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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Spinoza, 1970)(PUF) [I] 생애
들뢰즈, Sup “Philosophes”: PUF, 1970, P. 128
-[이 내용은 수정 및 첨가를 하여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P.177)에 있음,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민음사, 1999) 속에 들어 있음]
* 들뢰즈의 스피노자 생애에 관한 글에서 두 단어가 눈에 띈다. 하나는 데카르트와 무관하다. 다른 하나는 여행자[산보자]와 같다는 것이다. 첫째의 것은 스피노자는 달리 생각하는 세파라드이라는 점이다. 누구의 영향인지 모르지만(아마도 랍비 중에서 덕후 랍비) 플로티노스의 영향이다. 다른 하나는 폴리스적 분배가 아니라 노마드 분배로서 여행자이며, 가볍게 움직이기 위해 재산도 소유도 없이 살면서 하숙으로 이리 저리 다녔다. [들뢰즈는 어디에선가 하숙과 같은 삶을 산 소설가의 예가 있었는데 말이다. 최희준 “인생은 나그네 길”,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52TMC)
* 이 책의 국내 번역본은 없다. 그런데 이 책의 「생애」, 「철학」,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들의 색인」은 스피노자: 실천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박기순 역)의 제1장, 제2장과 제4장에 옮겨졌다. 첫째 책에서 「생애」와 「철학」은 후자 속에 몇 개념의 변경 및 몇 줄의 첨가 이외에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다. 전자의 책에서는 스피노자에 관한 문헌을 「작품」이라 소제목에, 그리고 마지막 「참고문헌」에는 연구자들을 소개 하고 있다.
둘째 책에서는 「생애」의 글 마지막 부분에 「참고문헌」을 첨가하여 스피노자에 관한 저술들을 소개 한다. 또한 첫째의 「철학」은 둘째에서 「윤리학(Ethique)과 도덕의 차이에 관하여」라고 소제목이 바뀌어 놓았으며, 시작 부분에 몇 줄의 첨가가 있는가 하면, 세 소절(小節) 중에서 둘째 소절에서는 전자의 마지막 긴 문단을 빼버렸다(박기순이 번역에서 첨가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52RLA)
# Table des Matières
[I] 생애 5
[II] 철학 21
[III]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들의 색인 39
[IV] 작품 100
[V] 발췌 101
A) La Critique (1-6) 101
B) Conquête de l’adéquat (7-14) 111
C) Les états du mode (15-20) 119
[VI] 참고문헌(Bibliographie) 127 [목차 128]
[교수 자격시험으로 벩송의 “물질과 기억”이 과제였는데, 그 시험을 준비하였다. 당시 맑스주의 경향의 준비생들은 벩송 속에서 “spiritualiste poussiéreux”(먼지투성이 정신주의자)를 보았다. 그는 벩송을 제일 구도(평면)의 철학자(un philosophe de tout premier plan)라고 생각했다. 고등사법의 낙방 때문에, 구두시험을 걱정했으나, 샤뜰레가 용기를 주었고, 시험을 치렀다. - 8등으로 통과하였다.]
들뢰즈의 한 철학자에 대한 논의에서 출판과정에 흥미 있는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들뢰즈가 1950년대 이전에 벩송을 잘 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벩송 연구서는 없고 논문들과 입문서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쓴 니체와 스피노자에 대해서 이야기 거리가 있을 것이다. 우선 왜 스피노자 다음 니체가 아니라, 니체 다음 스피노자일까? 나로서는 경험주의와 실재론을 같은 계열에 놓고 보면, 이성주의와 관념론이 다른 계열로 보이게 된다. 흥미 있게도 벩송은 칸트보다 신칸트주의를 비판하고 헤겔과 맑스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들뢰즈는 칸트를 사회적(표면적)인 기호화(의미화)에서 니체를 통해서 비판하면서 헤겔의 변증법도 함께 비판의 표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들뢰즈 비판이 대하여 비판을 넘어서 망치로 부수는 비판이 되려면 내면으로 들어가야 함을 알았다. 그 내면에 대해 니체의 작품 중 권능의 의지는 니체의 작품이라기보다 조각들로 남아있어서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 니체의 글 다음으로 나온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내면 즉 깊이(심층)에서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니체의 경우에서 파고 내려가는 고고학적인 측면과 생장하는 측면의 발생적 구조를 볼 수 있다면,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내재성에서 출발하여 속성의 성질들의 거쳐 양태들의 다양하게 드러남이 일관성 있게, 그리고 심층으로부터 표면으로 잘라지지 않은 지속으로서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니체에서 스피노자로 가는 과정은 내재성의 발견이후, 내재성에서 출발하는 철학을 자기 철학의 토대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국가박사학위 부재로 나온다.
- 내재성에서 출발하여, 그 실증적 근거가 되는 측면이, 또는 최종심급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들뢰즈가 보기에 스피노자와 니체의 공통점은 삶에서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이 점에서 신체의 중요성은 대승불교의 대중부의 강조와 맞물려 감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각자가 각자의 한 방향으로 끊어지지 않고 죽 살아가라는 숫타니파타를 생각해보라) (52SKG)
## 내용: [I] 생애 5 ######
* [머릿글; 인용 ](원3, 7)
스피노자를 읽게 된 이유는 무엇이죠? 그가 유태인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 얼마 후 몇 쪽을 읽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마치 돌풍이 등을 밀고 있기라도 하듯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말씀드리지만,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에 접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마치 요술쟁이 빗자루를 타게 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는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책이 당신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이죠? ...
“말하기 쉽지 않은 데‥…. .... 그의 책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스피노자가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그의 철학에 비추어보면, 가능한 한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 (7) ;
- 말라무드(Bernard Malamud, 1914-1986) 러시아 유태인 가계, 미국태생 작가. 수리공(The Fixer, 1966)(L'Homme de Kiev)(1966) (7)
[I] 생애 5
니체(Nietzsche)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불가사의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그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 – 겸손(humilité), 청빈(pauvreté), 순결(chasteté) - 을 독점하며, 이것들[덕목들]을 아주 특별하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게다기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하게 한다. 철학자는 그것들[덕목들]로 자기의 톡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그것들은 철학자에게서 도덕적 가면들(마스크des masques)도,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자체의 “결과”들이다. 왜냐하면 철학자에게는 다른 삶이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겸손(humilité), 청빈(pauvreté), 순결(chasteté)은 이제부터 특별하게 풍부하고 넘쳐나는 삶(une vie)의 결과들이 되며, 사유를 정복하기 위하여 또 모든 다른 본능을 종속시키기 위하여 충분히 능력있는 삶의 결과들이 되, - 이것을 스피노자는 온자연(Nature)이라 부른다. (5, 9)
바로 여기에서 철학자의 고독은 그 모든 의미를 갖는다. 그는 어떤 환경에도 합류될 수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좋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10)
철학자는 여러 국가 속에서 살 수 있고, 여러 환경 속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나, 은자(d’une ermite), 유령(d’une ombre), 여행자, 하숙생의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7, 11)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1632년 암스테르담 유태인 지구에서 태어났다. ... 1656년 그를 파문으로 이끌었던 철학적 전회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우리는 암스테르담 유태인 사회를 동질적 공동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공동체는 기독교 환경만큼이나 많은 다양성, 이해관계들, 이데올로기들을 갖고 있었다. (7, 12)
우리엘 다 코스타(Uriel da Costa, 1585–1640)는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하고 자연법만을 인정하면서 계시 율법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1647년 파문당했다. 특히 후안 데 프라도(Juan de Prado, 1612-1659)는 영혼은 신체와 함께 사멸한다는 것, 신은 철학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신앙은 무익하다는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1656년 회개를 강요받고, 이후에 파문당하게 된다. (8, 13)
스피노자가 보다 가혹하게 처벌되고, 1656년에 즉각 파문된 것은, 그가 회개를 거부하고 그 자신 스스로 단절을 원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회개하기는커녕 「유태교회의 탈퇴에 대한 변명(Apologie pour justifier sa sortie de la Synagogue)」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적인 특성을 – 구약의 인간적인 특성을 고발했다. (8, 13) “
한때 예수회 교도였던 반 덴 엔덴(van den Enden, latinisé en Affinius, 1602-1674)은 데카르트주의자로서 뿐만 아니라 자유사상가와 무신론자로서 그리고 정치 선동가로서 일찍이 명성을 얻었다(그는 1675년 프랑스에서 로앙 기사의 봉기이후에 사형을 당하게 된다) 또한 스피노자는 자유주의적이고 반교권적 기독교인들을 자주 접촉했고, 범신론과 평화 공산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은 평민파들과 멘노파들을 자주 만났다. (9, 14)
스피노자는 레인스뷔르흐에서 ... 야르흐 옐레스(Jarig Jelles, ca. 1620-1683), 피트르 발링(Pieter Balling, ??-1669), 시몬 드 프리스(Simon de Vries), 그리고 ‘진보주의’서적 출판업자 얀 리유베르츠(Jan Rieuwertsz, 1617-ca. 1685) 등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1665년 올덴부르크에서 보낸 스피노자의 편지와 1671년 옐레스에게 보낸 편지는 각각 평화주의와 공동체에 관련된 주제를 담고 있다). (9-10, 14-15)
유태인 사회에서 파문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지만, ... 스피노자 스승 중의 하나였던 랍비 메나세 벤 이스라엘은 동인도 회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640년 파문당할 뻔 했다. (10, 16)
그는 안경 렌즈 세공을 익혀 장인이 된다. 수공 기술을 갖춘 철학자-장인이었기에 그는 광학 법칙들의 발견을 따라가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그림을 그렸다. 스피노자의 전기를 처음으로 쓴 콜레루스(Colerus, 1647–1707))에 따르면, 그는 나폴리의 혁명가 마사니엘로(Masaniello)의 자세와 복장을 한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다고 한다. (11, 16)
스피노자는 레인스뷔르흐에서 이후 소론이 될 내용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라틴어로 설명한다. 그 친구들은 메모를 하고, 그 중 옐레스(Jarig Jelles, ca. 1620-1683)는 그것을 네델란드어로 번역을 했을 것이다. 스피노자 자신이 그 이전에 쓴 원문의 일부를 구술했을 가능성도 있다. 1661년경에 그는 지성개선론을 쓰게 되는데, 그 서두는 멘노파의 방식처럼 부에 대한 고발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스피노자 주의적 방법에 대한 훌륭한 설명을 담고 있는 지성개선론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1663년경 그는 자신과 한 지붕에 살면서 희망과 많은 성가심을 동시에 주었던 한 젊은이를 위해, 데카르트의 철학적 원리들을 쓴다. 여기에는 스콜라 학파의 개념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형이상학적 사유들)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책의 출판은 리유베르츠(Jan Rieuwertsz, 1617-ca. 1685)가 담당했고, 옐레스는 자금을 제공했으며, 발링(Pieter Balling, ??-1669)이 네델란드어로 번역했다. 의사이자 시인이었고 또한 암스테르담에 새로운 극장을 설립하기도 했던 로드베이크 메이에르(Lodewijk Meyer, 1629–1681)가 서문을 달았다. (11, 17)
그는 한 번도 데카르트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 이미 소론은 모든 스콜라철학, 유태 사상, 그리고 르네상스 철학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순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데카르트주의를 사용한 사유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스피노자는 거기에서 오직 자기에게만 속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이끌어 낸다. 원리들의 설명과 형이상학적 사유는 데카르트주의가 하나의 체처럼(comme épurateur)[정화기] 취급 되고 있는 이중의 역할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는 그것으로부터 새롭고 놀라운 스콜라 철학을 출현시키는데, 그것은 낡은 스콜라 철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데카르트주의와도 그러하다. 데카르트주의는 한번도 스피노자 사상이었던 적이 없으며, 그것은 차라리 스피노자 사상의 수사와 같은 것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주의를 자신에게 필요한 수사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윤리학에 이르러서야 명확한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12, 18-19)
1663년에 스피노자는 헤이그의 교회에 위치한 포르스뷔르흐로 이주한다. 얼마 후 그는 수도 헤이그에 정착하게 된다. 스피노자를 여행자[산보자]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주파한 거리라 아니라, 하숙 생활을 벗어나지 않는 그의 품성과, 그리고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포기한 결과로서의 집착의 부재, 소유물과 재산의 부재 때문이다. (12-13, 19)
그는 윤리학(Ethique, 1661-1675)(출판 1677.)을 계속 진행한다. 1661년 이후에 스피노자와 그의 친구들이 주고 받은 편지들은, 그의 친구들이 1부의 주제들을 알고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1663년에 시몬 드 프리스(Simon de Vries, s.d.)는 스피노자가 보내온 원문을 읽고 논할 수 있는 회원들로 구성된 단체를 기획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일분의 친구들에게 내심을 털어놓았지만, 그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비밀로 간직할 것과 1675년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의 경우처럼, 낯선 사람들을 경계할 것을 부탁한다. (13, 19)
그가 헤이그 근처에 정착하게 된 것은 정치적 이유인 듯 싶다. 수도와의 인접성은, 활동적인 자유주의적 환경에 접근하고 평민파 집단의 정치적 무관심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그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칼뱅파와 공화파, 이 두 거대 당파 사이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독립 투쟁에 대한 사안들, 전쟁에 관한 정책, 오란녀 가(家)의 야망, 중앙집권적 국가의 형성에 집착하였다. 반면 공화파는 평화 정책, 지방조직, 그리고 자유주의 경제의 발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군주제의 감정적이고 호전적인 태도와는 반대로, 요한 드 비트(Jean de Witt, 1625-1672)는 자연적이고 기하학적인 방법에 의거한 공화제의 합리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13, 19)
인민은 캘뱅주의, 오란녀 가(家), 편협함, 그리고 호전적인 사안들의 편에 있었다. 1653년 이후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 1625-1672)는 네델란드 재상(宰相)이었다. 그러나 [네델란드에서] 공화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은, 잘 못 수용된 대중의 선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놀라움과 우연, 즉 왕의 부재에 의해서였다. 스피노자가 혁명들의 유해성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그 혁명이 크롬웰의 혁명이 불러일으킨 실망들을, 또는 오란녀 가의 쿠데타의 가능성이 생겨나게 할 불안들을, 관련하여 이해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4, 20) [개인의 인격성은 내재성에 근거하지만, 국가의 유지는 외부적 관련을 중요하다. 자주적 국방이 없으면 스위스처럼 토양(산악)속에서 저항이 가능하거나, 개괄지와 저지대인 네넬란드는 외적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완충으로써 네델란드의 지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52UKH)
따라서 1665년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잠시 중단하고 신학 정치론을 기획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주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민은 왜 그토록 비합리적인가?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롭게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자유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왜 그토록 어려운가? 왜 종교는 사랑과 환희를 내세우면서 전쟁, 편협, 악의, 증오, 슬픔, 양심가책 등을 불러일으키는가? (14, 20)
1670년에 신학 정치론은 가상의 독일 출판사 이름으로 저자의 이름도 없이 출간된다. 그러나 저자가 누구인지 곧바로 드러났다. 그렇게 많은 반박과 비난, 경멸과 저주를 불러일으킨 책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유태인들, 가톨릭교도들, 칼뱅파, 루터파 등 사상계 전체가, 심지어는 데카르트주의자들까지도 다투어서 이 책을 고발하고 나섰다. (14, 20)
폭탄과 같은 책은 언제나 그 폭탄을 장전하고 있는 법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신학 정치론을 읽을 때마다, 탈신비화의 급진적 시도로서, 또는 “결과들”의 과학으로서, 철학의 기능을 거기서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 한 해석가가 말했듯이, 신학 정치론의 진정한 독창성은 종교를 하나의 결과로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5, 21) [탈신비화 시도란 크리스트교의 초월성에 반대하는 자연주의일 것이고, 결과를 원인으로 놓는 철학은 플라톤주의의 오성론자에 대한 반대로서 플로티노스주의 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 법칙들이 강한 상상력과 나약한 지성을 지닌 사람들[주지주의자]에 의해 어떻게 필연적으로 “기호들”(des signes)로서 이해될 수 밖에 없게 되는가) (15, 21) [주지주의자들은 과정을 이해하기보다, 결과로서 표현된 기호들을 보고, 거꾸로 과정을 추리한다. 이런 추론은 결과에 맞는 사항들만 찾아내어서(선택적으로) 자기 합당화를 한다. 현재 조국 주위를 탐문하는 검찰들이 주지주의자의 전형(유형)으로서, 먼저 만들어진 각본에 맞는 부분을 찾으로 70여군데를 압수 수색한 것과 같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조국을 단죄하려는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은 상층(유일신앙)과 위계(국가주의)가 먼저 규정되어 있다고 망상에 빠져있다. 들뢰즈가 이들을 파라노이라라고 한다. 분열과 빨갱이를 입에 올리는 자들이 유형학에 빠진 자들이다. 심층철학과 자연주의를 배척하는데서 온, 니체 표현으로 비참한 세태이며, 야만의 시대이다. 마치 종교재판 같은 마녀사냥을 현대판으로 법치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것 같다. 법률적으로 범죄가 있으면 그대로 실행하면 되는 것을 흐릿한 내용을 흘려서 범죄가 있는 것처럼 일반인에게 사고하게 하는 것이 주지주의자들이 법칙에 맞는 사실을 찾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52UKH)]
정확히 말해서 스피노자가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공화파와의 인연, 즉 비트의 보호였다. ... 1672년 비트 형제가 살해되고, 오란녀파가 권력을 다시 장악했을 때, 스피노자에게는 윤리학을 출판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1675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을 잠시 시도한 이후 그는 곧 그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신학자들은, 나를 상대로 공개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군주와 관리들에게 청원하고 있고, 게다가 얼간이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나에게 우호적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견해들과 글들에 대한 혐오를 보란 듯이 내보이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15-16, 22)
하이델베르크의 철학 교수직 [제안에 대해] .. “공공 교육을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훌륭한 기회를 잡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6, 23)
스피노자의 사유는 이제 현안에 몰두하게 된다. 상업 귀족정의 행운은 어떤 것인가? 자유주의 공화제는 왜 파산했는가? 민주주의의 실패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대중과 함께 노예들의 집합이 아닌 자유인들의 집단을 만들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들이 정치론을 고무시키게 되는데, 이 책은 상징적으로 민주주의를 다루는 장에서 미완성으로 끝난다. 1677년 2월, 물론 스피노자는 폐병으로 죽는다. 그의 친구인 메이으르(Lodewijk Meyer, 1629–1681)가 그의 죽음을 지켰고 원고를 가지고 갔다. 그 해 유고(Opera Posthuma)가 익명의 도움으로 출간되었다. (16-17, 23)
간소하고 소유물도 없으며 병으로 쇠약해진 삶, 마르고 허약한 몸, 갈색 피부의 갸름한 얼굴, 그리고 빛나는 검은 눈동자, 이 모든 것이 보여주고 있듯이, ...(17, 23)
삶을 증오하고 삶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숭배를 다양화하는 인간이며, 자기 파괴적인 인간이다. 이 자기파괴적 인간은 폭군과 노예, 성직자와 판관과 전사의 신성한 결합을 만들고, 언제나 삶을 내몰아 훼손시키며, 서서히 오래 삶을 죽게 만들고, 법률들, 소유들, 의무들, 제국들 등으로 삶을 뒤덮거나 질식케 하는 자이다. (17-18, 23-24)
콜레루스(Colerus, 1647–1707)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거미들을 찾아 그것들을 함께 싸우게 하거나, 파리들을 잡아 거미줄에 던져 놓은 다음 즐거운 듯 그 싸움을 바라보곤 하였다. 웃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18, 24)
헤겔의 스피노자에게 하게 될 비난, 즉 부정적인 것과 그것의 능력을 무시했다는 비난은 스피노자의 영예이고 순진무구이자, 그 자신의 발견물이다. (18, 24) [스피노자에게 기원의 부정적인 것은 없다. 긍정적이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이 된다는 것은 착각이며, 종교적 개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사기이며 기만이다. 원래 긍정이 있었는데 억압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파문, 전쟁, 전제군주, 반동, 마치 노예상태가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들, 이 모든 것들은 부정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았다. 비트 형제의 살해는 그에게 한 실례가 된다. 야만의 극치(Ultimi barbarorum). 삼을 모욕하고 파괴하는 모든 방식, 모든 부정적인 것은 그가 보기에 두 원천을 갖고 있다. 하나는 외부로 다른 하나는 내부로 향해 있는데, 원한(ressentiment)과 양심가책(mauvais conscience)이고 다른 하나는 증오(haine)와 죄의식(culpabilité)이다. “증오(la haine)와 후회(le remord)는 인류의 근본적인 두 적들이다.” (18-19, 25) [증오와 후회 둘다 자신을 갉아 먹는다]
이 원천들은 새로운 전망(vision) 하에서 그리고 새로운 삶의 욕구(appetit)[conatus] 속에서 새로운 의식과 함께 말라 들어가게(고갈)할 뿐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영원하다고 느끼고 경험한다. (19, 25) [예전에 읽을 때 주가 달려 있네, 5부 §23 참조.]
스피노자에게서 삶(la vie, 생명)은 관념이 아니며, 이론의 업무도 아니다. .. 윤리학에서 ... 기하학적 방법은 지적인 전시의 방법(une methode d’exposition)으로 끝난다. 교수법의 진술이 아니라 발명적인 방법이 중요하다. 기하학적 방법은 생명적이고 광학적인 교정의 방법이 된다. 인간이 일정 정도 비틀렸을 때, 우리는 비틀림의 결과를 기하하적인 방식으로(more geometrico) 그 원인들에 다시 연결시킴으로써 그것을 교정하게 될 것이다. 이 광학적 기하학은 윤리학 전체를 관통한다. .. 그러나 하나의 용어, 즉 생명(la Vie)만이 있을 뿐이다.(19, 26) [광학적으로 교정되면 얼마나 좋겠나, 인간의 삶은 우여곡절이라 광학적으로 교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데카르트 스피노자 시대의 두 가지 흥미, 하나는 동시성 다른 하나는 빛의 성질의 연구에 있었듯이, 그 중에서 빛에 대한 신뢰가 강했던 것 같다. 이들 다음 시대(18세기)가 빛의 시대(la Lumière, 계몽기)로 넘어 갈 것이다. 그러면 19세기는 ‘내부로’가 주제일 것이고, 20세기는 반도체의 전기 통과(스위치, 0와 1)가 주제일 것이다.]
삶은 사유 속에 있지 않다. .. 기하학적 방법, 안경 세공일, 스피노자의 삶 등을 하나의 전체로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삶-통찰자들(des vivants-voyants)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확하게 증명은 “영혼의 눈(yeux de l’âme)”이라고 말한다. (20, 26)
그것[영혼의 눈]은 제3의 눈으로서, 모든 허위와 그럴 듯함, 정념과 죽음을 넘어선 삶을 볼 수 있게 한다. .. 삶과 하나가 되고, 삶을 통찰하는 덕목들, 겸손, 검소, 순수, 간소함들이 필요하다. 스피노자는 희망을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용기도 믿지 않았다. 그는 환희(la joie) 그리고 전망(la vision) 만을 믿었다. .. 제3의 눈으로서 증명은 요구하거나 심지어는 설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영감을 얻은 이 자유로운 전망을 위해 안경을 만들거나 안경렌즈를 세공하려 할 뿐이다. “제가 보기에, 예술가들, 학자들, 철학자들은 렌즈를 세공하는 일로 아주 바쁜 것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한 사건을 위한 광범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어느 날 렌즈는 완전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우리 모두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놀라운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 ”(헨리 밀러, Henry Miller) (20, 26-27) [조주의 오도송과 혜능의 오도송 차이를 느끼지 않는가?]
(8:29, 52UKH) (9:07, 52VLF)
*참조1: 5조 홍인대사의 두 제자, 신수(북종선계) 대 혜능(남종선계) 차이를 참조.
오조 홍인의 제자, 신수 오도송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 바탕일세.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때때로 털고 부지런히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먼지 끼거나 때 묻지 않도록 하세.
육조 혜능 오도송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깨달음은 본래 형상이 있는 보리수나무와 같은 것이 아니며
明鏡亦無臺(명경역무대) 밝은 마음(거울) 또한 경대(鏡臺)와 같은 실제 모양이 없네.
佛性常淸淨(불성상청정) 본래마음인 불성은 항상 청정한데
何處有塵埃(하처유진애) 어디에 티끌(번뇌)이 있으리오. <돈황본 육조법보단경>
# 인명록********
1483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의 종교개혁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수였으며, 종교개혁가이다.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를 주장했다.
1496 멘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 신학자, 성직자. 평화적 재침례교(chrétien évangélique anabaptiste)로 개종. 이 평화주의는 농촌 공동체 속에서 격리된 생활, 사회적 참여에 대한 거부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1509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 피카르디에서 태어나 제네바에서 죽었다. 개혁교회 신학자, 종교개혁가.
[1572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1572) 프랑스에서 1572년 8월 24일(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부터 10월까지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추종자에 의한 위그노(캘빈파) 신도들을 학살한 사건. 프랑스 전역에서 희생자의 수는 약 3만명에서 7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로마에서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 학살의 날을 축하하여 ‘하느님께 찬양’이란 뜻의 ‘떼 데움’(Te Deum)이라는 성가를 부르도록 명하였고 특별 감사의 미사를 집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날을 기념하여 기념 메달을 주조하였다. / 제네바에서는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
1585 코스타(Uriel da Costa, 기독교 개명 Gabriel da Costa, 1585–1640) 리베리아 반도 출신, 포르투칼 철학자. 정통유대교에서 단죄 받음.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
1599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영국의 정치가, 군인. 청교도 혁명(1642-1651)의 주역, 1648년 찰스 1세를 처형, 1653년 의회를 해산하여 결국 종신호국경 1658년 9월 3일부터 죽을 때까지(11.10웨스트민스터 묘지안장. 1661년 찰스2세 왕정복고 때 파헤쳐 목 메담) 호국경.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1602 엔덴(Franciscus van den Enden, latinisé en Affinius, 1602-1674) 에스파뇰계 가족 홀란드 출신 철학자. 루방대학 신학과, 화가 루벤스(Rubens)와 반 다이크(Van Dyck)의 친구. < [암스테르담에서 스피노자의 주변인물(Amsterdamse Spinoza Kring): Enden, Jan Rieuwertz, s.d., Jarig Jelles, Pieter Balling, s.d., Lodewijk Meyer, Adriaen Koerbagh, Johannes Koerbagh, Johannes Bouwmeester, Simon de Vries, s.d., Jan Hendrik, s.d.] >
1604 벤 이스라엘(Manassé ben Israël ou Manassé ben Yossef ben Yisrael, parfois abrégé MB"Y, né sous le nom de Manuel Dias Soeiro, 1604-1657) 포르투갈 출신, 랍비, 카발리스트, 작가, 외교관, 출판 및 편집인. 스피노자의 교수들 중 한사람.
1612 프라도(Juan de Prado, 1612-1659) 리베리아반도 출신 합리주의 철학자. 스피노자보다 선배들 중의 한 사람이다.
1617 얀 리유베르츠(Jan Rieuwertsz (Rieuwers), 1617-ca. 1685) 평민파 출판업자.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들(1663)과 익명으로 신학정치론, 스피노자 사후 유고들을 출판하였다.
1619 올덴부르크(Henry Oldenburg ou Oldenbourg, Heinrich Oldenburg, 1619경-1677) 독일 태생 영국활동 외교관, 과학자. 영국 왕립학회 비서[서기]를 지냈다. 1661년 네델란드 여행 중 스피노자 만나 편지교환(1665), 그는 위험한 사상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스피노자 사상에 반대의 글을 쓰기도 했다.
1620k 발링(Pieter Balling, ??-1669) 스피노자의 친한 친구, 멘노파. 스피노자와 서신교환(편지 17)
1620 옐레스(Jarig Jelles, ca. 1620-1683) 네델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내밀한 친구. 프로테스탄트로서 메논니트(Mennonite) 분파에 속한다. 1661년에 스피노자(1632-1677)와 편지교환, 1674년 출판, -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 재침례파, 네델란드 종교개혁가. -
1620 마사니엘로(Masaniello Tomaso Aniello d'Amalfi dit « Masaniello » 1620-1647) 나폴리의 혁명가. 스페인에 반대한 봉기하였고, 집권 7일 동안 학살 이후 암살당했다.
1625 비트(Johan de Witt, fr. Jean de Witt, 1625-1672) 네델란드 재상(1653-1672), 형(Cornelis de Witt,, 1623-1672)과 함께 1672년 프랑스(루이 14세)와 전쟁에서 패한 후, 형제는 암살당했다.
1629 메이에르(Lodewijk Meyer, 1629–1681) 네벨란드 번역가, 의사. 스피노자 주변인.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1633 쾨르바그(Adriaan Koerbagh (1633–1669), Arzt, Jurist und Philosoph, Bruder von Johannes Koerbagh
[1634 쾨르바그(Johannes Koerbagh, 1634–1672), jüngerer Bruder von Adriaen Koerbagh]
[1634 부브미스터(Johannes Bouwmeester, 1634–1680) Néerlandais philosophe et médecin ♂; Dutch philosopher and physician
[프리스(Simon de Vries, s.d.: In February of 1663 Spinoza's student Simon de Vries wrote to him asking whether a definition must be clearly known and true
1642 카세아리우스(Johannes Casearius, 1642-1677) 스피노자와 같은 집에 살 때(1663년경), 그러니까 19살이구나. 참조, 「편지 9, 프리스에게」(카세아리우스 관해 나옴)
1647 콜레루스(Jean Colerus, Johannes [Nicolaüs] Köhler, 1647–1707) 네델란드 작가. 프랑스판 스피노자의 생애(Vie de Spinoza(Culture commune, 2013, P.44)
[1648년 찰스1세 처형(청교도 혁명 절정기) -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영국의 정치가, 군인. 청교도 혁명(1642-1651)의 주역, 1648년 찰스 1세를 처형, 1653년 의회를 해산하여 결국 종신호국경 1658년 9월 3일부터 죽을 때까지(11.10웨스트민스터 묘지안장. 1661년 찰스2세 왕정복고 때 파헤쳐 목 메담)
[1660 영국은 1660년 왕정복고에 따라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 1660-1685)는 귀국하여 이듬해 즉위하였다. 그는 비국교도를 탄압하고 왕권을 확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며, 1666년 네덜란드와의 전쟁, 전염병, 런던의 큰 화재(런던 대화재)로 시달렸다. 영국은 1670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로부터 군비를 지원받아 제2차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은 영국에서 1688년에 일어난 혁명. 의회와 네덜란드의 오랜지공 빌럼이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로 즉위하였다.]]
1804 쉬(Marie-Joseph Sue, dit Eugène Sue, 1804-1857) 프랑스 작가. 사회적 특성을 보여준 연재소설 Les Mystères de Paris (1842-1843) Le Juif errant (1844-1845),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 문헌학자, 철학자, 시인, 피아니스트, 작곡가.
1891 헨리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1891–1980) 미국 작가.
1914 말라무드(Bernard Malamud, 1914-1986) 러시아 유태인 가계, 미국태생 작가. The Fixer, 1966(L'Homme de Kiev)
1917 레바(Israel Salvator Révah, 1917-1973) 독일 베를린 태생(테살로니카 계보), 프랑스 유학(16세기 전공) - 전쟁 중에 학업 중단(유태인?), 스페인어 전공(포르투칼 포함). Spinoza et le dr Juan de Prado (1959), Des Marranes à Spinoza (1995)
1935 오지에(Jean-Pierre Osier, 1935-) ENS출신, 프랑스 철학자. L'Essence du christianisme[de Feuerbach], trad. Jean-Pierre Osier, éd. Maspér, 1968. 이 책의 서문을 썼다. / « Ou Spinoza ou Feuerbach » comme dit encore J.-P Osier à propos de la théorie de la religion dans sa présentation de L’essence du christianisme (rééd. Tel-Gallimard, 1992, p. 9)
1946 미뉘니(Filippo Mignini, 1946-) 이탈리아 철학자. 스피노자 연구자. L'Etica di Spinoza. Introduzione alla lettura, Carocci, Roma, 2002.
Spinoza: Korte verhandeling van God de mensch en deszelvs welstand(fr. Court traité sur Dieu, l’homme et la béatitude) - 1675 and 1700
Korte verhandeling van God, de mensch en deszelvs welstand. / Breve trattato su Dio, l'uomo e il suo bene (Filippo Mignini, 1986)
(4:06, 52RLA) (11:29, 52UKH) (11:40, 52VLF)
첨가
# 참고문헌(Bibliographie) 2. (25-26, 28-30) <- 스피노자: 실천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
[본문에 나오지 않은 부분이며, 1970년 판본과 다른 내용들만을 여기 기록한다.]
The oldest biography of Spinoza, [Jean Maximilien Lucas]
1636 루카스(Jean Maximilien Lucas 1636?-1697) 프랑스 편집자. 스피노자 전기 첫 출판자. He is now known as the first biographer of Baruch Spinoza.[1]
1647 피에르 벨(Pierre Bayle, né au Carla-le-Comte, 1647-1706) 프랑스 철학자, 작가.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1697, 4 volumes, 1702, 3 volumes. in-folio.
1647 콜레루스(Jean Colerus, Johannes [Nicolaüs] Köhler, 1647–1707) 네델란드 작가. 프랑스판 스피노자의 생애(Vie de Spinoza(Culture commune, 2013, P.44)
1818 반 블로텐(Johannes van Vloten, 1818–1883), Dutch theologican, Literary man, Philosopher, Linguist, Spinozist,
1834 란트(Jan Pieter Nicolaas Land, 1834–1897) philosopher and Orientalist. “Benedicti de Spinoza opera quotquot reperta sunt 1882”
1839 프로이덴탈(Jacob Freudenthal, 1839–1907) 독일 철학자. 유대신학 세미나를 한 것으로 보아 유대인일 것이다. 들뢰즈가 탁월한 전기라고 한 "스피노자 생애(Die Lebensgeschichte Spinoza's", Leipzig, 1899.를 썼다.
1862 아쀤Charles Appuhn, 1862-1942) 프랑스 철학자. 스피노자의 “윤리학”번역(1913), 스피노자 친구 모임에서 베르그송과 레비브륄을 자주 만났다고 한다.
1864 스타니스 라우스 두닌-보르코프스키(Zbigniew Stanislaus Martin Graf Dunin-Borkowski, 1864-1934) 오스트리아 교회, 종교철학사가. 스피노자 전문가. 겝하르트가 스피노자 연구를 이어 받다.
1881 겝하르트(Carl Gebhardt, 1881-1934) 독일 문헌학자 철학자. 독일에서 스피노자 탐구 선구자. Spinozas Abhandlung über die Verbesserung des Verstandes. 1905. Spinoza, 1932
1891 게루(Martial Gueroult, 1891-197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1912년 ENS입학, 전쟁에 3년 근무후 1919년 철학교수 자격. 소르본과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 Spinoza(tome 1: Dieu (Éthique, livre I), 1968 tome 2 : L'Âme (Éthique, livre II), 1974)으로 유명하다.
1892 코이레 (Alexandre Koyré, 1892–1964), 스피노자의 “오성개선론” 번역
1906 알끼에(Ferdinand Alquié, 1906-1985) 아세키나즈의 번역 서문을 썼다.
1926 미스라이(Robert Misrahi, 1926-) 스피노자 번역자 전문가.
까이으와(Roland Caillois, s.d.) 스피노자 번역자.
프랑세(Madeleine Francès, s.d.) 스피노자 번역자. 이 셋이 쁠레이아드 판 편집
아스케나지(Joël Askénazi (19..?-1993), Jocelyne Askénazi-Gerson, 1928-? ?.) 스피노자 번역자 abrégé de grammaire hébraique, Paris: Vrin 1968).
(52VMD)
*참고 문헌 1 ***
[VI] 참고문헌(Bibliographie) 127. <- 스피노자(Spinoza, 1970)
스피노자 읽기의 입문
- V. Delbos, Le spinozisme, Vrin, 1915. (Victor Delbos, 1862-1916)
“윤리학” 분석
- M. Gueroult, Spinoza, Aubier, 1968. (Martial Gueroult, 1891-1976)
방법(론)
- A Darbon, Etudes spinozistes, PUF, 1946. (André Darbon, 1874–1943)
양태들과 양태들의 감화들(Les modes et leurs affections)
- F. Alquié, Servitude et liberté chez Spinoza, (cours publié, C.D.U.) 1959.
알끼에(Ferdinand Alquié, 1906-1985)
정치사상 과 신학사상
- J. Préposiet, Spinoza et la liberté des hommes, NRF, 1968.
프레포지에(Jean Préposiet, 1926-2009)
- S. Zac, Spinoza et l’interprétation de l’Ecriture, PUF, 1965.
작(Sylvain Zac, 1909-)
스피노자와 그의 동시대인들
- L. Brunschvicg, Spinoza et ses contemporains, PUF, 1923.
브룅슈비끄(Léon Brunschvicg, 1869—1944)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G. Friedmann, Leibniz et Spinoza Spinoza, NRF, 1946.
프리드만(Georges Friedmann, 1902–1977)
(13:19, 52VMD)
첫댓글 1947년 교수자격 시험칠때, 들뢰즈는 벩송을 제일 구도(평면)의 철학자(un philosophe de tout premier plan)라고 생각했다.
1995년 그가 생을 마감하는 때, 「집합과 다양체(L’ensemble et la multilplicité)」이라는 기획에서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1995)과 「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1995, 1996출판)에서도 동일한 평면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내재성 평면(아페이론)의 철학자이다. (53M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