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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변방에서 영접 받으심
[요한복음 4:43~54]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오늘은 ‘변방에서 영접받으신 주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를 보고 ‘그는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다’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시고 이틀을 거기서 유하신 후에 갈릴리로 가시는 길이었다. 사마리아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중간에 있는 동네이다. 갈릴리는 어디인가하면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북쪽의 변방이어서 그 곳이 유대 나라에 속하는지 안 속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변방이다. 이곳은 성전도 물론 없고 제사장도 물론 없다. 신성하고 종교적인 것은 하나도 없는 아주 가난하고 가련한 곳이다. 신분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다 버려진 곳이다. 어디를 가든 변방(邊方)이라는 곳은 버려진 곳이다. 잘난 사람들은 다 성문 안에 사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서울에 가면 사대문(四大門)안에 사는 사람은 유명한 사람들(진짜 서울사람)이고 사대문 밖에 사는 사람은 서민들이다. 예루살렘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땅이었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해서 자라기는 갈릴리에서 자라나셨다. 예루살렘에서는 배척을 받고 설 자리가 없을 때면 그래도 늘 찾을 수 있는 곳이 자기 고향, 자기가 자라났던 인연이 있던 곳이다. 이때도 예수님은 이런 연유로 해서 고향으로 돌아오시는 길이었다. 서울에 가봤는데 설 자리가 없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봤는데 설 자리가 없어서 다시 시골로 내려오는 길이다.
오는 길에 사마리아에 들려서 만족할 만한 수확을 거뒀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다. 그리고 갈릴리에 가신 예수님은 거기서 영접을 받았다고 되어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저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서 영접을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방으로 믿음이 확산이 되었다.
주님은 좌우간 예루살렘만 떠나면 여러 군데에서 다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시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환영을 받고 가니까 갈릴리 사람들이 또 영접을 하고 이랬다는 뜻이다. 성전이 있고, 유대 종교가 있고, 정통이 있고, 하여간 좋다는 것이 다 있는 그 곳에서는 배척을 받으시고 변방으로 갈수록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명절에 행한 일을 봤기 때문에 갈릴리에 가시자 사람들이 그를 영접했다.
그리고 왕의 신하(관료, 좀 높은 사람)가 와서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너 같은 게 왜 왔냐? 이런 식인데 이쪽으로 오니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말이다.
그때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고 내려오셨는데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했다. 이것은 격언(格言)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고향에 내려오면 다 아는 처지니까 별로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예루살렘과 자신의 관계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육신적인 고향은 갈릴리지만 (얼른 보면 갈릴리에서 영접하지 않는다고 보일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이니까) 당연히 예루살렘이 자기 고향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이 고향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는 어떤 선지자도 영접받은 일이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향’은 예루살렘을 두고 말하신 것이다. 예루살렘은 영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다 예루살렘을 영적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모슬렘에서 메카의 성지로 생각하듯이 사실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는 선지자가 영접 받은 적이 없다.(마23:37참) 마태복음에 보면 그런 말이 역역하게 나와 있다. 보낸 사람마다 때리고 마지막에는 죽였다. 이런 비유를 든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환영받은 선지자가 없었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성전이 있고 제사장도 있고 서기관과 율법사가 있고~.” 이것을 지금 요즘 말로 한다면 성당이나 예배당이 있고 신부(神父)나 목사(牧師)도 있고, 신학자들도 있고 이런 종교적인 거성(巨星), 거물들이 모두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겠는가! 평생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고 그것을 연구한 사람들이고 전파한 사람들이니까 그 환경과 분위기가 얼마나 영적인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신성한 판이 다 준비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곳이란 뜻이다.
이 세상 나라도 국회의사당 그러면 우리나라의 제일 애국자들이 다 모인 곳이지 않은가? 거기 가면 진짜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가보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인지 정당(政黨)을 사랑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싸움질을 하고 이번에는 최루탄까지 던졌다고 한다.
예루살렘도 종교적으로 말하면 그런 곳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곳!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다시 내려오신다면 어디로 가시겠는가? 그리로 가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곳은 참으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은 발 붙일 곳이 없다.(마21:33~39참) 그 사람들이 다 짜고 있으니까 설 자리가 없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이런 것을 보고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이라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놓는다. 사람들은 신성하고 거룩한 곳을 만들어 놓기를 좋아하고, 또 신성하고 거룩한 신을 모시기를 좋아하고, 또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를 좋아한다. 거기서 자기들의 어떤 것을 좀 씻어내려고 노력하고, 정당화시키려고도 생각하고, 포장하려고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거룩한 가운을 입는다든지 옷도 또 그런 곳을 입는다든지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이런 성향 때문에 그렇다. 신성한 곳을 만든다, 신성한 신을 모신다, 신성한 신을 숭배하고 예배한다는 이런 관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어느 민족이나 다 마찬가지로 그런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것을 일단 가지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참 이상한 일이다. 자기만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한다. 신성불가침이라는 경고판을 딱 붙여놓고 이것은 아무나 못 온다. 이런 사람은 못 오고, 이런 사람은 못 오고, 이런 사람은 못 오고, 이런 사람은 못 오고...
이런 특정한 사람들이 독점을 한다. 그리고 기득권을 주장하고 자격증을 만들고 전문가를 양성하고 이래놓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신성한 것을 관리하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아무나 그 곳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나 신성하게 만들어놨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범접할 수가 없어서 진짜 신성불가침이다. 이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의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런 신성한 것에 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통(正統)이라는 것을 딱 만들어놓고 그 정통의 허락 없이는 천국에 못 들어가도록 막고 있는 것이다. 여기 허락 없이는 못 간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유대인들은 너희 이방인들? 너희와 같이 천당 간다면 우리는 천당에 안 가! 율법도 없는 저런 인간들하고 우리가 어떻게 한 자리에 있겠는가! 저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이런 식이었다. 지금도 세상에서는 끼리끼리 노니까 마찬가지로 다 그렇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부자는 부자끼리,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있는 사람끼리, 깡패는 깡패끼리, 이렇게 따로따로 놀고 그 영역 안에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게 만든다. 부자들끼리 있는 곳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도 끼기가 어렵지만 자기들도 같이 있으면 창피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골프장을 갔더니 좋은 차만 좍 몰고 가는 사람들이 외제차가 좍 타고 가는데 누가 티코를 타고 따라온다면 창피하게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친구 동창생이라고 오라고 했는데 어디서 티코하나 몰고 왔다면 창피하게 생각이 되서 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전부 이렇게 자기를 이런 것으로 세우려고 한다.
거룩한 것, 신성한 신, 신성한 예배! 이런 것들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자꾸 가르는 것이다. 옳은 사람은 옳다하는 것으로 가르고, 정의란 사람은 정의라는 것으로 가르고, 전부 이렇게 가르니까 자꾸 분열이 생긴다.
종교가 커질수록 이상하게 하나님이 설 자리는 작아진다. 종교가 위대해지면 하나님은 왜소해진다. 사람들은 종교를 보지 하나님을 보지 않는다. 너무나 종교의 위대함 커짐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 본다. 사람들은 지금 기독교의 뭘 보냐하면 기독교의 세력, 외세, 모양 이런 것을 본다. 하나님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점점 왜소해지고 종교만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화되어 기독교 문화가 커지게 되면 예수는 없어도 상관이 없다. 기독교 문화만 있으면 되니까 그렇게 된다.
껍데기는 자꾸 커지는데 알맹이는 작아진다. 요즘에 과일을 먹어보면 과일은 살이 찌고 달고 모양 좋고 이렇게 만들어진다. 원 토종에 비해 우리가 먹고 있는 것들이 아주 크다. 그런데 안의 씨를 보면 대부분 썩었거나 아니면 쭈그러졌거나 충실하지 못하다. 산에서 토종으로 자란 그런 것들은 가보면 껍데기는 시원찮은데 보면 씨는 충실하다. 요즘 아이들도 껍데기만 큰 아이들이 있다. 슈퍼에서만 사다 먹여서 집에서 요리하기 싫으니까 만들기 싫으니까 그냥 사다가 소세기 사다가 먹이고 뭐 사다 먹여서 껍데기는 커지는데 애들이 씨가 없다. 그러면 장가가서 아들을 못 난다. 씨가 없어서 모든 것이 원리가 똑 같다. 껍데기 커지면 알맹이는 작아진다.
주 예수님은 유대교의 성지 예루살렘에서 설 자리가 없다. 꼭 그 분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설 자리가 없다. 성 안에서는 한 몸 죽을 자리마저도 없었고 그래서 결국은 성문 밖으로 내쳐졌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성 안에서 죽이면 안 된다. 성안에 이런 시체를 놔두면 안 된다.
우리 서울에 가 봐도 성 안에 있는 묘들이 있는데 다 왕들의 묘다. 왕들만이 궁궐에서부터 거리가 약 80 미터 안에 묘를 쓸 수 있다. 일반인 들은 쓸 수가 없다. 서울 안에 있는 묘들은 다 왕들, 군 이런 사람들의 묘들이다. 다른 사람은 죽어도 거기서 못 죽는다. 나가서 죽어야지 거기서 죽으면 안 된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이 사람을 여기서 죽이면 안 되고 영문 밖으로 내쳐서 그래서 갈보리 산으로 가게 된 것이다. 죽을 자리마저도 없었다. 히브리서는 그의 능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나가자! 영문 안에 있으려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없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영문 안에서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곳이지 거기서 영접하는 곳이 아니고 시체 하나도 받아주는 곳이 아니니까 우리가 그를 따라가려면 우리도 그 능욕을 짊어지고, 부끄러움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생각하면 예루살렘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 그렇게 하면 껍데기는 커지는데 씨는 작아져버린다. 참 이상하다.
종교라는 것이 이상한데 약할 때는 다 어린양이 된다. 핍박받을 때 보면 정말 눈물 흘리고 기도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이러는데 딱 커지면 호랑이 같이 엉뚱한 동물이 된다. 사자 새끼도 새끼 때는 참 귀엽다. 사람하고 같이 놀고 그러면 키우면 ‘야성의 엘자’라는 영화를 보면 사자 새끼 데리고 키워서 하는 것, 그런데 이놈이 크면 사자의 본성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새끼 때하고 큰 다음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도 어렸을 때 약할 때는 어린 양이다. 그런데 커서 국교가 되면 완전히 호랑이 아니라 이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신성한 재판소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심판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재판을 했다.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죽이고 지금도 아직까지 반성이 없다. 그때 우리가 너무너무 잘못했다’이런 것이 발표가 아직도 없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변방에서 영접을 받으셨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심부에 가니까 영접 안 하던데 변방에 가니까 영접을 하더라! 변방은 종교적인 곳이 아니고 어쩌면 좀 인간적인 곳이다. 우리가 시골에 가면 같은 동네니까 인정미가 있고 사람들이 좀 사람다운 그런 데가 있다. 점점 도시화 되면 점점 뺀질뺀질해진다. 사람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그렇다.
오늘 새벽에 이어령씨가 나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지금 CBS에서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목요일인가 마지막 토요일인가 양화진 교회 목사님하고 이어령씨와 둘이 대담을 한다. 무슨 목적으로 하냐하면 이어령씨는 문학을 한 사람이고 그 쪽은 목사니까 둘이가 대담을 하는 것이다. 이어령씨 말이 종교적이고 신학적이고 교리적이고 이런 대로 가면 굵어져서 딱딱하다. 문학적인 인간적인 좀 그런 곳으로 사람이 빠져 볼 필요가 있다. 단 하루라도! 이렇게 말한다. 성경을 볼 때 지극히 인간적으로 문자적으로 보통 책을 읽는 것처럼 그렇게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읽어서 거기서 내 인생의 뭔가가 오고 거기서 하나님 말씀이 들려야지 아예 교리를 딱 가지고 신학을 딱 가지고 읽어 버리면 안 된다. 이런 말이다.
나도 평소에 그런 주장이다. 이것을 일단 사람의 글로 보자! 하나님이 썼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람의 글로 보자! 사람이 쓴 것으로 보자! 그리고 거기서 진리가 발견이 되어야지 아예 처음부터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썼다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에 손가락으로 친히 썼다고 한 데가 있다. 이것은 다 상징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이 무슨 손가락이 있겠는가? 하나님이 친히 썼다는 말은 강조하려고 손가락으로 썼다 이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성경을 보면 이 성경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색칠을 하고 본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냥 사람으로 보자! 사람이 쓴 책으로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 하나님이냐 이것을 알아야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이라고 덮어놓고 보면 안 된다.
그 양반이 묘하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안 될 줄 알았는데 묘하게 하나님이 인도했는지 기독교인이 되어서 기독교 방송에 자꾸 나온다. 나보다 세 살 위에다. 많이 위인 줄 알았는데 34년생이더라. 나는 37년생이고 훨씬 더 많은지 알았는데!
그러니까 ‘나사렛 갈릴리 사람들’라는 개념 속에는 시골! 촌사람들! 소박한 사람들! 그리고 인간적인 사람들! 한 동네에 같이 산 사람들! 비종교적인 그런 개념이 들어있다. 우리가 찬송가에서도 ‘갈릴리! 아름다운 갈릴리!’이렇게 말할 때 그냥 바다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정(人情)을 얘기한다.
나사렛 사람 예수, 나사렛 목수의 아들! 이렇게 성경에 표현할 때는 의미가 있어서 표현한 것이다. 종교적인 껍데기를 제하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런 곳에서 영접을 받은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거부하고 갈릴리에서는 영접했다. 우리가 좀 주의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선지자는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하고 내려갔다. 이 격언은 원래는 객지에 나가서 아무리 잘 되어도 고향에 오면 별로 시답지 않게 생각한다. 이런 말에서 나온 격언이다. 이것을 예루살렘하고 연관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전은 당연히 아버지 집이니까 거기가 바로 자기 고향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진짜 고향에 왔지만 영접받지 못했다.
갈릴리 사람들은 단순하니까 종교적인 색깔이 안 입혀졌으니까 예수께서 행한 것을 보고 그냥 믿었다. 물론 여기서 ‘믿었다’는 말이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었다는 것과 똑 같은 것은 아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믿었는지 하여간 영접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핍박하고 무시하고 안 알아주는 세계에서 이 사람들은 환영하고 받아 들였다는 뜻이다.
반대로 신성한 노선에서는 예수께서 행한 일을 보고 오히려 분노했다. 똑같이 아마 그 때가 예루살렘에 축제가 있어서 올라갔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런데 거기서는 갈릴리 사람들도 봤고 촌사람들도 봤고 예루살렘사람들도 봤을 것이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믿었고 예루살렘 사람들(종교지도자들)은 보고 분노했다. 똑같은 일을 보고 똑같은 사람을 변방에서는 영접하고 도성에서는 거부했다. 다 한 곳에서 행하는 것을 본 것이다. 두 가지 일을 본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한 것을 본 것도 아니다. 생각과 사상이 다르고 입장과 판이 다르면 전부 생각이 달라진다.
어제 저녁에 청년부 얘기하면서 ‘역사관(歷史觀)’얘기를 했는데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역사가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고 저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 역사책을 100% 믿으면 안 된다. 그 역사책을 쓴 사람이 어떤 시각에서 썼는가를 모르면 다 속는 것이다. 고려 역사를 조선시대 사람이 썼으면 조선시대의 입장에서 쓴다. 우리가 일제시대를 쓴다면 지금 입장에서 일제시대를 쓴다. 그냥 그것을 사실 그대로 쓴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책을 보고 누가 써 놓은 것을 보고 100% 믿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래도 속는다. 책이라는 것이 너무 마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안 그렇게 하려고 해도 책으로 써 놓은 것은 사람들이 믿는다. 시각이 다르면 엉뚱하게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똑같은 일을 한 곳에서 했는데도 불구하고 촌사람들은 보고 괜찮다. 좋은 사람이다. 선지자다. 이렇게 했는데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은 입장이 달라서 분노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사람은 입장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면 아주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장과 사상이라는 것이 없어야 된다. 불교에서도 그런 것을 없애려고 애를 쓴다. 없애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그런 것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으면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서 보게 된다. 색깔을 이미 칠해서 보기 때문에 바로 볼 수가 없다.
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이 있다. 그래서 기득권에 손상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라는 새로운 인물이 나와서 만일에 유대종교를 지도하게 된다면 자기들은 설 자리가 없을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것을 방어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변방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다. 자기들은 통장도 못하고 반장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 하니까 누가 통장이나 반장을 해도 상관이 없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누가 국회의원이 되든지 별 상관이 없지 않은가? 찍어라 해서 찍지만 누가 되든지 상관이 없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중요한 관계가 되는 사람도 있다. 목숨을 걸고 촛불시위도 하고 물대포 맞아가면서 하는 이런 사람도 있다. 이 추운 겨울에 한 방 맞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무릅쓰고 나간다. 그 사람은 무엇인가 관계가 있으니까 그럴 것이다. 관계없는 사람 같으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변방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잘 해주면 되는 것이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되는 것이다. 정치도 그냥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안다는 사람들, 자기도 한 번 해 먹고 싶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전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국은 물론 공산주의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시간 동안 잘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물어보니까 백성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정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냥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해 주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 정치하기가 편할 것이다. 물론 지도자들이 그만큼 잘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민족성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권력에 너무 피해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떻든지 권력을 한 번 잡아보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대륙이라서 그런 것 같다. 잘 모르겠는데 좌우간 관심이 별로 없다. 정치할 사람은 하지만 안할 사람은 관심이 전혀 없다. 학교를 다닐 때도 정치할 사람과 안 할 사람이 갈라진다고 한다.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
변방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새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무 것도 없으면 그냥 새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빈 마음 빈 그릇이면 무엇이든 담을 수가 있다. 간단한 이치다. 빈 병에는 언제든지 새 것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병 안에 뭐가 들어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들어갈 수가 없다.(눅5:37참) 소주보다 양주가 훨씬 더 비쌀 것이다. 하지만 소주가 담겨져 있는 병에다 양주를 담아보라! 들어가겠는가? 안 들어간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복음전파의 어려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사람이 뭔가를 가지고 있다. 가득 차 있다. 그 사람 속에다 우리가 지금 새 것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어렵다. 뭔가 꽉 차 있는 사람일수록 안 들어가고 들어가도 나와 버린다. 뱉어 내 버린다. 배부른 사람에게 뭔가를 주면 게워내듯이 말이다. 복음전파도 가난한 곳에 전파된다. 가난한 곳에 전파된다는 말이 그 말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자마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이 이미 박혀 있었다. 그 지식이 먼저 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셔도 다 그것으로 듣는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듣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한 분이다. 이렇게 듣고 있다. 그런데 그 선이 자리를 위한 선이기 때문에 이게 참 어렵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이미 자리 잡고 있어서 생명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러 이러 해야 된다. 부모는 이러 이러해야 된다고 철저하게 배웠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고... 이런 것을 교과서에서 쫙 배웠다. 그렇게 쫙 배우고 나서 아버지를 만났다면 그 아버지에 합격할 아버지가 있겠는가? 합격할 아버지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낳고 키워서 아버지인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뭔가 잘못을 해도 그런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학(學)을 공부하고 나서 아버지를 선택하려고 하면 세상에 어떤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로 선택하겠는가?
그러니까 지식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할 때 지식은 이런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먼저 들어와 버리니까 무엇을 해도 다 그것으로 듣는 것이다. 다 그 그릇에 받아버린다. 파란 그릇에다 물을 받아 버리면 물이 파랗게 보인다고 한다. 아무리 깨끗한 물을 담아 놓아도 파랗게 보인다. 오늘 우리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이 들어가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색깔로 변해 버린다.
그런데 거기서 가장 심각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교회 건축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교회 건축에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선악을 아는 지식이다. 성경 말씀은 이렇게 해석하나 저렇게 해석하나 잘 모른다. 어차피 잘 해석했는지 못 했는지 모르니까 덮어두고 현실적으로 교회 건축을 할 때 딱 드러난다.
사람들은 어떻게 다 선(善)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의(義)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보면 선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의롭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정의(正義)라는 깃발을 들고 나선다면 ‘옳다, 이것이 옳다.’라는 것을 들고 나오면 벌떼처럼 모이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선이라고 깃발을 꽂아 놓으면 다 그 편을 드는 것이다. ‘의’다, ‘정의’다. 이런 깃발을 꽂아 놓으면 모여 든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은 더 많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우리 백성을 주도하던 사상이 그런 사상이다. 주자의 성리학이기 때문에 흑백논리다. 이것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는 것이다. 그게 선이냐 악이냐가 아주 강하다. 조선시대에 만날 싸운 이유가 그것 때문에 싸운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한 명륜당(明倫堂)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이다. 다 같이 주자를 공부해서 싸운다. 이 정신이 우리 조선 민족에게 뿌리 깊이 들어 있다. 이것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더 강화가 되었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에 대해서는 사죽을 못 쓴다.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이것 보다 정의가 더 중요했다. 조선 왕조가 망할 때 보면 그렇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뒷전이고 지금 누가 더 옳으냐, 그러냐가 더 중요했다.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실속이 없는 것이다. 옳고 그런 것만 있지 실속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누가 정의다, 불의다. 이렇게 말해 버리면 완전히 갈라지는 것이다. 언제 네가 내 형제였느냐? 이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형님 동생도 소용이 없다. 부자간도 소용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안 보여서 그렇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하고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이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디에서 확실히 드러나는가 하면 교회 건축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세상에서는 왜 이것을 먹으면 확실하게 죽는가? 알 수 없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참 고상한 것인데 왜 이것을 먹으면 죽는가? 알 수가 없다. 교회가 안 세워지니까 그렇다. 우리가 하나 되려는 것이 없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똑똑해지는 데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 필요한데 둘이 하나가 되려고 하면 이것이 방해가 된다. 부부간에 싸우는 것도 다 이것 때문에 싸우게 된다. 옳으니 그르니 때문에 싸우는 것이지 다른 이유로 싸우는 일은 별로 없다. 서로가 내가 옳다, 네가 옳다 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말 뿌리 깊은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다. 이것을 역사로 본다면 몇 만 년이 되었는지 모른다. 뿌리가 어딘가? 역사로 보면 에덴동산에서 뿌리가 퍼졌다.
이것이 정말 어렵다. 그렇게 말을 했어도 어렵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나는 선악과를 이야기 했었는데도 이 선악과는 안 뽑히고 문제가 있으면 또 나온다.
잡초라는 것이 제초제를 뿌려도 또 나온다. 제초제는 무지하게 독한 것이라서 먹으면 그냥 죽는 것이다. 다른 농약은 먹어도 어떻게 하면 살 수가 있는데 제초제를 먹은 놈은 절대로 못 살린다고 한다. 그렇게 독한 것이 제초제인데 제초제를 해마다 뿌리지만 한 해만 안 뿌리면 도로 싹 나 버린다. 어디서 그게 남아 있다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제초제를 뿌리면 땅 속에 지렁이가 싹 없어져 버릴 정도로 독한데도 한 해만 안치면 도로 나 버린다. 봄에 쳤으면 여름에는 안 나지만 가을이 되면 도로 나 버린다. 일 년도 채 안 간다. 이렇게 뿌리 깊은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 건축에 가장 큰 장애물은 선악을 아는 지식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를 처음에 말할 때 첫 번째 교회에 주어진 약속이 그것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일을 주어서 먹게 하겠다. 그러니까 이것이 없으면 아예 교회 건축이 시작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선악과를 가지고서는 교회 건축 시작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선이나 악이나 다 소용이 없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이런 의문이 사람들 속에 생긴다. 절에서는 선이나 악이나 그것은 다 똑 같은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두리뭉실해 버린다. 선도 악도 다 생각이지 그게 어디 근본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게 아니고 검으면 검고 희면 희어야지. 확 이렇게 갈라져 있다. 또 희랍의 이원론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한국의 주자학이 뒷받침을 해 주고 있어서 한국의 기독교는 가장 선악을 아는 지식이 강한 것이고 높은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기독교만큼 싸움을 잘 하고 많이 하는 곳도 없다. 그리고 한 번 싸우면 절대로 합해지지 않는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선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오면 합해지지 않는다. 하물며 아내와 남편이 합해지겠는가? 안 합해진다. 형제간에는 말할 것도 없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오면 무엇이든 갈라져 버린다. 단절은 바로 죽음이다. 그러니까 내가 선한 사람만 골라서 사귀려고 하면 사귈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정의로운 사람만 골라서 사귀려고 하면 사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이 누군지 상관없이 이 깃발만 꽂으면 사람이 모이는 것이다. 그것이 내 원수가 되었든 상관이 없다. 정의라는 깃발만 꽂으면 사람이 모이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오죽하면 그것을 먹지 말라고 했겠는가? 한 번 흔들기만 하면 세상이 요동을 치는 것이다. 우리 한국이 그래서 지금 요동을 치는 게 아닌가? 서로가 자기 정의를 내세워 깃발을 흔들고 있으면 편이 갈라져서 이 편 되고 저 편 되는 것이다. 모든 일을 제쳐놓고, 만사 제쳐놓고 교회고 복음이고 다 제쳐놓고 나라고 뭐고 다 제쳐놓고 이것만(정의) 열중하는 이것이 인간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밥이 나오나 옷이 나오나? 아무 것도 안 나오는데 참으로 이상하다. 교회 복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선과 악의 전쟁판이 되어버린다.
선이나 악이나 알고 보면 다 자기가 만든 것인데도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선이라는 것이 백두산처럼 따로 있고 악이라는 것이 한라산처럼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아니다. 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지 않았으면 그렇게 사랑할 수 없다. 백두산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라산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기득권이다. 선을 만드는 것도 내 기득권, 의를 만드는 것도 내 기득권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키려고 하니까 동조자(同調者)를 모집하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그룹을 만들게 되고 편을 만들고 이렇게 되는 것이다.
편이 만들어지면 교회는 깨지는 것이다. 편이 왜 갈라지는가? 옳다 그르다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다. 누가 밥을 많이 주고 안 줬다 해서 갈라지는 것은 없다. 누구는 호떡을 사주고 누구는 찐빵을 사줬다고 해서 갈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옳으냐, 그르냐 때문에 갈라진다. 그러니까 그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는 다 의로워야 된다. 세상 사람은 다 선해야 된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선해야 되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의로운 사람이어야 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게 선을 좋아하고 그렇게 의를 좋아하고 그렇게 잘 뭉치는데 그러면 악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된다. 불의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된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만든 의가 의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의인이 왜 없는가! 의인이 벌떼처럼 많은데 왜 없다고 하는가?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다 자기가 만든 의라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만든 의는 하나도 없고 다 자기들이 만든 의를 가지고 저런다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사느냐 죽느냐’하는 데는 ‘선하냐 악하냐’가 소용이 없다.
어제 전쟁 이야기를 했는데 전쟁판에서는 무엇이 그르냐, 무엇이 옳으냐는 소용이 없다. 지금 사냐 죽느냐만 있다. 지금 사느냐 죽느냐지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는 전쟁에서는 없다. 어제 기택이 형제가 정말 군인다운 얘기를 하더라. 군인은 이념이 없단다. 이념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전쟁판에서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하는 판에는 이념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사람이 급한 자리에 가면 정의니 의니 선이니 다 없어진다. 여유가 있으니까 그렇지 죽을 판에 갔는데 우선 살고 봐야 되는데 그것이 나오느냐면 안 나온다.
우리도 그것을 생각했더라면 조선 왕조도 이렇게 망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것보다는 돈 안 나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실속 없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득권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정의만 지키고 있으면 그러면 나라가 튼튼할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총도 안 만들고 칼도 안 만들었다. 그런데 총칼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총 한번 못 쏘고 고스란히 도장을 찍어서 여기 대한제국 있습니다하고 갖다 바쳤다. 거기서 옳은 것 그른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 내놓으라고 일본군이 포위하고 앉았는데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주자의 성리학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정의로웠다. 우리는 침략을 당하면 당했지 침략한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너희가 우리를 침략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이 통하겠는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자기가 만든 의를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인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의롭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의의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거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이 말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나는 분명히 내가 의로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의로운데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물론 깨달으면 좋지만 만일 아무래도 도저히 모르겠다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모르면 믿는 수밖에 없다. 모르면서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다. 깨달아서 알면 좋지만 모르면 믿어야 된다. 모르고 믿기 싫으니까 나도 가능하면 깨달아서 알기를 원한다. 모르고 믿는 것은 바보 같아서 나도 가능하면 깨달아서 알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옛날에 친구와 밤새도록 토론한 것이 알아야 믿지 어떻게 모르고 믿겠냐는 것이고, 그 친구는 하는 말이 믿어야 알게 되지 하니까 밤새도록 해도 결론이 없었다. 정목사님과 나는 어려서 그랬다. 자기는 신학교 다니고 나는 안 다닐 때인데 방학 때 붙잡아 놓고 밤새도록 얘기를 했는데 그 내용이 나는 알아야 믿지 어떻게 모르고 믿느냐는 것이고, 그 친구는 믿으면 알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답답하다 무식하다. 사람이 단순해가지고 완전히 단무지로 생각했다. 그런데 알면 믿을 일도 없지 뭐 하러 믿겠는가! 모르니까 믿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필요하다. 몰라도 믿을 데가 없으면 그것도 곤란하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면 믿을 데가 있다. 내가 의인인 것 같은데 왜 아닌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인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정의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이 말을 믿을 것이냐 아니면 자기 생각을 믿을 것이냐 이것을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결정을 하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결정해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이 말은 창조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연구해보라는 말이 아니라 결정하라는 말이다. 네가 믿을래, 안 믿을래 결정하라는 말이지 연구해 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없나니’ 이 말도 연구해보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의인이면 의인행세를 해보고 안 되거든 의인은 없나니 하는 말을 믿으라는 것이다.
주님은 종교기득권자들에게 배척받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 길에서 사마리아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갈릴리에 가서 영접을 받고 왕의 신하가 간청한 것을 들어줬다. 그러니까 갈급한 사람으로부터 기다림을 받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갈급한 사람이 결국 영접하는 법이다. 생사를 가늠하는 이 급한 사람이 결국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론적인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다. 만날 이론만 가지고 따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정말 머리를 쪼개서 수술을 하든지, 김상근 형제가 가서 신경외과 수술을 하든지 다른 방법이 없다.
갈급한 사람이 주님을 찾는다. 그리고 주님은 갈급한 사람에게 필요한 분이다. 의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 의원은 누구에게 필요하냐면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런데 이 왕의 신하가 와서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까 고쳐달라고 하니까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했다. 이것을 보니까 좀 매정한 말이다. 지금 아들이 죽게 되었다는데 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느냐? 표적은 무슨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느냐? 너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면 도저히 안 믿을 놈들이구나! 이런 식이다.
그런데 그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서야 믿는다는 것은 좋지 못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보고 믿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별로 좋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질이다. 표적을 보고야 꼭 믿는 것이니까 품질이 고상하지 못하다. 그리고 표적과 기사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을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도 뭐라고 말릴 수는 없지만 이것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표적으로 정당화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표적이 있으면 그것이 정당하고, 표적이 없으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원시적인 것이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그런 말이 있다. 전쟁판이 나갈 때 양털을 갖다놓고 하늘에서 이슬이 주변에는 내리지 않고 양털에 내리던지 아니면 주변에는 이슬이 내리고 양털에는 내리지 않던지 이렇게 표적을 보여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 표적을 보고야 하나님 뜻을 알았다는 데가 나온다. 이것은 옛날 얘기, 구약시대의 얘기, 어렸을 때의 얘기다. 그런 것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는 정당화 할 수가 없다. 언제든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항상 양털하나 꽂아놓고 이슬이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보고 믿으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몰라도 믿어야 그것이 믿음이지 내가 이해가 안 되어도 믿는 것이 믿음이지 그것이 신뢰다. 가장 좋은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다.(요20:29참)
아버지가 한 말을 아들이 다 알고 받아들이겠는가? 아들로서는 이해 못할 것이 많다. 이해 못하는 것이 많지만 아버지니까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 아들이 너무 선악을 아는 지식이 발달해서 도저히 아버지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안 믿어야 한다고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면 그 아이들이 잘못되어 버린다. 몰라도 믿어야 되는 것이다. 아버지 말이니까...하는 이유로 몰라도 그냥 믿어야 되는 것이다.
겨우겨우 하루하루 벌어서 먹고 사는 아버지가 아들보고 내가 너 대학까지 보내줄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아들이 명석한 두뇌로 생각하니까 자기 아버지가 버는 것으로는 도저히 대학을 갈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너무 머리가 좋아서 계산을 다 해보니 등록금이 1년에 얼마인데 저렇게 벌어서는 목구멍이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고 불가능하다 하고 못 믿는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어차피 대학도 못갈 텐데 공부는 해서 뭐하냐, 공부할 것 뭐있냐 하면 인생이 내리막길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계산을 하지 않고 아버지가 약속했으니까 해주겠지. 믿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장학금 받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믿는 놈이 훨씬 낫다.
지금 천주교에서 맥으로 보는 성경을 강의하시는 차동엽 신부라는 유명하신 분이 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다. 들어보니까 집이 가난해서 공고(工高)를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에 합격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교회에서 누군가가 학비를 대줘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카톨릭 신학대학교에서 다시 공부하고 프랑스유학을 다녀왔다. 지금 젊은 세대에서는 아마 촉망을 받는 그런 지도자인 것 같다.
이 사람은 자기 집은 가난했지만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까 길이 생겼다. 아버지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공부를 시켜주마! 이렇게 했으면 그것을 믿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먼저 머리로 생각하니까 못 믿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계산이 안 나올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아이고 안 되겠다. 아버지가 돈을 못 버는데 돈 벌러 다니자! 이렇게 해서 나가버리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니고 몰라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참 좋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옆구리를 찔러보고 믿는다고 하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은 아주 고품질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려면 기왕이면 품질이 좋은 믿음을 가져야 안 되겠나? 믿음을 가지려고 할 때 꼭 표적이 나와야 믿으려고 하는 것, 꼭 표적이 있어야 따르겠다고 하는 것, 이런 수준의 믿음에 있을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수준으로 가야 되겠다는 것이다. 한두 번 봤으면 되고 다른 사람을 봤으면 되는 것이지 꼭 내가 그래봐야 되겠냐는 것이다.
옆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봤으면 됐지 꼭 내가 앉은뱅이가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야 되겠냐는 것이다. 진짜로 체험을 하려면 자기가 앉은뱅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료를 받아봐야 하나님이 진짜 치료를 하시는구나! 이렇게 알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이런 것은 참 멍청한 짓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앉은뱅이가 되었다가 못 고치면 어찌하겠냐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만일 못 고쳐버리면 어쩌겠냐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 표적은 한두 번 있으면 보면 된다. 그래서 이렇구나! 하면 된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이것을 표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표적을 보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보면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표적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아예 올 때부터 이마에 ‘하나님 아들’이라고 써 붙이고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닌가. 지금 표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표적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옳지 않은 것이다.
요즘에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이상한 집단들이 말세(末世) 같은 것을 많이 이야기 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을 많이 하는데 거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표적을 구하고 있다. 그런 표적을 내놓고 자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징조 표적 같은 것을 내놓고 말세가 곧 온다고 한다.
이외수씨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다. 트위터를 하니까 이외수씨 같은 분까지 오게 되었다. 오신다던 예수님은 아직도 안 오시고 해는 다 저물어 갔다고 해서 나도 화답을 했다. 이천년 전부터 온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아직도 안 오고 있다. 해는 다 가고 달랑 달력 한 장 남았는데 사람이 중심잡고 살기 어렵네! 중심을 잘 잡아야지! 세상에 제일 중심을 잘 잡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다. 그는 아주 미리부터 영원불변한 자리를 잡아 놨다. 여러분이 내 트위터에 들어오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온다 안 온다 온다 안 온다, 금년에 온다, 내년에 온다는 이런 것을 맞추다보면 오뚜기가 제대로 설 수 있겠냐는 것이다. 중심을 제대로 잡으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봐야 한다. 트위터에 들어가 보니까 너무 쓸데없이 써놓은 것이 많다. 좀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좋은 말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친구를 많이 만들면 그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고 한다. 내가 받아서 리트윗하면 막 퍼진다. 그렇게 퍼지다보니까 이외수씨 같은 분의 글이 나에게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한명숙 전 총리도 들어오고. 이것이 어디를 돌아서 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하면 많이 퍼지겠더라. 퍼지는데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좀 뭔가 그래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한다. 아침밥 먹었는데 배가 아팠다는 이런 글을 쓰면 안 된다. 이런 얘기는 쓸 필요가 없고 좀 그럴듯한 말을 써서 트위터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좌우지간 들어와 주면 좋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그럴지라도 그 사람 안에서 트위터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아침밥 먹은 것 때문에 썼지만 이 사람과 연결된 트위터는 다른 얘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페이스북을 하다가 트위터를 하니까 페이스북은 도저히 수준이 낮아서 안 될 것 같아 수준을 높이려고 트위터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 때 뭘 보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인지 물위로 걸어갔으니까. 뭐 어쨌으니까 하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면 안 된다. 이렇게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니까 사이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왜 그 사람을 재림 예수라고 믿느냐고 물으니까 그 사람에게는 이런 표적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이비다. 사이비가 다른 것이 아니다. 표적신앙! 이것은 저질(低質)이다. 때로는 맞는 수가 있지만 100번 1000번 10000번해서 맞는 수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얼핏 들으면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는다고 하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인데, 여기서 한 말은 그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사랑의 도전이었다. 이 말을 들은 왕의 신하가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왕의 신하가 너무한다. 애기가 죽게 되어서 살려달라고 하는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지 못하겠다고 하면 너무 한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으면 삐져서 그냥 갔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왕의 신하가 하는 말이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했다. 이것을 보면 왕의 신하는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 판단이나 비판해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어떠하든지 살아야 하니까. 예수께서는 그 말을 듣고 “네 아들이 살았다.”고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믿고 내려갔더니 애가 살았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갈급한 사람은 책망까지도 사랑의 말로 받아들인다.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왕의 신하는 가버나움에서 온 사람인데 가버나움은 갈릴리에서 30km 떨어진 곳이니까 약 100리 정도 되는 거리를 온 사람이다.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찾아왔다.
책망과 징계는 아무에게나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보고나 잘못한다고 하면 되겠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얻어맞는다.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하면 빰 맞는다. 관계가 있으니까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책망한다면 나를 꾸짖는다면 나와 관계가 되니까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다. 나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와서 하면 싸움만 나게 된다. 그러니까 책망과 징계를 들으면 이것이 내게 사랑의 도전으로 들려야 한다. 아무에게나 책망과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와서 자식을 징계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자식을 징계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 없다. 사랑이 없으면 책망도 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면 징계도 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는 것이다.(막7:24~30참)
누가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꾸짖겠는가? 뭘 얻어먹겠다고 꾸짖겠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친개를 건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보고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은 미친개를 건드린 것과 같은 것인데 이 말은 잠언에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너 잘못했어!”라고 해보면 틀림없이 미친개가 물듯이 문다. 내가 들을만한 사람에게 책망과 징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보다 적극적인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위해서 책망과 징계로 도전하는 수가 있다. 이것이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자의 이야기다. 희랍여자이고 수로보니게 사람인데 이 여자가 자기의 딸이 귀신이 들려서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다. 이것이 얼마나 매정한 말인지! 개들이라는 말은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내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아주 쌀쌀맞은 얘기다. 세상에 이렇게 쌀쌀맞은 말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은 삐져서 욕을 퍼붓고 할 것인데 이 여자는 “옳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했다. 주인의 아이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는 개들도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딸이 나았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책망이 아니고 도전이다. “네가 믿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참 복이 될 수도 있고 화가 될 수도 있고 그렇다. 다른 사람이 혹시 나에게 나쁜 말을 하더라도, 내게 나쁘게 들린 말일 것이다. 형제가 나에게 한 말이 나에게 나쁘게 들린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러면 복이 된다. 그런데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좋게 한 말도 나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화가 된다. 그러니까 “옳습니다. 그렇지만 개들도 아이들의 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했는데 이것은 “고쳐 주십시오.”하는 말이다.
가난하고 갈급한 곳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능력이 나타났다. 복음은 이런 곳에 머물고 여기서부터 전파된다. 그래서 왕의 신하의 아들 온 집안이 다 믿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렸다. 한 쪽에서는 배척을 받으시고, 다른 한 쪽에서는 영접을 받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왔다 갔다 하셨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셨는지 알 수 없다. 가난하고 갈급한 곳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능력이 나타났다.
하나님이 꼭 필요한 사람, 꼭 긍휼이 필요한 사람, 그 사람에게만 긍휼이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은 공평하시다. 안 필요하신 사람에게도 주고 필요한 사람에게도 주고 하면 뒤로 가보면 공평치 못하다고 싸우게 된다. 왜 많이 주고 왜 적게 주고 하냐고 싸운다. 그런데 정말 필요한 곳에만 가면 아무도 싸울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하다. 하나님의 긍휼은 공평하다. 복음은 이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전파된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파해보면 이 사람이 참 마음이 가난하구나, 아니면 이 사람 마음속에 뭐가 가득 찼구나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선악과로 가득 찼는지, 돈으로 가득 찼는지, 욕심으로 가득 찼는지, 자존심으로 가득 찼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가난하게 되느냐하는 것이 문제인데 구원파에서는 가난하게 만든다. 죄인으로 만들어서 아무리 착한 사람도 벌벌 떨게 만든다. 지금 아무리 잘 살아도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하니 이렇게 해서 안 되겠구나!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전도를 한다. 가난하게 된 건 맞는데 그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전도된 사람이 많이 있다. 나는 그렇게 전도할 소질이 없다. 여러분 중에는 그렇게 전도할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은 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그 사람이 그것으로 가난해질 수만 있다면, 그러면 복음을 들을 것이 아닌가. 일단 그 사람이 가난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니까. 확신이 있는 사람은 할 필요가 있다. 남이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흉내 내면 절대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천국이 저의 것이요.”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 같다. 배부르면 맛이 없고 배고프면 맛있다. 우리가 지금 오후 1시에 점심식사를 하게 되는데 2시에 식사를 하면 훨씬 맛있을 것이다. 주변 식당이 다 맛있다고 할 것이다. 12시에 끝내고 싶지만 12시에 끝내면 다 맛없다고 할 것이니까 1시가 적당한 것 같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좌우간 복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 다르다. 어떤 이유에서든 가난하면 다 복이 온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찾아오셔도 우리가 늘 거부하고 배척하던 사람들인데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가난하게 하셔서 주의 말씀을 듣게 하셨는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사모하게 하셨는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없으면 안 되도록 하셨는지, 주여 그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를 무슨 이유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이 없으면 안 될 사람으로 가난하게 해주시길 원하고 물이 없으면 안 될 사람으로 목마른 사람으로 되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