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름: 김영배 ♧ 2009/4/30(목) 00:30 (MSIE6.0,WindowsNT5.1,SV1) 211.216.37.159 1024x768 ♧ 조회: 662 | |
"軍 入隊의 얘기" "나도 베트벳 전우님들 처럼의 군대생활" 나의 셋째 형님은 나와 일곱살 차이지만,군대는 8년 선배이다. 형님의 친구분들은 대부분 형님보다 한살씩위로 친구들이 입대하는 장소에 갔었다. 당시는 기피자들이 많아서 입영날자에 오지않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당시 구청 직원이나 장병들을 인솔하러온 기간병들도 이문제로 상당히 난처 했었는데,여러명이 모자르니까 기간병이 환송나온 입영 친구들을 향해서, "지금 이자리에서 지원할 사람 없습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형님은 다섯명의 친구들이 입영하는데 너무도 서운해 바라만 보고 있다가,그소리를 듣고 지원을 해서 갑자기 1년먼저 입대를 하게 됐다. 그때가 57년 9월23일로 그곳에서 집에 "입대한 경위를 말하고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식으로 갑자기 입대를 하게 된거다. 형님의 군번은 1025...로 원래의 정축년 소띠는 군번이 통상 108로 되는데 덕분에 형님은 같은 나이들 보다 군번이 빠르다. 형님은 양구에서 근무를 하셨고,4.19 때 제대를 했다.그때의 친구분들과는 지금도 친분이 두텁고 그우정은 본받을만하다.내밑에 동생도 나보다 세살 아래인 정해년생으로 66년 4월 8일에 지원 입대해서 논산과 부관학교 졸업후,육군본부에 근무했다. 그당시에 난,9사단에 배치돼 근무했는데, 파병 결정이나자 9사단부대는 소란했다.또 ,그당시엔 9사단 사령부는 동두천에 있고,28사단은 양평에 있었다.9사단은 덕정리와초성리를 비롯해 전곡.백의리.진상리.대광리 .신망리.옥계리와 3.8선 철책이 있는 GOP 까지의 지역이고 28사단은 양평과 지평 일대에 있었다. 兩 부대는 2년이나 3년에 한번씩 부대를 위치를 바꾸어가며 근무 했었다.그러니까 9사단과 28사단은 형제처럼 가까웠다.(나중으로 계속) 나는 형님이나 동생과는 달리 제나이에 입대를 했다.한양대학에서 집합한 우리 모두는 서울 일대의 애들만 소집된 상태로 내가 아는 애들이 여럿 있었다. 엇그제 수원서 만난 김의성.조종학 그리고 이강한.송순복.김현덕 등이다. 우리는 왕십리역에서 군용열차를타고 영등포역에서 같은날 입대하는 인천 애들과 합류,그리고 열차는 느릿느릿 떠나기 시작해 새볔 한시에 강경역에 도착을 했다.그곳에서 우리는 걸어서 수용연대로 향했다. 시간이 새볔두시로 향하니만큼 수용연대 막사에는 먼저온 애들이 모포를 둘둘 감은채 자고 있었는데 어딘지 처량해 보이고 낯설은 풍경이다.연대 연병장에서 막사 안에는 먼저온애들이 20명정도 있었고 그애들이 고참이라고 우리를 침상 3선에 세우곤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고참 이라고 해봤자,군번도 받지 않은 애들이니 우리와 입장이 같고 우리가 그애들에게 질질맬 필요가 없다. 난, 수용연대서 부터 제대할때 까지를 형님이나 친구분들한테 너무도 소상히 들어 사정을 알고 있었고 우리동기들도 대부분이 그 사정을 알기 때문에 첨부터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을수 밖에 없다.우리가 얌전히 말을 들어 주니까 그애들이 기고만장,제멋대로 행동하는데,군생활 2년정도 고참노룻을 하는거다. 우리들에게 빤쓰까지 벗게하고 소지품을 전부 꺼내게했다.그애들이 우리들 사타구니까지 들여다보고 낄낄 거리고 좋아라 했다.기분이 몹시 언잖고 분했다. 먼저온 애들도 처음와서는 그런 과정을 했었기에 우리에게 군기를 잡을려고 했지만,너무나 지나치게 하니까 우리도 반발하기 시작했고,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듣지 않으니까 상당히 고압적으로 나왔다. 드디어 그애들이 뭉둥이를 들고 위협하기 시작해서 사태가 악화됐다.이윽고 우리 동기 애들 두명이 그애들에게 엉덩이에 빳다를 맞았다.우리가 그애들에게 주먹과 빳다를 맞을 이유가 없는거다. 참다못한 우리 동기 몇명이 통로로 내려섰다.나도 신고간 농구화를 신었다.고참이란 애들은 나중에 알고보니 제주도 애들이 열명정도,나머지는 경상도와 전라도 애들로 우리들과 숫자가 비슷했고 그애들은 수용연대에온지 10 일 이나 되도록 군번을 받지못한 애들이다. 나는"이놈의 시키들 혼좀나봐라.!" 그러며 신발끈을 조여맸다.우리가 즈희들 명령없이 통로에 내려왔다고 그애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순간,"짐승들도 숫놈끼리 모이면 싸운다고"했던가.! 우리 동기들은 모두 싸움에 가담했고 그애들은 절반정도 구경만 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순식간에 상황이 꺼꾸로 변했다.나는 애들 다섯명을 막사 밖에 배치했다."기간병이 오면 알리라'고,그애들은 뺏은 몽둥이 하나씩을 갖고 나갔다. 우리는 고참 애들을 통로에 무릎을 꿇게하곤 당한만큼 분풀이를 시작했다.이걸로 끝났으면 별 문제가 없었는데,밖에서 일이 벌어졌다.파수를 보러나간 애들이 한남동 일대에서 순-깡패 똘마니 노릇을 한 애들인지를 몰랐었다. 급히 달려온 기간병 몇명을 일어나지도 못하게 줘-패놨는데 그중에 중위 한명이 있다. 그런데 그런일이 우리 막사에만 벌어진게 아니고 다른 전체가 다- 그런 상황였다.수용연대에 비상이 걸리고 숫자가 모자른 기간병들을 지원하러 교육연대 기간병들까지 몇대의 트럭으로 달려왔다. 내가 생각해봐도 우리동기애들 전부가 경찰에 잡혀갈 상태가 됐다.군번을 받은 상태가 아닌게 다행일 정도였다.군번을 받았으면 우리전부는 입창깜이다. 드디어 곤히 잠자고 계시던 수용 연대장이 등장,우리는 꼼짝없이 연병장에 도열했고 기간병들이 둘러쌌다. 분위기가 살벌했다.그때가 대략 새볔 네시이니,깜깜한 밖에서 벌어진 일들은 누가 그랬는지 알수가 없다. 하늘이 얕다고 방방뛰던 연대장이, "이놈의 시키들을 날이새면 즉시 교육 연대로 보내서 xxx,gg 해라.'!! 직사하게 기압받고 내무반에 들어와 그래도 한시간쯤 잤다.기상이 되고부터 우리는 숨도 쉴 시간없이 머리박박 깍고 신체검사 하고 팔뚝에 完字 도장을 받았을때, 저녘식사 시간이 됐고 그리고,막사인 내무반에 들어오니 교육연대에서 온 기간병이 이름을 부르며 각자의 기록 카드를 주는거다.그러니까 군번이 나온거다. 그곳엔 벌써 각자의 군복 내의 양말 군화 등이 한벌씩 지급됐고 입고온 사복을 한장씩준 양회 종이에 싸서 겉에 주소를 쓰게 하고는 그길로 교육연대로 향했다. 그러니까 만 하루가 되기전에 교육연대로 넘어간 거다. 그당시 그렇게 빨리 교육연대로 간게 수용연대 사상 우리가 처음이고"기록을 깼다."고 했다. 그것도 우리는 교육이"제일 쎄다"는,30 교육연대로 갔는데 나는 13중대 훈련병이 됐다.지금도 그렇겠지만 훈련병도 향도와 분대장이 있다.향도는 연대 정외과 2년 다니다가 입대한 정의훈이가 됐고 나는 1분대장 였는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월남에서 올때까지 계속 1분대장을 했다. 어쨋던,수용연대장 특별지시로 우리는 잠을잘때까지 고달프게 훈련을 받았다.교육장도 멀고 맨날 뛰여 다녀야하고 사소한 일에도 전체가 기합받고 배고프고 졸립고 거기다가 교육은 철저했다.그러니 죽을 맛이다. 그런데 웃으운 얘기가 하나 있다. 하여튼 그애 때문에 취침전 점호때 기합 받느라고 한시간 정도 잠을 못잤었다.취침 전에는 주번사관이 주번하사를 대동하고 내무사열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침상 3선에 서서 인원 파악인 번호를 하게 된다. 우리의 고참병장인 내무반장이 주번사관앞에 차렷 자세로 경레를 하고는, "제 13 중대 2소대 내무사열 인원보고 총원 41명,현재원 41명.!"하고는 돌아서서 "번호!!" 한다.그러면,향도부터 하나!.나는 1분대장 이니까,둘,-그렇게 훈련병들이 차례로 번호를 불르게 돼 있다.그런데,서른 일곱째에 번호를 부르는 애가 문제다. 즉- 그애앞에 애는 서른여섯째이니 당연히 자기 차례에 "서른여섯.!" 그러면,그다음 훈련병은 "서른일곱" 해야한다.그런데 그애가 경상도애다,경상도애는 "서른일곱" 그러지를 않고 "삼십일곱!"그런다.그다음 훈련병은 "서른 여덟"을 준비하고 있다가 앞에 훈병이 삼십일곱 하니까 우물쭈물...... 그러면 반장이 "번호다시!!" 다시 번호를 하면,경상도 애는 반드시 "삼십일곱"한다. 주번 사관이 인상을 쓰고 돌아서서 다른 중대로 간다.다시올때까지 우리는 원산폭격 상태로 번호 연습을... 그걸 며칠 동안이나 그랬다. 그런일이 반복되어 우리가 피해를 입으니까 그애도 죽을맛이다.그래서 다음날부터 휴식 시간에 애들 몇명과 그애를 끼워놓고 번호 연습을 시켰다.하여튼 내무반장은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내는데,그런일이 반복되니 우리는 주식회사로 기합받기 일쑤였다. 그런데다가 어느 훈련병은 집안에 장군(별)이있어 중대장이 골치를 썩었다.그런일이 많아 중대는 항상 우리를 좋지않게 보고있고,있을때, 어쨋던 훈련병이 된지 8일쯤 밖에 안됐는데 사건도 많았다.그러니까 그때쯤,일과를 마치고 내무반에서 훈련 장구를 풀어 정돈하고 있는데,내무반장이 들어섰다. 말없이 허리에 양손을 짚고 우리들을 째려보고 있는데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뭔가 큰일이 벌어진거다. 우리는 하던일을 중단하고 긴장상태로 반장을 지켜봤다. "참내--도대체 이번 훈병들은 뭐이래!! 서울 인천 놈들은 다-그래!!??빽 소릴 지른다 그때는 날자가 얼마 안되서 반장이 우리들 이름을 다 모른다. 사법고시 1차 합격을 하고 입대한 동기가 있다.거의 국졸이거나 아예-글을 모른는 애들이 있는데,그런애들 틈에,그정도면 그애는,학력이 높은거고 똑똑한 놈이다.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짜식이 순-고문관이다.m.1 노리쇠를 잃어버리질 않나 군화를 .....어느날은 울쌍을 지으며 우무쭈물 하기에 ,그애는 뭘 잃어버리면 그런 표정이다. "뭐야 임마! 또 뭘 잃어 버린거냐?" 그애가 뭘 잃어버리면 거의 내가 다- 해결해 줬었다.(무슨뜻인지 아실거다) 이건 분명히 나에게 그런걸 뺏긴 녀석이 고자질을 했거나 발각이 된게 분명하다. 반장은 주머니에서 흰봉투를 꺼내 마구 휘저으며, 난 짐작이 갔다.그러나 편지를 보낸적이 없어서," 나는 며칠전 번개 콩 구워먹듯이 바쁘게 눈을 부라리며"입고온 사복을 빨리싸고 집 주소를 써라." 할때,그 바쁜 순간에도 가로 세로 2센티쯤 되는 종이에 얼핏들은 "30교육중대로 갑니다. 그렇게 쓰고는, 돌돌말아 혁대위 바지 재봉선 사이로 넣었었다. 1.4후퇴때,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 전사 통지서만 받고,어디서 어떤 전선에서 죽었는지 아무소식도 없는 둘째 형님 소식을 몰라(물론 군번도 없다) 하늘이 무너지게 우시던 어머니를 어릴때부터 보아왔고 나라에서도 "나몰라라"하는 몰염치를 나는 잘 안다. 그래서 혹여 내가 입대하자마자 북괴군이 쳐들어오면,전쟁이 나면"나도 그짝이 난다.30 교육 연대로간다는 증거라도 남기자 그런 뜻에서 몰래 그렇게 했던거다. 그때는 입고온 사복을 보낼때,군우 153 논산 제2훈련소,라고만 부대서 적어 보냈다. 30 교육 연대 군우과에서 편지를 받고 수소문해보니 13중대에 내 이름이 있으니까 13중대로 편지를 보낸거다.사연이 그렇게 됐다. 집에선 어머님이 입고간 나의 사복을 받으시고 우신것은 안봐도 뻔했고 퇴근해 오신 형님이 내옷을 꼼꼼히 살피시다가 쪽지를 발견 하신게 틀림없다. "중대장님이 뭐라 그러시는지 아냐!! 참내--어긋난 일이지만,편지 내용이 좋으니까 당사자에게 기합주지 말고 내무반 애들에게 읽어주도록..." <내가 편지를 보내서 군대의 특성상 아우가 곤란을 겪을줄 안다.어머님이 저렇게 우시니 어머님을 안심 시켜 드리기위해 이글을 썼고 지금의 군대는 엣날과 다르다며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고 어머님 앞에서 이편지 내용을 읽어 드렸다. 이미 부대장님께서 다- 말씀 하셨겠지만,지금 아우가 받는 교육이 전쟁이 나면 바로 전쟁터에 나아가 적과 싸워 이길수 있는 육군 최정예 교육이다.훈련을 가르치는 조교들은 아우보다 먼저 군에 갔고 그만큼 경험이 많다. 적과 싸워서 이길수있는 교육이니만큼,조금의 무리가 있더라도 조교가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교육을 받아라.그러면 아우는 나라를 지키는 용감한 군인이 된다. 나는 아우가 군에 입대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옆에 전우들과 다투면 안된다. 전쟁터에선 그들이 아우의 전우이고 생명까지도 지켜줄수 있고 그것은 아우도 마찬 가지다. 나는 사실 월남에서 전우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형님 말씀을 실감했다. 교육받는 도중에 조교의 말을 잘듣고 행하되 매사에 실수 없기를 바란다.언젠가 날짜가되면,모범적으로 만기 제대하여 아우가 환한 웃음으로 가족들 앞에 나타날것으로 가족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특히 건강에 조심해라. 형 씀. 나는 내 조카들이 군에 갈때마다 형님이 나에게 보냈던 편지내용을 인용해 이런식으로 편지를 보냈다. 물론,그날 기합을 받지 않았다.그대신 중대장이나 조교나 내행동을 많이 살폈다.그러나 난, 형님 말씀대로 정말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난 입대전, "당수도장"에 잠깐 다닌적이 있다. 총검술의 기본이 당수(지금의 태권도)의 동작이니 같은 동기들 앞에 불려나가 시범을 보인적도 있다. 6주의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후반기 교육인 금마에서 4주간의 교육을 또 받았다. (모두 아시는 경험이어서 재미가 없으실줄 압니다.이런 재미없는걸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그래도 괜찮다면 감사히 생각 합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요.) 홍 진흠: 김영배님! 지루하다거나 재미가 없다니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더우기 군에 안갔다온 젊은친구들과 여성들도 보니까 더 자세히 설명해도됩니다. 다행히 선배님은 형님들이 계셔서 많은 도움이 되셨네요. 저 같은경운 형님이 군에 면죄돼서 이인분(?)을 나라에 충성해야만 했습니다. 더우기 병과가 병참이었는데 병참이 뭐하는 곳인줄도 몰랐어요. -[04/30-05:25]- 이상수: 남자들의 군생활일은 몇날몇일밤을 얘기해도 끝이 없지요. 저도 같이 입대한 불알친구가 있엇는데 하루는 이 친구가 찿아와 울면서 숟가락을 잃어버렸다는겁니다. 그래서 옆 친구것을 흠쳐다줬는데 우리내무반에 도둑놈이있다며 소대 전체기합받은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도난사건이 많았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천정속에 군수품이 한트럭분이 숨겨져 있더라구요. -[04/30-05:55]- 조석영: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저는 선배님보다 10여년 늦게 입대했는데... 수용연대 모습이 많이 비슷해서 웃었습니다. 저희도 저희보다 5일정도 먼저 입대한 대기병들한테 팬티까지 내리고 앞뒤 모두 수색당하는 수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항상 김영배선배님의 좋고 재미있는 글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04/30-06:34]- 최현득: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그 당시의 동료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게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물론 기록을 하셨겠지만 섬세한 삶의 자세에 경의를 표합니다 덕분에 지난날을 회상을 할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계속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정도 시작해놓고 중단 하시면 원쑤 즙니다 ㅎ -[04/30-09:58]- 박용환: 저역시 입대전하고 입대후의 생각은 기억이납니다만~월남에서 생활한 기역은 아리삼삼해서 걱정입니다.ㅎㅎ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04/30-10:03]- 수색대: 경상도 사람은 서른 이상은 잘 못셈니다 세른아홉 그리고 바로 사십 합니다. 사십 하나...오십 둘...육십 셋... 기수와 서수를 구분못하고 40이상은 기수 서수 짭뽕으로 헤아리는 특징이 경상도 숫자 개념, 마흔, 쉰 디게 헷갈립니다. -[04/30-10:05]- 박용환: 전반기 훈련을 끝내고 후반기교육을 강원도 홍천 제1야수교에서 훈련을 받으려고 집결을 하여서 전남 광주병력(무슨 신교댄지는 모름)과 합세해서 일석점호를 취하는데 ..세상에나~~우리 30사단 신교출신들은 하나둘 이렇게 넘어가는데 그쪽 병력은 일이삼사..밤새도록 기합을 받앗다는 .. -[04/30-10:41]- 차경선<: 행군중에 발맞추라 번호를 붙여준다며 "하나, 둘, 삼, 넷..." 하던 조교생각이 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기억력에 감탄합니다. 2탄을 기대합니다. -[04/30-10:53]- 심대흥 : 군대얘기는 몇날며칠을 들어도 실증이 나지 않는 법이지요. 김전우님의 기억력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감탄했습니다.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04/30-10:58]- 홍석진백마66: 살아가면서 숫자라는 묘한것이다. 나는 훈련소 28연대. 28사단 거꾸로 82연대 월남에 갈때는 28연대 예하부대로 오면 2중대로만 배치가 됬었다. 수용연대는 기간병들이 고의로 바께쓰.모포.식기.수저(군대 말로 스푼) 등등을 감춘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해결 못하면 공동으로 돈으로 해결했으니까. 그당시는 배를 채우기 위하여 그런 방법을 썼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공감이 가는 군생활 이야기 잘읽고 갑니다. 바쁘다 바쁘이 ...ㅋ.ㅋ.ㅋ. -[04/30-12:01]- 최성영: 63년 6월군번 30교육연대 영외연대 여서 모든 교육훈련장이 먼 탓에 구보나 행진간에 군가도 다른연대 보다 많이 불러댓씁니다. 삼복 더위를 이겨내느라 목덜미 뒤에는 프랑스 외인부대 처럼 흰천으로 가리개를 하고 점심식사 후에는 한시간 가량 낮잠을 자게 햇씁니다. 다음 얘기가 기다려 집니다. -[04/30-12:05]- 김병장: 흥미 진진합니다.기억력에 놀랏고요...저도 향도를 했고 그때까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까지 받았습니다.후속편을 기대하면서 제대할때 까지를 부탁합니다....가능하지요? -[04/30-12:26]- 백하사: 서울 성동구 병력 으로 수색 30사단에서 집합, 수용연대, 25연대 8중대, 금마 후방기 ,여산 제2 하교대 까지 같이 훈련받은 동기들 지금도 25명 일팔회 라는 명칭으로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하고있습니다. -[04/30-15:55]- 신춘균: /51년부터 대구에 살고있던 난, 출생지인 고향인 양주군 면사무소 로부터 속달우편으로 급히 징집 통보를 받고 갑작이 끌려가듯 해서 그저 당황했던 기억만 지금도 납니다. -사람이 좀 못 나고 착한 편이였나 보오..- 급히 우편통보를 받아 들고. 이틀만에 처음인 곳. 의정부의 국민교정에서 아는 사람 하나없이 처음보는 장병들 틈에 끼여 수영연대라는 곳엘 끌려갔은니 정신이나 제되로 차려겠어요?! 논산 제 2훈련소 23연대 6중대였다는것은 기억나고....이렇게 군대를 시작해서 전후반 10주 훈련 받고. 공용화기 분대장반 하교대를 수료했고. 조교도, 분대장도 해 봤고. 월남도 지원군으로 갔다 살아왔고. 그때의 전우였던 김영배전우도 43년만에 작년 11월에 만났고. 영배전우가 껶어든 군입대 얘기를 들으니 내가 껶어든 일 같이 기억이 시롬스럽군요.!!! 좋는 얘기 많이 들려 주소. 기억이 더 더 나게 말이요. 이번에 대관령에 가면 아주 뿌리를 뽏을 작정이요.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 난 참 행복합네다.!! -[04/30-18:06]- 김병장: 지금도 불가사의한 일은 집으로 보내는 사복 봉지에 주소도 못쓰는 무학자 여러명에게 주소를 써준 기억이나고 그훈련 동기들이 어디서? 어떻게? 군대생활을 마쳤는지 궁금합니다. -[04/30-19:44]- 최덕종: 차경선님 이야기 하신 하나 둘 삼 넷은 포병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포 사격 제원을 불러줄때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 이렇게 씁니다. 보충대에서 이름 부르면 군번을 대는데 저는 하나 하나 오 삼 넷 여섯 둘 넷이였습니다. 11534624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다시 한번 군번 외워 보네요. 김영배님 잘 읽었습니다. 군대 이야기는 언제 해도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04/30-19:49]- 백동기: 군대 이야기를 하시니 공감대가 형성되는지 전우님들 댓글이 많습니다.경상도 사람들의 보편적인 언어구사 능력은 다른지방 사람들 서울이나 전라북도 사람들에 비하여 좀 떨어진다고 평소 느낌니다. 특히 경상도에서 계속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특히 더 합니다.나이가 지금 몇 살인냐고 물으면 대부분 예순 다섯살이라고 답해야 하는데 십중팔구 육십 다섯살이라고 합니다.반면에 수학이나 물리 화학은 특히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일사 일언에 대한 언어구사는 전라도 전주 사람들이 잘하여 아나운서를 많이 배출한다고 합니다.우리나라 언어의 구사능력은 말의 리듬이 지역적으로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이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문화가 그렇게 교류되었는것 같은데 예컨데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전라 남 북도는 말할때의 리듬이 서로 비슷합니다.반면에 함경도 강원도 경상 남 북도의 말투 역시 비슷합니다.이는 아마 백두대간 즉 백두산에서 산맥이 흘러 태백산맥을 거쳐 지리산이 있는 곳으로 경계가 되어 문화가 서로 교류타 보니 그렇게 된 듯 합니다.지금은 통신과 교통이 잘 소통되어 지방도시의 어린이들이 표준말을 쓰는것을 가끔 보는데 앞으로는 지방 사 -[04/30-20:17]- 백동기: 투리가 없어져 지금과 같은 정겨운 느낌이 많이 없어질것 같습니다. -[04/30-20:18]- 심상수: 김선배님 저는 나이론 여름 잠바를 입고 6월 13일날 원주38사단에서 집결하여 논산 훈련소 입대수용연대를 거처서 30연대 16중대 달보고 훈련장 나가고 별보고 들어온다는 제일끝에 배정된 중대여서 정말로 매일 구보로 교육장을 다녔던 기억이 잇습니다 훈련소에서 완자받고 군복으로 갈아입을떼 나이론 잠바에다 편지를 엄청길게 어머님께 썻던기억이 있습니다 총 6개월 정도 교육받고 (하사관학교교육까지)12월 23일 육군하사로 임관하여 집에갔을대 여름에 편지쓴 점퍼가 그대로 있더군요 어머니가 그잠바를 들고 엄청 우셨다고 합니다 동생들의 말입니다 편안한밤 되십시요 -[04/30-21:24]- 정병장: 김선배님...! 참으로 기억력 좋습니다.저도 기억력이 좋은편인데요,제이야기를 들은 후 (친구들 예기 입니다.)...선배님 동생이 66.4.8 입대하고 부관학교 나왓다고 하시니 생각나서 댓글 올립니다.저는 중랑천에 자전거로 운동을 많이 다니는 편 입니다.어느날 자전거타고 중랑천 주행을 하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에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얼굴 같아서, 지나쳣다가 다시 뒤돌아와, 그분한테 혹시 부관학교 333기 아니냐고 물으니까, 맡다고 하더군요.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얼굴모습이 어렴푸시 나더라구요...논산 훈련소 마치고, 부관학교 8주교육을 마친게 66.8월 중순경 이라 생각 됩니다.그러니 43년전 단 두달 같이 잇던 동기 얼굴을 알아 본거죠.혹시 김 선배님 동생도 부관학교 333기 저와 동기 같은데, 한번 알아봐 주십시요.댓글 부탁 드립니다. -[04/30-22:12]- 김지혜: 아빠 정말 감동.. 큰 아버지 편지는 와~~~~ 어렸을때 아빠한테 들은 기억이 있는데 다시 들어도 감동 내가 우니깐 울 얘들이 넘 놀랬어요 ㅎㅎ -[05/01-08:27]- 김영배: 정병장님 반갑습니다.제 동생은 제대한지 몇개월 안되서 사고로,타계했습니다.이름은 김춘배 이고 당시 부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1등으로 졸업하면,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준다고 해서 집이 청파동이니 가까운 육본으로 신청 했답니다.그래서 동생은 육본에서 근무하다가 제대 했습니다.동생 생각을 하니 슬프고 지금도 그립습니다.댓글 감사 합니다. -[05/01-09:04]- 김영배: 지혜가 베트벳에 들어와 댓글을 달았네,댓글 오랜만이다. 잘있었니?최서방도 애들도 다-잘있냐.! 6월 중순에 잠시 귀국한다니 네가 5년전에 왔을때 현충일이 되서 같이 국군묘지에 갔었는데 올해는 현충일엔 아빠 2소대 전우들을 못만나겠구나.아빠 소대원들도 많이 너를 보고 싶어한다.엄마한테 네가 도착하는 시간을 다시한번 전화로 말씀 드려라. -[05/01-09:12]- 김영배: 심상수 전우님.!원주분이시면 원주 1군하사관학교를 나오신것으로 생각 됩니다.그렇다면 교가인 ~충용정책 불후의 교훈 아~ 영원하라 하사관 학교~ 그노래 기억 나십니까?저는 하사관학교 28기 입니다. -[05/01-11:23]- 홍석진백마66: 지혜양 오랫만이라 반갑네요. 그동안 소식이 없었기에 궁금 했었는데 ! 애들과 건강하게 지내다가 6월달에 와요. 아버지가 몹시 반가워 할거예요. 친구가 어떤 따님을 두었는지 궁금도 하네요. 참말로 반갑네요. -[05/01-14:00]- 정병장 : 김영배 선배님,안타까운 일이군요.동생이 일찍 타계 하셧다니...부관학교 동기를 40여년만에 만나는가 기대를 했엇는데요.김춘배 이름이 기억 납니다.같은 내무반 생활을 해서...당시에 1.2.3등은 본인이 원하는 부대로 갓으니까요.저는 철원 최전방으로 배치를 받고 월남을 다녀왔습니다.김선배님 건강 하십시요. -[05/02-20:52]- 김영배: 정병장 전우님,말씀을 들으니 동생 생각이나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나는 혀님이나 누님들과 너무 나이차이가 많이나서 내바로 위 누님과 동생 춘배와 막내 여동생 그렇게 넷이서만 나이 차이가 얼마안되서 국민학교때부터 같은학교에 다니며 친했었습니다. 동생이 그렇게 되고나서 동생의 사진도 다 없어지고 남았는게 없습니다 서울집에 가면 혹시 있나!찾아봐서 있으면 사진을 올리겠습니다.키는 나보다 1센티정도 작습니다.여러가지로 감사 합니다. -[05/03-20: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