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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지역(동북지역/ 서남지역 順)
1)의령남씨 남재묘: 남양주시 별내3로 217, (근린공원 주차장).
: 남재(南在, 1351~ 1419(세종 1), 조선 개국공신, 부친 남을번(검교시중), 이색 문인.
진사시 합격 좌부대언을 지냈고, 아우 誾(은)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개국공신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태조에게 在(재)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개국공신 1등으로 대사헌이 된다.
1396년 도병마사로 쓰시마를 정벌하고, 제1차 왕자의 난에 아우 은이 살해되었다.
1400년 태종 때 경상관찰사,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 후 우의정에 이르렀고,
1416년 영의정에 올랐다. 공은 경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산수에 능하여 당시 南算(남산)이라 불렸다. 태조의 종묘 묘정에 배향된 인물이다.
※태조의 건원릉 자리가 본래 남재의 묘터로 잡았었으나 이성계에게 양보하고 이곳을 받았다. 현재 묘역 내 부친 남을번의 묘 및 후손들의 묘와 함께 있다.
2)풍양조씨 시조 조맹묘: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156번길 201, (묘소입구 도로변 공터)
: 고려조 문신으로 생몰미상, 초명은 엄(嚴)이고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시조이다.
신라 말기 초야에 살다가, 왕건이 건국하자 관직에 나아가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여러 번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고, 관직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묘는 진건면 송능리에 있다.
이 묘는 조선 때 광해군이 생모 공빈(恭嬪)김씨 묘를 성릉(成陵)으로 승격하여 단장하면서 이장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외가쪽 친적이 되는 관계로 가까스로 봉분을 깎아 평장으로 만드는 선에서 그쳤다. 1623년 인조 반정 이후에 다시 봉분을 쌓고 비를 세웠다.
그런 관계로 두 묘가 30m 간격으로 앞뒤로 있으며, 건너편에 광해군의 묘가 보인다.
3)양주조씨 조말생묘: ①남양주시 고산로126번길 18-9, (강변동숭교회 주차장)
- ②고산로126번길 15-1, (주차 공간) 이후 도보로 답사.
: 조말생(1370∼ 1447(세종 29), 려말선초 문신, 서운관정 조의(誼) 4남이다.
정몽주 제자 조용(趙庸) 문인, 태종(1401년) 때 문과 장원급제해 정언, 예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고, 1411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병조판서 재임 시에는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점령하였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잠시 좌천되었다, 함경도관찰사,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후 1439년 궤장을 받고 기로소에 들었다.
본래 이곳은 신안동김씨의 석실서원이 있었던 장소였으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무너 뜨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허화 시켰고, 고종은 부인 명성황후의 능침을 이장하고 본인의 신후지지를 위해 양주조씨 일문에 사패지를 하사하고 금곡의 홍유릉 부지를 받게된 것이다. 1900년 양주조씨 일문에서는 조말생의 묘를 비롯 40여기를 덕소로 옮겨왔다.
삼국시대부터 이곳은 ‘수석리 토성’이 있던 곳으로 한강을 감시하던 곳이다.
묘역 내에는 조말생의 묘와 신도비를 비롯하여 조귀석(숙종, 전라도관찰사), 아들 조태동 ( 사헌부 대사헌) 신도비 등 현재는 전부 25위의 종친을 이곳에 모시고 있다.
4)광주이씨 시조비(始祖妣) 인화이씨묘: 경기 하남시 하남대로 888, (도보 600m)
- (주차: 역사박물관 주차(기본 400원, 10분 @100-), 하남공영주차장(1일:4,000-)
: 광주이씨의 시조 이당(唐)의 배위로 정부인에 증직된 인화이씨부인의 음택이다.
본래 연산조 갑자사화 때 묘를 실전하였으나, 영조 때 후손이 이곳에서 찾아내었다.
부인은 아들 5형제를 두어 모두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차남이 둔촌선생이다.
광주이씨의 시조 이당선생은 경북 영천에 둔촌선생과 신돈을 피해 최원도의 집에 피해 있을 때 죽으면서 최씨문중의 명당터에 묻히게 되면서 광주이씨는 조선의 최고 명당터를 갖게되었다.
광주이씨 시조 및 배위가 모두 명당에 있는 까닭일까?
둔촌선생 이후로 조선의 명문가가 되어 문과 급제자가 186명에 달하며 이인손, 이극배, 이극균, 이준경,
이덕형에 이르기까지 현달한 후손이 많아 다 기록이 어려울 지경이다.
5)청풍김씨 김덕수묘: 남양주시 경강로 399번길 50-7, (문의공파(김식) 재실 앞)
: 金德秀(1500∼ 1552(명종 7), 부친은 대사성 贈영의정 김식(湜)으로 부자간 모두 유명한학자로 윤근수, 이언적, 권율, 원호 등의 제자를 두었다.
제자 윤근수 문하에 김상헌, 조익, 조형, 이정구 같은 제자를 두었으며, 더 밑으로 김상헌 문하에 홍명하, 박세채와 같은 쟁쟁한 계통을 이루며 조선예학의 한 획을 긋고 있다.
공은 효우가 출천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그러나 20세에 기묘사화를 당하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해금이 되어 비로소 효령대군의 증손녀되시는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게 되었다. 후에 증손 육(堉)의 추은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청풍김씨는 기묘8현의 한 분이신 김식(대사성, 贈영의정) 이후 아들 김덕수, 손자 김비(판관), 증손 김흥우(강릉참봉)로 이어지면서 14세~ 16세까지 약100년 간 권문세가를 누렸다.
▶14세 김육(堉): 영의정, 대동법시행
▶15세 김좌명: 병조판서, ▶김우명: 청풍부원군 (현종비 명성왕후 부친, 숙종의 외조부)
▶16세 김석주: 우의정 ▶19세 김시묵 (정조비 효의왕후 부친)
이외에도 청풍김씨 묘역은 평구마을을 중심으로 김성응(김우명 증손/ 영조, 훈련대장), 김권(김식 손자/ 선조 오위도총부 도총관, 贈영의정) 등의 묘가 있다.
이곳 묘역은 산세가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김식(湜)의 묘가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즉 평구마을은 천마산 줄기로 주룡과 지룡 중에 주룡이 내려오는 형상이다.
이곳 지명이 삼패동인 것은 청풍김씨 김식, 김좌명, 김육까지 세 분의 신도비가 있어서 삼패동이라 불려진 것인데, 2009년 김좌명의 아들 김석주(우의정)가 광주군 귀여리에서 이곳으로 이장해 올 때 신도비까지 왔으니 제대로된 지명은 이제까지의 다섯 분의 신도비를 포함해 육패동(六牌洞)으로 바뀌어야 맞겠다.
마을 이름도 이 일대가 평평한데 주룡의 용줄기를 따라 사방으로 자그마한 봉우리가 모여있어 평구(平丘), 즉 평평한 작은 언덕이 박덩굴처럼 흩어져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일명 소쿠리마을이라 불렀다.
풍수에서는 '박덩굴형'의 명당이라 부르며, 마치 박덩굴이 온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박이 마디마다 열리는 것처럼 생겼기 때문이란다.
하여, 이런 곳의 발복은 자손들이 박덩굴처럼 두루둘 번창하게 된는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쿠리명당에서의 가장 좋은 진혈은 용머리가 아닌 김덕수 묘터를 꼽는다.
의왕시에 있는 청풍김씨 13세 김인백의 처 안동권씨의 명당터가 조성되기 이전에 김식이 평구마을에 입향 하여 청풍김씨의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부터 만들어진 묘역이다.
의왕의 김인백은 김덕수에 비해 2대 후손이므로 손자뻘이다.
6)(新)안동김씨 김번묘: 남양주시 와부읍 석실로336번길 11-47, (석실마을 종가집 앞).
: 조선후기 100년 세도의 발원지, 김상현, 상용 형제묘 및 조부, 부모묘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앞선 ‘조선의 명당’에 이미 소개를 상세히 해 놓았으니 참고 하시고…
7)청주한씨 한확묘: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553, (묘소입구 다산도예 주차장.)
: 조선 초기 최고의 중국통 외교관 우의정 청주한씨 한확의 음택이다. 모란반개형 명당.
양절공 한확은 누이가 명나라 성조의 후궁 려비(麗妃)가 되면서 중국에서 벼슬을 받았다.
성조가 북쪽 원정 중에 죽자 여비도 자결하면서 중국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고, 아들인 선종이 즉위하면서 이번에는 누이동생이 공신부인으로 간택되면서 양국 외교의 중심에 더 우뚝 자리하게 되었다. 따님 역시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혼인하여 왕실과 사돈이 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일찍 죽으면서 왕위는 시동생 예종 에게 넘어갔으나, 훗날 예종이 즉위 후 일찍 서거하자 정희왕후와 한명회를 설득 아들 하성군을 성종으로 즉위시키면서, 본인역시 의경세자를 추존왕 덕종을 만들면서 소혜왕후가 되어 서오릉 경릉에 들어갔다.
공은 태종, 세종에 이어 계유정란으로 세조가 등극할 때까지도 모든 중국과의 외교일을 전담한 전문외교관 이었다. 벼슬은 병조판서, 이조판서,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고, 세조가 즉위하면서 정난공신,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좌의정이 되었다.
1456년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중국을 설득시키고는 귀국길에 사하포에서 죽었다.
평생을 외교에 몸 바친 진정한 외교관다운 죽음이었다.
이곳 지명을 ‘능내(陵內)’라 부른다. 그 만큼 한확의 묘가 왕릉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Tips: 한명회와는 4대조 상당부원군 한악(渥)에서 갈라져 한확이 아저씨뻘이 된다.
8)(旧)안동김씨 김사형 ․ 평산신씨 신효창묘: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49, 청학포란형.
- (주차: 양평군 양서면 목왕로648번길 10, 신씨제실 앞에 주차 후 도보로 탐방.)
: 양평 양서 목왕1리에는 (구)안동김씨 김사형(1333~ 1407)과 평산신씨 신효창(1364~ 1440)의 제각이 각각 위치하여 있고, 마을 뒷산에는 두 기의 묘소가 앞뒤로 나란히있는데 앞의 것은 대사헌(세종)을 지낸 신효창의 묘이고, 뒤는 신효창의 장인되는 개국공신이며 좌정승을 지낸 안동김씨 김사형의 묘이다. 명당이라 장인과 사위가 공유까지 한다.
신효창이 풍수에 조예가 깊어 스스로 장인과 자신의 묘소를 미리 정하였던 것이다.
풍수에서는 이 명당터를 청학포란형(靑鶴抱卵形: 푸른 학이 알을 품고있는 형세)이라 하며 두 묘소는 각각이 ‘알’에 해당되는 정혈(正穴)이라고 한다.
양평 부용리와 목왕리 일원은 ‘구정승골’이라하여 조선시대 재상 9명의 음택이 모여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407년 김사형의 묘가 구정승골 최초 입주한 음택으로 구정승골에서도 이곳을 최고의 명당으로 꼽고있는데, 후손들의 발복을 보면 꼭! 그러하지도 아니하다.
나중에 다른 EP로 ‘구정승골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9)덕수이씨 택당 이식(植)묘: 양평군 양동면 쌍학안골2길 66- 1, (백아골 택풍당 앞 )
: 李植(1584~ 1647(인조25), 호 택당(澤堂), 좌의정 이행(荇)의 5대손이며, 부친은 찰방 이안성(安性)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 급제해 입신한 후, 1618년 인목대비의 폐모론 때 은퇴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이조 좌랑에 나온 이후 대사간, 대제학, 예조참찬을 역임하였고, 병자호란 때 김상헌 등과 척화를 주장해 심양에 잡혀 갔다 돌아왔다. 이후 형조, 이조,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공은 문장이 뛰어난 당대학자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고, 특히 한문학에 정통하여 한문4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1686년(숙종12)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백아골 입구에 택풍당 碑(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 안 쪽의 택풍당은 잠시 은퇴했을 당시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이곳 출신의 후예로 3정승, 7판서, 3대제학에 문과급제 40인 등 생원, 진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곳을 당시 풍수사들이 ‘야(也)’자형 또는 ‘금비혈’의 명당이라 불렸는데, 이곳에는 택당 조부모, 부모, 장남 이면하(세자시강원), 3남 이단하(대제학, 좌의정)의 묘가 같이 있다.
조선 중기 명풍수사 이의신과 박상하가 직접 점지해 준 이곳에 먼저 부친을 장사지내고 이어 2년 후 조부모 묘까지 이장시켜 덕수이씨 가문의 발복을 이루었다고 한다.
10)연안이씨 월사 이정구묘: 가평군 상면 태봉골길 93-10, (사당 경덕사 입구)
: 李廷龜(1564~ 1635(인조13), 호 월사(月沙), 연성부원군 이석형(石亨)의 현손이며, 현령 이계(棨)의 아들이다. 윤근수 문인으로 1590년 문과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임진왜란 중 승지, 승문원 부제조를 역임하였고, 전란 후 외교를 주로 담당하며 대제학, 광해군 때 잠시 사직하기도 하였으나 병조, 예조, 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에 공주호종, 정묘호란 때 병조판서로 화의를 반대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으나 병자호란 발발 전 죽었다. 공은 문학의 대가로 이식, 신흠, 장유와 함께 4대 문장가로 불리운다. 호종, 강화(江華)에 피란하여 화의를 반대했다.
1628년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진다.
연안이씨는 3대 대제학을 배출한 학풍으로 당당한 집안이다.
조선에서는 광산김씨 사계집안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 달성서씨 약봉집안 (서유신, 서영보, 서기순) 및 전주이씨 백강집안 (이민서, 이관명, 이휘지) 등 조선 역사를 통털어 단 네 집안뿐이다.
묘역입구에 연안이씨 삼세비각(이정구, 이명한, 이일상 신도비)과 열녀, 효자문 및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묘역은 밑에서부터 후손 이광수(?)묘, 이정구묘, 손자 이일상묘, 제일 위가 아들 이명한의 묘로 4기가 상하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월사 묘역은 용인의 저헌 이석형의 묘와 더불어 연안이씨를 대표하는 명당묘역이다.
가문에서는 부원군 3인, 정승 8인, 대제학 6인, 판서 42인, 공신 4인, 청백리 2인 및 문과급제자 116인을 배출한 명문가로 특히 문형으로는 조선 최고의 가문이다.
11)밀양박씨 규정공파 묘역: 고양시 덕양구 원당로 135번길 26, (추원재 인근 도로 변)
: 공은 시조 박혁거세의 45대 손으로 밀성군 惟孝(유효)의 손자이며, 興의 아들이다.
고려중엽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 규정과 太師(태사)를 지냈다. 三品으로 退職하시여 87歲의 壽를 다하시어 糾正公派(규정공파)의 파조로 모시게 되었다.
이곳은 밀양박씨의 세거지로 규정공파(밀양박씨 12중조파의 한파) 묘역이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어 세칭 능골 또는 박재궁이라 부른다.
이곳은 풍수지리상 ‘대유혈’로 불리는 명당터로 파조 박현과 아들은 비석으로 모셔져 있고 그 외 개국공신 박강생, 절신 박심문 등이 제1 묘역에 모셔져 있고,
제 2묘역에는 밀양박씨 가문의 유일한 문형이셨던 낙촌 박충원(명종/ 대제학) 묘가 있고, 제 3묘역에는 역시 가문 유일의 정승이신 퇴우정 박승종(광해군/ 영의정)이 있다.
♠Tips: 밀양박씨 유일의 정승 퇴우정 박승종(1562~ 1623, 광해조 영의정)
: 선조 때 문과급제, 임진왜란 선무원종 1등, 호성원종 1등 공신, 도승지, 전라관찰사 및 병조판서를 역임, 광해 때 손녀가 세자빈이 되어 인척관계가 된다. 우찬성, 좌찬성을 거쳐 광해 10년 좌의정, 12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장남인 광해군의 장인 박자흥(경기감사)과 같이 자결하였다.
1857년 철종 때 복권되었다.
초장은 경기도 광주 검천이었으나 이후 공주, 목천을 거쳐 2007년 두응촌으로 오셨다.
♠Tips: 밀양박씨 유일의 문형(대제학) 낙촌 박충원(1507~ 1581, 명종 대제학, 이조판서)
일단은 경기의 명당터 1부를 여기서 마치고 나머지 2부는 다음 EP로 넘어갑니다.
명당을 찾다보니 남의 음택을, 또 발복을 확인하려니 남의 가문 후손들의 발자취를 자연 확인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상기의 밀양박씨의 인구는 300만을 넘어섰고,
400만이 넘는 김해김씨, 두 가문에 대한 의문이다.
조선 역사를 통해 밀양박씨에서는 상신(정승) 1분, 문형(대제학) 1분, 청백리 2분이 전부이다.
김해김씨 가문은 아주 더 심하다, 상신(정승) 1분, 청백리 1분, 문형(대제학)은 한 분도 안계시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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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읽어야 하는데~
좀있다 가게가서 자세히 일고 후기 올릴께요~
울하나형부~~최고!! 늘감사 드립니담~^♥
밀양박씨
무지 많은데..
조상묘를 등한시 모셨나?
자손이...ㅋ
에거..배~가는 항개도 없스무니다..ㅎㅎ
울 유자님은 워디 조씨여?
함안 아잉교..
우리 동네 고 일대가 본토 되것심
어제
남이섬 들어가다 남이장군 묘소 실~들따봤는데..
남이섬 안에 남이장군 묘라 불리워지던 돌무더기에 묘소를 맹길었다 하더군요.
실제 저 묘소들 안에 확인되지 않고 그분들이 안 모셔진 경우도 간혹 있나봐요?
바이올렛님 잘문은 하나 아저씨보고~~
사실 가묘가 많거든요. 남이장군묘는 여기저기 있던데요.
와
자료 함 올리실라몬 월매나 고생을 하실까요
하나님을 대장으루 임명하고 역사탐방 동우리 하나 맹글었음 좋겠는디유~~~~
산사람들이 옹기종기 좋은기운나누며 살아야하는디
다들 좋은곳은 돈많았던 부자들의 무덤자리로 너무도 넓은땅이 낭비가되어서 아까부여 무식쟁이의 눈에는요 ㅎㅎ
오늘도 감사히 잘 보고 읽고갑니다 또 무궁무진한 하나형부님의 보따리에선 어떤 야그가 나올지 늘 궁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