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8장의 접신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안유섭 목사가 집필한 카리스 성경 주석에서 그대로 인용함).
<삼상 28:8 신접한 술법으로 사람을 불러올리라>
- 이러한 사울의 부탁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招魂) 행위를 가리키는데(11절),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출 22:18; 레 20:27; 신 18:11) 자신의 금령(禁令)으로 철저히 배격하였던(3절) 그 요망한 복술 행위를 지금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접신녀(接神女)의 존재와 초혼(招魂) 행위에 대해서는, 그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지만,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그 정체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 체험을 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와서 그들을 현실의 인간과 의사소통하도록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곧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는 이교적 사술(邪術) 형태인데, 이는 결코 실제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는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온다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인 낙원과 음부로 옮겨지고 다시는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단, 예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을 돌려보내셔서 부활을 허락하신 경우는 종종 있으나(왕상 17:22; 왕하 4:32-37; 눅 7:11-15; 8:55; 행 9:40; 20:9-12), 그것은 하나의 기적으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며, 일반적인 초혼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② 따라서 만일, 초혼과 같은 광경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영혼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죽은 자의 영혼으로 위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③ 따라서 접신자와 초혼자는 사단이 인간을 속이기 위하여 기만하는 역사(役事)에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④ 결론적으로 초혼과 같은 행위는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서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미혹시키는 악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철저히 금지되었으며(신 18:10, 11), 이러한 초혼자들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28:11 내가 누구를 불러올리랴>
접신녀(接神女)는 아직도 사울 왕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에게 누구를 불러올릴 것인지를 묻고 있다. 이같은 그녀의 질문은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도 초혼(招魂) 행위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와 같은 초혼(招魂) 풍습에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내세관(來世觀)으로서의 ‘음부(陰府)’에 관한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두 '스올'(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았다(창 37:35). 그 이유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가 땅 속에 묻히기 때문에 그 영혼도 땅 속 깊은 어느 곳에 들어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약 성경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낙원(樂園)과 음부(陰府)라는 영적 세계로 나뉘어 들어간다는 신약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눅 16:19-21). 한편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하늘(삼층천 혹은 칠층천)에 계시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천사들을 비롯한 어떤 신적인 존재들은 하늘 뿐 아니라 땅 위의 어느 공간에도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 참조). 아무튼 무당과 박수 따위의 접신자(接神者)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내세관에 따라 죽은 자의 세계인 땅 속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어 교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28:1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
사울이 접신녀(接神女)에게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요청한 11절과, 그녀가 사무엘을 보았다는 말하는 본 절 사이에는, 그녀가 사무엘을 불러들이는 초혼(招魂) 행위를 한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그녀가 보았다고 하는 여기 ‘사무엘’의 존재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① 혹자는 실제로 ‘사무엘의 영혼’이었다고 본다(Josephus, Gregory of Nazianzus, Lewis, Hoffner, Lange, Buecken). 그 근거로는, ㉠ 성경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온 예가 많이 있기 때문이며(왕상 17:22; 왕하 4:32-37; 눅 7:11-15; 8:55; 행 9:40; 20:9-12), ㉡ 또한 여기 나타난 존재가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 사울의 죄악을 책망하면서 다윗의 궁극적 승리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모습이 생전의 사무엘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② 혹자는 사무엘의 영혼이 아니라, 일종의 천사와 같은 어떤 영적 존재였다고 본다(Patricia Cox, Klein, Keil, Youngblood). 그것은 여기 나타난 존재가 무녀의 초혼술에 의해 불려 온 것이 아니라, 사울을 책망하고 이스라엘의 운명과 다윗의 승리에 대해 예언해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나타난 것으로 본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본서에서 무녀는 자신이 사무엘을 불러낸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21절), 여기 나타난 존재는 실제로 그녀의 초혼 행위와는 관계없이 나타난 셈이 된다. ③ 혹자는 사단의 영 또는 악신과 같은 존재가 사무엘의 영혼인 것처럼 위장하여 행세한 것으로 본다(Luther, Calvin, Matthew Henry, Grotius, Patrick). 그 근거로는 ㉠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초혼 행위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 신(神)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성경적 개념과 배치되며(전 3:21; 눅 16:22, 23), ㉢ 악령도 뛰어난 지혜가 있어서 죽은 자의 과거에 대해 모두 기억하고 있으므로 사무엘을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④ 혹자는 본문의 '사무엘'( , 쉐무엘) 앞에 '이름'이라는 히브리어 쉠이 생략되었으며, 따라서 그녀가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Hertzberg). 그 근거는,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사울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사울이 사무엘의 이름을 대면서 불러달라고 말하자, 그녀는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할 사람이 사울 왕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사울 왕을 알아보고 놀라서 소리쳤다는 것이다. ⑤ 혹자는 접신녀가 실제로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Smith). 이상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견해는 종교 개혁 이전에는 지배적인 해석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네 번째 견해는, 문맥적으로 어느 정도 타당하기는 하지만,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고쳐야 하며, ‘이름’이라는 ‘쉠’을 추가하여야 하는 등 본문을 두 번씩이나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으며, 마지막 견해는 12절에서 ‘사무엘을 보고’라는 표현이 무당의 말이 아니라 본서 저자의 언급인데다가, 영매(靈媒) 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이나 환상(幻想)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견해는 단지 악한 영이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사울을 책망하고 다윗의 승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록 사단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케이스(case)는 모압 여인들과 간음 사건으로 이스라엘을 미혹시킨 거짓 선지자인 브올의 아들 발람의 사건(25:1-18; 벧후 2:16)에서도 볼 수 있다. 즉 그는 거짓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순간 하나님께 사로잡힘으로써 진리를 말하고(민 22:38; 23:8-12, 18-24), 야곱의 별의 예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함으로써(24:13-25) 마치 참 선지자로 행세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여기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 역시 진짜 사무엘의 영혼이 아니라,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의 영 또는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 따위로 보아야 한다.
<28:14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
여기서 ‘알고’([dy, 야다)라고 표현한 것은 ‘사울이 형상을 보았다’는 의미는 아니며, '노인'과 '겉옷'에 대해 언급한 접신녀(接神女)의 말을 듣고 그가 사무엘일 것으로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어리석게도 그녀가 초혼술(招魂術)을 통하여 사무엘의 영혼을 실제로 불러 온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그는 그녀가 사무엘이 올라온 곳이라고 암시하는 곳을 바라보며 절을 한 것이다. 한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 대하여 최대의 경외와 존경을 표현한 것이다(24:8; 25:23). 사울은 사무엘의 살아 생전에는 자신의 어버이와 같았던 그에게 거듭 불순종하고(13:8-14; 15:1-3, 17-19) 나중에는 그를 죽이거나 잡으려고까지 하였으나(16:2; 19:18-24), 오히려 그가 죽고 나서는 그에 대해 더욱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28: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로 분요케 하느냐 >
본문은 마치 사무엘이 실제로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사무엘을 흉내 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유령의 존재를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고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때 사무엘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기술 한 것에 대해서도, 본문에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실제로는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절 이하에서 펼쳐진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는 실제로는 접신녀와 사울이 대화한 것이다. '분요케 하느냐'의 히브리어 ‘히르가즈타니’()는 ‘떨다’, '진동하다', ‘격분하다’, ‘괴롭히다’라는 뜻의 ‘라가즈’( ) 동사의 사역 능동태인 힙일(Hiphil)으로 여기서는 ‘격분하게 만들다’, ‘동요하게 만들다’(disquiet, KJV)라는 의미로써 곧 ‘안식을 방해하다’(disturb, NIV)란 뜻이다(렘 50:34). 특히 이 단어는 성서외적(聖書外的)으로는, 자신을 아스다롯 여신의 제사장이라고 자처(自處)하였던 시돈(Sidon)의 왕 타브닛(Tabnit)의 비문에서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무덤을 평온하게 쉬는 장소로 생각했던 히브리인들의 고대 사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점진적으로 드러나던 계시(啓示)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으로써 명확하게 드러난 신약 시대의 진리에 의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 성도는 낙원(樂園)으로 가서 참 안식을 누리는 반면, 불신자는 음부(陰府)로 가서 고통을 당하면서 각각 최종적인 부활의 날을 기다리게 된다(눅 16:19-31; 요 5:29; 계 20:11-15). 따라서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들까지도 음부에서 편안한 안식을 취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사상인 것이다.
<사울이 대답하되 심히 군급하니이다 >
여기서 사울은 마치 사무엘과 직접 대화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이는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 나오는 사무엘의 목소리에 사울이 대답한 것이다. 여기 ‘군급하다’의 히브리어 ‘차르’( )는 ‘꺾쇠로 죄다’, ‘동여매이다’라는 뜻의 ‘차라르’(rrx) 동사의 형용사로서 ‘몹시 고통당하는 상태’(be in great distress, NIV, RSV)를 묘사한 것이다(삼하 24:13; 욥 6:23; 7:11).
아르케아카데미 안유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