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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시편 36편 5-9절)
주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주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생명의 원천과 누림
시편 36편은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로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경험한 사람의 간증이고 고백이다.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골골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것을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고 표현했다. 주의 집에 있는 살찐 것으로 풍족히 먹고 기쁨의 강물을 마신 결과로 생명의 원천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자기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해서 생명의 원천까지 이르는 간증이 시편 36편이다.
근원을 먼저 맛보는 사람도 있고 누림이 먼저 시작된 사람도 있다. 말씀이 좋아서 교회에 온 사람은 주변 사람이 어떻고 교회 환경이 어떻든지 관계하지 않고 말씀을 좇아서 산다. 그래서 점점 그 말씀을 사는 사람들이 좋아 보여서 교회를 누리게 된다. 반대로 말씀은 모르지만 사람이 좋아서 온 분들도 상당 수 있다. 교회가 좋고 사람이 좋고, 뭔가 편안하고 안식이 되어서 살다 보니까 이 사람들을 이렇게 조성한 말씀을 깨닫게 된다. 나타난 형태를 누리다가 근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에는 성막의 식양에 대하여 25장 이하와 35장 이하에 반복해 나온다. 25장부터는 지성소의 법궤에서 시작하여 등대와 떡상을 거처 바깥뜰로 나가는 모양으로 설명되어 있고, 35장 이하에는 거꾸로 성막을 만들고 그 안에 법궤와 기구들을 만드는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마음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것을 밖으로 표현했는데 실제로 집을 지을 때는 바깥부터 짓는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근원과 누림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데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근원을 먼저 찾고 어떤 사람은 누림이 먼저 된다. 시편 36편은 실제적 경험에서 시작하여 원천의 세계로 눈을 돌린다.
작년에 코로나 2차 대유행 직전에 양문회 RT를 봉화로 갔다. 그때 봉화에 가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니 ‘영남의 젖줄 낙동강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비석이 있었다. 듣기로는 태백에 있는 황지연에서 낙동강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물이 여러 곳에서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봉화 근처에서도 낙동강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부산에 살아서 낙동강의 하류만 보았다. 그래서 내 머리 속에는 낙동강 하면 구포를 흘러 을숙도를 지나 다대포로 해서 바다로 빠지는 강밖에 없었다. 그 후 대구에 와서 살면서 낙동강의 상류를 보게 되었는데 작년에 처음으로 내가 오랫동안 살던 부산의 젖줄의 시작점을 가보았다. 거기서 시작되어 영남의 많은 사람들이 이 젖줄에 붙어서 사는 것을 보니 근원을 보는 기분이 하류를 보는 것과 달랐다. 하류는 거대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는 수영을 하지 않는데 상류는 물이 깨끗하니까 래프팅도 하고 보트를 타고 물에 들어가기도 하고 별 것을 다 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으면 근원 근처에 사는 것이 맑은 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사람들은 나타난 것을 보고 그 경험을 가지고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아가게 된다.
예수님은 근원에서 오셨고 근원을 아신 분이지만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나타난 것을 먼저 보았다. 그분에게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내려놓아지는 것을 보았고 그분을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소망을 갖게 되었다. 제자들은 나타난 것을 보고 따라갔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근원으로 인도하셨다. 근원으로 갈수록 제자들은 캄캄해졌지만 결국 제자들도 근원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모든 사람들을 근원 안으로 이끄는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하였다 말씀과 사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육체로 나타나신 것을 본 사람이나 말씀을 경험한 사람이나 다 한 자리에서 만나지는 것이다. 그곳이 교회다. 내 인생이 흙인 줄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첫 자리를 아는 사람이 되면 삶의 모든 것이 가벼워지고 다르게 보였던 다른 사람들이 차별이 없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사람들은 이런 변화된 사람들을 먼저 보고 원천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 생각에 두고 우리 마음에 기록하여 우리 중에서 하나님을 알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그것이 마치 우리의 말초혈관까지 건강하게 흘러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까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서 우리의 원천이신 주님의 어떠하심이 나타나게 된다면 누구라도 와서 무엇을 알아야 된다고 할 필요가 없이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아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보기만 해도 원천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가 가진 소망이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여호와를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누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생명의 원천에 이르도록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5,6절)
1-4절은 이 세상의 악의 행태를 보고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라고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현실에는 항상 문제가 널려져 있다. 말씀을 듣고 살아도 직장 생활을 하든 어디를 가든 현실에 부딪치는데 현실은 우리가 이상 속에서 본 원천과 거리가 있다. 현실의 문제에 덮여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원한에 사무쳤다고 하고 하늘이 노랗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가득하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고 하였다. 어쩌면 같은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는 고백이 나온 것이다. 어떻게 원한이 공중에 사무칠 인생에게 어떻게 주의 인자와 성실이 하늘을 뒤덮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가!
6절에는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라고 하였다. 산과 바다와 하늘, 어떤 것을 보아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늘 문제 속에 사는 사람은 입만 열면 불평이 나오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송사가 나올 수 있다. 누구라도 그런 환경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 중에도 어떤 사람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데도 그에게서 “내 인생에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 어디를 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것밖에 없습니다.”라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다윗은 어디를 보아도, 하늘을 보니 주의 인자하심이 있고 공중을 보니 주의 진실하심이 가득하며 산들과 바다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와 같고 하나님의 심판과 같다고 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다른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냥 보면 ‘뭐가 좋다고 저렇게 하는가. 뭐가 좋아서 저렇게 감격하는가?’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에게 다른 빛이 비치면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절).”라고 하게 된다. 주의 빛이 있어서 빛을 보게 된다.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모든 것을 다 보려고 해도 다 보이지 않는다. 신발장수와 모자장수는 길거리를 다녀도 보는 것이 다르다. 신발장수는 사람들 발만 보게 되어 있고 모자장수는 머리만 보게 되어 있다. 모자장수는 전혀 발을 못보고 신발장수는 머리를 못보는 것이다. 시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관심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빛인가? 어떤 지식이 나에게 들어와 있고, 어떤 생명이 나에게 들어와 있느냐에 따라 이 세상을 한에 사무쳐서 살 수도 있고 주의 진실하심과 성실하심이 자기 인생을 뒤덮은 사람으로 살 수도 있다.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내 인생을 뒤덮고 나를 사로잡는 것이 있으면 세계가 바뀌게 된다. 나를 뒤덮고 있는 것, 나를 압도하는 그것이 나를 만들어가게 되어 있다.
젊었을 때는 호르몬이 왕성해서 쉽게 무엇인가에 압도당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도 하게 되는데 나이가 들면 사람을 만나도 쉽게 압도되지 않는다. 그래서 계산할 것이 많아지고 맹숭맹숭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젊어서부터 호르몬이 많지 않았는지 맹숭맹숭할 때가 많았다. 교회에서도 남들처럼 뜨거웠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했고 사람들이 환호할 때도 나는 비시시 웃는 것이 전부였다. 한번쯤 화끈해지고 싶어서 전도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한얼산 기도원이라는 데를 가 보았다. 북치고 장구치고 시끌벅적하고, 거기 가면 개도 방언을 한다는 곳인데 거기에서도 맹숭맹숭한 마음으로 머리로는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러는가 하며 계산을 하고 있으니 잘 뜨거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압도해 버리는 것, 내 인생이 다 사라져도 이것이면 족하겠다 싶은 것을 만나니까 내 성격과 관계없이 이것이 인생을 뒤덮게 되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오는 상황은 어떤 지극히 귀한 것이 내 인생을 뒤덮을 때 나오는 것이다. 말씀에 덮이든 그 인격의 아름다움에 덮이든 그것이 우리를 뒤덮게 될 때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살아나게 된다.
예수의 죽으심을 보고 ‘저것이 나구나. 내 인생은 저것밖에 없구나.’ 하고 그분에게 덮일 때 우리는 공중에 주의 진실이 사무쳤다고 고백하게 된다. 나의 모든 것을 뒤덮으시는 크신 분을 경험했을 때 내가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임을 알게 되고 그럴 때 내게 주신 모든 것이 귀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한없이 작아지고 인생의 바닥을 경험해서 은혜가 오기도 하고, 그냥 길을 가는데 너무나 값진 것이 보여서 내 모든 것을 팔아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불행은 자신의 출발점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이런 곳에서 일하게 하셨습니까.’ 하면 모든 것이 과분하고 은혜가 된다.
그렇듯이 우리가 본래 흙이었음을 기억하고 모태에서 빈손으로 온 인생임을, 십자가에 못박힌 그 자리, 모든 사람이 싫어 버리고 간 그 사람이 원래 나라는 것을 기억하면 우리 인생은 은혜로 뒤덮여 있음을 알게 된다. 첫 자리를 기억하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모두 은혜뿐이다. 교회생활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즐거워하는 유일한 곳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못한 사람일 수 있고 더 비참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럴 때 우리는 더욱 은혜에 뒤덮인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다. 세상에서 실패를 가지고 나가서 잔치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런데 교회는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더 깊은 누림이 있는 곳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축복일 수밖에 없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7절)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5-6절에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덮었습니다.”라는 표현은 막연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주의 인자하심이 보배롭다고 하였다.
‘인자하심’은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다. ‘헤세드’는 인자하심, 자비하심, 사랑 등 여러 말로 번역되었다. 문장으로 이 말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 놓은 것이 스바냐 3장 17절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마음’이 헤세드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이다.
신약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구약에는 몇 번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헤세드라는 말이 훨씬 많이 나온다. 헤세드는 신약에서 아가페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지만 정확한 의미는 스가랴 3장의 ‘너를 보면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속으로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내 앞에 이런 대상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을 갖는 것보다 이런 사람을 얻는 것이 더 큰 축복이 아닌가! 시편 기자는 그것이 인생의 보배라 하였다.
목요일 사무엘하 말씀 중에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의 오해를 사서 다윗은 재산을 그의 종과 반씩 나누라고 결정을 내렸다. 처음에는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모든 재산을 다 가지라고 했고 종 시바는 므비보셋을 섬기라고 했는데, 중간에 시바가 모함을 해서 므비보셋이 해명을 했는데도 반씩 나누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나는 왕이 이렇게 평안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시바에게 다 가지라고 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내게 복은 당신입니다. 당신이 있는 것이 나에게 축복입니다. 내가 왕과 함께 밥을 먹든 안 먹든 내 할아버지의 소유를 갖든 안 갖든 다 부차적입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태도다. 절름발이 같은 사람으로서 왕의 식탁에 앉아 은혜를 누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복을 주신 사람이 우리의 축복의 전부인 것이다.
여기서 내 인생의 보화는 주의 인자하심이라 하였다. 무엇이 내 인생의 보화인가? 내가 보화로 여기는 것이 나를 조성해가고, 마침내 그것이 나를 뒤덮는다. 그런 복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내가 그를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보면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다면, 내가 형제를 보면서 내가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보화가 아닌가!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서 나온다면 이것이 우리 인생이 가진 가장 귀한 보화가 아니겠는가!
주님 자신이 내게 보화가 되면 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다.(계14:1) 가장 소중한 그것이 우리의 이름이 되고, 우리를 보면 그것이 생각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제사장의 모습이다.(출28:36-38) 제사장의 이마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써 붙였다. 제사장은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기고 다닌 사람이다. 구약이니까 어쩔 수 없이 이마에 패를 붙이고 다녔지만 우리를 보면 어린양이라고 읽게 되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읽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 자기 인생을 자기에게 보화로 보인 것과 바꾸며 살아간다. 그래서 주의 인자하심이 보배롭게 보인 사람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한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 우리 인생이 가진 시간과 재능과 물질 등,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것을 영원한 것과 바꾸고 사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보화로 보인 사람이 내가 보화로 여기는 것과 바꾸다 보면 결국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사람이 된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들어가려면 내 날개를 접어야 한다. 병아리가 날개를 펴고 있으면 어찌 어미 품에 들어가겠는가. 다 접고 들어가는 것이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것은 내 날개를 다 접어야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줄 알아야 주의 날개 그늘에 머물게 된다. “내가 당신 안으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나를 접고 들어가는 사람의 고백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줄 알 때 우리는 다 접힌 사람이 된다. 그때 우리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있게 된다.
우리의 축복은 관계의 축복이다. 관계 속에서 헤세드를 경험하는 것이다.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면 너를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는 분이 내 앞에 있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이것을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길 때 우리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주님을 깊이 누리게 된다.
주의 집의 살찐 것, 기쁨의 강물(8절)
8절에는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날개를 접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들어가서 누리는 몸의 생활이다.
처음 대구에 와서 얼마 후에 집회 때 그런 간증을 한 기억이 난다. 나는 맹물같은 성격이라서 쳐다보고만 있지 빠져들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뒤로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데도 없고, 이 단순 과격한 사람들 속에 푹 빠지자니 나도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뒤로 갈 수도 없고 앞으로 가자니 물에 빠질 것 같던 것이다. 그래도 길이 이 길밖에 없어서 “나를 이 물에 풍덩 던져보겠습니다.”라고 간증을 했다. 여기 던져지면 몸 안의 생활, 주의 집의 살진 것으로 풍족하게 되고 기쁨의 강물을 마시는 생활을 누리게 된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뜻이다. 에덴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는 곳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서 기쁨이 발원한다. 창세기에는 동산에서 물이 발원하여 네 곳으로 흐르고 사방을 적시고 흘러내렸다고 했는데, 시편에는 근원에서 기쁨의 강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가면 이것이 구체화되어 수정 같은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내린다. 강 좌우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 같은 생명수가 흘러내리는데 길 가운데로 흘러서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자라고 그 생명나무의 잎사귀들, 과정들이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 있다고 하였다. 열매도 먹지만 잎사귀까지, 내 인생의 어느 과정도 버릴 것이 없이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며 나는 왜 이래야 하는가?’ 나 혼자만 놓고는 이유를 다 알 수 없다.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데 어느 날 보면 내 인생이 누군가를 치료하는 자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때는 내 인생을 끄집어내야 되는 것이다. 마치 보석상자에서 보석을 꺼내 주듯이 내 인생의 한 과정 한 과정을 꺼내서 누군가를 치료하는데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교통이 그런 것이다. 누구를 찾아가서 위로할 때 성경을 펴놓고 하겠는가. 내 인생을 끄집어내야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말로 하자면 그 잎사귀를 끄집어내서 만국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 좌우에 생명나무 열매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데 열두 열매가 열두 달을 과실을 맺어 어느 시절이나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이 관계의 축복을 누리고 이것을 보배로운 것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이 주의 집의 살진 것으로 배부르게 되면 기쁨의 강물을 마시게 된다. 물을 조금 마셔도 좋은데 기쁨의 강물을 마신다면 흠뻑 젖지 않겠는가! 목을 축이는 정도가 아니라 흠뻑 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흐르는 약속이다. 우리는 동산 안의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 같은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내려서 거기서 그 물로 인해서 생명나무들이 자라게 되고 그 나무들이 겪은 모든 과정들이 만국을 치료하는데 쓰인다고 하였다. 이것을 우리 교회생활의 말로 풀어보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그 깊은 죽음에서 어떤 말씀이 흘러나와서 그 말씀이 우리를 생명나무가 되어 자라게 하고 내 인생에 겪은 모든 과정을 그 말씀으로 해석이 되니까 누군가를 치료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상이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다 치료해야 되는 사명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만국을 치료하는 이 귀한 약재가 저장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교회에 아픈 사람도 많고 마음이 아픈 사람도 많은데 이런 사람들을 우리 잎사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여럿이 같이 모일 수 없지만 두 명이 만나는 것은 허용되니까 내 잎사귀가 치료에 쓰이는 것이 궁극적으로 내 존재가 완전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꼭 말씀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직책을 맡아야 쓰이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의 과정이 누군가를 살리는 것이다. 이보다 귀한 쓰임이 없다.
이것은 몸 안에서 주의 집의 살진 것을 먹고 복락의 강물을 마시는 생활이다. 단지 즐겁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즐거움은 내 인생이 누군가를 치료하고 났을 때 내 존재의 의미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이 날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구나. 이때를 위해서 당신이 그렇게 내 인생을 준비해 오셨구나!’ 이런 기쁨의 강물이 거기서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시편 16편에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라고 하였고(3절),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하였다(11절). 이것 또한 우리의 고백이다.
형제를 존귀히 여기고 ‘내 즐거움이 그에게 있구나.’ 하고 살다 보니까 이것이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길이구나.’라고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배필로서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 기쁨은 살찐 것으로 배부르고 기쁨의 강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9절)
9절에는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하였다.
기쁨의 근원, 생명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야곱은 요셉에게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으로 축복했다. 원천에 이르면 마르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냥 “교회가 좋다. 사람들이 좋다.” 하고 있으면 어떤 때는 좋은데 어떤 때는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원천의 복을 가진 사람이 되면, 근원을 알아서 거기 뿌리를 박으면 표면이 마르든 비가 오든 관계없이 항상 넉넉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원천의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내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셨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분 앞에 있는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신 것이다. 그래서 처음 볼 때는 굉장한 것 같았는데 원천으로 가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분이다. 로마군대라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 같았던 분이 아버지 집으로 간다 하고 아버지 앞에 선 모습을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으니까 능력도, 기적도, 위대함도 다 사라지고 나와 다를 바 없는, 실망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신 그 사람이다. 창세기 1장과 2장 안에 있는 이 사람으로 회복되야 되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우리는 동산을 떠나왔고, 동산은 화염검으로 가려져서 거기 들어가면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동산 안에 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동산에서 온 사람, 벌거벗은 한 사람, 아무것도 수식할 것이 없는 이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조롱했고, 따르던 제자들은 실망하고 떠났으며 다 낙담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사람을 본 것이 우리에게 원천의 축복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 내려와 보라 조롱해도 내려올 수 없는 이 사람, 부끄러움과 조롱과 상실, 이것은 우리가 다 싫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지어졌지만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그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 사람이다.
꼼짝할 수 없는데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지으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의 안식,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이제는 더 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안식이 바로 이 사람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사람은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안에서, 죽임당한 어린양 안에서 이 사람이 우리에게 보여졌다. ‘저것이 나였구나.’라고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천한 것에서 보배로운 것을, 무시했던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을 보게 되었다. 우리 인생이 그 사람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고, 7년에 한 번씩 안식년을 지키고, 안식년을 일곱 번 지키는 해, 49년과 50년에 걸친 해는 희년이다. 예수님은 기쁨의 해, 은혜의 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사 내게 기름 부으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다. 희년이 그런 해다.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기업을 원래 소유지로 돌리고, 원래 내 땅이었는데 팔아먹었어도 희년이 되면 다시 내 땅이 되는, 남의 땅을 돈주고 빼앗았어도 희년이 되면 돌려줘야 되고, 모든 빚이 탕감되는 것이다.
50년 만에 한 해씩 이런 일이 오면 살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50년만 버티면 되니까 이런 나라가 이 세상에 있으면 좋은데 공산주의가 이런 사회를 꿈꾸다가 잘 안되었지만 교회가 이런 나라다. 희년이 선포되는 나라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셨다. 희년은 안식년의 축적이다. 안식년을 일곱 번 축적한 결과로 희년이 오는 것이다. 우리의 안식이 그것이다. “내 인생에 하나님이 지으신 여기에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이 안식이 우리에게 축적될 때 다른 것은 다 가지게 하십시오. 나는 당신과 누리는 이 헤세드의 기쁨, 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복된 관계만으로 내 인생은 만족합니다.” 이런 것이 일곱 번 축적될 때 우리에게는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속박이 풀어지는 우리의 희년이 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원천에 있는 그 사람,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만족이라면 만족 못할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이 사람으로 만족하고 이 사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면 우리 교회는 세상 앞에 희년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속박을 풀어주고 모든 빚을 탕감하고 이제는 아무것에도 매일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영생이다.
이 목사님 말씀 중에 부모가 가장 기뻐하는 말은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말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사람인 것만으로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십니까. 나는 인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다른 것은 다 가지게 하십시오.”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이 모든 속박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이 해방을 세상 앞에 선포하기 원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축복의 원천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 있다. 거기에 약함과 부끄러움과 조롱과 상실 등, 우리가 싫어했던 모든 것이 있었다. 그 자리가 바로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지어졌지만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는 자리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꼼짝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바로 거기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 모든 풍성을 누리고,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여 영생을 누리는 자리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의 빛 안에서 보게 되었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기에 죄악이 관영하고 이기심과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이 관계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고 이 보배로운 기쁨을 주체할 수 없게 하시고 주님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치는 경험까지 하게 하시는지요! 우리에게 두신 은혜가, 우리의 잔이 넘칩니다. 우리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합니다.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복된 관계를 누리고 이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원천을 알게 하시고 이 원천의 축복을 늘 세상 앞에 내놓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