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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신라 말의 명재상 순유(純由)이다. 고려 말에 성세를 보였는데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2명을 냈고, 문과 급제자 107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순유는 뒤에 극신(克臣)으로 개명했는데, 신라에서 재상까지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벼슬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그의 12세손이며 중흥시조인 장경(長庚)으로부터 8세(世) 안에 문형(文衡:대제학) 18명, 상신(相臣:정승) 15명, 문과 급제자 75명 등을 배출하였다. 장경의 아들 5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백년(百年)은 밀직사사, 천년(千年)은 참지정사, 만년(萬年)은 낭장, 억년(億年)은 참찬, 조년(兆年)은 정당문학 등을 지내며 현달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조년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5만 8134가구에 18만 61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
성주이씨 종친회 회장님 귀하(1)
안녕하십니까?
초면인데 용기를 내어 성주이씨 종친회 회장님께 편지를 드립니다.
본인은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를 고향으로 둔 김용규라는 사람입니다. 현재 경남 통영시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며 고향 함양의 향토 역사에 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고향인 경남 함양에서는 7년간 근무를 하였는데 7차 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교육과정은 그 지역의 문화 역사를 위시해 사회 전반에 걸쳐 좁게 학습을 하게 짜여진 탓에 지역의 교사가 직접 사회과 도움자료를 만들어 교과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바, 본인이 교재 집필진에 직접 참여를 하였고, 교재를 만들기 위하여 함양과 관련된 문화, 역사, 전통, 전설 등등 제반 자료들을 검토하고 수집하고 탐색하여 지금은 함양군내 학생들이 제가 만든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이로 인해서 함양의 전설과 성주 이씨 집안과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몇 학년 때인지는 몰라도 도덕 교과서의 내용 중 옛날에 두 형제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 두 개를 주워 사이좋게 금덩이를 나누어 가지게 되나 나룻배로 강을 건널 때 동생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형이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금덩이 두 개는 바로 자신 혼자만의 몫이 되었을 거라는 시기심이 싹터 오름과 함께 필요 이상으로 형님을 미워해지기까지 한 것이 두려워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고 하자 형님 역시 그런 마음이 생겼음을 시인하고 형 역시 그 아까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런 이야기는 도덕 교과서에만 있는, 어른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혼자 생각해 본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선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두 형제의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 김성진 함양문화원장님과 이백년 이억년님
김성진 함양문화원장과는 개인적으로 저와 인연이 많으신 분입니다. 중학교때 은사님이시기도 하고 함양문학 회원이시기도 하여 그분과의 많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김성진 문화원장님께서는 2005년도에 새 문화원장님으로 선출 되셨지만 사실 그 이전 부터 함양의 문화 업무에 많은 노고가 계셨는데, 지금은 교직을 정년 퇴임하시고 함양의 문화의 업무에만 열중하고 계시지만 근 30여 년 동안 함양의 향토 역사에 대해서 많은 책을 저술하시었습니다.
10편의 시집 외에 함양 역사서인 의병장 문태서 연구, 우리고장의 전설, 함양의 뿌리(지명책자), 학사루의 별, 다볕골 옥돌, 함양누정기, 함양 예찬, 함양역사 인물록, 함양금석문 총람록등을 편찬하시었으며 10년 동안 함양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함양문학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도 지대한 업적이 있으신 분입니다. 2001년 전국시인협회 세미나 개최, 2002년도엔 전국 문인 대표자 대회를 함양에서 개최하여 지리산 작은 산골 마을인 함양을 홍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분을 장구하게 소개했느냐 하면, 함양 문협 회원인 제가 그분과 자주 모임에 접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마다 묻혀진 함양의 전설이나 역사에 관해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 때문입니다.
그 주 이야기를 요약해 본다면
* 변강쇠 옹녀의 이야기 : 함양군 마천면의 등구 마천 오도재를 배경 무대로 한 가루지기 타령인데 이는 판소리 12마당 중 6째 마당으로 판소리 가사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함양을 배경으로 하였다.
* 고려말 목은 이색이 말년에 함양에 내려와 살았다는 기록이 여러곳에 있다. 함양 재궁이라는 마을에 가 보면 목은이 들, 목은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이 있는데,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 임진왜란때 왜장과 함께 남강 물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무덤이 함양군 서상 방지 마을에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 고려말 개성 유수를 지낸 이억년이 함양에 내려와 살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개성유수라는 직급은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격으로 당시의 수도가 개성이었으므로 아주 높은 직급이었던 분이 시끄러운 정계가 싫어 함양의 지리산으로 오게 되었으며 휴천면 백연마을과 아주 관계가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분과 관련된 내용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며 많은 관심과 사료적인 고증을 많이 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지만 그냥 여담 정도로만 인지했을 뿐 무관심으로만 일관했지요. 막연한 전설로만 말입니다.
그러던 중 KBS2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지금도 인기 프로그램의 하나인 제 39회 스펀지 프로그램 시청을 하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 고려 문인 이조년은 우애를 위해 (황금) 을 던졌다. (★★★☆)
: <형제의 우애를 다룬 유명한 이야기, 고교 한문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형제투금'>
두 형제가 길에서 황금 두 덩이를 우연히 발견, 하나는 형이 갖고
다른 하나는 동생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느닷없이 동생이 물 속으로 황금을 던져버렸다. 형이 깜짝 놀라 왜 그랬냐고 묻자 황금을 본 순간, 형의 황금도 탐하려는 마음이 생겨 강에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에 형도 감동하여 형 역시 황금을 물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조년과 그의 형 이억년이다.
이 형제가 황금을 던진 곳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바로 강서구 두암공원의 한 연못이다.
바로 이억년님의 이야기가 방영된 것이지요. 또 하나의 깜짝 놀랄일은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교과서에 실려 있었으며 그 시조에 매료된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나라 사람중 이 시조에 대해서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바로 이조년의 시조이지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 시조의 주인공이 황금보다도 형제간의 우애가 훨씬 높이 있다고 스스로 실천해 보였던 그 두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 아하! 저 아름다운 이야기는 내 고향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
김성진 문화원장님께서 여러 번 말씀 하셨던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였구나! '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며 평생 생활을 하고도 남을 황금덩이를 버릴 정도로 형제간의 사랑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던 두 분 형제 이야기는 어른이 되고 오랜 교직 생활에서의 직업적 가치관에서 기인된 연유인가는 몰라도 저 이야기는 성주 이씨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로만 끝내서는 아니 된다고 여러 번 독백을 하여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주인공이 저의 고향인 함양 휴천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에 무척 흥분이 되었고 제 가슴속에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과 함께 약 100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사실 하나를 재조명하여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꽉 메우더군요.
◈ 황금을 강물에 던져버린 두 형제의 이야기에 매료된 이유
저는 교직생활 28년 동안 학생 생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았고 학교 업무도 그쪽 분야에 종사했었습니다. 교육잡지에 학생 생활 문제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써 보기도 했지요.
요즘 자라나는 세대에 대해서 학교에 근무를 하는 한사람으로서 느껴지는 오묘한 감정이 참 많기도 한데, 재작년으로 기억되는 사건 하나를 다시 꺼내 보고 싶군요.
사건의 주인공은 경찰 업무를 도와주는 의무경찰의 한사람이었는데 저녁에 근무지를 이탈하여 밤샘을 하고는 새벽에 들어온 그를 보고 상사가 꾸지람을 하였다는 이유로 5층 옥상에서 자살을 하였다는 신문 기사였습니다. 의무경찰이라는 업무는 군 복무와 유사한 일일 것인데 근무지를 이탈하여 PC방에서 게임을 즐기고, 당연히 꾸지람을 받아야 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죽음으로 표현을 하였다는 사안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더군요.
2005년도엔 이와 비슷한 큰 사건 하나가 있었지요. 휴전선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한 병사가 자신을 자주 나무란다는 이유만으로 수류탄 투척과 함께 총기를 난사하여 동료 병사 8명이 사망하였다는 사건 외에 상사가 나무란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고 동료들이 먹는 식수에다가 제초제를 넣어 동료를 중태에 빠트린 사건, OECD국가 중 이혼율 세계 1위, 학교 폭력 매우 심각한 상태라는 각종 매스컴의 보도 내용은 이미 세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런 사건 외에 얼마전의 사건이 또 생각나는군요. '60억 재산가 70대 할머니 한강에 투신- 자살로 추정' 이라는 기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남편과 별거 생활을 하면서 홀로 살고 있던 할머니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고민이 참 많았겠지요. 얼핏 흘림 기사로 난 내용 중 딸과 재산 문제 갈등, 아들과 재산 문제 갈등 등의 문제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 봅니다.
이런 사건들과 연관시켜 요즘 세상을 평해 보라고 한다면 영혼의 상실 시대라고 단언을 해 봅니다. 그러면서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낱말은 케케묵은 고전이 되어 버렸다는 자학적인 비애마저 앞서더군요.
문제는 이런 사건에 대해서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일까요? 너무나 버릇없이 구는 학생의 생활지도를 위해 훈계나 꾸중 내지는 기합을 주었다고 경찰에게 폭력교사로 고발을 하는 시대입니다.
'왜 우리 아이의 기를 죽이느냐!' 하는 논지이지요.
세상의 분위기가 돈만이 전부이다 라는 가치관으로 흘러가는 것은 제가 본 관점만은 아닐 것입니다.
돈은 생활을 참 편리하게 하고 우리네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필수 요소니까 돈의 중요성과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라나는 우리네 아이들마저 정신이 혼탁해져 가고, 인터넷이나 핸드폰, 각종 유해 매체 등을 통해 무방비로 저질 문화에 너무나 쉽게 접해져 가고 있으며, 아니나 다를까 제가 교직 생활을 통해서 경험한 바로는 익히 보도된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의 사건 기사 외에 보도되지 않은 위험 사건이 너무나 많다는데 있습니다.
제가 보아온 관점은 정신 문화의 황폐화에 대해서 위기 의식을 너무나 많이 느껴 보곤 했습니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열해 보았으나 고려시대 때 이억년 이조년 님들께서 보여주신 투금탄 이야기 속에서 요즘의 황폐해진 정신 문화의 새로운 정립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형제 사이에서 물질욕 때문에 금이 간다면 그 물질은 이미 죽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그 분들의 일화에서 새로운 정신문화를 일깨우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 경남 함양군 휴천면 백연마을에 대해서
형제간의 우애 때문에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주인공은 이억년과 이조년 두 형제분들이었고, 경남 함양에 와서 사셨던 분은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 분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인터넷에 조회를 했더니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호장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고 이장경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처음에 농서 이씨로 하였으나,
그후 그의 아들 5형제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가 문과에 급제하고 가세가 번성해지자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에따라 본관을 성주라 했다라고 적혀 있더군요.
함양군 휴천면 백연마을에서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분이 사셨다는 기록은 「함양군지(옛 천령지)」에 있으며 「한국인의 족보」 971페이지 성주이씨 편에도 잘 나와 있더군요.
*이억년 : 자 (인녀) 호 (락산제) 관직 (개성유수), 1285년(충렬왕 11) 문과에 급제 개성유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 갑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千載紅塵夢外事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위성 엄천리로 들어가 도정정사를 짓고 孔孟의 도를 강론하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위성이라는 지명은 경남 함양군의 옛 지명을 말하며 지금도 함양군 함양읍에는 위성초등학교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엄천리라는 지명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함양군 휴천면 엄천 골짜기를 말하며 함양군 유림면 엄천강 쪽에서 마천면 아래쪽까지를 엄천골 또는 휴천계곡이라고 합니다.
성주이씨 종친회 회장님 귀하(2)
[문정 백연마을]
당시에는 이 모두를 통틀어 엄천리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백년 이억년 두분이 사셨던 곳의 정확한 위치는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를 말하며 자연마을로 백년 문정 문하 문상 도정마을이 있습니다.
이억년님의 묘소는 문정 마을의 폐교된 옛 문정초등학교 뒤쪽으로 약 200m 지점의 양지바른 산 언덕에 위치하여 있더군요.
◈ 이억년 묘소와 주변의 환경
[이억년님의 묘소]
묘소의 바로 맞은편이 지리산이며 묘소의 앞쪽으로는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진주의 남강으로 흐르는 청정 옥수 엄천강이 있으며 몇 년 전에 지리산 함양댐 건설 계획 문제로 온 세상을 떠들썩 했던 문정댐 예정지가 묘의 앞쪽에서 약간 상류에 위치해 있습니다. 건설부에서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발표를 했지만 댐이 건설된다고 해도 이억년님의 묘소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천혜의 관광지 최 적지에 있게 되는 셈이지요. 백연 마을도 역시 댐이 건설된다고 해도 마을의 표고 때문에 물이 그곳까지 차 오르지 않는 곳입니다.
엊그제 이억년 님의 묘비 탁본을 하기 위해 문정까지 갔었는데 여름철 피서객들로 인해 2차선의 도로는 수많은 차량으로 인산 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 중 함양 IC, 산청군 생초IC, 88고속도로 중 남원시 인월면 인월IC에서 쉽게 지리산으로 차량 접근이 용이하여 피서객이나 관광객들의 차량이 몰려 든 탓이었는가 봅니다.
[문정과 백연마을]
이억년 님의 묘소가 있는 문정 마을과 이백년님이 살았다는 백연 마을은 예전엔 지리산의 오지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한데 주변 8km 이내의 주요 관광지를 소개해 드린다면 문정에서 약 1km 윗 쪽에 엄천 강물에 수 만년 동안 강 주변의 바위들이 깎여져 빚어낸 천하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용유담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유명한 선인 특히 영남학파의 대 유학자 김종직, 김일손, 성종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유호인, 단성소로 유명한 남명 조식 선생이 그 곳을 다녀가면서 많은 시를 남기기도 할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용유담의 건너편에는 그분들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진 암각들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기도 합니다. 용유담에서 지리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송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해발 약 1000m상에 위치한 지리산의 누워 있는 부처 형상이 아주 신비스럽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산봉우리와 바위,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어 낸 산의 형상이 영락없이 누워 있는 부처 형상이더군요.
[지리산 중턱에 위치한 누워있는 부처의 형상]
부처 형상을 한 바로 이웃엔 선녀 굴이라는 자연 동굴이 있는데 그곳은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이은조, 이홍이가 1962년까지 국군과 경찰의 눈을 피해 약 10여 년 동안 은둔해 있던 곳이기도 하며 많은 산악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 주 등산로이기도 합니다.
용유담에서 마천면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우리 나라 3대 계곡의 하나인 칠선 계곡 입구가 되는데 마천면 추성리에는 불교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서암 정사라는 절이 있기도 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기도 하는 곳입니다.
[서암정사의 모습이 슬라이드로 펼쳐집니다]
500년 전 김일손이 지리산 기행을 하면서 넘었던 오도재가 또 유명합니다. 함양군 함양읍과 함양군 마천면 사이의 고개인데 옛날에는 소금을 지고 오르내리던 오솔길이었으나 지금은 2차선 포장도로로 예쁘게 만들어져 있으며 오도재 전망대에서 지리산 쪽을 바라보면 천왕봉을 위시해서 중봉, 하봉 등등 수많은 봉우리들이 한눈에 조망되는 시원한 곳이기도 하지요. 지리산을 등정하는 산악인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몰려들고 있는 백무동과도 지척간이며, 지리산 중턱에 위치해 있으면서 긴 협곡사이로 흐르는 개울 때문에 인기 있는 지리산 자연 휴양림과도 가까운 곳이기도 합니다.
문정에서 강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세종대왕의 12째 왕자였던 한남군이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귀양을 왔던 한남 마을이 있으며, 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릉의 소재지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데 이 왕 무덤과 문정과의 거리도 약 8km 정도 됩니다. 차량으로의 거리는 약 20분 거리이지요. 소설 동의보감에 나오는 유의태 약수터도 유명한 곳인데 역시 그 이웃이구요.
산청군에서 전국에서 단 하나뿐인 한방 휴양단지를 건설하고 있는데 현재 조성중이지만 그곳과 문정과의 거리도 얼마 되지 않는 곳입니다.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분께서는 1000여 년 후를 내다보시는 선견지명이 있었나 봅니다.
이억년님의 묘소에서 지리산을 치어다 보니 그 유명한 지리산의 누워 있는 부처와 일맥을 같이 하더군요. 문정마을에서 조금 윗쪽에 견불동이라는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 마을의 유래는 부처가 보이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지리산 봉우리의 형상이 부처 모양이고 그 부처 형상이 보이는 곳이라는 뜻이지요.
◈ 여러 자료에 나타난 선인들과 문정 마을
진주 경상대 한문학과 최석기 교수님께서 번역하여 내놓으신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이라는 책을 읽고서는 저는 고향인 엄천 골짜기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재인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500년, 400년 300년 전엔 마을도 별로 없고 산골 오지 마을이었는데도 당시의 선인들이 참 많이도 문정 주변의 엄천 골짜기를 찾았던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는데 역사 속에 나타나는 유명 인물들
김종직, 김일손, 유호인, 양대박, 남명 조식, 박여량, 유몽인, 박장원, 이동항, 한남군, 목은 이색, 이숙번 등입니다. 고려때는 목은 이색이 휴천면과 이웃인 유림면에 은거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여러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문중 문정 마을을 위시한 엄천 골짜기를 다녀간 기행 코스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김종직 유두류록(1472년) :
함양읍-팥치재-당두재- 휴천면 남호리 절터- 동강(화암)-구실악재-한쟁이골-감태박골-노장대(지장사)-환희대-선열암-신열암-고열암(함양독바위-지리산으로 기행함
2.김일손의 두류기행록(1489년 성종20 4월14일-4월28일) :
함양읍-제한역(팔령인근)-오도재-등구-금대암-용유담-문정-휴천면 남호리 절터-사근역(수동)-산청-단성-단속사-묵계-법계사- 천왕봉 등정
3. 양대박의 두류산 기행록(1586년 선조 19 9월 2일-9월 12일) :
청계-운봉-인월-백장사-실상사-마천-용유담- 천왕봉갔다 오면서 용유담- 문정-휴천면 남호리 절터-당두재를 넘어 목현이모댁 1박- 팔령재-안신원-귀가
4. 박여량의 두류산일록(1610년 광해2년 9월 2일-9월 8일) :
함양수동인으로 병곡 도천-목현-휴천면 문정-용유담-마천 군자사-백무동-하동바위-천왕봉-상류암-쑥밭재-산청군 금서면 오봉-산청군 금서면 방곡-벼리-모실-목현-함양
5.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1611년) :
남원-운봉-인월-마천의 영원사 및 인근 기행후-의탄-용유담-엄천강을 건너 마적-청이당-영랑대-소년대-천왕봉 등정을 함
6. 박장원 유두류산기(1643년) :
안의 - 수동- 유림 국계- 유림- 유림면 모실-함허정-엄천강을 계속 따라 올라가며 문정-용유담- 마천- 지리산 등정
7.이동항 방장유록(1790년) :
함양- 유림면 함허정- 휴천면 절터 엄천사에서 1박 후-문정- 용유담- 마천-백무동- 지리산등정
이것을 보면 선인들은 지리산 기행을 하면서 이백년 이억년 님께서 사셨던 문정 마을을 지나친 것으로 확인이 되는 글들이며 당시의 과거 급제를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적 감흥이 뛰어난 분들이라 지리산의 절경과 청초한 산수의 화려함에 쉽게 구미가 당겨지는 그런 지형적인 특성 때문이었다고 또 하나의 결론을 내려봅니다.
또 고려말 목은 이색이 함양군 유림면에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함양군지에 있으며 목은이 들,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큰 무덤 하나, 그와 관련된 여러 시들이 향토사학가이신 김성진 함양 문화원장님으로부터 속속 밝혀지고 있기도 합니다. 유림면과 문정이 있는 휴천면과는 바로 지척간인데 ,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산골 오지 마을에 속해 다른 지역과는 문화적 교류가 참 적었던 곳인데 여러 사료들을 발췌해서 읽어보고 조사해 보노라면 옛 부터 많은 선인들이 엄천 골짜기를 참 좋아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성주 이씨 두 형제분이 지리산 산골 마을을 찾은 것은 막연히 지리산을 찾은 것만은 아닌 것으로 추측이 되는군요.
서부 경남에서도 작은 고을이지만 옛부터 좌 안동 우 함양이라 일컬을 만큼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하였고, 정계에 진출하여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하였더군요. 경치 좋은 곳엔 정자나 누각이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를 보유한 곳이기도 하지요.
우리 나라 역사상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국가 대사를 꾸려 나간 일은 성주 이씨 집안 외에 누사 이래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닌 다섯 분이나 말입니다.
성주이씨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부럽기까지 하네요.
그 중에서 이백년, 이억년 두 분이 지리산으로 온 것은 막연한 도피가 아닌 인맥이나 지리산이라는 강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 봅니다.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을 해 본다면 이백년 이억년 님께서 사셨던 때는 고려 제25대 왕(1274∼1308)때였으며 71년 원(元)나라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 돌아와 원종이 죽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10월 원나라의 강요로 고려-원나라 연합군을 편성,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 군을 파견하였으나 패퇴하게 됩니다. 원나라의 지나친 내정간섭이 매우 심하였고, 재위 동안 관제는 원나라의 속방처럼 격하되고 6부는 폐합, 변경되었으며 영토의 일부도 원나라의 직속령이 되었던 시대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몽고 풍습의 유입 등으로 자주성을 잃기도 하였으며, 원나라 공주와 그 일족이 막대한 토지를 점유하여 많은 농민들이 유민으로 전락하였는데, 무신정권(정중부, 최충헌, 최우등)이 득세를 하고 난 이후 매우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짐작이 됩니다. 이백년 이억년 두 분 형제가 이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는 듯 추측만 할 뿐 이지요.
◈ 끝 맺으며
황금이라는 물질보다도 더 인간 사랑의 고귀함을 보여 주신 주인공이신 이억년 님의 묘소가 일반인들의 묘소처럼 지리산 어귀에서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도 못한 채 쓸쓸히 누워 계시는 모습이 지방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워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욕심을 내어 건의를 드린다고 하면 성주 이씨 종 중 차원에서 이억년님의 묘소 정화 작업과 주변 정돈 및 안내판 비석 설치와 함께, 이백년 이억년 두 분이 지으셨다는 도정정사를 복원하셔서 드높은 성주이씨의 자존심 회복은 물론, 후세 사람들에게 그분들의 높은 뜻을 길이길이 남기는 것이 어떨까 하여 건의를 드리는 바입니다.
함양군청 관광과에 전화로 이런 사실에 대해서 건의를 하여 보았지만 그것은 종중 차원의 문제가 더 우선 시 된다는 답변 뿐 별다른 진척이 없고, 김성진 함양 문화원장님만 관심이 많으실 뿐 주변의 대부분 사람들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했으며, 이런 사항들을 지리산과 관련된 여러 홈페이지에 아름다운 두 형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하여 본인의 이름으로 글을 올렸으며 성주 이씨 대종 회 홈페이지 자유 게시판에도 글을 올리게 되었고, 이렇게 성주 이씨 대종 회 회장님께도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방 주민의 한 사람일 뿐, 1000여 년의 세월동안 그 마을 사람들조차 잘 인지하지 못한 채로, 이억년 님의 고귀한 인간 사랑의 정신마져 묻혀지는 것 같아 그 안타까움에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시욱 성주 이씨 종친회 회장님을 위시해서 성주 이씨 종친 모든 분들에게 건강하심과 훌륭한 성주 이씨 가문에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며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