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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9. 우리나라의 의복제도 東國衣制
우리나라 의제衣制를 살펴보면, 신라新羅 진덕왕眞德主 때에
김춘수金春秋가 당唐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제도를 따르고 싶다고 요청하자,
당唐 태종太宗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고서 의대衣帶를 하사下賜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4년에 또 부인들의 의복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의복이 중국과 같게 되었다.
송宋나라 때에는 송나라 사신使臣 유구劉逵와 오식吳拭이 고려를 방문하여 관館에 있었다.
잔치 자리에서 향장鄕粧을 한 창녀娼女를 계단 위에 불러 올려 그 입고 있는
활수의闊袖衣와 색사대色絲帶 및 대군大裙을 보고 감탄하면서,
“삼대三代 시절의 옷이 이곳에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고 한다.
의복 제도는 고려가 신라의 것을 이어받았고, 조선이 고려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넓고 좁고 길고 짧은 것에는 비록 조금의 차이가 있지만,
그 큰 틀을 가지고 말하자면 고쳐진 것이 없으니,
이러한 의복이 삼대三代에 남긴 제도와 비슷하여,
오히려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 남겨져 있다는 것이다.
요즘 중국에도 이러한 의복 제도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도처의 풍천風泉에 대한 감회를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다.
10. 김구金坵의 문장
내가 우연히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김구金坵가 남긴 문집을 보니,
그 문집의 끝부분에 몇 줄의 글이 있었다.
이 글은 세상에서 박식하고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쓴 것이라고한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계오년癸午年 김수재金秀才가 호남湖南으로부터
내가 살고 있는 고요한 물가 집을 방문했었다. 김수재는 소매 속에서 몇 편의 시를 꺼냈다.
내가 그 시를 펼쳐 읽으니, 그 중 한편은 바로 고려 명신 김문정공의 시였다.
김문정공은 문장과 덕업德業이 우리나라에서으뜸이었는데,
나만이 그 시를 보지 못한 것이 늘 한스러웠다.
지금 그대가 김문정공의 시를 보여주니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네.
시축詩軸 가운데 악장樂章 한 수가 있었는데, 내가 그 악장을 읽어보고, 세 번 탄식했다.
백 대가 지난 뒤에도 문정공의 성대한 덕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북극北極의 풍운지회風雲之會요, 우리나라 해와 달의 밝음이며,
온 나라에 가득한음악이요, 검과 패옥佩玉을 차고 조정에 달려 나가면 부른 노래이기 때문이다.
당시의태평한 모습을 형용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풍풍하고 앙앙함이 또한 성대했구나.
만일 오吳나라 계찰季札에게 보게 했다면, 어찌 대풍大風이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것을 시인이나 글을 하는 사람들이 즐겨야할 뿐만 아니라,
바로 대아大雅의 군자들에게듣게 한다면 어찌 드러내어 칭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 글을 써서 주면서 감동한 바가 있었다.
내가 요즘 병으로 산중에서 지내고 있으면서 스스로 일민逸民이 된 것을 달갑게 여겼다.
돌로 만든 책상과 소나무 창으로 만든 곳에서 살면서,
인간세상과 멀리 있었고 숲에 내린눈과 넝쿨에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티끌세상과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말을 듣지못했으니, 또한 어떻게 당대의 일을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북국의 풍운지회와 동방 일월의밝음,
음악소리가 나라에 가득하여 새로운 기쁨을 올리는 것과 검과 패옥을 차고 조정에달려가
태평성대를 축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겠다.
지금 우리나라는 또한 예전에 말한 동방과 비슷한가?
성스러운 덕을 찬양하여 당대의 성대함을 울리는 것에 문정공같은 사람이 무릇 몇 사람이나 있을까?
내 몸이 산중에 있어 바깥일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대가 와서 당세當世에 대해 묻는데, 만일 들은 바가 있다면
내가 이렇다 저렇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것 또한 이산속에 사는 늙은 내가 들은 것이 아니겠는가?
김수재가 찾아온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 이미 글을 써서 그에게 주었고,
또 이 말을 그에게 전해준다” .
지금 내가 이렇게 기록한 의도를 살펴보니,
고려 때를 태평성대로 여기면서 노래하고 찬미하
는 것에 마치 산진山榛과 망미望美의 남은 뜻이 있는 듯하니, 정말로 가소로운 일이다.
김구의 문집에 실린 시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我王曾爲活蒼生 우리 왕이 일찍이 백성 살리기 위해
親屈龍沙萬里行 친히 먼 변방 굽어보려 만 리 행차했지.
北極風雲初啓會 북극의 풍운에 처음으로 조회에 나아가니
東方日月更廻明 동방의 해와 달이 다시 밝은 빛 찾았네.
笙歌滿國呈新喜 음악소리 나라에 가득 차 기쁨 드리고
劍佩趨朝賀太平 신하들은 조정에 달려가 태평성대 축하하네.
請見功臣歸美處 공신을 청해 보고 아름다움 돌리는 곳에
山含萬壽湧崢嶸 산도 만수 머금어 우뚝이 솟아났구나.
이 작품의 제목은 「영주교방치어迎主敎坊致語」이니,
고려 원종元宗이 몽고蒙古에 입조入朝하고 고려로 다시 돌아왔을 때,
모든 관리들이 악장을 지어서 축하를 알린 것이다.
문정공이 이때에 문형文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를 짓게 된 것이다.
북방의 오랑캐가 위협하는 때에 국왕이 북방 오랑캐의 위협이 가까워지자
친히 북방의변방까지 행차한 것이다.
모든 관리와 온 나라 사람들은 혹시라도 북방 오랑캐에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랑캐의 사나운 위협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돌아왔기에 시를 지어 이것을 축하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이겠는가.
아, 그 사람이 박식하고 문장에 능했다고 세상 사람들이 추켜세워 자랑한
사람도 오히려 이와같구나.
맞구나, 붓을 잡은 사람이 사실만을 모아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을...
흙 (土)
11. 보은報恩의 지세와 관방
보은報恩 한 고을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다.
동쪽으로는 화령化寧의 험준함을 끼고 있고, 남쪽으로는 추풍秋風의 길이 나 있으며,
청주淸州와는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맞닿아있다. 그리고 지세地勢도 험준하다.
보은현 동쪽으로 70여 리쯤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옛산성山城이 있다.
그 산성은 험준한 암벽 위에 있기 때문에,
비록 뛰어나고 날쌘 병사가있더라도 그 산성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다만 보은의 서쪽은 지세가 조금씩 낮아지니, 절로 관문關門이 된다.
진실로 하늘이 만들어준 성터인 것이다. 지금 그 성터를 보니, 성을쌓았던 돌이 그대로 있다.
조금만 수리를 하고 더불어 창고를 두어 군물軍物을 둔다면,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고을의 군민軍民과 양식을 갖추어
이곳으로 들어가 거처한다면 어떠한 위험에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하늘이 이와 같이 험준한 곳을 만들어 주었기에,
이미 전대前代에 이곳에 설치한 것도 또한 저같이 근실하게 했었다.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되어 사람들이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곳을 버려둬 빈 땅으로 만들었으니 탄식할 만하구나.
12. 진주晉州 촉성矗城의 지세와 관방
진주晉州의 촉성矗城은 큰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낮으며,강물을 가로질러 흘러간다.
서북쪽으로부터 남강南江에 이르기까지는 산이 높고 바위가우뚝하여,
적들이 쳐들어올 만한 곳이 못된다.
동남쪽은 낮고 평평하기에 임진왜란 때에촉성이 함락당한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남강의 아래로부터 북장대北將臺까지는 성城의 본체本體와의 거리가 혹 3~40보,
혹은 4~50보이니, 지형地形에 맞추어 견고하게 토성土城을 쌓아 외곽外郭으로 삼고,
성의 제도에 있어서는 안팎에서 함께 끊는 형세를 이용한다면
어떤 위험에도 온전하게보존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성제城制에 대해서는 관수만록觀水漫錄에 상세하게보인다.】
또 살펴보건대, 성의 안쪽에는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남강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한다.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여,
적이 남강에서 물을 길어오는 길을 끊어버린다면 고립된 성에서는
하늘에서 샘물이 쏟아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어렵게 될 것이니,
실로 끝없는, 깊은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지금 보니, 촉석루 위쪽으로 10여 걸음 뒤의 그곳이 지형이 가장 낮다.
이곳에 10길 정도의 못을 파서 바깥쪽에 있는 강물과 서로 통하게 해야 한다.
공주의 쌍수성雙樹城에서 강물을 끌어오는 방법이 있는데,
영남의 반드시 방어해야할 곳으로, 이 성보다 더 중요한 곳이 없기에 이 방법을 써야 한다.
13. 합천陜川의 구민방책
합천陜川 고을의 터는 진실로 조석朝夕으로 물에 잠길 염려가 있는데,
도백道伯이나 읍수邑守가 되어서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바라만 본다면
어찌 식자識者의 견해라고 할 수있겠는가.
어린아이가 엉금엉금 기어서 우물로 들어가려 하면 사람으로 가만히 서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
하물며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어찌 아무런 걱정도 하지않고 백성을 구제할 생각도 없는가.
합천 일대의 큰물은 서북쪽으로부터 흘러와 동쪽으로 흘러간다.
그 물의 기세가 마치 고을을 곧바로 삼킬 것 같다.
그래서 예로부터 구불구불 제방을 쌓아서 사나운 물줄기를 막았고,
그 물줄기를 고을 남쪽으로 흘러가게 했었다.
수십 년 전에는 큰비가 내렸는데, 밤중에 사방의 제방이 무너져 한 고을이 물에 잠겼으며,
700여 명이 한 순간에 물에 빠져 죽었다.
이미 이러한 경험이 있어서 그 뒤에 크게 제방을 쌓고 몇 길을 더 덧대었으니 견고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 제방 위에 서서 제방의 안팎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 강은 모래가 있는강이기에 해마다 모래가 물을 따라 흘러내려와 강을 점차 막고 있다.
고을 쪽에 있는 제방의 높이는 몇 길이나 되지만 제방 밖은 한 길도 되지 않는다.
만약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여 큰물이 갑자기 넘치게 된다면,
모래 제방이 터지는 것은 한순간일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한 고을의 백성들은 장차 아무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이러한 경우에 대해 근심하지 않으니 제비가 구구거리고 서로 즐기며
장차 불의 재앙이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꼴이다.
식견이 있는 군자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을 보게 한다면,
물난리에서 벗어날 방법을 도모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랴.
.... 우하영의 천일록 - 잡록 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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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취석실 선조님 자료, 오늘도 좋은 공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광성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