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다낭 여행기 (3)
4월 5일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 일정은 다낭 근교의 바나산 테마파크와 다낭해수욕장(미케비치), 영응사 코스다. 저녁에는 아오자이 쇼가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날이라 가방을 정리하여 체크 아웃을 하고 여권을 찾아 버스에 올랐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첫날 투숙할 때 여권을 모아 호텔 측에서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꺼림칙하기도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바나산 테마파크는 다낭의 근교에 있는 해발 1487m의 높은 산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산 정상에는 테마파크가 조성되어있는 관광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다낭의 습하고 무더운 날씨를 피해 프랑스 간부들의 별장으로 조성된 곳이란다. 해방 후 한동안 잊혀져 있다가 다시 조성되어 지금은 다낭의 가장 매력적인 테마파크로 조성했다. 아직도 계발은 계속되고 있었다.
산 정상을 올라가는 데는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정상까지 운행되는 케이블카의 길이는 5,800m로 25분간이 소요된다. 세계 키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장가계의 천문산 케이블카가 제일 긴 7,455m로 2등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밀려드는 관광객을 감당할 수 없어 두 곳을 증설하여 세 곳에서 운행되고 있었다. 총연장 길이로 치면 아직 세계 제일의 긴 케이블카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밀림과 아득히 펼쳐지는 경치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정상에 도착하니 여기가 과연 1,500m 가까이 되는 산의 정상인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색다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골든브릿지다. 거대한 두 손이 골든브릿지 다리를 떠받친 채 하늘로 들어 올리는 듯한 모습이다. 손 하나가 5층 건물을 능가한다. 손가락 하나가 장정 다섯 아름은 족히 될 것 같다. 여기에 비하면 포항 호미곶의 손은 세끼 손가락 반 만큼도 되지 않을 것 같다. 골든브릿지에 오르면 저 멀리 다낭 시내와 바다까지 눈앞에 다가오는 확 트인 전망은 가슴이 뻥 뚫리게 했다. 테마파크의 건물들은 프랑스건축 양식이다. 프랑스의 파리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테마파크는 에버랜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성당과 절, 호텔, 놀이 시설과 게임장, 음식점, 야외공연장, 아름다운 정원 등이 있다. 케이블카를 탈 때 입장료 70만동(한화 35,000원)만 지불하면 일부 전시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설은 무료로 관람하고 이용할 수 있다. 야외무대에서는 시간마다 색다른 공연이 이어졌다. 오후 2시부터는 중앙광장에서 페레이드가 있다고 하는데 다음 일정으로 구경하지 못하고 1시경에 내려왔다. 우기에는 비와 안개로 조망이 가리지만 4월 건기라서 맑은 날씨에 멀리까지 보이는 경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내려올 때는 다른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한국 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다당 시내로 돌아와 다낭이 자랑하는 미케비치(일명 차이나비치)에 갔다. 백사장의 길이가 무려 20km로 아시아에서 가장 긴 백사장이라고 한다.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6대 해변 중 하나라고 했다. 아직은 계절이 일어서인지 청년들 수십 명이 공놀이를 하고 있을 뿐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백사장을 걸어며 태평양의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맛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워만 보이는 다낭 해변의 이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4년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국민 가운데 사회주의 체제로의 동화가 의심스러운 부유층, 정치인, 군인, 관료, 교사, 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탄압대상자 중 약 100만 명이 바다를 통해 탈출을 시도했는데 이들을 보트피플이라고 한다.
탄압은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 탈출하려던 이들 가운데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고 한다. 다낭 앞바다에서만 1만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공산주의의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해변에서 건너다보이는 선짜반도 남쪽 해안 언덕에 위치한 커다란 불상이 보이는 영응사로 향했다. 영응사는 ‘비밀의 사원’으로도 불린다. 비밀의 사원으로 불리는 이유는 은밀히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을 적어서 몸에 간직하면 이루어진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나도 소원을 빌어볼까 하다 한만은 베트남인들의 소원을 들어주기에도 바쁠텐데 전쟁시 참전하여 수많은 목숨을 빼앗은 이역만리 한국인의 소원까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영응사에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불상인 68m 높이(건물 30층)의 해수 관음상이 있다. 올려다 보는 고개가 아프다.
대웅전 옆으로는 18 나한상이 각기 다른 표정으로 세워져 있고, 넓은 앞마당과 계단에는 크고 작은 분재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이렇게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영응사는 2003년에 지어진 절로 보트피플의 아픈 역사로 인해 탄생되었다고 한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바닷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성금을 모아 세운 절이라고 한다. 이런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낭 앞 바닷물은 푸르기만 하니 인생무상이 아닐련지. 영응사의 내력을 듣고 보니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아우자이쇼를 관람했는데 기대에 못 미치는 특색 없는 공연이었다. 들어갈 때 입구에서 아오자이 입은 아가씨 두 명이 양옆에서서 사진을 찍었다. 왜 찍는지 몰랐는데 공연을 관람하고 나오는 통로 양쪽 벽에 현상한 사진을 걸어두고 사라고 했다. 한 장에 5달러였다. 손목을 잡고 끈질기게 강권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구입했다. 공연에 실망했는데 얄팍한 상술까지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이 나이에 어떻게 예쁜 아가씨를 양옆에 세우고 사진 찍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결코 믿진 장사만은 아닌 것 같았다.
베트남은 정치는 공산주의를 고수하지만, 경제는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다. 시내 곳곳에서는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었다.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공헌이 크다고 한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료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냉철한 현실을 보았다.
짧은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밤 1시(우리나라 시각 3시)에 귀국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구슬치기하고 고추 달랑이며 멱감던 까까머리 소꿉친구들이 백발노인이 되어 함께한 정겨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