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다산 송곡리 봉강 조상(曺塽)의 후송재(後松齋)를 찾는다.
봉강 조상(曺塽)은 임재 서찬규(臨齋 徐贊奎)와 간재 전우(艮齋 田愚)
문하에서 수학하여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유학자이다.
후송재 표석
기호 낙론계열의 학통을 이었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령군 다산면 송곡촌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938년 문인들이 봉강선생을 기리고자 후송재를 건립하였으며,
후송재(後松齋)는 고령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후송재 정문
조상(曺塽)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으로 임재 서찬규(臨齋 徐贊奎)의
문하에서 학문에 대한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실천하여 수제자가 되었으며,
스승은 칠조훈(七條訓)인 “입지지대(立志之大), 입심지정(立心之正),
진실심지(眞實心地), 과실필개(過失必改), 절문근사(切問近思), 독서통투
(讀書通透). 변화기질(變化氣質)” 등을 써주면서 학문적 성취를 격려하였다.
후송재(後松齋)
입지지대(立志之大) : 뜻 세우기를 크게 하라
입심지정(立心之正) : 마음 세우기를 바르게 하라
진실심지(眞實心地) : 마음을 진실하게 하라
과실필개(過失必改) : 과실(過失)을 반드시 고치라
절문근사(切問近思) :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데서 생각하라
독서통투(讀書通透) : 글을 읽어 사리를 뚫어지게 깨달아 환하게 하라
변화기질(變化氣質) : 기질(氣質)을 다르게 변화시켜라
후송재 오르는 돌계단
조상(曺塽)의 본관은 창녕, 자는 문보(文甫), 호는 봉강(鳳岡)이다.
호조참판 퇴우당 조계형(退憂堂 曺繼衡)의 18세손이며,
대구도호부사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의 15세손,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의 14세손, 양산군수 설주 조시량
(雪州 曺時亮)의 13세손이며, 이인좌의 난 때 합천군에서
대거 가담한 조성좌(曺聖佐)의 10세손이다.
후송재 마루
조성좌(曺聖佐)는 반역죄로 1728년 4월 1일 처형 당했으며,
조성좌의 아들 형제 조명상(曺明相)과 조명협(曺明莢)은 멸문지화
(滅門之禍)를 피하기 위해 합천 묘산면에서 달아나, 달성 가창 정대리에서
은거하였다가 이인좌의 난이 어느 정도 평정된 후 낙동강을 건너 고향인
합천 묘산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입향하였다.
그렇게 목숨을 구해 대를 이어 나갈 수 있었고, 수직(壽職) 장악원정
조계흥(曺啓興)의 7세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조규승(曺奎承)이다.
증조모는 해주오씨로 효부(孝婦)로 정려(旌閭)를 받고, 복호(復戶)의
혜택을 입었으며 마을 인근 도로변에 해주오씨 숭효각이 있다.
아버지는 조정환(曺珽煥)이며, 어머니는 옥산장씨이다.
후송재 마루위의 후송재기 등 편액
후송재 측면
툇마루 아래의 박주가리
후송재 내.외의 석비
학산조공 추모비, 봉강선생 창녕조공 송덕비, 창녕조공 휘성좌 유허비
대문간채(안쪽에서)
송곡마을 입구의 창녕조씨 세거지, 동가 노래비 등 표석
송곡마을 전경
후송재 입구의 봉강선생 시비
설매음(雪梅吟) ~ 봉강(鳳岡) 조상(曺塽)
잦은 바람 눈보라의 깊은 겨울 한가운데 / 한 그루 매화가 시련속에 빈가지녀
아직 다하지 않은 맑은 향을 사랑하나 / 쇠잔한 맥박만 오래 남아 가련하구나.
여린 햇살이 닿은 가지 푸른 빛이 갓 도는데 / 혹한에 마음이 얼어 붙은 꽃은 벙글지 않네
다음 해 붉도록 힘찬 봄 기운을 받거든 / 마땅히 먼저 터뜨려 하늘의 뜻을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