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여행을 담는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月 村
- 丹陽 禹氏 집성촌을 찾아서 (24) 경기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정평공파
경기도 수원시와 인접한 화성시에는 단양우씨 3집안의 집성촌이 있는데, 다세대 순으로 문희공
봉상정공파,안정공파,정평공파 집안들이 서로 먼거리를 두고,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과연 어느 집안부터 먼저 찾아가야 할지 망설여졌는데,단양우씨 카페지기 우승환 종인의
도움으로 화성시에 문화재로 등재되어 자료가 많은 정평공파 추연 선조님 집안을 먼저 찾아 갔다.
수원역에서 화성시 매송면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20분 정도 달리니 수원시내를
벗어나면서 매송면 소재지 어천리에 내려 가게에서 단양우씨 집안을 찾으니 금방 알려준다.
임진왜란 의병장과 문과에 급제 후 화성 현감과 남인의 대표 인물로 활약하신 추연 선조님의
후손 우광성종인댁을 찾아가니, 이른 아침 식사 시간이다. 방금 단양우씨 카페지기 우승환님께
내방 연락을 받았다고 하시며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덥기 전 묘역에 먼저 가보자고 제안하신다.
정평공파 집안은 경기도 파주와 경북 상주, 경기 화성이 대표적 집성촌인데 자손이 귀한 집안이다.
이곳 정평공 화성 종가에도 자손이 귀하여 연이어 4대째 계자를 모셔 온 기록이 족보에 있다.
시조로 부터 17세손이신 추연 우성전(1542~1593) 선조님께서는 27세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거치면서 당시 당파대립에 대한 정황을 기록한 추연일기 (계갑일록)이 후세에 목판본을 제작
필사본을 국내 주요 도서관과 대학에서 중요 자료로 인정 보관되고 있다.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추의군을 모집, 활약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집안을 빛내신 분이다.
시조로 부터 24세손이신 우하영(1741~1812) 선조님은 조선후기에 전국산천을 체험하면서
옛 문헌과 당대제가들의 논설을 읽고 수집하여 국가.사회의개혁및 개혁방안을 종합한 "천일록"을
저술하시어, 묘역과 함께 경기도 중요 유형문화재로 인정 등재되었다. 아쉽게도 묘역에 비석이
세워지질 않아 조선시대의 역사를 알기 위해 찾아오는 탐방객들이 안타캅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수원 시외버스터미날에서 다시 수원역을 거쳐 화성시 매송면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수원시와 가까이에 위치한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집성촌
조선말기의 족보에는 화성시 매송면 집성촌을 수원으로 표기하고 있다.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에 도착한 면소재지 골목 풍경
직접 가족 이름을 쓰고 돌 조각으로 완성한 개성 있는 가족 문패
"찾아 오다 보니 너무 일찍 방문한것 같습니다." 아침식사 중에 내방 함
거실벽에 힘있는 서예 글씨 작품 한점이 한눈에 들어온다.
3대가 한자리에 함께 한 가족사진
주말에 멀리 계시는 삼촌과 동생도 방문, 주말 텃밭을 일구면서 지내는 다복한 가족 풍경이었다.
서예작품을 나무와 돌에 옮겨 작품활동을 하고 계시는 우광성 종인
퇴계 이황선생 성학심도를 오랜시간에 걸려 나무에 새겨 남긴 명작 병풍작품
단양우씨 족보 대동보와 서예 작업시 사용하는 다양한 낙인도 보인다.
화성시 매송면 중앙도로에 있는 문화재 묘역 안내판
추연 우성전 선조님의 신도비 (작고 후 후손들이 일대기 활동사를 기록한 비석)
참나무 숲길로 이어지는 묘역가는 길
선조 묘역 맨 아래에 모셔진 14세 樹 입향조 할아버지
집에서 묘역으로 다시 화성시 다른 집성촌 3곳을 함께 취재하며 동행하며 도와 주신
우광성 종인께서 잘 보존된 비문을 읽고 설명 해 주고 있다.
망부석에 구멍이 뚫린 석 조각 상이 붙어 있는 보기드문 석조물이다
좌 청용 우백호 조건에 맞는 중중 임야 중 최고의 위치에 모셔진 묘역들
같은 집안 묘소인데 비석이 사라져 주인공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산소
남기신 기록물과 교지가 함께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우성전 선조님 묘역
내용이 충실하게 기재되지 못한 추연 선조님 묘역 문화재 안내문
한자리 명당에 잘 모셔진 정평공파 화성 후손 묘역
종답 채소 텃밭에 농사일로 가시는 우광성 종인 가족분들
조선 말기 체험한 선진 농업론 (천일록)을 저술하신 우하영 선조님 묘역
禹夏永 선조님 묘역 안내문
처음 찾았던 묘역과 다른 위치에 모셔진 묘역을 둘러본 후 바라본 매송면 일대
묘역을 둘러 본 후 우광성 종인 댁으로 가는 매송면 중앙로 길
추연 우성전 선조님의 인터넷 기록물들
도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계갑일록 (추연일기) 우성전 선조님 기록물 원본
1583년6월1일~ 1584년8월30일까지 42세에 전국을 돌면서 당시의 당파분열과
당쟁의 반대당 인물들의 언행과동향을 기록한 일기장, 역사적인 중요 자료로 인정 받음
집안 화재로 소실 될뻔한 귀중한 계갑일록(추연일기)의 첫 페이지
첫줄 시작과 그날의 상황에 따라 글씨체가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맨뒷장에 가까운 후학들이 계갑일록을 보고 회답 적어 덧 붙여져 있다.
계갑일록 교지 기록물 5점과 묘역이 경기도 지정 문화재로 등재 된 지정서
화성시청에서 문화재로 등재 된후 발간된 계갑일록 필사 번역 간행물 책자
정평공파 화성 집안에서 자손이 귀하여 종가를 잇기위해 계자로 한집안에서 4대를 모셔 온
상황을 알수 있다. 추연 우성전선조님도 종가로 계자로 오셨음을 알수 있다..
임진왜란때 화성지역 의병장으로 추의군을 모집 활약한 해설서
27세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남인의 대표 주도인물로 활동 함.
화성시에서 발간한 계갑일록과 함께 지정된 문화재 화보
책자에 원본 복사본도 함께 실려 있다.
추연선생 유사 행장, 비문, 시호들을 줄때의 모든 지식을 알리는 백서다.
귀중한 윗 어른의 소장품을 대를 이어 잘 보관하면서 소장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추연수록 퇴계 인행록 스승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스승에 대한 배움의 감회록
무오사화에 대한 관련 고서
단양 시중공 비문을 수기로 적어 기록으로 남기셨다.
안동 지방향시(과거시험) 질문에 대한 답변서
추연선조님 교지 경기도 문화재 제187호 정조 17년 (1793년)
贈諡 (증시) 임금이 역대 나라에 영향을 끼친 사후 신하에게 다시 내린 교지
추연 우성전 선조님의 부인 허씨 할머니께 숙부인에서 정부인을 명하는 교지
남편 관직이 정3품에서 정2품으로 승진하시며 부인께 내려진 교지
술회 마음속에 품고 있는 느낌들을 글로 표현한 고서
추연 선조님께서 시호를 받으면서 여러명이 함께 한 관료들의서명 날인이 보인다.
지방 하급 관료를 뽑을때 한때 지방으로 출장가서 과거시험을 치루었음을 알수 있다.
조선말 정조 임금의 비답, 우하영선조의 상소에 대하여 내리신 하답, 길이 7m
긴 장문의 글을 쓰다 부분 수정했던 흔적이 보인다.
우하영(1741~1812) 천일록 필사본 번역 책자
출판사에서 중요 자료임을 알고, 국내 학자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출판된 책자
단양우씨세계 백천보 필사본 (1866년)
정평공파 가계보 휴대용 家牒 (옛 어른들께서 다른지방과 출타시에 휴대)
후천자 (後天字) 기존 천자문에서 부족한 빠진글자들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단양우씨 대동보 족보
화성 집성촌을 수원으로 표기된 조선시대 족보 16세 부터 기재된 것이 보인다.
1966년에 대전에서 발행된 단양우씨 대동보
근대족보 편찬의 전성기가 시작 되는 시점이다.(1966년)
경기 화성의 입향조는 14세 樹 선조님
화성에는 종인이 귀한 상황에서 도시로 떠나고 극소수만 고향을 지키고 있다.
작은 방에서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으로 전시회도 여러번 했다고 한다.
역사 깊은 태극 문양을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화하고 있었다.
대가족이 모인 점심 식사자리에 긴시간의 만남으로 인하여 접심식사까지 함께 했다.
중국의 서예 대가 왕희지(321~379) 난정서 신룡본 모본을 나무에 새겨 작품화 했다.
술자리에서 쓴글과 필법과내용이 중국 고대의 명작이라 원본은 사라지고 모본만 500종류라 한다
다양한 형상의 테극 괘와 함께한 창작 작품들
많은 구상을 한후 먼저 그래픽 도안으로 작품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첫댓글 추연 선생님 흔적을 상세히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호 문강공 엄청 많읍니다 타종파도마찬가지고
우리단양우씨도 두분 우리파조이신 국진 할아버지와
추연 우 성전할아버지두분입니다
좋은자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