원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 초기인 태종때라 생각된다. 왜냐면 왕조실록에 태종 5년 10월 창적궁이 세워졌다 는 기록과 이듬해인 태종 6년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을 지었다는 내용을 찾아 볼수있어 이 창덕궁 동북쪽이 바로 지금의 비원 곧 후원이 있는 곳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해온정이라는 정자 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잔치를 벌이고 등놀이도하였다.

해온정은 태종 14년에는 "신독정"이라 이름을 고쳤는데 세종때부터는 별로 이 신독정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세종이 창덕궁보다 경복궁에 즐겨 머물렀던 까닭이라 생각된다. 또한편으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 정자가 사용되지 않아 자연히 없어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태종6년 5월 27일에는 인소전을 창덕궁북쪽에 짓도록하여 그터를 잡고일을 시작하였으며, 같은해 8월22일이곳에 신의왕후의 신위를 모셨고 2년되인 태종 8년 8월 26일에는 이름을 문소전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세조때에는 후원좌우에 연못을 파게하였다는 기록이 세조실록 5년 9월26일 기록에 보이고또 세조 7년 11월에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열무정"은 세조 5년에 판 연못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예종때에도 후원에서 습진 (적을 뒤쫓아가 공격하는 연습)이있을 때 이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궁궐지에는 "열무정" 북쪽에 사정기를 쓴 비석을 세워둔 비각이있다고 하였다.

지금 부용지 서쪽에 "마니" "파리" "우리" "옥정"의 4개의 샘에 대하여 기록한 비각 곧 "사정기비각"이 서 있다.

세조는 후원을 확정하였다. 세조 8년 정월에 동복 담장을 넓게 쌓고자 하여 둘레 4,200자 (약 1,272미터)로 그안에 있던 백성의 집 73채를 헐었다.또 58채의 집들을 헝어 북쪽담장도 넓게 쌓아 후원의 경계가 지금처럼 성균관에 가깝도록 하였다. 이때가 세조 9년 이였다.

창덕궁 후원이 넓어지면서도 왕과 왕의가족들이 쉬던곳이 난잡한 놀이터로 변한 것은 연산군때이다.

연산군 3년 초에 후원의 서쪽담장을 높이고쳐 쌓게 하여궁밖사람들이 궁안의 놀이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고 또 9년에는 동족담장과 서쪽담장아래쪽의 집들을 모두 헐게하였다. 더욱이 10년에는 성균관이 후원과 근접하고있다고 하여 성균관을 다른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연산군은 더 나아가 재위 11년(1505) 5월에는 새로 대를 쌓을것을 명하였으니 이것이 서총대이다. 돌을 10자 높이로 쌓고 주위에 돌양쪽 강에 배들을 띄우게 난간을 둘렀으며, 1,0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로 만들었다. 또 대앞에는 큰엿못을 파게 하였는데 감독만 900여명이고 일꾼들은 수만명이었고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남으로써 공사는 중단되었고 중종때 모두 철거되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창덕궁 후원에 이어난 일들은 이들말고도 성종 8년 (1477) 3월 3일 선공감에 명하여 후원에 채상단을 쌓게 한일도 있으니 이는 왕비가 양잠을 장려하던 일과 관계있으며 뒷날 1911년 후원의 주합루 서쪽서향각에 양잠소를 만들게 한 일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또 임진왜란(선조25년)전인 선조 7년 (1574)8월9일에는 후원에 말이 달리는 길을 만들어 기사를 시험케 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서내에서 없었던 일이니 하지 않을 것을 간하였으나 임금꼐서 듣지 않았다 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은 모주 불타고 후원도 그 피해가 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영건청을 두어 여러 건축공사를 강행하자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영건청을 없을 것을 간하였던 일이 있다. 이해 광해군은 "근일 영건청을 없애라는 삼사의 논의 가 있었는데 그말은 옮다... 책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한가롭게 놀 곳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불안할 때 쉴곳이 없어 책방을 만들어 몸과 마음을 고치는 병당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니 영건청을 폐하기는 어렵고./... 혼경전 영화당같은 것은 영조하지 말도록 하여 공의에 따르겠다"는 기록이 광해군일기 2년 2월 을미조에 보이고 이기록밑에 "이 여러전각의 건축일들은 모두 먼저 이루어졌다 또 별전 여러곳도 만들어졌다고 되어있다. 또"기이한 화초,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둘사이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유람에 대비하였는데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라고 주해되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재정에도 불구하고 크게 공사를 하여 후원의 위용을 갖춘 것을 앙수있다.

후원의 그 많은 정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인조?이다.

인조 14년 (1636)에 지금의 소요정인 "탄서정 태극정인 운영정 청의정"등을 세우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이라는 인조의 붓글씨를 받아 그대로 암반에 새겨 넣었다.

또 인조 18년(1640)에는 취규정이 건립되고 현종5년에 관덕정으로 이름을 고쳐 부른 취미정이 인조 20년 (1642)에 건립되었다. 또 인조 23년 (1645)네는 뒷날 희우정이라 고쳐 부른 취향정을 24년에는 팔각정 25년에는 취승정 관풍각이 세워졌다.

이가운데 취승정은 낙민정으로 개칭되었고 팔각정은 "세자가 중국 북경에서 돌아오니 임금께서 북경의 궁궐모습을 묻자, 세자가 팔각정 제도가 묘하다 하여 그것을 그려보게 하고 그대로 지은 것"이라고 인조실록에 전한다.

숙종14년(1688)에는 청심정과 빙옥지가 만들어졌고 16년에는 술성각 옛자리에 사정기비각을 세웠다 또 18년에는 영화당을 고쳐 짓고 애달정을 세웠다.

숙종 30년 12월에는 임진왜란 ? 군대를 보내 도와준 명나라 황제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후원에 대보단을 축조하였으며 33년에는 택수재가 세워졌고 53년 정조 원년에는 규장각을 세웠는데 택수재는 부용정으로 고치고 규장각은 왕실의 도서를 모아 둔 곳으로 위층은 누각인데 이것이 지금의 주합루이다 .

순조28년(1828)에는 궁굴속에서 사대부들의 사는 모습을 알기 위해 연경당을 건립하였다.

한일합방 뒤 1921년에는 선원전을 후원 북쪽 옛건물터에 세웠다.

이처럼 창덕궁 후원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여러대의 임금들을 거치면서 여러차례의 건축과 후원 가꾸기를 하여 오늘날과 같은 만여 평이 넘는 후원을 이루게 되었다.


창덕궁은 1405년 조선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되어 역대 왕을 통해 오랫동안 확장되고 다듬어 졌다. 창덕궁의 규모는 총 면적 170,980평에 이르며 그 중 후원의 면적이 약 9만여평을 차지하고 있다. 이 궁에는 조선의 다른 궁에 비하여 가장 넓고 아름다운 후원을 가지고 있어 동양에 있어서 한국정원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명원이다. 신하가 집무하던 외조공간은 옥당등이 있던 금천교 북쪽 공간이며, 왕이 정치하던 치조는 인정전과 선정전 공간이고, 왕족이 생활하던 침전공간인 연조는 대조전과 희정당 공간이다


한국의 조경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동양조경의 한 범주로서만 인식되어 왔다. 이는 한국조경에 대한 체계적 과학적 연구가 아직도 미흡하고 유적과 사료들을 제대로 발굴 정리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조경의 특징과 장점을 세계에 알리는 데 등한시한 것도 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숲이 유난히 많고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졌기 때문에 조경도 자연히 자연과 동화된 자연풍경식 조경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기본양식에 있어서는 중국 조경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세부양식에 있어서는 누구나 한 눈에 보아도 중국이나 일본과는 또 다른 특징과 양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특징과 차이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미의식과 자연관, 신앙체계를 엿볼 수 있다.

한국의 전통적 조경양식 또한 자연풍경식이면서 상징성을 부여한 사의적(寫意的)인 특색을 지녔으나 중국이나 일본처럼 여기에 너무 치중하거나 집착하지는 않았다. 보다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우리나라 조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지형지세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평지는 적고 자연굴곡이 많아서 대규모의 택지를 조성할 경우, 자연지형이 항상 포함되게 된 데 그 연유가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자연장애를 토목학적으로 처리해 평지화 하기보다는 자연의 고요 형상을 되도록 수용해서 집터나 정원에 끌어 들였다. 신령사상을 가진 우리 민족으로서는 산신령 또는 조상님의 신기(神祈) 서린 자연을 내 맘대로 뜯어 고친다는 것은 천벌 받을 일로 여겼던 것이다. 자연히 주거지와 구조물들의 자연성이 살아 숨쉬게 되고 자연을 닮아가게 된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자연굴곡을 준 중국이나 일본과는 형태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내용과 방법론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중국처럼 동굴, 바위 등을 인공적으로 만들거나, 높고 거창한 누각은 짓지는 않았으며, 일본처럼 수목을 지나치게 자제하거나, 특정 수목을 지나치게 선호하거나, 인공을 가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연못이나 누각, 화단 등은 직선으로 처리해서 자연과 대비를 이루도록 의도하였다. 주변 경관이 불균일한데 다시 건조물들을 불규칙하게 처리할 경우 오히려 어지럽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반면에 직선 처리된 방지(方池), 사괴석(四塊石), 굴뚝, 화단(花壇), 안뜰은 단아하고 절제된 느낌을 준다. 자연미를 최대한 배려하면서 도형적인 대비효과를 가미한 것이 바로 우리 전통조경의 가장 뛰어난 미학이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직선화된 여러 동의 건축물들을 배열할 때는 비대칭적인 균형을 이루도록 계획하였다. 곡선이 많을 때는 직선으로 대비하고, 적선이 많아질 때는 일부의 방향 또는 동선을 곡선으로 처리해서 대비와 강조효과를 주는 것이다. 가령 6개의 네모를 일정하게 배치하기 보다는 그 중 1개의 방향을 틀어 놓을 때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이것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홀수 배치의 미학이자 고도로 계산된 미학인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은 크고 작은 형체들이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대칭을 이루는 것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비대칭의 동적인 균형미를 중시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은 정원양식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한국 정원의 미는 무위자연과 겸양의 미덕, 그리고 약간의 대비를 가미한 개성미라고 할 수 있으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순천주의(順天主義)' 정신이 내면에 흐르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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