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오늘, 뉴욕 병원의 하루
코로나 발생 5 주년을 맞이 하여 신문에서 코로나에 대하여 특집을 보내고 있다. 특히 뉴욕은 미국 내에서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지역 중 하나로, 의료 시스템이 극한 상황에 직면했고, 의료진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피로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초기 시절, 당시의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시기였다. 나 역시 병원에서 근무를 하면서 나만의 그때 상황을 일지로 적은 것중 2020년 3월 22일에 쓴것을 여러분과 공유해 봅니다.
그 봄, 뉴욕의 기억
비가 내린다. 하루 종일.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전혀 봄 같지 않다.
거리엔 여전히 적막이 감돌고, 공기는 싸늘하다.
코로나바이러스. 그 이름 하나가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는 뉴욕의 병원에서 일한다.
매일같이 환자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한다.
거리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지만, 병원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로비에는 이미 들것에 실려 온 환자들과 긴급 투입된 의료진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재빨리 마스크를 고쳐 쓰고 가운을 여미며 동료들 곁으로 달려갔다.
모두의 눈빛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지만, 그 속엔 환자들을 살려내겠다는 간절함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피로와 절망 속에서 찾은 작은 희망
첫 교대 시간, 야간 근무자로부터 간밤의 상황을 인수인계 받았다.
“밤새 네분이 돌아가셨어요… 산소 공급이 모자라 힘들었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사망자 명단을 넘겨받으며 “수고 많으셨어요”라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스크와 고글(goggle)가려진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추가 환자가 도착한다는 외침이 들렸다.
폭풍 전의 짧은 고요는 그렇게 끝났다.
병원 안은 전쟁터였다.
산소포화도 경보음과 인공호흡기의 기계음이 공간을 메웠다.
의료진의 얼굴에는 깊게 패인 고글 자국이 선명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몇 시간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거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두려움을 억누르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한 환자의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지자 모두가 일제히 그의 침상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산소 마스크를 바로 잡고, 동료 의사는 급히 기관 삽관을 준비했다.
“제발, 버텨주세요!”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환자의 손을 힘줘 잡았다.
다행히 삽관이 성공했고, 산소 수치는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다른 침상에서 울리는 모니터 경보에 다시 몸을 돌렸다.
극심한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잠시 짬이 나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사이,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때 옆에 동료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조용히 내 손에 작은 초콜릿을 쥐여주었다. “당 떨어질 때마다 하나씩 먹어. 우리 반드시 버텨내자.” 지친 서로를 토닥이며 우리는 눈빛으로 미소를 나눴다. 동료와의 연대감은 이렇게 서로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의 휴식도 사치였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호출 벨이 울렸고, 우리는 흐르는 눈물을 훔칠 겨를도 없이 다시 환자들 곁으로 뛰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투의 연속, 점심 시간도 잊은 채 우리는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눈물로 전하는 마지막 인사
해가 저물기 전, 70대 노인 환자 한 분이 위독해졌다.
그분은 오후 내내 산소 마스크에 의존해 힘겹게 버티고 있었지만, 산소 수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가족이 곁에 올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노인 환자분의 찬 손을 꼭 잡았다.
두 눈 가득 두려움이 어려 있는 그분이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 말하려 했다.
“가… 가족들에게…”
희미한 목소리와 함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 이대로 보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급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다행히 환자분의 아들과 연락이 닿아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를 해주세요. 빨리요…!”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흐느낌과 작별 인사가 병실에 퍼졌다.
환자분은 남은 힘을 다해 휴대전화 너머 가족들에게 입 모양으로 “사랑한다…”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 마지막 한마디가 마치 병실을 감싸 안는 듯했다.
눈물로 젖은 고글을 닦을 틈도 없이 나는 그분의 손을 꼭 쥐며 마지막까지 곁을 지켰다.
그날도 몇몇 환자들은 산소 포화도가 떨어져 고통스러워했고, 나는 손에 묻은 땀을 닦으며 약을 준비했다.
하이드록시클로로퀸(hydroxychloroquine)이라는 약이 잠시나마 희망을 안겨줬지만, 그 희망마저도 위험했다.
부작용으로 갑작스러운 심장 박동 변화가 찾아오고, 몇몇 환자들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EKG 화면 속 변화된 심장 리듬을 보며 무력감이 밀려왔다.
희망을 건 약마저 이렇게 무력하다니.
어느 날은 젊은 환자가 들어왔다.
“다리가 저려요.”
혈전이었다. 이미 다리는 검게 변해 있었고, 결국 절단 수술을 해야 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생이 달라졌다.
혈전 예방을 위해 혈액 희석제를 투여하지만, 그마저도 모든 것을 막아주진 못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가족들에게 DNR(DO NOT RESUSCITATE)과 DNI(DO NOT INTUBATE)를 권유할 때다.
100세의 환자가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지면, CPR을 시행한다고 해도 생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도 ‘풀 코드’ 상태라면 CPR을 해야 한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마지막 폭력 같았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그 과정에서 의료진이 감염될 위험이다.
CPR 중 튀어나오는 침방울 속 바이러스가 우리 의료진의 숨 속으로 스며들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흘러갔고, 집으로 돌아와도 기진맥진했다.
다시 봄이 오길 바라며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두렵게 만들었다.
거리엔 여전히 적막이 감돌고, 극장도 공연도 모두 멈췄다.
내가 사랑했던 뉴욕은 그 활기를 잃고, 마치 유령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뉴욕을 사랑한다.
이 도시가 주었던 꿈과 열정은 아직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다.
브로드웨이의 빈 거리를 서성이며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이 거리에 환한 웃음과 음악이 울려 퍼지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간절한 소망을 품고 다시 병원으로 향한다.
우리는 언젠가 이 전쟁을 이겨낼 것이다.
그날이 오면,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다시 웃을 수 있기를.
그렇게 희망을 되새기며 나는 오늘도 환자들의 곁을 지킨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이 봄이 언젠가 다시 따뜻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PS: 아래 사진들은 그 당시 뉴욕 극장가의 거리입니다. 사람과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